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가 | 박승남 | 2024-04-0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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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열왕기상22:41-53절 개역개정41. 이스라엘의 아합 왕 제사년에 아사의 아들 여호사밧이 유다의 왕이 되니 42. 여호사밧이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삼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아수바라 실히의 딸이더라 43. 여호사밧이 그의 아버지 아사의 모든 길로 행하며 돌이키지 아니하고 여호와 앞에서 정직히 행하였으나 산당은 폐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아직도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44. 여호사밧이 이스라엘의 왕과 더불어 화평하니라 45. 여호사밧의 남은 사적과 그가 부린 권세와 그가 어떻게 전쟁하였는지는 다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46. 그가 그의 아버지 아사의 시대에 남아 있던 남색하는 자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었더라 47. 그 때에 에돔에는 왕이 없고 섭정 왕이 있었더라 48. 여호사밧이 다시스의 선박을 제조하고 오빌로 금을 구하러 보내려 하였더니 그 배가 에시온게벨에서 파선하였으므로 가지 못하게 되매 49.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내 종으로 당신의 종과 함께 배에 가게 하라 하나 여호사밧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더라 50. 여호사밧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그의 조상 다윗 성에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장사되고 그의 아들 여호람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51. 유다의 여호사밧 왕 제십칠년에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이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 52. 그가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의 아버지의 길과 그의 어머니의 길과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53. 바알을 섬겨 그에게 예배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기를 그의 아버지의 온갖 행위 같이 하였더라 왕상 22:41-53 여호사밧과 아하시야의 평가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이름을 남긴다는 것은 그가 살아온 삶의 평가를 뜻합니다. 한마디로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진정한 평가를 기록으로 남기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남조 유다 제4대 왕이었던 여호사밧에 대한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45절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사밧의 남은 사적과 그가 부린 권세와 그가 어떻게 전쟁하였는지는 다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역대지략(sepher dibre hayyamim)이라는 자료는 망실되었다고 합니다. 역대지략(Book of Chronicles)은 문자적 의미는 '날마다의 사건의 일'로서, 왕국의 사관들에 의해 기록된 왕들의 국정일지, 또 다른 말로 '왕조의 역사기록'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역대지략은 없지만, 우리에게는 열왕기와 역대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여호사밧에 대한 독립된 기록은 매우 짧게 아홉 절로 끝내고 그 내용도 무척 간단합니다. 여호사밧의 이야기는 아합 왕과 길르앗 라못을 점령하러 간 이야기(왕상 22:1~40)와 뒤에 나오는 모압과의 전쟁에 참여했던 이야기 중간에 옹색하게 끼어 있는 모양새입니다(왕하 3:1~20). 열왕기가 소개하는 여호사밧의 기록을 보면 여호사밧은 아사 왕의 아들로 유다의 왕이 될 때 나이는 35세였으며 예루살렘에서 25년을 다스렸다(42절). 그는 아버지 아사의 모든 길로 행하며 돌이키지 않았고, 여호와 앞에서 정직히 행했으나 산당은 폐하지 않았다(43절). 이것을 보면 열왕기에도 여호사밧의 잘한 점을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이어서 44절을 보면 이스라엘 왕과 더불어 화평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치적에 대한 기록도 매우 짧고 간단합니다. 여호사밧은 아버지 아사 왕 시대까지 남아 있던 남창을 제거했고, 오빌에서 금을 가져오려 했으나 배들이 파선해 그만두자,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자기 부하들을 시켜 배를 타고 가져오겠다고 했는데 이를 거절했습니다(46, 48~49절). 그리고 죽어 다윗성에 조상들과 함께 장사 되었습니다(50절). 이것이 전부입니다. 아무리 보아도 열왕기 저자는 여호사밧을 홀대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열왕기는 여호사밧의 독립된 이야기를 짧게 기록하는 대신, 다른 이야기에서 여호사밧의 이야기를 길게 두 번이나 다루었다(왕상 22:1~28; 왕하 3:1~27).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건 여호사밧 자신의 독자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남의 이야기에 좀스럽게 얹혀 있을 뿐입니다. 하나는 아합의 이야기에, 다른 하나는 모압을 치려는 아합의 아들 요람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역대하를 보면 여호사밧에 관한 내용을 17에서 20장에 걸쳐 길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사밧의 치적에 대해서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대기와 비교해 보면 왜 열왕기 저자는 여호사밧의 이야기를 마지못해 취급하는 듯 냉대하듯 합니다. 왜 그럴까요? 열왕기는 예언자의 눈으로 유다와 이스라엘의 역사를 평가하고, 더 이상 하나님앞에서 범죄 하지 않도록 경고하고, 어떻게 하면 바른길로 나갈 수 있을까를 보여 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적인 관점에서 기록한 역대기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여호사밧의 이야기를 살펴 보기 전에 먼저 지난 번에 본 열왕기상 22:1-38절 중에 특이한 점을 보겠습니다. 그것은 내내 ‘아합’이라는 이름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 16회나 “이스라엘 왕”이라고 칭합니다. 아합이 죽었을 때는 ‘왕이 이미 죽었다’라고만 전하고 39절 이하에 가서야 아합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름을 부르기조차 싫을 만큼 그가 가증한 인간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면에서 주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불러 주신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반면 미가야는 하나님의 선지자란 어떤 사람인지를 분명히 보여 주었습니다. 성문에서 두 왕이 왕복을 갖춰 입고 앉아 있고, 거짓 선지자 400명이 둘러서 왕의 승리를 예언하였는데 그 앞에서 미가야는 담대히 아합이 전쟁에서 패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그때 미가야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그는 혼자였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음성만 듣고, 그 말씀만 전했습니다.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선지자 미가야는 당시 나단, 엘리야, 엘리샤 아모스와 계열을 같이하는 선지자였습니다. 사도행전 4장에 나타나는 베드로와 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전에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기도 했고 두려워서 숨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의 강림으로 담대해진 저들은 이제 숨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담대하게 공개적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산헤드린 공회가 베드로와 요한을 불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경고하였을 때 담대하게 외쳤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4:18~20) ‘선지자’의 히브리어 ‘나비’는 ‘샘솟다’(to spring), ‘분출하다’(to gush forth)라는 뜻이다. 여기서 파생되어 ‘열심히 말하다’ 또는 ‘말하려는 것에 대해 쏟아져 나오듯 말하다’라는 뜻으로 발전했습니다. 이런 표현은 선지자들이 성령께서 말하게 하시는 것을 쏟아내듯이 말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 예레미야는,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9)라고 표현했습니다. 민족의 멸망과 파멸을 말하기가 어찌 쉬운 일이었겠습니까? 주저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배교자나 민족 반역자라고 낙인찍히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안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이 불붙는 것같이 솟아오르니 어찌 예언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며 예레미야는 토로합니다. 1928년생으로 1958년부터 매사추세츠공과대 교수로 재직한 놈 촘스키는 [지식인의 자격]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에는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반체제 인사에 해당하는 인물들이 나온다. 그들은 ‘선지자 prophet’이다. 그들은 당대 지정학적 현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권력층의 범죄를 비난했으며, 가난하고 고통을 겪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고 요구해 기득권층을 머리끝까지 화나게 했다.” 사람들은 아합처럼 자기의 목숨이 걸린 일인데도 사실 여부를 떠나 자기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해주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참 선지자들이 배척받고, 거짓 선지자들이 환대받게 되는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선지자들의 생활이 얼마나 딱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지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죽임을 당할 수 있는 데다, 바르게 전하려니 사람들에게 배척받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의 삶은 항상 가난하고 험난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이야 환영받고 왕의 식탁에 앉아 먹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당시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이 왕궁의 식탁에 초대받을 만큼 아합과 이세벨에게 존귀하게 여김을 받았다는 것은, 북이스라엘이 이세벨이 지배하는 바알 천국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다시 여호사밧에게로 돌아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열왕기상 저자는 여호사밧의 잘못한 점도 비판하여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예를 들면 여호사밧이 아합과의 군사 동맹을 하려고 두 나라 사이에 평화를 위해 자기 아들과 아합왕의 딸 아달랴와 정략결혼을 시켰습니다.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것은 산당을 폐지 시키지 못하고 남겨두어 백성들로 우상 숭배의 길을 열어 둔 것입니다. 이렇게 그의 부정적인 과거를 들추어내고 있습니다. 이처럼 여호사밧 한 사람에 관한 평가를 책에 기록해 놓았다는 것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사밧 한 사람에 대한 평가만 책에 기록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 모두를 위한 평가를 하나님의 책에 기록해 놓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모든 것은 그날그날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가가 전부 책에 기록됩니다. 그것을 가리켜 ‘행위의 책들’이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2절에 보면 두 가지 종류의 책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여기 분명히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할 것 없이 전부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각자의 삶에 대한 평가가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음을 뜻합니다. 많은 경우 범인이 잡혔어도 자신의 죄를 부인하고 부정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증거가 없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부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증거가 되는 단서가 나오면 꼼짝없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남긴 흔적의 증거나 특히 녹취록이 나타나면 꼼짝없이 판결받게 됩니다. 이것을 이름하여 스모킹 건이라고 합니다. 스모킹 건이란 어떤 범죄나 사건을 해결할 때 나오는 결정적 증거를 이르는 말로, 영국의 유명 추리소설 작가 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스> 시리즈 중 하나인 <글로리아 스콧 호>에서 나오는 대사에서 유래했습니다. 소설에는 선상에서 일어난 살해 사건을 묘사하는 대목에서 ‘목사는 연기가 나는 총을 손에 들고 서 있었다(the chaplain stood with a smoking pistol in his hand).’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이는 곧 목사(chaplain/ 병원, 교도소 또는 군대와 같은 비종교 기관에서 영적 지원과 지도를 제공하는 종교 지도자)를 살해범으로 지목하는 내용으로 원문에서 보듯이 원래는 스모킹 피스톨이지만 이후 스모킹 건이라는 표현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강력한 단서가 되는 것이 바로 자기 행위를 따라 기록된 책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았던 모든 사람이 백 보좌 심판대 앞에서 자기의 모든 삶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기에 그 앞에서 그 어떤 변명도 하나님 앞에서 통하질 못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은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생명책에 기록되어 영생에 들어가지만, 행위의 책들을 통해 잘잘못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어떤 것들이 삶에서 죄로 드러나게 되는지 그날에 밝혀지게 될 것입니다. 부끄럽게도 죄악들이 드러날 것입니다. 물론 그동안 드러나지 않게 행했던 선한 행실들도 밝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믿는 자들의 선한 행실에는 상급이 뒤따를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한 번뿐인 이 짧은 인생에서 과연 무엇을 기념으로 남겨야 할까요? 여행에 가서 기념품도 사 오고, 기념사진도 찍지만, 하나님의 기념 책에 우리의 기록을 남겨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우리의 삶에 하나님을 위한 기념적인 일들로 가득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념 책을 여셔서, 참으로 자신을 두려워하고, 또한 사랑하였던 성도들의 이야기를 펼치실 때, 그 안에 우리들의 이야기도 기록되기를 소망합니다. 영혼 구원을 위해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도 기록될 일입니다. 말라기 3장 16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 책에 기록하셨느니라 너무도 귀한 말씀이요 우리에게 힘이 되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전부 기록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우리가 더욱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야 할 것입니다. 누가 보든 안 보든, 하나님께서 다 보고 계시니 후회함 없는 삶이 되도록 하나님께 칭찬받는 자들이 다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호사밧의 치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43절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함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직이라는 단어는 야샤르(rv;y:)로 곧은, 정직한, 공정한, 올바른, 의로운 입니다. 개인적으로 정직했을 뿐만 아니라 왕으로서도 정직하고 공정하고 의롭게 통치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문제는 공정, 정직이 무너진 것입니다. 의롭지 못하고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지도자가 정직하지 못하면 나라가 거짓되고 정의롭지 못하게 됩니다. 국가 신뢰도가 추락하게 됩니다. 경제에도 문제가 생깁니다. 그런데 여호사밧이 정직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의식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할 때,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을 의식할 때 정직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호사밧의 한계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산당을 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이 아직도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고 합니다. 사실 산당을 폐한 왕은 몇 명 되지 않습니다. 그만큼 산당을 없애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백성들의 그만큼 산당에 밀착되어 있었기에 큰 반발이 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처음에는 야웨 하나님을 예배할 목적으로 가나안 사람들의 산당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이를 가나안 농경 사회의 풍요 신을 숭배하는 의식과 관행으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마침내는 야웨를 바알로 대체하는 혼합주의 방식으로 활용되었습니다. 열왕기에서는 산당을 지칭할 때 언제나 그 앞에 "자기를 위하여"란 구절을 사용합니다(참고, 왕하 17:16, 32), 표면적으로는 산당에서 야웨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지만 긍극적으로는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제사란 의미입니다. 그런데 히스기야와 요시야 왕은 산당을 제거했습니다. 그러므로 열왕기에서 보여주는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르게 살려고 노력한 왕은 다윗과 히스기야와 요시야 단 세 사람뿐입니다. 아사, 여호사밧(다윗의 길은 아니고, 아사의 길을 따라), 요아스, 아마샤, 아사랴, 요담, 일반적으로 ‘그의 아비 다윗의 길로 행했으나’ 그들은 ‘산당을 제거하지 않았다’라는 꼬리표가 붙었습니다. 그러니 이들은 올바르게 살려고 했으나 다윗의 길을 따르지 아니한 왕이 되는 것입니다. 44절 여호사밧이 이스라엘의 왕과 더불어 화평하니라 여호사밧이 아합과 동맹함으로 평화를 정착시킨 공은 적지 않지만, 나라를 쪼개어버린 것이 하나님의 뜻과 관련이 있음을 알아야 했고, 방법 면에서도 진지해야 했습니다. 아합의 딸 아달랴와 자신의 아들 여호람과 결혼을 시키면서 이루어 낸 평화이지만 후일에 엄청난 희생을 치르게 되었습니다(왕하 11:18, 대하 19:2). 그런데 47절을 보면 그 때에 에돔에는 왕이 없고 섭정 왕이 있었더라고 합니다. 에돔에 섭정왕이 있었다는 말은 에돔이 여호사밧의 속국으로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그 너머에 있는 에시온 게벨에서 솔로몬 시대에 왕성했던 다시스 선단을 다시 조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도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남은 사적과 베푼 권세, 전쟁에 관한 기록을 생략(45)하는 저자가 실패로 끝난 이 이야기를 장황하게 기록하는 이유가 뭘까요? (대하 20:35-37 참고) 49절을 보면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내 종으로 당신의 종과 함께 배에 가게 하라 하나 여호사밧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더라고 합니다. 이렇게 아하시야의 제안을 거절하는 것이 여호사밧의 회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비록 실수가 있었지만 회개하고 돌이킬 줄 아는 왕이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그를 선한 왕으로 평가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는 어떠한가요? 52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의 아버지의 길과 그의 어머니의 길과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여러분 고속도로가 하나만 제대로 뚫려도 얼마나 시원한지 모릅니다. 하물며 세 개나 뚫린다면 어떠할까요? 그런데 북 왕국 이스라엘에 고약한 전염병을 퍼뜨리는 고속도로가 세 개나 놓인 셈입니다. 이름은? 아버지(아합)의 길, 어머니(이세벨)의 길, 그리고 여로보암의 길입니다. 겨우 2년밖에 왕노릇하지 않은 아하시야에게 이렇게 혹독한 비판이 쏟아지다니! 부모를 잘못 만난 탓인가? 아하시야를 책망하는 말이며 동시에 아버지 아합의 죄를 책망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53절입니다. 바알을 섬겨 그에게 예배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기를 그의 아버지의 온갖 행위 같이 하였더라 과연 우리는 훗날 어떠한 평가를 받게 될까요? 지도자들은? 선거는 평가(심판)이기도 합니다. 현재의 지도자들은 어떠한 길을 걷고 있나요? 정직하고 공의롭고 공정한가요? 대통령을 비롯한 현 정부, 집권당이 그렇고 잘했다고 생각하면 지지하고 그렇지 않다면 반대하고 야당을 택하는 것입니다. 투표로 말입니다. 내 지역, 내가 좋아하고 내게 가까운 사람일지라도 공정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인간들은 잘못 평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역, 연고에 매몰되어 보고 싶은 것, 듣고 싶은 것만 보고 들으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정확하고 확실합니다. 공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눈, 마음으로 이 선거에 임해 주권자의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지켜보십니다. 24.4.7 주일 오후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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