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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회복)하게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라! 박승남 2021-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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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히브리서12:1-2절 개역개정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12:1~2, 3:1~6 온전(회복)하게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라!

 

한 병사가 사막에서 생활하는 어느 수도사를 찾아가 하나님이 자신의 회개를 받아주실지 물었습니다. 수도사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친구여, 자네는 옷이 찢어졌을 때 그것을 버리는가?” 그 병사가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그것을 다시 수선하여 입습니다.” 그러자 늙은 수도사가 그에게 반문했습니다. “자네가 옷에도 그렇게 신경을 쓰는데 하나님이 자신의 피조물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이지 않으시겠는가?”

그렇습니다. 자신의 피조물인 우리 인간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깊은 관심을 가지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면 주님은 우리를 얼마든지 회복시켜 주실 수 있습니다. 아니 주님은 우리를 회복시켜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에스겔 3624~30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슬픔 속에 희망없이 살아가던 가련한 백성들에게 놀라운 소망의 말씀, 회복의 말씀을 주십니다. 그것은 포로에서 돌아오게 해시고 정결하게 해 주시고 성령으로 살갗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어 말씀을 따라 살게 하시며 풍성한 소출을 주시어 다시는 다른 여러 나라의 조롱을 받지 않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면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여러분 회복이라는 말은 히브리어에 "슈부(bWv)", 헬라어로는 ajpokaqivsthmi”(아포카디스테미)인데 이는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거나 회복시키다'입니다. 그리고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시고 잘못된 것으로부터 본래적인 것으로 돌이키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우리는 전 세계적으로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것과 같은 2020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교회 역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위기입니다. 하지만 역사를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고난 속에서 평화를 창조하시는 분이시고 회복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히 주님 앞에 나아가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을 보면 믿음의 주여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고 합니다. 여기 온전케 하시는 이라는 단어는 teleiwthv"(텔레이오테스) 완성자, 완전케 하는 자 perfecter.라는 뜻입니다. 우리를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서 온전히 회복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온전히 회복시켜 주시는 분이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서의 본문을 보면 한쪽 손 마른 사람이 나옵니다. 어느 손인지 모르지만, 한쪽 손이 질병이나 사고 등의 이유로 근육이 위축되고 마비되어 제 기능을 할 수 없으니 보기에도 그렇고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요? 그런데 이 사람이 갈릴리 회당에 와 있었고 그곳에 우리 예수님도 들어가셨습니다. 그 사람을 보신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요? 믿음의 주요, 사람들을 온전하게 회복시켜 주시는 예수님이 가만히 보고만 있으실 리가 없습니다. 그를 불쌍히 여기셨고 고쳐 주시기로 마음먹으셨습니다. 그리고 거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가 예수님께서 반드시 환자를 고쳐 주실 것이라 믿고 있었습니다. 이는 그 자리에 있었던 바리새인 서기관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행동 원리는 모든 사람에게 익히 알려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날이 안식일이었던 것입니다. 안식일에는 병자를 고치는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던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그 사람을 고쳐 주시면 고발하려고 벼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이 이러한 그들의 생각을 모르셨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그들의 올무에 걸려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은 전혀 개의치 않고 자신의 사역 정신 대로 행동하셨습니다. 드디어 그 환자를 사람들 가운데 일어서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때와는 달리 행동하셨습니다. 환자를 먼저 고쳐 주신 것이 아니라 먼저 바리새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4.

그 순간 선을 행하는 것과 생명을 구하는 것 그리고 악을 행하는 것과 죽이는 것이 대립하는 순간입니다. 예수님 자신은 선을 행하려고 하셨고 바리새인들은 선을 저지하려고 하였는데 바로 이것은 악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생명을 구하려고 하셨지만, 저들은 생명을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환자를 불행 기운데 빠져 지내게 할 뿐 아니라 그에게 생명을 주려고 하는 예수님까지 죽이려 생각한 것입니다. 선을 행하면 악을 멀리하는 것이고 악을 행하면 선을 멀리하게 됩니다. 로마서 1619절을 보면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고 합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는 질문은 반대자들에게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촉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잠잠하였습니다. 여기 잠잠하다는 단어 ejsiwvpwn(에시오폰)은 침묵의 상태가 계속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아무 말도 못 하고 한동안 시간이 흘러간 것입니다. 왜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는지 몰라서였을까요? 아닙니다.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옳은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지만, 예수님 앞에서 그 대답을 하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인정하는 꼴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예수님은 5절과 같이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셨다고 합니다. 탄식하셨다는 것은 sullupevw(쉴뤼페오) 함께 슬퍼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몹시 슬퍼하시면서 분노(ojrghv 오르게)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아무 때나 쉽게 화를 내시는 분이 아니라 꼭 필요할 때만, 마땅히 화를 내셔야만 할 때 분노하시는 분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이라는 저들의 마음이 굳어져서 움직이지 않는 모습을 보며 주님은 분노하시고 슬퍼하셨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안식일에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생명이 위험에 빠졌을 때입니다. 여러분들이 주일에 교회당에 오다가 누군가 위험에 빠진 것을 보았다면 그를 돕고 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짐승들을 위해서는 할 수 있는 일들을 왜 사람들에게는 못하는가요? 주님은 종교지도자들의 어리석음과 잘못된 관습을 꾸짖으시고 탄식하셨습니다. 그런 종교가 어찌 사람을 위한 종교라 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 한국교회가 예수님의 정신,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사람을 살리는 종교가 되어야 합니다.

 

이어서 주님은 대담하게 행동하십니다. 손을 내밀라그래서 환자는 명령대로 순종하여 손을 내밀었고, 그 순간 그 손이 회복되었습니다. 자신을 책잡으려고 눈을 붉히며 앉아 있는 반대자들에 앞에서 예수님은 환자를 사람 중에 일으켜 세운 채 공공연하게 그리고 서슴없이 병자를 고쳐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당시 분위기를 환자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선택하고 손을 내밀었으니 대단한 결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손을 내민 것은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는 믿음의 행위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기적을 일으키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그는 치유되었습니다. 본래의 상태대로 회복된 것입니다. 얼마나 기뻤을까요? 성경은 순종할 때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을 여러 차례 보여줍니다.

 

이제 그동안 사용할 수 없었던 손을 정상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남들 보기에도 안쓰럽지 않게 되고 또한 멸시와 천대와 조롱을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것이 우리가 회복되어야 할 것들이 아닙니까? 본래의 교회 모습으로, 성도의 모습으로 회복되어 교회로서, 성도로서 제구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주님의 말씀처럼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교회로써 말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예루살렘교회는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습니다. 새번역에는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1장에 나오는 안디옥교회는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불리게 된 것입니다.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13:34~35) 우리는 진정 주님의 제자로서, 참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불리고 있나요.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 멸시 천대가 아닌 칭송, 호감을 받고 있나요?

 

여러분 우리 주님은 선을 행하고 생명을 살려주시는 분, 본래의 상태로 회복시켜 주시는 분입니다. 육체적인 회복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살갗 같은 마음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그 자리에서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였다면 저들도 바르게 회복되어 새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들은 완악하여 회당을 박차고 나가 버렸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결코, 완악, 완고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대신 살처럼 부드러운 심령, 겸손하고 온유한 심령이 되기를 바랍니다.

 

2021년을 맞이한 여러분은 어떠한 것이 회복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 어떻게 하려 하십니까? 이번 2021년 우리 교회 달력을 보면 1월에서 12월까지 매월 하나씩 우리가 회복되어야 할 것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진정한 예배의 회복부터, 믿음의 기도, 말씀의 능력, 평범한 일상, 사랑과 화목, 화해와 평화, 다음 세대의 믿음, 교회의 영광, 천국의 소망, 구령의 열정, 풍성한 감사, 나눔과 소망이 회복까지입니다. 이 얼마나 귀한 것들입니다. 진정 이러한 것들이 회복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각자 형편에서 필요한 것들이 회복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히브리서를 보면 예배의 회복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025절을 읽어드립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당시 히브리서의 상황을 정리해 보면 율법적인 유대주의와의 싸움이 제일 큰 싸움이었고요, 영지주의와의 싸움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교인들의 열심도 식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배우려고 하지를 않았습니다. 모이기를 힘쓰지 않았고 신앙 성장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게다가 박해가 오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1019절부터 25절까지 예수의 피를 힘입어 담력을 가져라,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라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잡아라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격려를 해라 모이기를 폐하지 말고 힘써 모이라고 외친 것입니다.

디엘 무디의 주석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신자가 목사님을 찾아와서 제가 주일날 가끔 바빠서 예배드리는데 빠지기도 하지만, 신앙은 변함이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난로에 장작이 훨훨 타오르는데 아무 말 하지 않고 장작을 하나 밖에다 내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조금 전까지는 벌겋게 타고 있던 장작이 점점 꺼져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분이 목사님 알았습니다. 제가 열심히 주일 참석하겠습니다라고 했답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전 세계에서 3분마다 한 명씩 기독교인이 살해되고 있다고 합니다. 3분마다 한 명씩 순교를 당하거나 살해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비하면 우리는 너무 편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 아닙니까? 요즘 코로나 19로 인해 모여 예배드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느끼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요즘은 교회당에 나와서 예배드리고 싶어도 할 수 없어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는 형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한편으로는 잘된 일입니다. 왜요? 사실 우리는 내일을 모릅니다. 언제 어떻게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지 못할 일이 또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코로나로 인해 가정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훈련된다면 걱정할 일이 없습니다. 우리 가정이나 내가 있는 곳에서 언제든지 예배를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모여서 드리나 가정에서 드리나 사모하는 마음, 예배드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갈급함같이 예배드리기 사모하면 모여서 예배드릴 때 어찌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어려운 사정으로 가정에서나 각자의 자리에서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을 때라도 왜 예배드리지 않겠습니다. 요즘 염려가 되는 것은 교회당에 나오지 못할 사정이 되니까 아예 예배를 드리지 않는 이들이 38%나 된다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진정 주님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의 습관처럼, 우리는 모이기를 그만하지 말고, 서로 격려하여 그날이 가까워 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 힘써 모입시다 라는 히브리서 1025절 말씀처럼 더욱 모이기를 힘쓰고 함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제일가는 의무는 바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해방시켜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바로에게로 가서 '나 주가 이렇게 말한다' 하고, 그에게 이르기를 '나의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예배할 수 있게 하여라. '나의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에게 예배를 드리게 하여라.

그런데 예배와 말씀은 떨어질 수 없습니다.

여러분 예배를 드릴 때 거기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과 안식을 누릴 수 있고 우리의 영혼이 회복될 수 있습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당연히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번은 사람의 제일 된 목적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하고 이어서 그 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일이다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배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드리든지, 교회당에 나와서 드리든지, 대형교회에서 드리든지 조그만 지하 교회에서 드리든지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분은 동일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어디에서든지 영과 진리로, 성령과 말씀에 의지하여 진실하게 예배하는 자들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여러분 예배는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 말씀 안에 거하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가장 기본적인 것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고,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는 것이고, 믿음의 도리에 대해서 아는 것이고, 그것을 더 확고하게 붙잡는 것입니다.

우리 몸이 건강할 수 있는 비결은 음식을 잘 먹고 맑은 물과 공기를 마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우선하는 것은 바로 영혼의 평안, 영혼이 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삼서 2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간구한다고 하면서 이어서 하는 말이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 입니다. 가이오라는 성도는 영혼이 잘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는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말씀에 순종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며 주님과 동행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영혼은 지금 어떠한 상태입니까?

영혼이 잘 되기 위해 저는 여러분이 올 한해 말씀 묵상 생활을 하기를 바랍니다. 하루 많게는 30분 정도 시간을 내면 됩니다. TV, 스마트 폰 보는 시간을 줄이면 됩니다. 그래서 적어도 성경 말씀을 1독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읽어야 말씀을 알고 말씀에 순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말씀이, 말씀이신 주님이 여러분을 치료하고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히브리서 4:12~13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고 말씀합니다. 말씀은 살아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람을 수술도, 병이 어디 있는가도 알아내 쪼개기까지 합니다. 우리 몸과 영혼을 스캔하여 뭐가 잘못되었는가까지 정확하게 가르쳐 주고 수술까지 해 줍니다. 성경을 덮으면 하나님이 안 보이고 성경을 열면 하나님이 보입니다. 어떤 분들은 성경을 안 읽는 이유는 읽으면 죄가 보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병원에 가서 MRI로 몸을 찍어서 병을 찾아냅니다. 그런데 병원에 가서는 찍으려 하지만 교회 와서는 왜 안 찍으려 할까요? 성경은 유익한 책입니다. 어디에? 교훈(예방, 알려주는 것)과 책망(치료하는 것)과 바르게 함(수술)과 의(회복)로 교육하기에 말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통해 믿음의 주요 온전케(회복)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에스겔 36장을 보면 회복을 말씀하신 하나님은 37절에서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고 하십니다.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약속을 붙들고, 말씀을 부여잡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올해 어떠한 일이 펼쳐질지 알 수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제 코로나와 함께 가야 한다고 하기도 합니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아니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주님께서 회복시켜 주십니다. 우리의 영과 육을 말입니다. 주여, 이제 회복하게 하소서! 기도하겠습니다. 202113일 주일 낮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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