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기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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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박승남 2009-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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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요한복음3:16절 개역개정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3:16, 4:6, 21:25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우리 기독교인들은 무엇을 믿는가요? 그리고 믿음이란 무엇인가요? 우리는 오직 믿음이라고 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이 돈으로 구원을 사고 파는 부패한 로마 가톨릭을 향해 오직 믿음을 외쳤습니다. 그때 이 울림이 얼마나 큰 기쁨이었으면 전 유럽에 불길처럼 퍼져나갔을까요? 죄인인 인간이 어찌 스스로 자기 구원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엄청난 복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다니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소식입니까? 이보다 기쁜 소식은 이 땅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직 믿음을 강조하는 곳에선 언제든지 믿음과 행위간에 갈등이 일어납니다. 도대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 날 오직 믿음이 교회 안에서 무조건 믿음으로 둔갑해 있습니다. 그러나 무조건 믿는 믿음이란 과연 가능할까요?

종교개혁자들이 외쳤던 오직 믿음이란 로마 가톨릭이 죄의 용서를 빌미로 휴지 조각 같은 면죄부를 팔아 돈을 챙기고 선한 행위로 구원받는다면서 사람들을 속이는 것에 항거한 구호였습니다. 그러나 개혁자들도 오직 믿음은 성경의 원리적인 선포이지 성경에서 말하는 모든 내용을 아우른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종교개혁과정에서 믿음이란 무엇이며, 믿음이란 어떻게 사는 것인가에 대한 글들을 계속해서 저술했던 것입니다.

오직 믿음이란 말은 아주 간단하지만 굉장히 포괄적인 개념입니다. 그 속에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전제되어 있고 이 사건을 통해서만 구원받는다는 은혜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어떤 진리에 대해 단순하게 정답을 주지 않습니다. 성경은 어떤 진리도 간단히 개념화하거나 교리화 하거나 조직화해서 말해지 않습니다. 믿음이란 용어가 신약성경 전체에 걸쳐 폭넓게 사용되지만 사실 그 의미는 문맥에 따라 조금씩 다릅니다. 그만큼 믿음의 범위가 넓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것을 똑같은 개념으로 받아들이곤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온 어떤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 각권에서 그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었는가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3:16절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먼저 접하고 또 사랑하는 구절입니다. 종교개혁자 루터가 작은 복음서라고 말했을 만큼 이 짧은 구절 안에 기독교 핵심진리가 모두 담겨 있습니다. ,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예수님은 어떤 분인지, 믿음이 무엇이며 구원과 영생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이 만들어졌고 인간이 이 세상에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은 인간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작품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아야 우리가 누구인가를 알게 됩니다. 동시에 그분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함께 살 수 있는가를 알게 됩니다.

 

8편을 보면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을 보고는 하나님에게 압도된 다윗의 고백이 나옵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2015714, 미국 항공우주국은 뉴호라이즌스라 즉 새로운 지평선이라는 인공위성이 명왕성을 통과했다고 발표했습니다. 2006119일 미국 플로리다 주 케이프커내버럴에서 뉴호라이즌스가 발사 될 때의 탈출 속도가 초속 16.26 km로 지금까지 인간이 만들어낸 물체 중 가장 빠르게 지구를 탈출한 것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지구에서 명왕성까지는 시속 49,600km96개월 꼬박 567천만km를 날아간 것입니다. 지금은 2014 MU69라 이름하는 전체로 항해중입니다.

여러분 20157월에는 미 항공우주국(NASA)은 전 세계에 인터넷으로 생중계된 브리핑을 통해 항성 케플러-452’와 그 주변을 공전하는 행성 케플러-452b’를 발견했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케플러-452의 온도는 태양과 비슷하며 그 주변에 있는 케플러-452b’ 행성은 지금까지 발견된 행성 중 가장 지구와 유사한 환경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행성은 지구의 1.6배 크기로 단번에 '슈퍼지구의 유력후보로 떠올랐습니다. 그러면 이 행성은 지구에서 얼마나 떨어졌을까요? 놀라지 마십시오. 새로운 망원경으로 관측한 결과 무려 1400광년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면 광년 즉 빛의 해는 얼마나 먼 거리인가요? 빛은 1초에 지구를 7바퀴 반만큼 돌고, 태양까지 도달하는 데는 824초 걸립니다. 그런데 광년(光年, light-year)이란 빛이 1년 동안 나아가는 거리를 말합니다. 이러한 1광년은 대략 95천억km입니다. 그러면 95천억 × 1400을 곱하면 도대체 얼마나 먼 거리인가요? 13300km입니다. 여러분 상상이 가십니까? 그렇다면 우주는 얼마나 큰 것인가요? 더 나아가 우주보다 크신 하나님은 얼마나 더 크신 분일까요?

지지난 주간에 우리는 새벽기도 시간에 에베소서 말씀을 보았습니다. 그 중 에베소서 4:6절을 보면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만유의 아버지 이십니다. 여기 만유란 모든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모든 것의 아버지시라는 것입니다. 여기 만유를 온 세계, 우주라고 바꿔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면 만유 위에 계시다는 말씀은 온 세계, 우주 위에 계시다는 말씀으로 우주를 감싸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주를 팔로 안듯이 품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만유를 통일하십니다.

여기 통일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디아라는 단어인데 그 뜻은 ‘~을 통하여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주를 관통해 계신다는 뜻으로 마치 우리 몸을 스캔하듯이 우주를 스캔하시는 하나님을 떠올리게 합니다. 우주 만물을 스캔하시는 하나님은 우주 안에 충만하게 계십니다. 이러한 분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온 우주보다 크신 초월적인 존재이시고 우주 안에 충만히 거하시고 모든 것을 살피시고 아시는 하나님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우리 교회에게도 해당됩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주님은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라고 말씀합니다. 즉 여기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를 말하는데 그러니까 주님은 이 교회 저 교회를 둘러보시고 그래서 모든 것을 아신다는 뜻입니다. 그런 분이 주시는 편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우리 교회의 모든 것을 다 관통, 스캔하십니다.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약점이고 무엇이 계속 지켜야 할 잘하고 있는지도 아십니다. 그래서 이러한 하나님은 일곱 교회에 편지 하시면서 때론 칭찬하시고 때로는 책망하시고 고치고 돌이키고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 교회의 약점, 그리고 잘못된 점은 무엇일까요? 목회자가 잘못하고 있는 것은, 당회가 잘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성도들이 잘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아가 깨우침 받고 교정하고 돌이켜 더욱 주심 보시기에 합당한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감싸고 계시고, 우리 몸을 스캔하듯 살피시고, 우리 안에도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속, 생각까지 다 아십니다. 여러분 어떻게 그리 크시고 위대하신 분이 우리처럼 작은 몸에 계실 수 있으실까요? 열왕기상 827절 이하를 보면 성전을 건축 한 솔로몬도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하나님께서 땅 위에 계시기를, 우리가 어찌 바라겠습니까? 저 하늘, 저 하늘 위의 하늘이라도 주님을 모시기에 부족할 터인데, 제가 지은 이 성전이야 더 말하여 무엇 하겠습니까? 그러나 주 나의 하나님, 주의 종이 드리는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오늘 주의 종이 주 앞에서 부르짖으면서 드리는 이 기도를 들어주십시오.

여러분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루 말할 수 없이 크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은 너무도 크시기 때문입니다.

139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의 영을 피해서 어디로 가며, 주의 얼굴을 피해서 어디로 도망 치겠습니까? 8 내가 하늘로 올라가더라도 주께서는 거기에 계시고, 스올에다 자리를 펴더라도 주님은 거기에도 계십니다. 9 내가 저 동녘 너머로 날아가거나, 바다 끝 서쪽으로 가서 거기에 머무를지라도, 10 거기에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여 주시고, 주의 오른손이 나를 힘있게 붙들어 주십니다.

 

요한복음 3: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라고 말씀합니다. 원문의 순서는 사랑하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지극한 사랑을 강조한 것입니다.

여기에 사랑하신다는 말은 헬라어로 에가페센으로 이는 아가페의 부정과거형입니다. 헬라어에서 부정과거형은 시작 시점이 분명하지 않지만 그 상태가 지금까지 계속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라는 말은 하나님이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지금까지 변함없이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영원까지 사랑하시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언제부터 우리 인간을 사랑하신 것일까요?

에베소서 14~6절을 표준새번역으로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창세 전에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예정하셔서,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찬미하게 하셨습니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신은 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데 아니 한 것이라고는 주님을 거역하고 교회를 박해한 것 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크신 은혜와 사랑을 받은 사도바울은 깊이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주님은 나를 언제부터 사랑하신 것일까? 그러다가 그는 고백합니다. 창세전에 나를 선택하시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예정하셨구나~ 너무도 감격스러웠을 것입니다. 이것은 교리적으로 읽기 보다는 바울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신앙고백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구원하신 목적은 주님과 사귐을 갖게 하시고(요일1:1~4) 1)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고(4) 2)그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시고(6,14) 3)그의 영광이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시기 위해서(12)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체험한 사도바울은 목숨을 내 놓고 충성하였습니다.

여러분 사랑은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대상을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은 세상입니다. 그래서 구분이 세상을 사랑하신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모든 피조물도 포함되겠지만 특별히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것일까요? 또한 하나님은 왜 모든 사람을 무조건 다 사랑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라는 말의 의미는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면에서 보면 이란 구약과 신약의 역사를 포함하는 긴 세월의 인간 역사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 역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을 배반하는 역사입니다. 지금도 인간들은 하나님을 배반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인간들을 사랑하셔서 팔로 안으려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는 진정 아파하시고 고통당하시는 역사입니다.

 

호세아 3:1절을 보면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에게 말씀합니다. "너는 다시 가서, 다른 남자의 사랑을 받고 음녀가 된 그 여인을 사랑하여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들에게로 돌아가서 건포도를 넣은 빵을 좋아하더라도, 나 주가 그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너도 그 여인을 사랑하여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그 여인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실상은 호세아 4:1절 이하에서 잘 말씀해 줍니다.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사랑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다. 있는 것이라고는 저주와 사기와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다. 살육과 학살이 그칠 사이가 없다.

제사장이나 예언자라고 하는 이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세상을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셨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지도 않고, 용서하지도 않으시며 나의 백성이 아니며, 나도 너희의 하나님이 아라고까지 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마침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아져서, 얼마나 되는지, 아무도 되어 보거나 세어 볼 수 없을 때가 올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사람들이 너희를 로암미라고 부른 땅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를 것이다. 그리고 불쌍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여러분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사랑하셔서 예언자들을 보내셨습니다. 글로 남겨 놓은 예언자들만 해도 16명이나 되고 그 이름과 활동이 언급된 예언자의 수도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사자들을 보내셨건만 인간들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북 이스라엘도, 남 유다도 망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그의 마지막 카드를 내놓으셨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독생자 카드는 그분의 사랑과 아픔이 함께 버무려진 비장의 무기였습니다. 히브리서 11~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예수님은 마지막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역시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아픔을 토로하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23:37)

예수님의 눈물은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와 인간이 행한 배반의 역사, 그 양면을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영원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탄식하신 것같이 자녀를 가슴에 품으려 하지만, 배반하고 달아나는 자녀까지 억지로 품을 수는 없습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이 누구나 다 사랑할 수 없다는 이 사실에 하나님의 아픔이 있습니다.

 

인간의 불행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온전한 자유의 세계를 추구하며 에덴을 떠나는 것에서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죄와 함께 살 수 없는 분이시기에 그들을 쫓아 내셨고 그들은 원하던 곳으로 떠나갔습니다. 인간의 불행은 그 때부터 시작되었고, 동시에 하나님의 아픔도 시작되었습니다.

죄란 무엇인가요? 이 땅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죄가 많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죄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그분으로부터 떠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시작이고, 모든 죄의 근원입니다. 그 때부터 인간은 삶의 목적과 의미 그리고 삶의 방향을 잃어버린 채 자기들이 좋아하는 대로, 자기 멋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죄는 점점 쌓이게 됩니다. 사사기는 인간의 가장 타락한 상태를 이렇게 짧은 문장으로 표현합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21:25)

인간이 자기 멋대로 사는 것이 죄의 극치입니다. 자제력을 상실하고, 누구도 통제할 수 없게 되는 것이 죄의 극한입니다. 죄의 끝이 어디인가를 보여 주는 것이 사사기 17장부터 21장까지의 내용입니다. 그것은 두 가지 모습으로 전개됩니다. 하나는 부패한 종교현상이고, 다른 하나는 극단으로 치닫는 인간 타락상입니다.

사사기 17장을 보면 미가라는 젊은이가 가산 은 천 백냥을 훔쳐서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추궁에 못 이겨 순수히 돈을 돌려주자, 어머니는 그 돈으로 자기 집에 신당을 세우고 은장이를 불러 신상까지 만들어 갖추고는 아들 미가가 여호와께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후 베들레헴에서 온 레위인 청년이 머물 곳을 찾다가 미가의 집에 들렀는데, 미가가 청년을 자기 집 신당의 제사장으로 삼아 버립니다. 그리고 미가가 이렇게 말합니다.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17:13) 여러분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어이없는 노릇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도대체 자기들 멋대로 입니다. 그리고는 오히려 복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17:6) 여기서 이란 사실 하나님을 지칭합니다. 그러니까 그 시절엔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이 누구에게도 통제받지 않으며 멋대로 망나니처럼 살았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세상은 비정상이 정상인 것처럼 여겨지는 사회였으며 욕망만을 좇아 분별을 잃어버린 사회, 그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사회, 법도 질서도 없는 사회, 그리고 사람들이 이 땅에서 왕으로 행세하며 사는 세상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 후서 3:1~5절에서 말세에 나타날 인간의 타락한 상태를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질병이 그 속에 고통과 죽음의 씨를 담고 있듯이, 죄 속에는 사람을 부패하게 하고 불행하게하며 심지어 죽게 하는 씨가 들어 있습니다. 죄는 마약처럼 한순간 기분 좋게 합니다. 그러나 곧 후회하게 되고 거리로부터 떠나지 않으면 죄는 사람을 파괴하기 시작합니다. 나아가 인간관계를 파괴합니다. 가정을 파괴하고, 마침내 우리 삶의 터전인 사회와 국가를 파괴합니다. 사회와 국가가 죄로 썩어 가면 그 안의 사람들은 마치 방죽 안의 개구리처럼 죽는지도 모른 채 서서히 죽어 가게 됩니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시기에 하나님은 아파하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10절을 보면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 말씀합니다. 여기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는 말은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말입니다. 만드신 바라는 말은 원어로 포이-에마 즉 작품이라는 말입니다. 이 단어에서 poetry, poem 즉 시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아무튼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를 예수님이 생명을 바쳐 작품을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작품으로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서 있거나 앉아 있거나 사는 것 자체가 우리를 만드신 위대하신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런 인간을 하나님이 어떻게 저렇게 쓰시지? 바울은 자신을 만드신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 사랑을 삶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자신이 만드신 걸 작품들이 죄로 말미암아 다 죽어 가는데 어찌 마음 아프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요한복음에서 언급된 세상이란 헬라어로 코스모스 인데 그 뜻은 질서, 장식, 우주, 세상(세계)라는 뜻입니다. 당연히 여기에는 죄로 인하여 심판을 받고 죽어 가는 인간들이 포함됩니다. 마치 광야를 건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함으로 하나님이 뱀을 보내 물어 죽게 한 것처럼 이 세상을 사랑가는 사람들은 죄에 물러 죽어 가고 있습니다. 아니 에베소서 말씀을 보면 죄와 허물로 이미 죽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마침내 죄로 죽어가는 인간들, 죄와 허물로 죽은 인간들을 건져 낼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들 때문에 아파하시는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가 그처럼 크신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처럼 크신 하나님을 인간이 어떻게 찾아갈 수 있겠는가요? 유한이 어떻게 무한을 인식할 수 있겠는가요? 시간적 존재가 어떻게 영원한 존재를 인식할 수 있겠는가요? 그 분이 인간들을 찾아오시고 만나 주셔서 말씀해 주시고 보여 주신 것들을 통해서만 인간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은 그 분이 만나 주신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분입니다.

이제 다음 주부터 성경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을 찾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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