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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참 스승이신 예수님 박승남 2023-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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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요한복음13:12-17절 개역개정

12.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요13:12-17​ 우리의 참 스승이신 예수님 

 

여기 계신 분 중에 나는 주일학교(교회학교) 때부터 교회를 다녔다.” 손들어 보십시오.

네 한 절반 정도가 주일학교를 다니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주일학교 다닐 때 우리를 가르치셨던 선생님 계시지 않습니까? 그 선생님들께서 현재 이렇게 반듯하게 자라서 사회에서 큰일들을 감당하시고, 교회에서 장로, 권사, 집사, 교사 또는 교역자로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우리의 현재 모습을 보신다면 그분들이 얼마나 뿌듯해하시겠습니까!

그분들은 그냥 열심히 심고, 정성껏 물을 준 것뿐인데 저희가 이렇게 반듯하게 자란 것 아닙니까! 물론 우리를 이렇게 자라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시지만 그분들이 심거나 그분들이 물준 나무가 아름다운 믿음의 열매를 맺는 큰 나무가 되었다면 얼마나 보람되냐 이겁니다.

서울의 유명한 교회 목사님이 교사 헌신예배 때 이렇게 간증하셨습니다. 목사님이 초등학교 2학년 때 교회 선생님의 손에 이끌려서 갑작스럽게 성경 암송대회를 나가게 됐는데 1등을 하게 되었답니다. 선생님이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자기를 꼭 껴안아 줬데요. 근데 그때 그 선생님의 따스한 품이 자신을 방황하지 않도록 붙잡아 줬다는 겁니다. 그래서 신앙의 굴곡 없이 여기까지 왔다고 간증하셨습니다.

사람이 어떤 스승에게 어떤 교육을 받느냐는 것은 그 사람의 장래를 결정짓는 중대사입니다. 그렇다면 성도 된 우리의 최고의 스승은 누구일까요?

 

본문 13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선생(didavskalo" 디다스칼로스)이라고 하십니다. 물론 제자들은 당연히 직접 예수님께 배웠으니 선생님이 되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면 우리는요? 비록 우리는 제자들처럼 배우지는 않았다 해도 계속해서 주님의 말씀과 삶을 배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선생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부르심에 의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다고, 아니 영광이라고까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놀라운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용서와 이해와 섬김, 겸손과 자기희생 등을 배웠습니다. 예수님께로부터 위대한 가르침과 위대한 생활을 배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훌륭한 제자가 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바로 받은 좋은 제자들이 많습니다. 세상 역사를 바르게 바꾼 이들을 보면 예수님의 위대한 교훈을 배운 자들이 많습니다.

학교에는 학문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있고 학원에서는 공부와 기능과 온갖 무술 등을 가르치는 이가 있고 교회에는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사들을 비롯한 성도들이 배우고 따라야 할 스승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하시면서 참사랑을 베풀어 주셨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사랑을 베풀어 주신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저녁 어둠의 그늘이 대지를 덮듯이 죽음의 그늘이 예수님 주변을 서서히 덮쳐 오는데도 주님은 제자들에게 유월절 만찬을 준비하도록 하셨습니다. 특별히 그날도 왼손을 식탁에 비스듬히 기대고 앉아서 오른손으로 음식을 먹는 식사 방법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당시 유대 관습으로 보면 대단히 웃기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인의 성결 시스템(purity system)에 의하면 상에 기대고 앉아서 먹는 만찬은 성전을 중심으로 한 엘리트 지배계급만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랍니다. 천민(impure people)들은 우리처럼 의자에 똑바로 앉아서 음식을 먹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갈릴리 촌사람들과 세리 등 천민들을 데리고 유대 귀족 행세를 하고 식사를 한 것입니다. 마치 양반행세를 한 것이나 다름이 없는 행위였습니다. 이런 모습을 유대 귀족들이 알고 얼마나 분통을 터뜨렸겠는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더욱이 주님은 직접 수건을 허리에 두르고 그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이는 주인이 자기 집에 온 손님들에게 하는 의례(儀禮)적인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식탁에 앉아 식사하다가 의도적으로 내려오셔서 그들의 발을 씻겨주었기 때문입니다. 발을 씻겨주신 후에 식탁에 앉아서 하신 말씀이 이를 증명합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님 또는 주님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옳은 말이다. 내가 사실로 그러하다. 주이며 선생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남의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과 같이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13:1415-새번역).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그처럼 소중한 가치를 지닌 내용이 왜 다른 복음서엔 없고 요한복음에만 있을까요? 아마도 요한 자신이 이 사건을 깊은 감동으로 지니고 살다가 복음서를 기록하게 되었을 때 이 내용을 강조해서 기록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면에서 생각해 보면 요한복음이 복음서 중에 가장 늦게 기록된 문서라고 생각해 볼 때 교회는 벌써 섬김의 자세를 잊어버리고 높은 자리를 놓고 많은 갈등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참고 약 3:1).

 

귀족들의 만찬 모습으로 식탁에 앉아 먹는 모습이나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것은 그들을 귀족처럼 대접해 준 모습입니다. 앞으로 당당하게 살도록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동시에 서로 섬기는 자세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주님이 보여주신 공동체는 모두가 귀족처럼 존귀한 존재로 여김을 받는 공동체이면서 동시에 모든 사람이 서로 섬기는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섬긴다는 생각을 하면 나는 누구를 섬겨야 하고 누구는 섬김을 받아야 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스승이신 주님은 모두가 서로 섬기는, 그래서 하나되는 공동체를 이루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높은 자도 없고, 섬김을 받는 자도 없고, 오직 섬기는 자만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용서와 사랑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말로만 스승 노릇을 합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23:3~4)

어느 날 한 어머니가 자기 아들을 데리고 사회적으로 덕망이 높은 스승을 찾았습니다. ‘선생님, 아무리 타일러도 아이가 말을 듣지 않습니다. 사탕을 너무 많이 먹어 이빨이 모두 썩었는데도 제 말을 듣지 않아 이렇게 선생님을 찾아뵙게 된 것입니다. 이 아이는 선생님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잘 듣거든요.’
스승은 소년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말했다. ‘한 달 후에 다시 오너라.’
스승의 뜻밖의 태도에 소년의 엄마는 놀랐습니다. 그리고는 속으로 원망했습니다. 먹지 말라고 한 마디만 해주면 될 텐데 한 달 후에 다시 오라는 이유가 대체 뭘까? 스승님은 매우 지혜로운 분으로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도 척척 풀어 주시는데 이렇게 사소한 일을 한 달씩이나 미루다니 이해할 수 없어. 한 달 후에 어머니와 아들은 다시 스승을 찾았습니다. 스승은 말했습니다. ‘한 달 만 더 기다려라.’
소년의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또 한 달씩이나 기다려야 합니까?’
스승은 말했습니다. ‘글쎄 한 달 만 더 기다리라니까요. 그때 다시 오십시오.’
다시 한 달 후 모자가 스승을 찾았을 때 스승은 비로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부터는 사탕을 먹지 말아라.’
소년은 말했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선생님. 지금부터는 절대로 사탕을 먹지 않겠습니다.’
소년의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사탕을 먹지 말라는 말을 하는데 왜 두 달씩이나 걸려야 했습니까?’
스승은 말했습니다. ‘실은 나도 사탕을 무척 좋아합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어린아이에게 사탕을 먹지 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처음 한 달 동안 사탕을 끊으려 노력해 봤습니다. 그러나 실패했지요. 그래서 다시 한 달을 연장해서 더 시도해 본 것입니다. 이제 나는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나는 떳떳이 말할 수 있습니다. '소년아, 너는 사탕을 끊을 수 있다. 늙은 나조차 사탕을 끊었는데, 아직 어린 너는 사탕을 끊는 것 말고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고 말입니다.’
이 이야기는 말보다 실천하기가 얼마나 힘든가를 보여주는 교훈입니다. 이 선생은 제자에게 본을 보여준 이야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삶으로써 본을 보여주신 분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13:1). 유대 사회에서는 주인과 스승이 종과 제자의 발을 씻기는 일이 없었습니다. 종들이 주인을 받들어 먼지 묻은 발을 씻기는 일이 당연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높은 위치에도 불구하고 종의 자리로 내려가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섬기시기 위해서,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의 목숨까지 주시려고 이 땅에 오신 분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10:45).


주님은 섬김, 봉사의 본만 아니라 고난에도 본을 보이셨습니다.
(벧전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봉사의 본만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 고난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순전히 우리를 위한 고난입니다. 특히 죄인을 위한 고난입니다. 자신은 죄가 없으신 분으로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통해서 속죄의 죽음을 당하신 분입니다(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또한 의인으로서 고난을 몸소 당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예는 인류 역사에 찾아볼 수 없는 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구속함을 받은 모든 성도는 그 고난을 발자취를 따라가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14:27)고 했습니다. 자신을 부인하고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합니다(9:23).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백하기를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11:1)고 했습니다. 보십시오. 골로새서 124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우리도 그리스도의 고난의 자취를 따라가 그 영광에 참여해야 하겠습니다(8:17)

요한복음 13장 다음인 146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인생의 근본 된 길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분이라야 알고 가르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일반 스승은 세상의 지식을 가지고 학문을 가르쳐 주지만,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제시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 길을 가장 정확히 아시기 때문에 그 길을 확실하게 가르쳐주실 수 있으십니다. 인생이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길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 길은 그리스도 외에 다른 곳에서는 배울 수 없습니다. 주님의 제자인 도마는 주님께서 가는 길을 바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는 그 길을 확실히 알고 주를 위해서 살았습니다(20:27). 우리는 주님이 가르치신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비록 그 길은 좁은 길이지만 생명의 길입니다(7:13). 우리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잘 보여줌으로써 이 길을 잘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길을 가르치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친히 이심을 밝혔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이 범죄함으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서 생명 나무의 길에 접근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3:24). 아담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가 생명 나무의 길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자신이 길이심을 확실히 증거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이 길을 모르고 방황하는 자들이 세상에는 너무도 많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길(16:17)이시며 생명의 길(2:28)이시며 평화의 길(1:79)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모든 인생은 길 되신 그리스도에게로 나가야 합니다. 그 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마련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누구든지 길 되신 그리스도를 믿으면 천국(天國)의 백성(百姓)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무슨 일을 할 때 그 동기가 참 중요합니다. "왜 이 일을 하게 되었는가?" 하고 물었을 때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동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 동기가 분명하고 자신이 있으면 이미 반은 성공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참 길을 찾는 다는 것은 쉽게 찾아질 수 없는 귀한 것입니다. 길을 찾았다면 혼자만이 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많은 사람에게 함께 찾은 길을 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서 사십니까? 라고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살기는 살되 무엇을 위해서 사는지를 모르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랑하시는 믿음의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의 길과 구원의 길을 찾았습니다. 이 길로 함께 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 일하는 교사들을 돌아보는 아름다운 신앙의 덕을 쌓기를 바랍니다.

본문 14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이 말씀도 자신은 희생할만한 신분이 아니지만 다른 사람의 희생을 받아야 할 사람이지만 자신이 희생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 12:2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 말씀은 한 마디로 자신이 희생함으로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한 알의 밀알로 범죄한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입니다(27).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생명이 없는 인생들에게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대신하여 주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생명을 주신 스승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생명을 나눠 주신 분입니다. 그 생명은 또한 사람들의 빛이었습니다(1:4).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떡이십니다(6:35).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자는 생명의 떡을 먹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 안에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모신 자는 생명의 주를 모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자는 생명의 말씀을 듣는 자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믿는 자는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됩니다. 한 알의 밀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영원한 스승으로 모셔야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누구의 강압에 이끌려 버린 목숨을 내어놓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10:18)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참으로 우리를 위하여 자원하여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러므로 더욱 값집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도 자원하여 오셨으며 자원하여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였으며 자원하여 잡히시고 자원하여 죽으신 것입니다(27). 이러한 사실을 볼 때에 그리스도는 인류의 참된 스승이십니다. 이러한 스승은 세상에는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기꺼이 봉사해야 하며 기꺼이 마음과 몸을 드려야 합니다.

17세기 할레라는 곳에서 고아원을 운영하는 아우구스트 프랑크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고아들을 먹일 돈이 없어 고민하는데 한 거지 과부가 그를 찾아왔습니다. 돈 좀 달라고 하는데 마음은 아팠지만 말했습니다. "미안하지만 도와줄 여유가 없어요."
그러자 그 과부는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습니다. 모든 희망을 다 잃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너무 가슴 아파서 프랑크는 골방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합니까?"
곧 신비한 평화가 그의 마음속에 임했습니다. 한 끼 정도는 굶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골방에서 나가서 그에게 남은 마지막 금화 하나를 그녀에게 주었습니다. 프랑크는 아이들에게 한 끼만 금식하자고 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굶지 않게 하셨습니다. 바로 그날, 그는 한 부자로부터 금화 12개와 스웨덴의 친구로부터 금화 2개를 받았고 곧이어 그의 필요를 들은 근처의 한 영주로부터 금화 500개를 기부받게 되었습니다. 그날 이후, 프랑크의 눈에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의 눈물이 끊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희생 제물을 드리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이 세상에 희생이 없는 성공이란 없습니다. 희생이 없었는데 성공했다면 그것은 우리 앞에 있던 누군가가 희생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희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성공하지 못해도 실망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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