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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의로 여기시고 박승남 2020-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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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로마서4:1-11절 개역개정

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7.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9.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10.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11.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롬3:28~4:11 믿음을 의로 여기시고

 

요즘 다니엘 기도회의 다양한 강사들을 통해 은혜받고 있습니다. 모두 각자 이런저런 사연들을 가지고 있는 분들입니다. 암 환자를 비롯하여 몹시 불행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모든 상황에서도 저들은 간증의 주인공, 예수를 증거하는 신앙인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조지 뮬러라고 일컬어지는 김상숙 권사님은 열악한 근무 조건과 저임금, 질병 등으로 고통받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사랑으로 보듬고 있는데 이분은 어떤 일이 있어도 사람들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하나님은 사람들을 통해 역사하신다라는 자기 합리화에 빠지지 않기 위해, 물질에 있어서만큼은 절대 기도 제목도 내지 않는다고 합니다. 외국인 환자들을 모두, 조건 없이, 전액 돕기 위해서, 신학대학에 다니는 여러 외국인의 등록금과 생활비 그리고 1년에 한 번씩 고향에 다녀올 수 있는 왕복 항공권을 지급하기 위해 참으로 많은 돈이 필요할 텐데도 돈을 쌓아놓은 것도 아니록 오직 하나님만 바라며 믿음으로 나아가고 있고 그 모든 것을 감당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양한 분들이 말씀을 전하고 간증하였는데 그 중심을 보면 다 하나로 통일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 모두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있다는 사실과 말씀대로 살려고 힘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아니면 결코 그렇게 많은 이들 앞에 설 수 없었던 사람들, 저들은 중심에 주님을 모시고 주님이 주인이 되시어 자신을 사용해 주시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깊은 감동, 울림을 주고 우리의 영혼을 맑게 해 주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들은 말씀처럼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었던,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린 인간들을 위해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화목제물, 속죄제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구약에서 화목제, 속죄제를 드리기 위해서는 , , 염소 등의 제물이 필요했습니다. 사실, 이 가축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이 인간으로 인해 죽어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예수님도 죄가 하나도 없으시지만, 십자가에 달려 화목제물, 속죄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우리를 의롭다고 하여 주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여러분 아들의 고통은 아버지의 고통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믿음입니다. 327절을 보세요.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4절을 보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뜨거운 가슴, 그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은혜를 얼마나 가슴 깊이 느껴보셨습니까?

 

바울은 드디어 선언합니다. 29절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이고,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신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30절에 다시 선언합니다.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3:30).

수학 공식처럼 표시해 보면 믿음으로(할례자인 유대인+무할례자인 이방인) = 하나님 안에 하나 됨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에는 '공동체적개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한 분의 아버지 하나님 안에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공동체적' ()입니다.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 인정받고 받아들여진 사람들은 모두 하나입니다. 할례자나 무할례자 모두가 하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자들의 하나님이십니다. 갈라디아서 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아멘!

 

이어서 바울사도는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받는 진리에 대해 유대인에게 어떻게 설명할까를 생각하다가 아브라함의 경우를 들어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그 민족의 창설자요 율법의 완성자로 믿고 있으며 또 아브라함은 행위로도 완전해서 구원을 받았다고 믿었습니다. 바울도 그렇게 믿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성경을 읽으면서 이전에 깨닫지 못했던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를 설명해 준다면 유대인들에게 믿음의 원리를 쉽게 설득시킬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믿음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논리적인 설명보다도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생애를 통하여 믿음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믿음은 단 한 번의 사건인 동시에 일생을 걸쳐 살아가야 하는 순례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아브라함의 일생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로 바벨탑이 무너지고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하나님을 부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해서 부른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12:1~3)

이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75세입니다. 그러니 그 나이에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떠났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한 채 말씀을 가슴에 품고 간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분명 다른 사람에 비해서는 훌륭합니다. 굉장한 결단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그의 결단이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하나님이 부르시지 않으셨다면, 하나님이 만나주시고 말씀해 주시지 않으셨다면 떠날 수 있었겠습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찾아 헤매다가 만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셨고 하나님을 그를 부르셨습니다. 그러고 보면 아브라함이 이렇게 선택하시고 부르신 그 은혜에 아멘하고 순종한 것뿐입니다. “아멘, 믿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보인 최초의 믿음입니다.

가나안 땅에 도착한 아브라함은 그 땅에 기근이 들자 먹고 살기 위해 이집트로 갔습니다. 그리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하는 실수를 저질러 사라가 큰 곤경에 처했었습니다. 브루거만(W. Bruggermann)이라는 성서학자는 그때 아브라함의 모습은 불신앙의 유혹을 받고 넘어진 사람의 모습이고, 그는 자신의 생존을 확보하는 데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고, 이는 그가 약속을 철저하게 신뢰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루터는 이러한 아브라함의 모습을 두고서 말씀을 그의 시야에서 사라지게 했다라고 예리하게 지적했습니다.

 

그런데 왠 은혜입니까!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 그들 부부를 건져 주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거부가 되어 나오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재산 때문에 조카 롯과 헤어지는 아픔을 겪습니다. 롯은 에덴 동편으로 간 롯은 마침내 죄악의 도성 소돔 땅까지 들어가 살게 되었는데 소돔을 침략해 들어온 네 왕이 소돔과 고모라를 함락시키고 사람들과 재물을 다 빼앗아 달아났습니다. 이 사실을 안 아브라함은 그들을 뒤쫓아 가서 그들을 무찌르고 롯과 사로잡힌 자들과 재물을 되찾아왔습니다.

모든 싸움이 끝나고 평화가 왔습니다. 그런데 한가해진 아브라함에게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기업을 물려줄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미래에 대해 불안해진 것입니다. 이때 그는 자기 집의 충실한 종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을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그리고는 아브라함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여러분 하늘의 별들은 몇 개쯤 될까요? 1608년 갈릴레오가 천체 망원경을 발명한 이후 오늘날 천문학자들은 은하계의 숫자만 해도 수십억 개 이상이 되며 그 하나하나의 은하계는 수십억에서 수백억 개의 별들로 이루어졌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이 탄생하기 600년 전에 활동했던 하나님의 선지자 예레미야는하늘의 별들은 셀 수 없으며(33:22)라고 했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고 말씀하심으로 하늘의 별들을 다 헤아릴 수 없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늘을 우러러 별을 보게 하신 것은 늙은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주시되 그것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후손들을 주시겠다고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지금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아브라함, 마음이 어둡고 힘이 없는 아브라함에게, 미래에 대한 소망과 꿈과 용기를 주려 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비전입니다. 아마 이때 아브라함이 나이는 85세쯤 되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하나님이 주시는 이런 약속을 믿었겠습니까? 지금은 신자들이 구름떼처럼 많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 당시만 해도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의 거의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자식이 단 한 명도 없었을 때입니다. 그러니 도무지 믿기 어려운 말씀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습니까?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15:6) 믿었다는 말이 아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아멘! 내가 믿습니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고 여겨주셨습니다. 의롭다고 여겨주셨다는 말은 그제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완전한 백성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전까지는 무엇이었습니까? 예비 신자라고 해야 할까요?

 

그러면 육신으로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자기 행위로 구원받은 것입니까? 분명 아브라함은 우리가 본받을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러한 아브라함을 기리기 위해서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모든 율법을 다 지켜서 의롭게 되었고 또 복을 받았다고 가르쳤습니다. 율법이 주어지기 전부터 율법을 다 준수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그렇습니까? 이러한 가르침에 아브라함이라면 어떻게 말할까요? 너무도 당황해하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지 말라고 할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이 없는 사람은 자기 과시를 잘합니다. 자기의 , 공로를 주장합니다. 내가 이만큼 했는데 하며 자기가 한 일을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만하게 되고 남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시험에 들게 됩니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은 겸손하며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립니다.

여러분 본문 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여기 행위라는 단어는 행동업적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2절을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성취한 어떤 업적으로 의롭게 되었는가?’ 만약 아브라함이 업적, 행위로서 그처럼 의롭게 되었다, 그것은 그가 일한 것에 대한 대가로 주어진 것이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그가 자랑할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업적이 아니라면 지금까지 유대인이 자랑하고 극렬하게 주장해 온 것들은 다 무너지고 맙니다.

창세기를 보면 유대인들이 그처럼 자랑하는 아브라함의 수치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성경의 위대한 점이고, 또 인간들의 수치를 드러냄으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밝혀 놓습니다. 동시에 오직 의로우신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심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애굽으로 내려간 아브라함의 행동은 그가 불경건한 자였다는 대표적인 예가 됩니다.

창세기 16장의 하갈 사건도, 아무리 시대적 상황을 참작한다고 해도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특히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은 일은 아브라함이 신앙을 고백한 직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또한, 상속자를 주시겠다는 약속을 놓고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계약까지 맺은 바로 직후에 일어난 일입니다(1512~21). 그러므로 이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과의 계약을 철저히 파기한 것입니다. 그 결과, 하갈 결혼 사건이 있고 난 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 대하여 13년이나 침묵하셨는데(1616-171), 이것만 보아도 아브라함의 행동은 하나님 앞에서 결코 용서받지 못할 범죄 행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은 흠이 없다고 주장했고 자랑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주장, 자랑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여실히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보기에는 대단한 인물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5절에서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말합니다. 여기에 아브라함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아브라함이 경건하지 아니한 상태에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당시 아브라함이 경건하지 않던인물이었다고 밝히기를 서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경건하지 아니하다라는 단어는 로마서 125절에서, 하나님을 예배 또는 경배하지 않는 사람들을 지칭할 때 사용되던 단어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아브라함을 불경건한 자였다고 단정하였습니다. 결국,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소망이 없던 인물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론 우리들의 행위가 그럴듯하고 대단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업적, 공로가 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죄인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설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늘 주님의 은혜 안에 거해야 합니다. 주님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이어서 다윗의 이야기도 듭니다.

다윗 역시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성군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도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일을 많이 한 사람입니다. 간음죄를 저질렀고 또한 살인교사죄까지 저질렀습니다. 이 둘 다 율법으로는 사형감입니다. 따라서 행위로 보면 도저히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죄를 지을 때는 즐거웠지만 결국 그로 인하여 엄청난 고통을 겪었습니다. 마음속에 죄를 품고 있을 때 <뼈가 쇠하여질 정도로 다시 말해서 뼈가 닳아 없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32:4)습니다. <진액>이란 양분이나 힘을 말하므로 세상을 살 힘과 에너지를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죄는 생명 에너지를 고갈시켜 창조적 인생을 살지 못하게 만듭니다. 죄에 사로잡히면 아름답고 건설적으로 살지 못하게 되고 마침내 살고 싶은 생각까지 없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그가 죄의 지적을 받았고 회개하여 하나님께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복도 받아서 이스라엘의 최고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용서와 사랑을 늘 회상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시 321~2절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복되어라! 지은 죄 용서받고 허물을 벗은 그 사람! 주께서 그의 잘못을 따지지 않으시고, 그 마음에 거짓이 없는 사람은 복되고 복되다! -표준새번역) 정말 다윗은 회개하였을 때, 입을 열어 자신의 죄악을 고백하였을 때에 일한 것이 없이 다시 말해서 선행을 한 것도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복을 누렸습니다. 물론 회개하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죄를 깨우쳐 주셨고 회개할 기회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32:6). 경건한 자는 주님을 의지하며 사는 자입니다. 이러한 자가 주님께 기도할 때, 자신의 죄를 애통하게 생각하며 회개할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의 죄를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죄를 죄로 여겨주시지 않고 덮어 주시고 의롭다고 여겨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복된 은혜입니까?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죄인을 죄인이라 하지 않으시고 의인이라 여겨주신다니 이처럼 감격스러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성경에 수많은 죄인이 믿음으로 이러한 은혜를 입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세리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그는 성전에 올라가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분명 죄 많은 세리였지만 자기가 죄인임을 확실하게 알고 불쌍히 여겨주심을 의지하고 나갔을 때 그는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은혜와 복을 누리게 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마음껏 죄를 지어야 하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위고의 장편소설 장발장(레미제라블)이 있습니다. 가난해서 한 조각의 빵을 훔치다가 체포된 장발장은 몇 번이나 탈옥을 꾀하였으나 19년간 감옥생활을 하고 출옥합니다. 하지만 장기수였던 그를 받아 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는 하룻밤을 지낸 한 신부의 집에서 은그릇들을 훔쳐 달아났다가 다시 붙잡혔습니다. 이제 다시 감옥에 들어가면 백 년도 더 있어야 합니다. 장발장은 신부가 주었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신부와 죄수 장발장의 대질 신문이 벌어졌습니다. 신부는 그 은 기물을 자기가 준 것이라도 대답하고 장발장을 해방해 주었을 때 그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그 용서의 사랑이 너무 크기 때문에 그는 그 사랑을 평생 잊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회개하고, 사랑과 헌신의 생활을 하게 되어 훌륭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의롭다고 해 주신 은혜가 얼마나 큰가요. 우리는 지옥과 천국의 갈림길에 섰을 때 아마 확실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엎드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영원히 찬양을 드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어 이 놀라운 은혜의 자리에 들어감을 얻었으니 이제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더욱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믿음은 변하고 흔들릴 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만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믿음은 힘이 있습니다. 17:20절을 보면 예수님은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너희가 못 할 것이 없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전제되면 큰일도 할 수 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힘을 얻고 권능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신실하신 주님, 은혜의 주님,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믿음으로 살아가 큰일도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20201115일 주일 낮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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