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전도하라 | 박승남 | 2024-01-2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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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요한복음1:35-51절 개역개정35.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36.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38.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43.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6.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48.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5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51.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요 1:35-51 이렇게 전도하라 요한복음은 영원으로부터 시작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영원하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원의 문제를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하기가 얼마나 어려워요. 그래서 영원을 이해시키는 것으로 전도하기는 어렵습니다. 체험한 사람이야 쉽지요. 영원을 이해하는 것과 경험한 것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해하고 있는 사람의 말은 어렵습니다. 잘 이해를 못 하는 사람의 말은 더 어렵고요. 그런데 체험한 사람의 이야기는 쉽습니다. 체험한 사람은 자기가 경험한 것이기 때문에 설명하기가 쉽습니다. 성령에 대하여 설교할 때 이론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뭔가 달라지는데, 그리고 힘이 있는데, 그것을 말로 설명하면 듣는 사람이 이해가 되겠어요? 그런데 경험한 사람이 성령이 임하면 ‘간이 붓는다’라고 설명했다고 합시다. 술 먹고 겁 없이 날뛰는 사람을 보고 “너 간덩이가 부었냐?”라고 하듯이 성령 받은 사람도 그런 경험을 하게 된다고 말하면 이해는 잘되지 않지만 뭔가 느낌은 오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전도는 언제나 영원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체험한 사람들에게서 출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도는 영원이신 예수님을 체험한 사람들이 그 체험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증언이라고 합니다. 세상의 위대한 선생들, 예를 들자면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 같은 스승들은 제자들을 모아 이론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을 모아 가르치신 게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가를 체험하게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보면 세상에 오신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은 두 사람밖에 없습니다. 한 분은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삶을 통하여 자신을 증거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예수님을 성령으로 경험한 세례 요한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전도의 시작은 바로 이 두 분에게서 시작되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전도자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입니까? 세례 요한은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 제자들에게 “저분이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고 소개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제자들이 물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때 요한이 다시 설명합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나도 알았노라”라고 증언하였습니다. 즉 세례 요한 자신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내려서 그 위에 머무는 것을 보여주셔서 그분이 메시아인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연구해서 안 것이 아닙니다. 단지 성령께서 가르쳐 주셔서 안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요한의 말은 힘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이 두 제자에게 예수님을 소개할 때 두 제자는 의심 없이 예수님을 따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따르는 두 제자에게 “무엇을 구하느냐?”라는 질문을 던지시며 접촉을 시작하였고 두 사람은 예수님이 계신 곳을 가서 보고 그 집에 머물기 시작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이 있었기에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살기로 작정했을까요? 그리고 그때부터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한 안드레는 자기 형 시몬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라고 전합니다.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라는 말로 자기 형을 데리고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을 보자마자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는 말이 아닙니까? 그 후부터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베드로는 자석처럼 예수님에게 붙잡혀 살아가게 됩니다. 그다음 전도의 사례는 예수님이 직접 빌립을 만나 초청한 경우입니다. 아마 빌립도 예수님의 초청을 받고 그 집에 가서 하루를 지내보았겠지요. 그리고 그다음에 같은 동네 벳새다 사람 나다나엘을 찾아갑니다. 그리곤 말합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어떻게 빌립이 예수님을 이처럼 분명히 알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빌립이 예수님을 만나서 살아본 결과로 안 것입니다. 빌립의 전도를 받은 나다나엘은 말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느냐?” 그러자 거기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말하지 않고 단지 이렇게 말합니다. “와서 보라” 그러자 나다나엘이 빌립과 함께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아버지가 어느 날 고향인 블라디셀리시아라는 곳을 향해서 말을 타고 가다가 깊은 숲속에서 그만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들은 그가 가진 모든 소유물을 빼앗고 심지어는 타고 가던 말까지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그에게 물었습니다. "이게 네가 가진 전부냐?" "예, 그게 전부입니다." 강도들은 그를 놓아주었습니다. 그는 생명을 건졌다는 흥분과 감격에 정신없이 도망을 쳤습니다. 그러다가 엉겁결에 어떤 묵직한 것이 손에 닿은 것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잃어버리지 않고 안전하게 갖고 다니기 위해서 옷소매에 꿰매어 보관해놓은 금덩이였습니다. 그제야 그는 자기가 금덩이를 몸에 그대로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헐레벌떡 강도들한테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금덩이를 내놓으며 "아까 내가 말한 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너무 무섭고 떨려서 그게 전부라고 했었지만, 사실은 감추어놓은 금덩이가 있습니다. 이것을 받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강도들은 너무나 놀랐습니다. 그들 중 아무도 감히 그 금덩이를 받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더니 그에게서 빼앗았던 물건을 다 돌려주었습니다. '이렇게 정직한 사람의 물건을 빼앗아서는 우리가 도저히 살 수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러고 나서 강도들은 어디론가 줄행랑을 쳤다는 것입니다. 주님께로부터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은 나다나엘은 깜짝 놀라 묻습니다.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내가 보았노라” 이스라엘에 있어서 무화과나무는 평화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스가랴 3장 10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그날은 이 땅의 죄악을 제거하시는 날을 말하는데 그때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있다는 것은 영적으로 큰 은혜를 받아 평화를 누리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무화과나무는 높이보다 옆으로 펴지는 숲과 같은 나무로서 가지가 많아 잎이 무성해 마치 우리나라의 느티나무와 흡사해서 그늘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경건한 사람들은 그 무성한 가지 아래 앉아서 성경도 읽고 묵상도 하고 특히 메시아가 오기를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나다나엘을 보시고 너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평화를 누리는 사람,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묵상하며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칭찬해 주신 것입니다. 사실 나다나엘에게서도 흠을 찾으려면 많았을 것입니다. 완전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나다나엘의 가장 경건하고 아름답고 진실하게 살려고 하는 그 순간을 보아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사람들을 대할 때, 전도할 때, 교회에 새로 나오는 분들에게 이처럼 대해야 할 것입니다. 그의 장점, 좋은 점을 보고 진심 어린 인정과 칭찬을 해 줄 때 그의 마음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은 나다나엘은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맙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그 말에 주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아마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서 창세기 28장에 나오는 벧엘에서의 야곱의 이야기를 묵상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다고 해서 놀래, 나는 네가 어떤 말씀을 묵상하고 있었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말씀에는 야곱의 꿈에 사닥다리가 보이고 그 사닥다리 위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였지. 그러나 내가 분명히 말한다. 앞으로 너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사닥다리가 아니라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닐까 말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야곱의 이야기에서 나오는 사닥다리가 나오는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인자로 바꾸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야곱이 꿈에서 본 사닥다리는 땅에 있는 죄인과 하늘에 계신 하나님 사이를 연결해 주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정한 통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고 구원을 받을 수도 없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닥다리는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닥다리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거룩한 하나님과 죄악 된 인간이 진정한 영적 교제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다나엘아, 나는 너의 심중을 알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한 그 이상의 능력을 행할 수 있다. 나는 너와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늘나라로 인도할 길, 사닥다리이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이 하늘나라에 이르는 사다리에 오를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 뿐입니다. 또한, 예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베드로는 분명히 선포했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4:12)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전도란 무엇이며 어떻게 하는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전도는 내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도자는 자기와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안드레는 자기 형 베드로를, 그리고 빌립은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전도했습니다. 자기 말을 가장 믿어줄 만한 사람에게 전한 것이지요. 주님 앞으로 데리고 만 오면 예수께서 그들에게 자신이 누구인가를 보여주십니다. 베드로에게도 그리하셨고, 나다나엘에게도 그리하셨습니다. 전도에는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가까운 곳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자신의 가정과 교회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출발해서 점점 멀리, 마침내는 다른 문화권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가장 가까운 예루살렘은 바로 부모 형제와 친척들, 그리고 좀 더 범위를 넓힌다면 친구나 직장 동료나 친구들, 그리고 이웃들이니 다. 그다음이 가끔 만나는 사람들, 우리 교회를 다니다가 안 다니는 사람들이 가장 좋은 전도 대상자입니다. 또 어느 교회든 다니다가 낙심된 자들도 대상자입니다. 이렇게 전도하는 것을 관계중심 전도(relational evangelism)라고 합니다. 복음을 전도하는 일에 특별한 방법은 없습니다. 전도 훈련을 받는다고 교과서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훈련을 많이 받아 놓으면 어느 때든지 적절하게 사용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무조건 사람을 만나서 전도하기보다는 먼저 교제를 나눠야 합니다. 소위 라포르(rapport)가 형성되도록 해야 합니다. 라포르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생기는 상호신뢰 관계를 말하는 심리학 용어입니다. 서로 마음이 통한다든지 어떤 일이라도 터놓고 말할 수 있거나, 말하는 것이 충분히 감정적으로나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상호 관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길거리에서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면 전도 대상자를 정하고 그와 좋은 관계, 마음이 통하는 관계를 만드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만나서 식사도 대접하고 선물도 주고 인생 문제도 나누고 필요를 채워 주는 일 등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그다음에 그분이 나를 신뢰하게 될 때 적절한 때를 얻어서 자신이 만났던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자신이 변화하게 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전하는 것입니다. 전도는 나를 전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를 신뢰하는 그 바탕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이나 성도들이 모인 자리에 초대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부담 없이 모여서 친교하고, 찬송하고ᅵ 기도하고 말씀을 나누면서 자연스럽게 믿는 형제들과 사귀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길에서, 음식점에서, 식품점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효과적인 전도는 관계전도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복음을 경험한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경험한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런데도 전도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런 경우 죄책감도 많고요. 그런데 왜 전도하기가 이처럼 어려울까요? 몇 가지를 생각하면서 자신을 반성해 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내가 주님을 온전히 믿는가?’ 그리고 ‘내가 예수님을 깊이 알고 있는가?’,‘내가 복음의 은혜에 얼마나 감격하며 살고 있는가?’, ‘내가 얼마나 전도를 행동으로 옮기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해 보았는가?’, 마지막으로 ‘전도는 성령이 하신다는 것을 믿고 성령님을 의지하고 전도하려고 했는가?’를 점검해 보십시오. 많은 분은 전도할 수 있는데도 자기가 경험한 놀라운 은혜의 감격을 마음속에 묶어 두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어느 목사 한 분이 주일날 골프를 치러 갔다고 합니다. 그러자 같이 치는 분들이 괘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인들에게는 주일에 골프 치지 말라고 해놓고 자기는 골프를 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이 목사 혼 좀 내주세요.” 그런데 다음 타석에서 목사가 친 볼이 높이 떠서 날아가더니 그만 깡통 속에 땡그랑 하고 들어갔습니다. 홀인원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같이 있던 분들이 하나님께 원망했답니다. “혼 좀 내주시라니까, 홀인원을 하게 하십니까?”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더랍니다. “저놈 홀인원 했지만, 누구에게 말하겠냐?” 바로 그게 저주라는 것입니다. 가장 큰 감격을 안고도 전하지 않으면 그것이 고통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많은 체험이 있습니까? 다른 것도 좋지만, 여러분의 경험을 전하세요. 그런데 그 경험도 잘 정리를 해야 합니다. 너무 길어도 안 되고 너무 짧아도 안 되고 어느 점을 강조해야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일 것인지 연구하고 잘 준비해서 들려주셔야 합니다. 이제 주변의 가까운 사람을 찾으세요. 전도 대상자 즉 태신자를 찾는 것입니다. 태신자는 임신한 어머니가 아기를 자기 태속에서 두고 있다가 때가 되어 출산하는 것처럼 전도 대상자를 자기 마음속에 두고 기도하며 관계 전도하며 힘쓰다가 마침내 예수를 믿는 신자로 태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2월에 태신자 작정하는 시간을 가질 것입니다. 그때 당황스러워하지 마시고 미리미리 준비해 두었다가 그때 작정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사람들을 찾아 나서세요. 특히 여러분을 신뢰하는 사람을 찾아 나서세요. 아니면 신뢰하도록 만드세요. 그리고 전도하세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인 기도와 전도를 통한 영혼 구원을 올해는 많이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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