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큰 문제가 발생해도 | 박승남 | 2024-08-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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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마가복음6:42-52절 개역개정42. 다 배불리 먹고 43.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44. 떡을 먹은 남자는 오천 명이었더라 45.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46.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 47.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께서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48.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49.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 지르니 50. 그들이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고 51.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52.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막 6:45~52 아무리 큰 문제가 발생해도 지난주 우리는 오병이어 기적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몰려든 무리를 목자 없는 양같이 여기신 예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저물 때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비록 가난한 이들이 먹는 초라한 음식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름답고 풍성한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생각하시면서 먹이셨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기적을 경험한 무리는 어떠한 생각을 하였을까요? 이루 말할 수 없이 환호했을 것이고 가슴에 희망과 기쁨이 넘쳤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14~15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15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저들은 예수님을 자기들의 왕으로 추대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임금이 되시면 일단 먹고 사는 문제, 경제 문제가 해결될 것이고 게다가 병자들을 치료까지 하니 이 얼마나 훌륭한 지도자입니까? 그래서 누가 뭐라할 것도 없이 군중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흥분한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제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왕이 되신다면 자기들은 왕의 직속 신하들이 되어 권세를 누리게 되는 것이니까 너무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리에게 일어난 마음의 불을 더욱 활활 타오르게 하려고 부추기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에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본문 45절입니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여기 재촉하사라는 말은 억지로 ~ 하게 하다, 강제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강제로, 억지로 무리와 분리해 배를 타고 가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무리의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무리를 자기들 사는 곳으로 보내셨습니다. 때로는 우리들 마음에도 세상의 헛된 것들에 마음이 부풀어 허황된 꿈을 꾸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헛된 꿈, 욕망을 버리고 십자가의 길, 진리의 길, 생명과 평화와 정의의 길을 걷기를 원하십니다. 이어서 주님은 46절과 같이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습니다. 왜요? 기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복음서에는 주님은 큰일을 하시기 전에 반드시 기도하셨고, 또 큰일을 끝내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습니다. 이번에도 오천 명을 먹이신 후에 제자들을 재촉하여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주님은 무리를 흩어지게 하시고, 홀로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습니다. 고요한 중에 깊이 하나님 아버지와 교통하셨고 또한 철없는 제자들을 가슴에 품고 위해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알 리 없던 제자들은 예수님 없는 배를 저어 바다 깊은 곳까지 갔습니다. 제자들은 주님 부재(不在)를 경험하면서 어쩐지 허전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강한 바람이 불어 닥친 것입니다. 이런 바람과 싸움하느라 배는 한 치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밤 사경까지(새벽 3시∼6시 사이) 싸웠습니다. 바람과 싸움이 얼마나 처절했는가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사경을 헤맨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제자들이 풍랑과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을까요? 본문 48절을 보면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櫓) 젓는 것을 보셨다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보셨다는 것일까요? 육신의 눈으로 보셨다는 것일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기 보셨다는 헬라어 단어 ‘에이돈’은 시각적인 측면에서 본다는 뜻도 있지만, 감각적인 인식에서 보다, 내면적인 주목으로 알아차린다는 뜻도 있습니다. 여러분 당시 예수님께서는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보셨다”라는 뜻은 주님의 기도에는 제자들이 있었다는 말이고, 그 기도 중에 그들이 고난에 빠진 것도 아셨고, 그 고난을 기억하고 계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고생하는 제자들에게 바로 가시지 않고 밤 사경이 돼서야 가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밤을 4경으로 구분하였는데, 1경은 약 3시간으로 저녁 6시부터~9시까지가 1경, 9~12시까지가 2경 12~3시까지가 3경 그리고 밤 4경은 새벽 3시부터 6시 사이를 말하는데 이때가 ‘하루 중에 가장 어두운 시간대’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서 힘들고 지치고 어려울 때 어두운 시간을 보낼 때 혼자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 민족도 풍랑을 겪고 있습니다. 특히 8.15 79주년을 맞이하여 작금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아연실색게 합니다. ‘친일·극우’ 인사인 김형석씨가 독립기념관장에 임명되어 논란이 일파만파로 퍼지고 있고 광복회 등 여러 단체의 광복절 행사 ‘불참’이 쇄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이 다시 사도광산을 세계유산에 등재하려 하는데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지난 7.29일 일본 니가타현 향토 박물관에 마련된 조선인 노동자 전시를 소개하면서 “한·일 정부는 한반도 출신 노동자에 관한 상설전시를 ‘강제노동’ 문구를 사용하지 않고 진행하는 것으로 사전에 의견을 모았다”고 보도했습니다. 일본은 그렇다 해도 우리 정부가 왜 이것을 용인하는 것인지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시 2,000여 명의 노동자가 끌려가 강제노동에 시달렸는데 이 정부의 역사 인식이 왜 그러한지 각계가 분노하고 있습니다. 보수는 본래 민족을 중시하는데 우리나라 보수는 왜 이런 것일까요? 무엇이 잘못되어 이리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것일까요? 여러분, 이 모든 것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주님께서 보고 계십니다. 개인이니 공동체의 위기, 풍랑, 고난의 역사를 보시고 아십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이 물 없는 구덩이 빠졌을 때,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릴 때,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할 때 그리고 파렴치범으로 몰려 감옥에 갇혔을 때도 다 보고 계셨습니다. 시편을 보면 다윗을 비롯한 시인들이 많은 어려움과 고난과 시련과 고통을 겪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의 모든 어두움을 다 보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님께서는 대부분 즉시 개입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도 그리하셨는데 그러면 왜 어려운 지경에 있는 제자들을 좀 더 빨리 구해 주지 않았을까요? 우리가 알다시피 풍랑을 만난 제자들의 직업은 대부분 어부이었고 이런 파도나 풍랑에 잔뼈가 굵은 사람들입니다. 처음 파도가 치고 풍랑이 일 때는 이들은 매우 놀라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자신들의 삶 속에 늘 있었던 일들입니다. 바로 이즈음에 예수님이 나타나 "풍랑아, 잠잠하라" 해서 잠잠해졌다면 제자들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그냥 내버려 두어도 이 정도는 우리가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어부 생활을 했던 베테랑 어부(베드로, 요한, 야고보 등) 고수들의 말에 따라 돛을 올렸다가 내렸다가…. 키를 돌리고 바람을 맞서 충분히 견딜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고, 세 시간이 지나도 상황이 좋아지지 않고 더 나빠집니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비결을 다 동원해서 이 상황에 대처해 보지만 더는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결국 '이제 죽었구나, 우리는 여기서 끝났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때가 밤 사경이었습니다. 물리적인 밤 사경은 밤 삼경 다음이지만, 영적인 밤사경은 내가 할 수 없다고 두손 두발 다 드는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언덕 위에서 풍랑을 겪고 있는 제자들을 바라보고 계시면서 영적 밤 사경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인간의 한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납작 업드려 '주님! 내 힘으로는 안됩니다. 도와 주옵소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이때가 영적 밤 사경인 것입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우리에게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있습니까? 물리적인 밤 사경은 정한 때를 기다려야 하지만 영적인 밤 사경은 오늘 밤이라도 당장 올 수 있습니다.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빨리 깨닫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영적인 밤 사경을 맞이하길 바랍니다. 주님은 밤 사경에 역사하십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시는 주님께서 개입하실 시간이 있습니다. 그것은 간절히 우리가 기도할 때나 주님께서 보시기에 가장 적절한 시간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제자들만 배를 태워 호수를 건너도록 하신 것은 주님의 어떤 의도가 있었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또 갈릴리 바닷가에 사셨던 주님께서 그때쯤이면 북쪽의 찬 바람이 불어온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을 텐데 그들을 재촉하여 보낸 이유는 무엇일까요? 재촉하여 보낸 것은 풍랑 속으로 내모신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왜 그리해야 했을까요? 본문은 제자들을 호수로 내보내고 주님은 기도하시면서 그들에 관한 관심을 가지셨고, 고난당하고 있는 현실을 보고 계셨다고 하는 것도 이상한 일입니다. 그런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신 주님께서 새벽이 되도록 그들을 고통 가운데 두고 보고 계셨다는 것도 이상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야 물 위로 걸어가셔서 그들을 건져주셨습니다. 마가는 바다를 꾸짖었다는 말이 없고, 제자들의 배에 주님이 오르시자마자 바람이 그쳤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왜 그 저녁에 그들만 호수로 내몰으셨을까요? 바람이 일어날 것을 아시면서 말입니다. 왜 여기서는 바람을 꾸짖지 않고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그쳤다고 했는가요? 주님께서 일부러 호수로 그들만 내보내신 것은 의도적인 일이었습니다. 제자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려고 하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주님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또 제자들은 그 사건을 통하여 무엇을 배웠을까요? 마가는 본문을 52절과 같이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마음이 무디어 있었다”라고 끝을 맺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요?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마음이 무디어 있었기 때문에 풍랑 속에서 두려워했었다는 말인가요? 아니면 빵의 기적을 체험한 자들이라면 그런 주님의 능력을 믿고 그런 어려움 중에도 두려워하지 말고 있었어야 하지 않았냐고 묻고 있는 것인가요? 여하튼 이 사건을 통하여 제자들이 배운 것은 주님이 없는 세상엔 풍랑이 늘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함께하실 때 풍랑도 잔잔해진다는 진리를 체험적으로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오늘의 사건으로 그들이 배운 것은 그 이상일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육지는 물론 바다까지도 주님의 주권이 미친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가는 어느 곳이든 주님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고, 주님은 자기들과 어느 곳이든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아마도 성령 강림 이후에 이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후부터는 아무리 큰 문제가 발생해도 주님께 그 문제를 맡겼습니다. 모세가 그리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풍랑과 같은 고난을 만나면 주님을 잊어버리고 그 문제에만 집착합니다. 주님이 해결해 주시리라고 믿으면서도 나 자신의 지혜와 힘으로 해결해 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내가 내 힘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다가 더 큰 일을 만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믿음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 안에 들어가 사는 것이고, 그의 은혜와 영광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롬 5:2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금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에 [믿음으로] 나아오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될 소망을 품고 자랑을 합니다.). 그렇다면 육지도 바다도 주님 안에 있듯이 우리 안에 일어나는 모든 문제도 사실은 주님의 영역에 속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말입니다. 한국과 미국에서 자동차가 서로 추돌했을 때 서로 처리하는 방법이 다르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자동차끼리 추돌하면 두 운전자가 싸움하는 게 일반적인 풍속도입니다. 그러나 미국은 자동차가 추돌했을 때 운전자끼리 싸우지 않고 경찰을 기다린다고 합니다. 경찰이 모든 문제를 판가름해주고, 나머지 피해는 보험회사에서 처리해 주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미국은 경찰을 그만큼 믿는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영역 안에 사는 자들이 어떤 문제에 직면했을 때, 그 문제와 싸운다든지, 아니면 관계된 사람과 다투거나 분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 영역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문제에 개입하셔서 도와주실 것을 믿고 서로 기다려야 합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이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요, 교회 안에 일어난 문제를 해결하는 길입니다. 보십시오. 48절을 보면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라고 합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물 위로 걸어오셨으면 배로 올라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진정시켜야 했을 텐데 그냥 지나가려 하셨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4장 28절을 보면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같이 하시니 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그네로 나타나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와 함께하셔서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심으로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때 두 사람의 가슴은 뜨거워졌습니다. 하지만 아직 그분에 부활하신 예수님이신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제 세 사람은 엠마오 마을 입구까지 왔습니다. 그러자 나그네는 더 가려는 것같이 했습니다. 영어로는 “He bagan to take leave of them.”입니다. “그는 그들과 작별하기 시작하셨다”라는 뜻으로 그들이 붙잡지만 않았으면 그냥 지나가려고 하셨다는 말입니다. 아슬아슬한 순간이었습니다. 주님은 붙들지 않는 집엔, 초대하지 않는 집에는 억지로 들어가지 않으십니다. 누가복음에 19장 1절에서도 ‘지나가시더라”라고 기록하여 주님께서 여리고 성에 사는 자들에게 기회를 주신 것을 암시했던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제자도 주님이 주신 기회를 만났습니다. 이들이 주님을 보낼 것인가? 아니면 붙잡아 같이 지낼 것인가? 영원에서 순간을 보면 아슬아슬한 순간이었습니다. 그 순간 두 제자는 나그네를 붙들었습니다. “그들이 강권하였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강권이란 단어는 특별한 초청으로 “우리 집에서 묵어가십시오” 하고 압력을 가했다는 말입니다. 그때에야 나그네는 그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기도는 주님을 우리에게 머무시도록 붙들어 두는 사슬과 같은 것입니다. 기도는 좋은 의미의 끈질긴 강권이 필요합니다. 집에 들어간 나그네는 식탁의 주인공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음식 잡수실 때 빵을 들고 축사하시고, 제자들에게 떼어 주시는 순간 그들의 눈이 열려서 나그네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이후 그들은 슬픔, 낙심, 절망이 사라지고 기쁨이 충만하여 오던 길을 되돌아가 예루살렘으로 가서 제자들 그리고 함께 한 이들에게 그들이 만난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 지르니 50 그들이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고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게 되었습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초청하거나 붙들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6장 21절을 보면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했다고 합니다. 영접하다(람바노)는 취하다(take), ~을 잡다는 뜻입니다. 이어서 마가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우리가 그 문제, 고난의 핵심으로 주님을 초청할 때, 또는 주님께서 문제의 핵심으로 들어오실 때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에 문제가 일어나거나 교회에 문제가 일어났을 때, 진정으로 주님의 뜻을 묻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지혜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다 다툼이 일어나고, 심지어는 교회가 분열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문제 앞에서는 언제나 주님은 제외됩니다. 우리는 주여! 주여! 하면서도 기독교를 인간 종교로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요? 진정 언제든지 주님께서 우리들의 중심, 교회의 중심이 되셔야 합니다. 이 민족도 거짓과 불의가 판을 치고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나라가 아니라 사랑과 정의와 평화의 왕이 되신 주님의 뜻이 이뤄지는 나라가 되기를 바랍니다. 제자들 이 사건을 통하여 몇 가지를 배웠습니다. 물로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1) 문제 안에 주님이 언제나 계신다는 것, 2) 그 문제를 주님이 가슴에 품고 계신다면, 문제의 해결점은 주님의 안에 있다는 것, 3) 그 뜻을 알아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주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그 문제를 풀어가도록 해야 한다는 겁니다. 때로는 단련도 받고, 훈련도 받고, 회개도 하고, 버릴 것을 버리고, 마음을 씻어야 할 것은 씻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때가 되면, 마지막으로 4) 주님은 그 아픔을 치료하기 위하여 우리 곁으로 찾아오신다는 사실과 그러나 그때도 주님은 우리 곁으로만 오시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그 문제 안으로 주님을 초대해야 합니다. 그럴 때만이 주님은 그 문제에 개입하십니다. “그는 풍랑을 밟고 오셨다. 인생의 모든 소란함은 다 그의 발밑에 들 것이니, 기독교인이여, 왜 두려워하느냐?” -어거스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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