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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독한 고통의 영적 이방인 | 박승남 | 2025-09-2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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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고통의 영적 이방인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의 삶은 ‘자색 옷과 고운 베옷’으로 포장되고 ‘날마다의 호화로운 잔치’로 채워진 거짓된 삶이었습니다. 그런 그도 죽었습니다. 아마도 그의 장례식은 매우 성대했고 수많은 조문객이 와서 그의 업적을 칭송하며 거짓된 눈물을 흘렸을 겁니다. 반면, 거지 나사로도 죽었습니다. 그의 시신은 아마 아무도 모르게 쓰레기처럼 처리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의 죽음은 세상의 눈에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의 죽음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죽음이라는 정직한 거울 앞에서, 모든 거짓된 포장은 벗겨졌습니다. 세상의 가장 화려한 장례식과, 하늘의 가장 영광스러운 환영식이 극명하게 엇갈립니다. 죽음은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하나님의 정직한 저울이었습니다. 부자는 ‘음부(하데스)’에서, ‘불꽃 가운데서’ 고통받고 있는데 눈을 들어 본 광경이 멀리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위로받고 있는 나사로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절규하며 외칩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이 짧은 외침을 보면 그는 여전히 아브라함을 ‘아버지’라 부르며 자신의 혈통적 특권에 의지하고 있고 또한 여전히 나사로를 자신의 필요를 채워줄 심부름꾼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나사로를 보내어” - 살아생전 나사로를 인격체로 대하지 않았던 오만함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의 대답이 들려옵니다. “얘야,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그리고 결정적인 한 마디를 덧붙입니다. “그것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이 ‘큰 구렁텅이’(Chasma Mega)는 부자가 이 땅에서 날마다 조금씩 파내려갔던 바로 그 ‘무관심의 구렁텅이’가 완성된 모습입니다. 그가 나사로와의 사이에 그었던 ‘구별 짓기’의 선, 그가 나사로의 고통을 외면하며 만들었던 ‘공감의 단절’, 그 차가운 무관심이 이제는 영원히 건널 수 없는 절대적인 분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는 긍휼과 연민이라는,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감정 세계로부터 스스로를 소외시킨 ‘영적인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는 영원히 하나님과 이웃으로부터 분리된, 고독한 고통의 이방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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