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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진리로 오신 예수님
박승남 2019.12.25 조회 1389

[성경본문] 요한Ⅱ서1 : 3 - 6 | 개역개정

  • 3.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 4. 너의 자녀들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를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 5.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 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
  • 6.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따라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

 

요이1:3-6 사랑과 진리로 오신 예수님

 

벌써 올해도 거의 다 지나가고 성탄절도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성탄절을 맞이하는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십니까? 어린아이도 아니니 설레는 마음도 없고 그냥 무덤덤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깊이 생각해 보면 다른 절기도 그렇지만 성탄절은 더욱 그냥 무덤덤하게 보낼 절기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영광 받기 위해서, 사람들의 대접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고 죄인들을 위해 대신 죽으시기까지 하시려고 오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너무도 황공하고 너무도 감사하고 너무도 고마운 날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성탄절의 풍경은 진정한 성탄의 의미는 알지 못한 채, 자기만족과 욕심을 채우려는 마음으로 서성이는 모습으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이제 성탄은 세계인의 축제가 되어 있지만, 본질은 빠져 버리고, 비본질적인 것에 덮여가는 잔치가 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성탄절은 백화점과 상가에 먼저 찾아오고, 온 세계 사람들이 축하하고, 기뻐하는 절기가 되었다는 점에서는 마음 한편 고마운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성탄절은 모든 것을 취소시켜버릴 수도 있는 도전 앞에 직면해 있기도 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은 상업주의의 도전입니다. 상업주의에서는 아기 예수의 탄생은 별로 중요한 사실이 아닙니다. 성탄절은 그냥 한몫 보는 때이고, 즐기는 연휴일 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아 분주한 나날을 보냅니다. 하지만 정작 정말 중요한 예수님 탄생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는 오늘날만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에도 그러했습니다.

이천 년 전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아가 탄생했음에도 세상사는 일에만 분주했습니다. 메시아를 갈망했던 회당에서도 복음이신 예수에 관한 관심이 없이 그냥 율법만 따르고 있었습니다.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고 말씀이 아무도 예수님 탄생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대통령이, 재벌이 외국에 나가면 사전에 다 완벽하게 준비를 하지요. 아니 우리도 외국에 가면 이미 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묵을 숙소와 먹을 것과 갈 곳을 말입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을 위해서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위해 준비된 방이 하나도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왜 예수님을 위해서는 준비시켜 놓지 않으셨을까요? 왜 호텔을 준비시켜 놓지 않으셨을까요? 사람들은 왜 자신들을 위해 오신 주님을 몰라본 것일까요? 모든 방은 이미 호적을 등록하려는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 그들은 그곳에서 앞으로 바쳐야 할 세금과 곡물들을 계산하느라 분주했습니다. 세상은 언제나 어떻게 구원을 받느냐는 것보다는 무엇을 먹고살 것인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메시아 탄생은 구원의 기쁜 소식이 아니라 의미 없는 외침이 되어 버렸습니다. 구유 아기 탄생은 겸손한 왕임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예수를 향한 세상의 무정함과 무관심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와 성도는 달라야 할 것입니다.

이제 성탄절을 앞둔 우리의 태도는 바뀌어야 합니다. 메시아 탄생 소식을 정말 중요한 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날은 나를 위한 날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날이며, ‘나에 관한 관심예수를 위한 관심으로 바뀌어야 합니. 우리는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계획하면서 며칠 남지 않은 성탄절 행사를 준비하느라 분주한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럴 때일수록 예수님에게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성탄절을 준비하면서 우리의 찬양, 율동, 재능을 받으실 주님께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말하라고 한다면 예수를 아는 일입니다. 이것이 세상과 교회가 다른 점입니다. 그래서 대림절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지난주는 요셉과 야곱의 가정 이야기를 통해서 생명의 양식 되신 예수님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오늘 대림절 마지막 주일에는 사랑과 진리로 오신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드립니다. 사랑과 진리로 오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어떤 믿음으로 살아야 할까요?

 

요한일서 48~9절을 보면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God is love)고 선언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것도 그 완전한 사랑을 이루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독생자를 보내주셨습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요한복음 3:16절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얼마나 저와 여러분을 포함한 세상을 사랑하시는지 우리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시려고 독생자를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을 내어 주시고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랑하신 우리는 어떠한 이들입니까? 로마서 5:8절을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잘나고 의로운, 똑똑한 우리가 아니라 죄인인 된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아니 로마서 510절을 보면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라고 말씀합니다. 아니, 누가 죄인을 위해서, 누가 원수를 위해서 희생하려 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원수가 되었던 죄인들을 위해 독생자를 보내 주셨고 보내심을 받은 독생자 예수님은 자기 생명을 내어 주어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예수님을 멸시하였고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습니다.(53:3) 사람들은, 우리는 하나님이 왜 우리를 사랑하셨는지도 모른 채 그 사랑을 받은 것입니다. 누구나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는데 주님은 인정받지 못하면서도 멸시와 천대와 조롱을 받으시면서도 그 귀한 사랑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 사랑을 아무도 끊은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38~39절에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력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질긴 끈,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끈인 줄 믿습니다. 심지어 어느 것조차도? 죽음조차 도입니다. 천국은 죽어서만 가는 곳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서 주님의 통치, 주님의 다스림을 받는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그런데 이 천국은 죽어도 계속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죽을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이 계속 이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기쁨이고 복이고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끊어지지 않기에 주님의 사랑은 영원하고 그 영원사랑으로 돌보시는 주님의 은총으로 우리는 영원토록 주님과 더불어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 인간의 사랑은 어떠합니까? 불완전합니다. 아무리 사랑을 많이 가진 사람이라도, 아무리 별을 따다가 그대 손에 바치려는 마음이라 해도, 그 마음이 얼마나 갑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사랑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부모의 사랑 참 귀하지요. 하지만 그 사랑도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자녀라도 그 아픔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것이 부모의 한계입니다. 전 문화부 장관 이어령 씨는 딸의 실명 소식을 듣고 이렇게 절규했다고 합니다. 나는 너 앞에서 아무것도 해줄 것이 없구나. 너는 너고 나는 나구나. 아무리 아버지의 사랑이라지만 인간끼리의 사랑으로는 그 한계를 넘을 수 없구나. 이 간격을 넘을 수 있는 분이 있다면 나는 무릎을 꿇겠다.” 그런데 마침내 그는 그 간격을 넘을 수 있는 분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는 회개하였고 70세 나이에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자신이 자녀를 사랑해도 하나님 사랑을 뛰어넘을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하나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채울 수 없는 사랑의 간격을 메워줄 수 있는 완전한 사랑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세상이 도저히 채울 수 없는 완전한 하나님 사랑에 메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부모의 사랑과 비교할 수 없는 아가페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하나님 사랑의 절정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신 것입니까? 하나님 사랑을 우리에게 완전하게 적용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탄생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모든 사건은 하나님이 우리를 확실히 사랑하신다는 사인(sign)입니다. 고린도후서 514절에서도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보여 주는 하나님 사랑이 우리를 꽉 잡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이 사랑에 잡힌 사람들은 도저히 그 사랑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 사랑, 그 질긴 사랑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그런데 그게 기쁨이죠, 그게 감사죠, 그게 감격이죠.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 사랑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붙들어 주십니다. 심지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 사랑에 우리가 확실하게 묶여 있다는 것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실제로 오셨고, 실제로 굶주리고, 피곤하고, 슬프고, 아프고, 외롭고, 배신당하고, 매 맞, 죽음의 고통을 모두 경험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사랑을 확증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극한 고난과 죽음까지 이기심으로써 하나님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이 사랑의 비밀을 아는 성도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보여 주신 우리를 향한 하나님 사랑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하나님 사랑의 완전성을 믿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랑을 구걸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만을 사모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완전한 하나님 사랑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절망하고, 아파하고, 외로워하는지 삶의 현장으로 나가서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소개해 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세상은 우리들의 삶을 통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다미엔 같은 붙은 나병 환자들에게 가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했지만,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건강하니까 사랑 운운하지 우리 같아 보라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다미엔은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하다가 자기 몸속에 나병균을 집어넣었습니다. 그리고 봐라, 나도 당신들과 같이 똑같은 나병 환자다. 이러한 우리를 하나님은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모른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당신들도 하나님은 사랑하신다. 거기에 그들은 꼬꾸라지게 되고, 그 사랑을 깨닫게 되고 그 사랑에 감격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우리들의 삶을 통해서 위대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대림절은 이 완전한 사랑을 알고 느끼고 전하는 절기입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기관과 모임과 성도들이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세상에서 확실히 증거할 수 있는 축복된 대림절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이 땅에 오셨을 뿐만 아니라 진리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말씀했습니다. 본문 3절에도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하나님 말씀을 이 땅에 선포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진리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진리로 우리에게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순종의 방법을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모든 능력과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에 스스로 순종함으로 예수님은 그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의 핵심이며 정수이며 최상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선택한 유일한 구원의 방법입니다. 예수님은, 이 고난을 피하고 싶었지만 결국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39절에서 말씀한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입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자기 뜻보다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해 예수님은 고난을 결심하셨습니다. 어떠한 고난이 있어도 하나님의 위대한 뜻을 이루기 위해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통한 구원의 방법에도 순종하셨습니다. 이사야 53:7절에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아무 말 없이 어린 양처럼 잠잠히 도수장으로 끌려가시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순종이 중요한 것입니다.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서 능력보다 중요한 것은 순종입니다. 창세기 22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말씀대로 순종하였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숫양을 준비해두시고 그것으로 대신 제물로 드리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친 것으로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 현장 속에서 이삭은 아버지의 그 순종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가나안에 흉년들었을 때 애굽으로 내려가고 싶었지만, 말씀에 순종하여 내려가지 않았고 그러자 마침내 이삭은 농사하여 그 땅에서 거부가 되는 복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뜻을 따라 사는 자녀가 진정한 복의 삶을 사는 것이라는 것을 이삭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 6절에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따라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랑은 이것인데 그 계명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계명이지요. 사랑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말도 안 들어주면 그게 사랑인가요? 사랑하면 다 들어주고 싶어요. 정말 사랑하면 순종의 힘이 생겨요. 예수님은 모든 일을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성자 하나님이셨지만 아버지 하나님이 말씀하신 때와 원칙과 기준을 벗어나지 않으셨습니다. 간혹 교회를 사랑한다고 하는 성도 중에 자기 고집과 자기 방식대로, 내 멋대로, 내 생각과 내 주장대로 그러면서 교회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섬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성도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도, 상처를 주면서도 주님을 사랑한다고, 교회와 성도를 사랑한다고 합니다. 내 고집과 내 방법으로는 언제나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로마서 10:2절을 보면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닙니다. 자기 지식, 자기 생각으로 하는 것입니다. 다 같이 따라 해 보겠습니다. 교회사랑은 말씀의 순종으로 하는 것이다.” 교회 사랑뿐 아니라 자녀 사랑도 순종이 중요합니다. 진정한 자녀 사랑은 내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하나님 뜻을 이루는 자녀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하십니다. 자녀를 자기 방식대로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하는 것이 진정한 자녀 사랑입니다. 진정으로 자녀를 사랑한다면 말씀에 순종하도록 가르치기를 바랍니다. 교회를 사랑하도록 가르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교회를 사랑한다면 말씀이 가르쳐주시는 방법대로 순종하기를 바랍니다.

 

놀라운 사랑을 받은 우리는 진리 안에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랑과 진리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더 자세히 말씀드리면, 예수님은 진리와 함께 하는 사랑으로 오셨고, 진리 가운데서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말씀을 떠난 사랑이 아니라 말씀을 따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God is love). 그렇다고 해서 사랑이 하나님이다’(Love is God)는 말은 아닙니다. 모든 사랑이 다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말하지만 빗나간 사랑도 있습니다. 잘못된 사랑도 어리석은 사랑도 이기적인 사랑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랑도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은 진리에 대한 순종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은 진리 되신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요즘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진리를 떠난 이들이 많습니다. 제멋대로, 제 감정대로 하면서 진리를 사랑한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의 감정에 따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진리를 따라 사랑하신 것입니다. 내 감정은 그렇지 않아도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손양원 목사님이 정말 불같은 뜨거운 사랑이 일어나서 자기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아들로 삼았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어떻게 그러한 자를 보면서 가슴이 불타는 사랑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말씀에 순종한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으니까 진리 안에서 순종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려고 노력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감정이 아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3:6절은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 말씀합니다. 말씀을 벗어난 사랑은 이기적이며 파괴적입니다. 또한, 말씀의 기준을 넘은 사랑은 교만으로 시작하는 것이며 결국 이기심을 충족하는 폭력으로 끝납니다. 그래서 진리와 함께 하는 사랑이 중요한 것입니다.

 

반면, 진리를 잘 아는데 사랑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쉽게 다른 사람을 정죄합니다. 정의로운 사람인데 인자함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바리새인들이 이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잘 깨닫기는 하지만 사랑하지 못하면 정죄하는 사람이 됩니다. 말씀을 모르는 사람을 정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사랑으로 서로를 감싸 주어야 합니다.

반면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데 진리를 떠난 사랑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씀을 떠난 사랑은 자기 기준과 자기 방식대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사랑이 아닙니다. 진리는 기초이고 사랑은 건물을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기초 위에 사랑을 세워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사랑하기 위해서 말씀이 가르쳐준 사랑의 기술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사랑하십시오. 그 말씀 속에서 사랑을 실천해 보십시오. 그 안에 있는 하나님 사랑의 기술을 배우십시오. 내 욕심, 내 욕망을 내려놓고 그분의 사랑 노래를 들으십시오. 세상 어느 곳에서도 진정한 사랑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도 진정한 사랑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위대한 사랑은 오직 진리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고 알게 될 때 경험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마음 판에 새겨진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히 변질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시켜줍니다. 이것은 잠시 흥분시키고 소멸하는 즉흥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수천 년 동안 예언된 하나님 말씀을 따라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아브라함과 유다와 다윗의 자손으로, 작은 고을 베들레헴에서 그리고 동정녀의 몸을 통해 태어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즉흥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따라 진리로 이 땅에 오신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이 영원한 것이며, 가치 있는 것이며, 효력이 있는 것입니다. 진리 가운데 있는 예수님이 보여 주신 사랑의 힘을 믿으십시오.

 

성도 여러분! 대림절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사랑의 증표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묵상하고, 진리에 순종하며, 감사하고, 축하하기 위해서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너의 자녀들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를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이처럼 진리의 말씀을 행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사랑의 증표로 오신 예수님께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사랑과 진리를 세상에 전하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20191222일 주일 낮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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