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교회의 모델 새 예루살렘 | 박승남 | 2019-08-2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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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요한계시록21:9-27절 개역개정9.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 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11.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12.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13. 동쪽에 세 문, 북쪽에 세 문, 남쪽에 세 문, 서쪽에 세 문이니 14. 그 성의 성곽에는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15.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측량하려고 금 갈대 자를 가졌더라 16.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길이와 너비가 같은지라 그 갈대 자로 그 성을 측량하니 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더라 17. 그 성곽을 측량하매 백사십사 규빗이니 사람의 측량 곧 천사의 측량이라 18.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19.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20.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수정이라 21.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각 문마다 한 개의 진주로 되어 있고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22.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24.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25. 낮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 26.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계21:9~27 지상교회의 모델 새 예루살렘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곧 마지막 천사는 이제 모든 것이 마지막으로 이뤄진다는 것을 예감하게 해 줍니다. 마지막 일곱 재앙은 새 예루살렘을 보여 주는 희망찬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 천사는 요한을 그리스도의 신부인 새 예루살렘으로 안내합니다.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그러자 성령은 요한을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이 산은 “크고 높은 산”입니다. 측량이 불가능할 정도의 크기의 새 예루살렘을 한 눈으로 볼 수 있는 높은 산입니다. 요한은 거기서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계시록의 역사가 재앙으로 마치지 않는 것을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이기는 자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 승리하는 자와 악한 자들에게 굴복하는 자들로 나누어 전개됩니다 계시록 전체 22장을 보면 6,7,8,9장에 나오는 재앙들과 13장에 짐승의 악행과 그리고 16~19장까지의 용과 음녀 그리고 짐승과 그를 따르는 자들에 대한 심판을 기록한 내용을 제외하면 모두가 하나님의 이야기와 이긴 자들의 이야기로 가득차 있습니다. 19장도 초반은 허다한 무리 즉 이긴 자들이 부르는 찬양과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계시록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을 위한 책입니다. 악한 자들은 곧 사라지면 그만이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영원히 남습니다. 본문은 새 예루살렘의 전체 모습을 상세하게 다 보여주려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본문에 소개된 내용은 새 예루살렘의 어떤 특정 부분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새 예루살렘에 관해 강조하는 것은 1)하나님으로부터 내려왔다는 것 2)성벽 및 기초석과 열두 진주 문이 있다는 것 3)성의 전체 크기에 대한 것 4)그리고 성 안에 없는 것과 있는 것입니다. 첫째는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입니다. 이 구절은 21장 2절과 원문에서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는 똑같은 문장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첫 번째 내려온 새 예루살렘(21:2)은 그리스도의 신부인 동시에 구원받은 성도들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온 새 예루살렘(10,11)은 하나님과 그 백성들이 함께 살 도시입니다. 계시록에서는 새 예루살렘은 이긴 자들의 공동체를 말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도시, 새 예루살렘을 의미합니다. 우리로가 살고 있는 세상적 개념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개념입니다. 새 예루살렘이 사람이고, 또 도시입니다. 어떻게 사람이 도시가 되고, 도시가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엄연한 모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 사 차원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늘에서 내려온 도시로서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영광에 싸여져 있습니다. 원문대로 번역하면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영광을 가지고 내려온다”고 되어있습니다. 로마가 탐욕으로 가득 찬 인간들의 욕망으로 세워져서 착취와 향락과 범죄, 사람들의 악취로 가득찬 도시라면 새 예루살렘, 어린 양 신부의 모습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찬 곳입니다. 이는 왜 도시가 사람이고 사람이 되시인가를 깨닫게 해 주는 것입니다. 도시나 나라는 사람이지, 건물도 물질도 화려함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화려하고 대한한 건물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악하고 추하면 그 도시를 결코 아름답다고 할 수 없고 거기를 가보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결국 그 안에 누가 사는가에 따라 천국과 지옥으로 갈려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찬 모습은 광야에서의 성막이 완성되었을 때의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출애굽기 40:34절을 보면 성막이 완성되었을 때,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였습니다. 주님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찬 것입니다. 11절을 보면 새 예루살렘을 먼 곳으로부터 보았을 때의 빛깔을 소개합니다. 그 성의 빛깔은 지극히 귀한 보석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았습니다. 이것이 새 예루살렘의 모습입니다. 이런 보석들의 화려하고 찬란하고 맑고 깨끗하고 투명한 색깔은 바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새 예루살렘으로부터 나오는 빛은 바로 하나님의 빛에 의해 비춰져 발하게 되는 모습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빛을 받아 세상에 비추는 존재입니다. 요한복음 8:12절을 보면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그렇습니다. 주님이 진정한 빛, 참된 빛이십니다. 오늘 본문 23절을 보십시오.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하나님의 영광이 비춥니다. 이는 비추기 시작해서 영원히 비춘다는 것입니다. 이는 지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잃고 있는 옛 예루살렘과 대조를 이룹니다.(계11:2~3) 그리고 어린 양이 그 도시의 등불이 되십니다. 그러니까 해나 달의 빛이 필요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는 태양과 달이 필요없다고 결코 말할 수 없습니다. 해와 달이 없으면 만물은 다 죽어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기억할 것은 어린 양이신 예수님의 빛이 비춰주시면 해와 달이 필요 없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해와 달이 빛을 비추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빛이 얼마나 큰 빛인가요? 해와 달이 없어도 될 정도라면 주님의 빛이 얼마나 큰 빛인지 그러면서도 얼마나 은혜로운 빛인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시121편 6절을 보면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보호해 주시고 지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나 오늘이나 해와 달이 주는 유익도 있지만 해와 달이 우리를 상하게 하고 해롭게 하는 일도 많습니다. 뜨거운 태양 빛으로 일사병에 걸리기도 하고 가뭄이 들기도 합니다. 달의 인력으로 바닷물이 육지로 들어와 해안가 주민들이 위협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해와 달이 없습니다. 이제 진정 해가 상하게 하지 못하고 달이 해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해와 달이 주던 유익 이상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기쁘고 고맙고 감사한 일입니까! 그리고 그리스도의 등불은 시편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라는 말씀의 의미로 “그리스도께서 친히 한 사람 한 사람의 길을 밝혀주신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실족하게 되는 사람이 없습니다. 한 사람도 무의미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도 없습니다. 무정하고 무능한 이들도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세상의 빛, 참된 빛 되신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14절에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라고 말씀하고 이사야 60:1절을 보면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교회는 발해야 할 빛은 무슨 빛입니까? 마태복음 5:16절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그렇습니다. 빛은 바로 우리의 착한 행실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배운 말씀대로 사는 삶, 착한 행실이 바로 우리가 세상에 비추는 빛입니다. 결국 우리는 착한 행실을 통해 드러내는 것은 주님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이 위대하심, 주님의 사랑, 주님의 능력입니다. 주님의 빛을 늘 받아서 이를 힘써 드러내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요한의 눈에 띈 것은 새 예루살렘의 성벽과 기초석입니다. 12절입니다.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여기 성곽(테이코스)는 wall 성벽을 말합니다. 성벽은 크고 높습니다. 17절을 보면 그 성벽의 크기는 144규빗입니다. 한 규빗을 50cm로 잡는다면 72미터입니다. 엄청난 높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144라는 숫자가 의미는 바에 집중해야 합니다. 144는 12X12입니다. 이는 구약교회와 신양 교회가 하나되어 하나님의 백성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더불어 성벽이 크고 높다는 표현을 통해 완전하고 완성된 것이며 완전히 안전하고 장엄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열두 진주문(21절)이 있고 열두 천사가 문을 지키고 있고 열두 문들 위에는 이스라엘 12지파의 이름들이 쓰여 있습니다. 여러분 문은 동서남북에 각각 3문씩입니다. 이렇게 열두 문이 각 방향에 고루 배치되어 있는 것은 어느 방향에서도 들어올 수 있도록 열려 있는 문들이란 암시입니다. 또한 12문은 영광스럽고도 놀라운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로 들어갈 기회가 풍성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말씀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계3:20) 그렇습니다. 우리는 활짝 열린 그 문에 들어가 하나님과 먹으며 신령한 교제를 누림으로 그 풍성한 은혜를 누리고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송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와 깊은 교제를 나누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만나주시고 말씀해 주시고 교제해 주시고 은혜베풀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알고 우리는 늘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문 되신 예수님,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 하나님께, 은혜의 보좌에 나아가야 합니다.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함으로 깨어 기도함으로 찬양함으로 주님과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내 안에 계심을, 주님의 임재를 느끼게 되고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풍성히 누리게 됩니다. 삶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게 됩니다. 성곽 새 예루살렘 성벽에는 12 기초석이 있는 데, 그 위에는 12 사도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열둘이라는 숫자는 온 세상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온 땅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을 모두 받아들이기에 충분하다는 뜻입니다. 또 문들에 이스라엘 12지파의 이름과 열두 기초석에 12 사도의 이름이 있다는 것은 구약과 신약에 구원받은 사람들을 나타내는 숫자인 동시에 144,000이 누구를 말하는가를 밝혀주는 준거를 제공해 줍니다. 144,000은 장차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할 성도들의 숫자입니다. 이 모습은 14장 그리고 본문인 21장에 나오는 사람들과 동일한 사람들입니다. 또한 7:9절에 나오는 능히 셀 수 없는 무리와는 같은 사람들입니다. 본래 이스라엘 12지파는 온 세상을 상징하는 숫자이고, 예수님께서는 12제자를 뽑음으로 세상을 대표하는 새 공동체를 만드셨습니다. 144,000은 유대적으로 계산한 구원받은 성도들이고,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신약 입장에서 본 구원받은 성도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완전한 수를 의미합니다. 7장 14절을 보면 이들이 누구인가를 장로 중 하나가 설명합니다.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개하였느니라.”환난에서 나온다는 말은 그 믿음 지키고 증인으로 살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당했는가를 생각하게 해주는 말씀입니다. 144,000명은 이 숫자는 우리에게는 그리 많아 보이지 않지만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만명의 숫자도 엄청 많은 수입니다. 이스라엘 군대의 단위는 천부장으로부터 시작되어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까지 됩니다. 그러니까 144,000이면 천부장의 부대가 144개나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엄청난 규모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실제적인 숫자가 아니라 상징적인 수자라고 볼 때 구속함을 받은 사람들의 수는 계산할 수 없을 만큼 많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이 숫자는 대적들을 위해 싸워야 하는 군사적인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즉 144,000은 로마 제국과 그 뒤에 도사리고 있는 악의 세력들과 싸우는 증인으로 살다가 죽임을 당하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싸우는 그리스도의 군사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지상에서는 칼과 창, 활과 무기를 가지고 싸우지만 그리스도의 군사들인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싸웁니다. 세 번째 관심은 도시로서의 새 예루살렘의 모습입니다. 요한이 가장 관심을 가지고 보았던 것은 성의 크기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천사가 금갈대자로 도시를 측량해서 보여 준 새 예루살렘은 16절과 같이 네모 반듯한 정방형입니다. 그런데 성막의 지성소가 길이와 넓이와 높이 모두 10규빗인 정방형입니다. 그리고 솔로몬 성전의 지성소(내소)는 길이와 너비와 높이 20규빗의 정방형입니다. (왕상 6:20) 정방형은 성경에서 완전성을 말합니다. 새 예루살렘이 커다란 장방형으로 된 지성소입니다. 지성소가 한 나라만큼 큰 도시로 확장된 셈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된다는 것을 거대한 이미지로 보여줍니다. 동시에 정방형의 나라는 성도들을 포용하기에 넉넉할 뿐 아니라, 거기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과 함께 아주 친밀하기에 살기에 넉넉하고 부족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16절에 12,000스타디온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스타디온이 거리측정 단위이며 또한 함축적으로 경기장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로 경기장을 스타디움이라고 하지요. 왜냐하면 아테네나 로마의 스타디움 즉 경기장의 길이와 대체로 같은 길이였기 때문입니다. 1스타디온은 185미터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 24절은 스타디온을 ‘경주’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리이스 경주코스는 거리가 한 스타디온이었던 것입니다. 자 그러면 12,000스타디온은 어느 정도 거리일까요? 12,000×185m 하면 2,220,000m가 됩니다. 그러니까 이는 2,220km가 됩니다. 여러분 가로 세로 그리고 넢이가 2,200km라면 너비만 4,840,000㎢가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면적이 99,720㎢이고 북한 면적이 120,538㎢로 합계는 220,258㎢ 인데 이 넓이의 약 21배가 되고, 현재 이탈리아의 너비를 301,338㎢로 계산한다면 16배의 크기가 됩니다. 초대 교회 당시 이 땅의 크기를 이 도시보다 더 크고 넓다고 생각한 이들은 없었을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도시의 크기는 로마 제국을 비웃게 만드는 크기입니다. 더욱이 이처럼 큰 도시가 온통 보석으로 싸여 있습니다. 로마가 온갖 죄악의 어둡고 더러움으로 덥혀있다면 새 예루살렘은 보석으로 되어 있습니다. 특히 어린 양의 12 사도의 이름이 있는 12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습니다. 그것이 19~20절에 나옵니다. 그러니까 지상 교회의 모델인 구원받은 백성들, 144,000명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출애굽기 28장과 39장에 보면 제사장들이 입을 옷에 대하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 옷은 거룩한 옷이며 영화롭고 아름다운 옷입니다. 12보석이 가슴에 달린 이루 말할 수 없이 값비싼 옷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요? 제사장들이 그처럼 귀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직임, 그 사명이 매우 귀하고 아름답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날 목회자를 비롯한 우리 성도들이 영적인 제사장입니다. 주님의 교회가 제사장이다 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지요. 특히 의의 옷, 그리스도로 옷을 입혀 주셨으니 교회가 얼마나 아름답고 거룩한 것입니까? 얼마나 영화로운 것입니까? 그래서 우리는 찬송 210장에서 ♬시온성과 같은 교회 그의 영광 한없다♪ 라고 찬송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자존감, 자부심을 갖지 못할 뿐아니라 스스로 더렵히고 추하게 만들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교회가 얼마나 귀한지 생각하고 자부심을 가지고 또한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서로 잘 섬겨야 합니다. 여러분 성경은 보석으로 시작해서 보석으로 마칩니다. 에덴동산도 보석의 동산입니다. (창2:12 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 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새 예루살렘은 에덴의 회복으로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21절을 보면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각 문마다 한 개의 진주로 되어 있고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라고 말씀합니다. 계시록에 유리가 많이 나옵니다. 계시록 4장 6절에는 하늘나라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늘나라 바닥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또 15장 2절에는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유리 바다를 생각할 때 만약 그 밑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보인다면, 유리 바다 위에 있다고 행복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이제 확실해 졌습니다. 본문 21절에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정금인데 유리같이 맑은 정금으로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의 길은 넓은 길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마태복음 12장 19절과 누가복음 10장 10절에도 쓰인 ‘호도스’로서 넒은 길 또는 대로를 의미합니다. 계시록 18장 16절에 화려한 로마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르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이여 세마포 옷과 자주 옷과 붉은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민 것인데 하지만 제아무리 화려한 옷들과 값진 보석으로 꾸민 로마라 할지라도 그것이 새 예루살렘과는 비교될 수 없습니다. 더욱이 도시는 사람입니다. 그 안에 사는 자들이 아무리 값비싼 옷을 입고 보석으로 꾸미고 최고의 음식을 먹는다 해도 거짓과 우상으로 득실거리고 음란으로 붉게 물들어간다면 그런 도시는 이 땅에 존재할 가치가 전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18장 14절을 보면 바벨론아 네 영혼이 탐하던 과일이 네게서 떠났으며 맛있는 것들과 빛난 것들이 다 없어졌으니 사람들이 결코 이것들을 다시 보지 못하리로다 라고 말씀합니다. 사도요한은 자기가 본 새 예루살렘의 모습을 인간의 필치로 다 표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가능한 한 가장 아름답게 그리려고 노력했을 것이고, 보석 이름으로만 채워 놓았습니다. 그러나 천사가 보여준 새 예루살렘의 모습은 완성될 그 나라를 보여 주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도시의 모습이 아니라 그 도시의 성격을 말해 주려고 한 것입니다. 동시에 로마가 땅을 지배하고 있고, 땅에 사는 사람들에겐 로마가 유일한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에 대하여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새 예루살렘의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관심을 그곳으로 향하게 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동시에 현재 땅에서 고난당하고 박해 받고 죽음의 위기에 몰려 있는 성도들에게 희망을 주고 용기를 주어 이런 고난을 이기고 승리하도록 하려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나아가 새 예루살렘을 통하여 진정한 성도의 공동체인 교회는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 주려고 한 것입니다. 22절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새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없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에게는 큰 충격적인 말입니다. 당시 유대인들 아니 현대의 유대인들도 성전 재건을 간절하게 열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성전을 갈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 자신이 참된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 성도들이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전서 3:16~17절을 보면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여러분 또한 성전이 필요없는 새 예루살렘에는 거룩한 어떤 특정 구역이 없다는 말이고, 그래서 특정한 사람들만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공간이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디에서나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을 만날 수 있고 교제할 수 있는 공간이 새 예루살렘입니다. 어린 양이 그 도시의 성전이란 말은 새 예루살렘 전체가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는 지성소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3절) 24절을 보면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고 말씀합니다. 이는 이사야 60:3절의 반영입니다.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이 구절은 예루살렘이 바벨론에서 돌아오고 회복된 후에 나라들과 왕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것이란 예언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26절과 같이도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라고 말씀합니다. 땅의 왕들 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들도 그 나라(왕국)에 들어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가지고? 승리한 사람들(왕들)이 자기들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들어갑니다. 이는 장사꾼들이 자기 이익을 위한 상품을 가지고 음녀의 도시인 로마로 들어갔던 것과는 완전히 대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27절과 같습니다.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여기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로마 제국의 우상 숭배와 음란과 부패한 문화에 젖어 살던 사람들, 황제에 아부하고 동조하며 살았던 사람들로 그들은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반면 그리고 들어갈 수 있는 자들인 어린 양의 생명책이 기록된 자들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속죄함을 받고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칭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또한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충성된 삶은 사는 헌신자들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입장에서 보면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개한 자들이며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고 악한 자들에게 굴복하지 않고(계20:4) 영적 싸움에서 이긴 자들, 벽옥과 수정 같이 맑고 깨끗하고 순수하고 변함없이 진리로 다스리시는 예수님을 경배하며 따르는 백성들입니다. 여러분 새 예루살렘은 곧 오늘 교회들의 어머니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들은 어머니 교회의 모습을 닮아야 합니다. 1)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빛으로 빛나야 합니다. 2)성령 하나님의 지혜로 충만하고 바르고 순수하게 판단하고 결정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3)성문이 열두 개여야 합니다. 즉 누구든지 들어올 수 있는 교회여야 합니다. 4)성도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들어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영광을 주님께 내려놓고 주님을 높이고 감사를 드리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5)보석처럼 교회가 아름다운 빛을 내야 합니다. 그런데 한편 본문 21장의 사람들이 되는 것이 어렵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여러분에게 [Jesus All]이란 책에 나오는 아주 인상적인 예화를 드립니다. 이는 스티브 브라운의 이야기입니다. 브라운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영문학 수업이 너무 어려워서 포기하려고 했답니다. 울며 낙심한 딸을 데리고 아버지는 영어 학과장에게 사정을 이야기하러 학교에 갔습니다. 그 이야기를 옮겨보면 이렇습니다. 그녀(영어학과 학과장)는 딸 옆에 서 있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로빈은 금세라도 울음을 터뜨릴 태세였다. 주변에 여러 학생이 있었다. 그녀는 로빈이 창피할까 봐 서둘러 그 학생들을 내보냈다. “이분들과 할 얘기가 있으니까 다들 나가 있으렴.” 학생들이 나가고 문이 닫히자마자 로빈이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제가 온 것은 다름 아니라 제 딸이 이 영어 수업에서 빠지길 원해서입니다. 우리 딸에게는 너무 어렵습니다. 그래서 말씀인데요. 이 애를 일반 영어 수업으로 옮겨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브라운 씨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면서 학과장은 “로빈과 잠시 이야기해도 될까요?”라고 물었다. “물론이죠.” 이제 그녀는 로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로빈 학생, 어떤 심정일지 잘 알아요. 그런데 내가 시험 점수에 상관없이 무조건 A 학점을 주면 어떨까요? 시작도 하기 전에 A 학점을 주면 할 수 있겠어요?” 이런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멍청이가 세상에 어디에 있겠는가? 로빈은 훌쩍거리면서 대답했다.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녀가 말했다. “A 학점을 줄게요. 학생은 이미 A 학점이에요. 자, 함께 수업을 합시다.” 나중에 학과장은 브라운에게 로빈이 영어를 잘 배울 수 있도록 낮은 성적의 가능성을 차단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로빈은 그 수업에서 연속 A 학점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A학점을 받았다는 것. 실패와 심판의 위험이 이미 제거된 상태에서 기다린다는 것 말입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루신 것을 기뻐하는 것 말입니다. 로빈이 A학점을 이미 받았지만 공부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얻은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16:33) 우리에게는 승리의 보장이 있습니다. 승리지이신 어린 양 예수님을 끝까지 신뢰하고 나아가면 우리의 삶은 진정 승리자로 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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