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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나 박승남 2021-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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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로마서7:7-14절 개역개정

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9.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10.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11.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12.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13.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제공: 대한성서공회

                     롬7:7-14 율법과 나

 

로마서를 보면 율법을 공박하고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는 것 같은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배운 바를 살펴보면 율법이 절대로 사람을 의롭게 만들 수 없습니다. 그리고 71~6절에는 우리가 율법에 대해서 죽었다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5절에 보면 율법을 통한 죄의 정욕이 우리의 지체 속에서 사망에 이르는 열매를 맺도록 만들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통해서 일어난 죄의 정욕이 결과적으로 우리를 사망에 이르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율법에서 해방되었다고 말하면서 묵은 율법 조문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지 말고 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율법은 필요 없는 것 같고 문제투성이고 마치 못된 남편과 같은 것처럼 보이고 죄 즉 잘못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너무도 소중하게 여기는 유대인들이 들을 때는 이게 뭐지? 아니그렇다면 율법이 죄란 말입니까?’라는 항의가 바울에게 들려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이 질문에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7절 이하에서 그 이유에 대해 진술을 합니다. 특이한 것은 7절부터는 주어가 바뀐다는 점입니다. 7절에서 25절까지의 주어는 우리가 아니라 (I)입니다. 즉 율법과 나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이렇게 주어가 1인칭이 된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의 경험적 고백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또한, 714절부터 시제가 현재형으로 바뀝니다. 24절을 보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탄식을 하는데 이는 바울의 경험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율법이 죄가 아닌 이유는 우선 죄를 죄로 깨닫게 해준 것은 바로 율법이기 때문입니다(7:7). 율법이 없었다면 죄가 무엇인지도 몰랐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상한 본성이 있습니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 하는 못된 본성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선을 그어 놓고 들어가지 말라고 하면 사람들은 더 들어가고 싶어합니다. 어린아이들에게 높은 선반에 얹어 놓은 물건에 손대지 말라고 일러두면 어떻게 해서라도 들여다보고 싶어 합니다. 물론 들어가지 말라 손대지 말라는 다 합당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율법 자체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합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율법을 이용하여 잠든 죄를 움직이고 자극함으로 생기를 띠게 하여 더 큰 죄를 생산해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문이 많아지고, 조문이 많아진 만큼 죄는 더 확장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의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11:28-30). 그러면 여기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어떠한 사람들인가요? 우리는 죄와 세상의 이런저런 걱정 근심, 돈 문제, 자녀 문제, 인간관계 문제 등으로 지치고 힘들어 하는 이들을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틀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말씀하신 배경 속에서는 바로 율법에 눌려 살아온 백성들을 말합니다. 백성들이 무겁게 지고 왔던 멍에는 바로 율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사랑하는 시 1편은 어떠한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가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아니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된 자인데 그런 율법이 어떻게 사람들을 무겁게 누르는 멍에가 된단 말인가요? 율법은 보통은 십계명을 중심으로 한 모세 5, 율법서를 말합니다. 율법을 토라라 하는데 토라는 "율법"보다 더 광범위한 용어로서 종교적 가르침, 계시 그리고 교훈까지를 포함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구약성서 전체를 율법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구약시대 때에 지키도록 알려 주신 법을 모두 613로 보고 있습니다. 그중에 '지켜라'는 강제 조목이 248, '하지 말라'는 금계(禁戒)365개로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세속으로부터 지키고 하나님과 더욱 가까이하며 정의와 사랑으로 살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율법을 변화하는 환경에 적용시켜야 할 필요를 느꼈으며, 이러한 노력으로 신약에서 "조상(장로)들의 유전"(7:3-그들은 '미쉬나'를 이렇게 불렀다)이라고 부르는 구전 율법을 발전시켰습니다. 이 구전 율법은 율법을 보호하는 "울타리" 역할을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을 수행하기 위하여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노동"을 구전 율법에서 39가지로 규정해 주고 있습니다. 이 구전 율법의 목적은 주어진 율법에 순종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 율법의 권위를 기록된 율법보다도 더 높이려는 사람도 있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본말이 전도되어 율법의 정신, 하나님께서 법을 주신 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11:42).

십일조에 대해서는 언젠가 오후 예배 때 말라기 3장을 통해 말씀드린 바 있는데 십일조인간들의 빚어내고 있는 불공정 사회를 공정사회로 바꾸기 위한 장치입니다. 정의와 긍휼을 베풀기 위해서 그 땅에서 고난 겪는 사람들, 누군가의 돌봄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을 돌보도록 십일조를 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의를 행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 눈에 보이는 몇 가지 규칙만 지키는 것으로 교만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대로 산다 하던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정신을 잊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라고 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선민답게 정직하고 긍휼이 넘치고 공의롭게 살기를 원하셨는데도 말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율법 중에 안식일 법이 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면 살고 범하면 죽는다(15:32-36 참조). “유대인이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유대인을 지켰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유대인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사활을 거는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총 39234장에 달하는 안식일 조항들을 만들어내었습니다. 물론 이 조항들은 율법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결과적으로는 본래의 안식일 정신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이 이 안식일 조항들을 일부러 깨뜨리시는 장면들을 자주 봅니다.

소위 정결법도 그렇습니다. 먼지가 많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은 위생상 필요했습니다. 샌들을 신고 다니는 문화에서 다른 사람의 집에 들어갔을 때 그 집에서 발 씻을 물을 내놓는 것은 기본적인 예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장로들의 유전으로 정결의식이 되었습니다. 그른데 세월이 지나면서 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속을 더럽게 한다고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속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정결례의 본질인데 말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안식일 법과 정결법에 의도적으로 도전하셨습니다. 그러나 서기관들은 이런 법들을 가르치기에 바빴고, 어긴 자들을 벌주기에 바빴습니다. 하지만 사랑이 많으시고 율법의 정신을 바르게 아시는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쉬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는 내가 살았더니(7:9a). 그의 어린 시절은 물론 모든 사람의 어린 시절이 자유롭게 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에덴동산의 생활, 율법이 들어오기 전에는 모든 것이 그렇듯이 자유로웠습니다. 죄는 힘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7:8). 그런데 계명이 들어오니까 죄가 살아나고 나는 죽었다고 합니다. 9, 11절과 같이 '나는 죽었다(7:9, 11)는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합니다. 이 말은 우리 육체적인 생명이 죽는다는 뜻이 아니라, 죄에 눌려 힘을 잃었다는 뜻입니다. 아담에게 죄가 살아났을 때, 그가 죽은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75절을 보면 율법은 죄의 욕정(sinful passion)을 일으켜서 죄를 더욱 증가시킨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율법이 없다면 죄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물론 율법이 존재하기 전에 양심의 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양심의 법이 죄를 알게 해주기는 하지만 죄를 구체적으로, 그리고 바르게 깨닫게 해주는 데는 무딘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7절과 같이 율법은 죄를 구체적으로 알게 해 주었고, 동시에 탐심을 일으킵니다.

8절부터는 율법이 계명으로 바뀝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개인의 삶에 적용하려는 것입니다. 계명이 들어오니 죄는 살아난다고 합니다. 이는 법 조항의 역기능을 보여줍니다.

일꾼들이 도착했을 때 집은 조용했습니다. 누군가 현관으로 다가오자 일꾼들은 그 사람을 집주인으로 생각했습니다. 일꾼들은 문과 창에 새 경보장치를 설치하러 온 참이었습니다. 동네에 도난 사건이 빈번하여지자 집주인은 강도가 들 것을 염려하여 지금보다 더 나은 장치를 주문했습니다. 그런데 공사 당일 집주인은 몸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이웃에게 자신이 몸을 움직이기 어려우니 현관에서 대신 사람들을 맞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이웃은 일꾼들과 함께 집을 돌며 경보장치가 정확하게 어떻게 작동하는지 배웠습니다. 그러는 사이 좋은 수가 떠올랐습니다. 그는 그 집을 침입할 수 있는 최적의 위치에 놓인 셈이었습니다. 경보장치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실제로 훌륭한 경보장치였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웃은 공사 과정을 보면서 경보장치를 뚫는 좋은 수를 알게 되었고, 결국 나중에 그 집에 무사히 침입할 수 있었습니다.  (톰 라이트(N. T. Wright) 목사)

이 이야기에 나타난 이웃의 모습은 실제로 로마서 7장에 나오는 가 합성된 것입니다. 여러분 12절과 같이 율법 자체는 하나님의 법이고 거룩하고 정의롭고 선하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경보장치처럼 훌륭하고 제대로 작동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다른 부분에서 실수한다면, 즉 불성실한 이웃에게 경보장치 설치를 돕게 한다면, 율법은 이롭게 작용하기보다는 해롭게 작용할 것입니다.

 

법을 알면 알수록 죄에 대하여 알게 되고, 죄의 욕망은 더욱 살아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으면 죄의 범위는 더 넓어지고, 죄의 본질은 깊어집니다. 그리고 심하면 악한 행동을 유발합니다. 그렇지만 율법은 그 자체로 죄를 억제하거나 치료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율법이 없다면 죄는 힘을 쓸 수 없다는 점에서 8절과 같이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라고 합니다. 이것은 바울 자신의 직접 경험했던 불행한 과거를 반영합니다. 율법의 본래 목적은 죄를 억제하고 생명에 이르게 함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물론 여기 사망은 육체적 죽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죄에 눌려 죽은 것 같은 존재가 된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율법이 악한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을 타고 일어나는 죄성이 악하다고 지적합니다. 그래서 그 책임은 율법에 있는 게 아니라, 죄를 짓는 인간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 예로 탐내지 말라는 계명으로 설명합니다. 탐내지 말라는 율법 조항(계명)이 있으므로 비로소 탐심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탐내지 말라는 계명을 통하여 죄는 틈을 타서 사람들 속에서 온갖 탐욕을 일으킵니다.

탐내지 말라는 계명이 들어오니까 탐심이 살아나고, 구체적인 탐심의 죄들이 마음에 일어나고, 그 결과 나는 죽었다고 합니다(7:9). 탐심에 대하여 몰랐던 사람이 그 말을 듣는 순간에 남의 것을 갖고 싶은 탐심이 그 마음에 일어납니다. 탐심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으면서 탐심은 구체성을 띤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죄를 따라가다 보면 곧 사망에 이른다고 합니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사망으로 인도합니다. 여기서 계명은 모세의 율법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계명이 생명에 이르게 한다라는 말씀은 구약 자체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구원의 수단으로 삼으실 의도는 결코 없었지만, 율법에 순종하면 생명을 얻는다는 약속을 주신 것은 사실입니다. 레위기 18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에스겔 2011절을 보면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삶을 얻을 내 율례를 주며 내 규례를 알게 하였고라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말씀을 보면 율법이 온전히 지켜졌다면 생명을 주었을 것이라고 결론 짓는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10절과 같이 율법이 생명에 이르게 하는 계명임에도 불구하고,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율법이 사망으로 인도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을 행할 능력이 없는 인간이 율법 아래서 살다 보면, 율법을 성취해 가는 게 아니라 죄 속에 더 깊이 빠져든다는 의미에서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12절과 같이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다 선언합니다.

그리고 14절에서는 율법은 신령하다라고 합니다. 신령하다는 말은 성령과 관계된 표현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율법이 폐기되어야 한다고 어디에서도 주장한 적이 없습니다. 도리어 로마서 331절과 같이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성령의 법을 따라야 한다는 주장은 율법을 폐기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 길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율법을 완성해 나가는 길입니다(517). 출애굽 당시 애굽에서 먼저 건져 주시고 그 후에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20장 십계명에 대해 말씀을 하시기 전에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고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13절을 보면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7:13) 라고 질문합니다. 새번역 성경은 그러니 그 선한 것이 나에게 죽음을 안겨 주었다는 말입니까?”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7절 같이 질문한 사람들과는 다른 율법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서 온 항의입니다. 율법이 악하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끈질기게 질문을 던짐으로 도전합니다. 이 문장으로 보아 당시 로마에는 바울을 반대하던 무리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바울은 아니다라고 잘라 말합니다. 바울은 이미 죄와 율법이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밝혀 왔습니다. 율법이 사망의 원인 제공자가 아니라, 사망의 제공자는 우리가 짓는 라고 다시 한번 선언합니다. 그뿐 아니라 율법은 죄를 드러나게 해 줍니다. 율법에 대한 바울의 입장을 정리한 구절이 713절입니다.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초대교회 교부로 뛰어난 설교자요, 신학자였던 크리소스톰(Chrysostomos 황금같은 입, 349년경 407)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죄의 악함을 보여주고, 죄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명백하게 나타낸다. 그리고 그것은 계명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또 율법보다도 은혜가 얼마나 더 우월하다는 것과 은혜와 율법이 알력 관계에 있지 않음을 명백하게 한다

지금까지 율법에 대하여 말하면서 바울은 두 칼날 사이를 슬기롭게 헤쳐 나왔습니다. 두 칼날이란, 하나는 율법을 절대 옹호하는 세력들이고, 또 하나는 율법 폐기를 주장하는 자들입니다. 율법은 선한 것이므로, 폐할 수 없고 지켜가야 하지만 율법의 모순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십자가의 은혜로 산다는 사실을 줄기차게 주장해 왔습니다. 동시에 율법 안에서 죽음을 강조하는 것은 율법은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가게 해주는 고마운 안내자라는 사실을 말하려고 한 것입니다.

바울이 이처럼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울이 율법을 본격적으로 취급하는 곳은 로마서 84절 이하로부터입니다. 그 이유는 의롭다 함 받은 이후에 그리스도인의 삶을 율법과 연결 지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즉 은혜는 율법을 폐기하는 게 아니라, 은혜는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과 화평의 길로 걸어가므로 은혜가 은혜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교회의 문제는 은혜만을 강조하고, 율법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데서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많은 기독교인이 은혜를 받은 다음에 그리스도인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깊이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평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주신 율법(토라)을 깊이 알고 그것을 따라 살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율법을 적극적으로 변호하는 이유입니다. 바울이 반대하는 것은, 율법 자체가 아니라 낡은 옛 조상들의 조문, 즉 유대인들이 생명처럼 주장하는 조상들이 전해 준 율법에 대해 해설하는 조문들. 예수님께서 지적하시고 비판하시고 몸으로 도전하신 장로들의 유전입니다. 현재도 율법은 나쁘고,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제가 80년 군에 입대하여 훈련소에 들어갔을 때 두 종류의 소대장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좀 심하게 말하면 무지막지한 소대장이고 하나는 너무도 부드러운 소대장이었습니다. 얼굴도 잘생겼습니다. 이분이 시간이 될 때 저와 몇몇을 불러서 이야기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십일조를 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얼마나 설득력 있게 말했는지 제가 그 후 몇 달 십일조를 안 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다시금 드렸습니다. 십일조라 해 보았자 그 당시 제 군인 월급이 3천 원도 안 되었으니 몇백 원 정도였지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인자하게 생긴 그 소대장이 다름 아닌 구원파였다는 것입니다. 구원파는 새벽예배, 십일조, 주일성수 등이 율법주의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정상적인 정통교회라면 새벽예배나 십일조나 주일성수가 구원의 조건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구원파는 새벽에 예배를 드리지 않아야만 종교에서 벗어나는 것이, 주일성수를 하지 않아야만 하며, 십일조를 내지 말아야만 율법주의를 벗어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을 때 한 번만 회개하면 된"라고 주장합니. 그리고 "예수를 한 번만 믿으면 된다"라고 주장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실제로 죄가 없어지므로 완전한 의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더는 성령의 인도와 보호가 필요 없다는 주장이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주장은 마치 예수를 처음에 한 번만 믿고, 그다음부터는 예수를 더는 안 믿어도 구원을 받는다는 뜻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일반교회의 성도였다가 이단 종교로 개종한 사람도 구원을 받는다는 것인가요? 박해를 받아서 신앙을 버리고 세상으로 나간 이들도 구원받는다는 것인가요. 즉 믿음을 유지할 필요성과 일상적인 회개를 반복적으로 할 필요성을 착각하는 주장이 바로 구원파의 주장인 것입니다. 계시록 2~3장을 보면 일곱교회에 대해서 성령께서는 "회개하라"라고 말씀합니다. 그 교회들은 이미 예수를 믿는 교인들로 처음 믿음의 회개와는 구별됩니다. 그 말씀은 모두 이미 믿는 자들에 대한 범죄에서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경고입니다. 율법이 진리인가라! 묻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그리하셨듯이 바울도 율법과 은혜의 순서가 잘못된 것이지, 율법이 잘못된 게 아니라고 합니다. 율법은 의롭다 함을 받은 후에 반드시 지켜져야 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물론 율법 중에는 제사법, 규례법, 정결법 등 우리가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이 있지만 그 정신은 지키는 것입니다.

 존 번연은 <죄인의 괴수에게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책에서 자기가 거의 18개월 동안 얼마나 무서운 죄의식의 고뇌 속에 사로잡혔던지 들에서 먹이를 찾고 있는 기러기가 부러워 보일 정도였다고 토로했습니다. 차라리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더 나을 뻔했노라고 했습니다. 그는 율법을 새삼스럽게 깨달은 것입니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어버리는 이 가공할 만한 죄책감, 이것은 성령이 주시는 특별한 은혜입니다. 이것은 성령 받은 사람만이 아는 은혜입니다. 십자가 앞에 서는 자만이 아는 은혜입니다. 율법을 바로 깨달은 자만이 아는 은혜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에는 정반대의 병리 현상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죄인은 많은데 죄의식은 희박합니다. 많은 교인이 가슴속의 묵은 땅을 갈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가시덤불을 뽑아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죄의 감각을 잃고 사는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정신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어버리는 은혜를 체험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를 율법에서 해방시켜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무 좋아 춤을 추며 감사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문간에 서 있는 손님이 험상궂으면 험상궂을수록 어린 딸아이는 엄마 치맛자락을 바짝 끌어안습니다. 율법 안에서 나의 죄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보면 볼수록 우리는 예수님을 바짝 끌어당깁니다. 율법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자기가 얼마나 절망적인 존재인가를 보면 볼수록 그 사람은 십자가 앞으로 가까이 나아갑니다. 오직 예수의 십자가만이 유일한 피난처인 것을 율법이 깨닫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깨달은 죄를 누가 그 죄를 치우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민수기 21장을 보면 불 뱀에 물려 죽어 가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불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모세가 놋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쳐다본즉 살게 되었습니다(21:8-9).

그런데 요한복음 314~1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살게 하시기 위해 그리스도 예수를 보내 주셨습니다. 멸망치 않고 죄 때문에 죽지 않고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구원해 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시어 보혈을 흘려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날마다 예수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면 살게 됩니다. 그러면 정결케 됩니다. 평안과 안식과 소망을 누리게 됩니다. 202127일 주일 낮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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