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를 부르신 하나님 | 박승남 | 2015-10-1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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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출애굽기3:1-11절 개역개정1.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3.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 때에 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5.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 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8.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9.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출3:1~11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 성경은 추상적인 사실을 기록한 책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구체적인 장소와 시간 안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하여 하나님을 보여 주는 책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하여 거기에 나타나신 하나님을 먼저 읽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사람을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나를 아는 것이고, 나의 삶을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모세를 만나 주신 하나님 이야기입니다. 모세에게는 이집트 왕자로서의 호화로웠던 삶이라든가, 자기 동족이 애굽에서 겪고 있는 고통은 한 갓 옛날의 기억 뒤로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이제는 오직 양을 치고, 자기 식솔들을 먹이는 일에만 점점 집착하게 되던 어느 날, 자기 양떼를 이끌고 호렙이란 산기슭에 이르렀을 때 이상한 현상이 눈에 띄었습니다. 사막의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는 것입니다. 작년 제가 이스라엘에 갔을 때 어느 날 갈릴리 온도가 44도까지 올랐습니다. 그래도 우리나라처럼 땀이 흐른 것은 아니지만 태양 빛은 강열했지요. 그런데 그로 인해서 그런지 그 날에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벳세다에서 그리고 예수님 당시 갈릴리의 수도였던 디베랴에서 산불이 일어났습니다. 아마 뜨거운 태양 빛에 의해서 자연발화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날 숙소가 있었던 디베랴로 돌아가는데 1시간 이상 지체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날 많은 사진을 찍었는데 아쉽게도 페이스 북에 올린 사진을 빼고는 스마트폰을 잘못 만져서 다 잃어버려 아쉬웠습니다. 화재 현장도 찍었는데 말이지요. 아무튼 갈릴리도 그렇다면 사막에선 더욱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태양이 작열할 뿐 습기가 없으므로 관목 같은 곳에 불이 잘 붙기도 하지만 곧 타 없어집니다. 물론 그렇다고 큰 불로 번지진 않습니다. 왜냐하면 광야에서는 나무가 거의 없기 때문에 그 나무 하나 불타는 것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이상하게 나무가 계속 타고 있는 것입니다. 작은 나무가 소진되기까지 불과 몇 분이면 충분할 텐데 이때만운 시간이 지나도 사그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세는 하도 신기해서 다가갔습니다. 그 때 떨기나무 가운데서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부르셨을 때 모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아마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동안 하나님에 대해 지식으로만 알았는데 그 분이 자기 이름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모세 자신을 매우 잘 알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자신을 너무나 잘 아시고 자신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시기를 원하시는 모세를 그 품으로 품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부르실 때 이름을 부르십니다. 아담아, 아브라함아, 삭개오야, 시몬아, 사울아 사울아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르실 때 그 이름을 부르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사람을 찾아오십니다. 이 천지에는 사람 부르시는 하나님의 소리로 가득 찹니다. 모세의 이름을 부르시므로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아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관심이 많으신지, 사랑하는 자들을 이름으로 기억하시는 하나님이신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부르십니다. 한없는 애정을 가지시고 부르십니다.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기 위해, 용서하시고 새 출발을 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 사명을 주시고 헌신하도록 하시기 위해 이름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불러 주실 때 우리는 진정 의미 있는 사람,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자기의 이름을 불러 주시는 분을 만났습니다. 이 때의 놀라움과 감격은 그의 일생을 지배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모세야! 모세야! 라고 부르시는 소리를 듣고 모세는 본능적으로 더 가까이 가보려 했을 것입니다. 그 때 어떠한 소리가 들렸나요? 5절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하나님은 부르셔 놓고는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리하셨을까요? 신학자 폴틸리히는 이것을 [하나님과 인간의 질적 차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너와 질적으로 다르다. 하나님과 인간은 철저하게 다른 존재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거룩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께로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나아긴 하되 인간이 함부로 접근 할 수 없는 분,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거룩성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란 세상의 어떤 더러움과 속된 것으로도 더렵혀지지 않으시는 분이란 뜻이고, 도리어 그 분과 접촉하는 모든 더러움을 정결하게 하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그러럼 인간들과 전적으로 다른 분이시기에 인간은 하나님에 대하여 일정한 간격을 유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이런 한계를 넘어서 신비적 관계를 맺고 산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신비주의자들입니다. 이들은 대부분 이단이거나 잘못된 신앙으로 빠져들기 쉬운 사람들입니다. 제 아무리 깨끗한 사람이라도 하나님과 직접 접촉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한계를 넘어간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기들 마음대로 하나님을 조정할 수 있다고 단언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대다히 큰 착각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이신지 모르는데서 나오는 커다란 과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영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속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는 이들은 이런 거짓에 속아 넘어갑니다. 바른 신앙은 하나님과 인간의 일정한 간격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를 인정치 않는데서, 하나님과 간격이 없어질 때 이단이 됩니다. (박태선 -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사람이 제 아무리 신앙심이 깊어져도 하나님처럼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는 다릅니다. 그리고 이것을 깨달아야 하나님을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이어서 하나님은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셨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전에서 신을 벗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신발은 일반적으로 더러움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예배당에 들어갈 때 신을 벗었습니다. 강단에 올라갈 때도 신을 벗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신을 벗는 문화에 익숙합니다. 그러나 미국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집에서도 신을 신고 있습니다. 잠을 잘 때를 제외하고는 항상 신을 신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 가정에 초대받아 갔을 때 신을 벗는 것은 주인을 불쾌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중동지방에서는 남의 집을 방문하게 되면 먼저 주인이 발을 씻도록 물을 준비해 주었습니다. 종이 있으면 종이 발을 씻어 줍니다. 고대 시대의 신은 대게 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발에 먼지가 많이 묻어 있기 때문에 방에 들어가기 전에 발을 씻어야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더러운 것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세상의 먼지가 묻어 있는 것을 다 털어 버려야 합니다. 모세가 신고 있던 신에는 양들의 똥이 묻어 있을 수도 있고 냄새가 났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신을 벗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 모세는 주저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모세는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막의 모래는 매우 뜨겁습니다. 돌이나 바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사막이나 광야에서는 절대 신을 벗고 걸을 수 없습니다. 신을 벗고 있으면 금방 화상을 입게 됩니다. 그리고 광야에서는 조그마한 상처도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광야 40년 동안 신발이 닳지 않도록 해 주셨습니다.(신29:5)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에게 신을 벗으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분은 모세와 거래를 쉽게 끝내기 위해서 신을 벗으라고 하신 것이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과 실랑이를 하느라 오랜 시간을 보냈습니다. 우리 같으면 발이 뜨거워서라도 “하나님, 알았습니다. 그리하겠습니다. 빨리 신이나 신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성경에 보면 모세의 발이 잘못되었다는 말은 없습니다. 뜨거워 고생했다는 말도 없습니다. 아마 신발이 닳지 않도록 해 주신 하나님께서 모세의 발도 상하지 않게 해 주셨을 것입니다. 모세에게 발에 신을 벗게 하신 하나님은 이어서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신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여러분 혹신 여러분의 고조부, 증조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아시는 분이 있다면 어떠한 분일까요? 그분은 이 땅에 속한 분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저절로 머리를 숙여 절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햇수를 계산하기도 어려운 먼 조상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아신다는 하나님이 지금 나타나신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하나님은 그 이전부터 계신 분이시고 영원하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은 실제로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함께 세월을 초월해 사시기도 하신 분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조상들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나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마가복음 12:26~27절을 보면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언급하신 것은 이들의 후손인 모세를 찾아오셔서 그들과 맺은 언약을 지키려 하신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낮 설교 말씀과 같이 하나님은 계약, 언약 약속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꼭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이 이제 모세를 찾아오셔서 조상들과 하신 약속을 지키려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지만 한편 아무나 사랑하지는 않으십니다. 계약의 하나님은 계악 안에 들어와 그 계약을 지켜 가는 백성들을 사랑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역사는 하나님의 계약 안에 들어올 때부터 새롭게 시작되었습니다. 계약이란, 하나님이 부르시고 아브라함이 응답한 것을 말합니다. 그때 비로소 아브라함은 하나님 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부르시고 인간이 그에게 응답함으로 그분과의 관계로 들어가는 일종의 계약인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12:1~2) 아브라함이 이 계약(약속)을 받아들이고 가슴에 픔고 하란을 떠났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만나 주시고, 인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야곱이 부모를 속이고 도망가다가 벧엘에서 돌을 베고 잠잘 때도 꿈에 사닥다리가 나타나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하고, 하나님이 그를 끝가지 보호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창28장)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이미 그 아버지를 통하여 야곱에게 약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올 때도 하나님은 얍복 강에서 그를 만나 주셨습니다.(창32:22~28) 그와의 계약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벧엘에서 하란으로 도망치던 야곱에서 나타나셔서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28:15) 그는 외삼촌 집에서 일과 사랑에 빠져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았지만 하나님은 약속대로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얍복 강에 이르러 죽음의 위기를 맞이한 야곱이 그제야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때에 찾아오신 것이 아니라, 그와 늘 함께 계셨습니다. 야곱이 그제야 그 사실을 발견할 것뿐입니다. 십자가도 하나님과의 계약을 드러냅니다. 요한복음 3:16절은 십자가를 통한 구원을 계약 관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하나님 편의 조건입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인간 편의 조건입니다.) 그 결과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시고 계약의 조건을 내거셨습니다.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다는 것이 조건입니다. 인간들은 믿기만 하면 됩니다. 영생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떨기나무 불꽃 속에 나타나 모세를 부르셨을까요? 많은 학자들은 떨기나무는 노예로 전락하여 핍박박고 곤핍하고 메마른 생활을 하고 있던 미약하고 초라한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떨기나무처럼 보잘 것 없는 미약한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그리고 가장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저들을 택하셔서 가장 강하고 아름답게 만드시고 저들을 통해서 위대한 일을 이루려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보잘 것 없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을 불러서 가장 강하고 아름다운 사람을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내가 약할 때 곧 강함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강하고 아름다운 나라를 불러서 사용하셨다면, 강하지 않고 아름답지 않은 나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스스로 잘났다고 하는 사람, 강하다고 하는 사람들을 불러서 사용하셨다면 약하고 힘없는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빈부귀천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변화를 위한 부르심입니다. 약함에서 강함으로, 불행에서 행복으로, 비천한 것에서 귀한 것으로 말입니다. 또한 그냥 떨기나무가 아니라 불타는 떨기나무였습니다. 노예로 전락하여 이집트라는 불 속에서 고통당하며 신음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과 늘 함께 하시는 분이심이 분명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형편과 사정을 헤아려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고난당하는 여러분을 외면치 않으시고 눈여겨보시고 마침내 건져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출생 때부터 모세에 지극한 관심을 가지시어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애굽에 있을 때나 광야에 있을 때도 역시 모세를 눈여겨보시고, 그를 기억해 두었다가 이제 그를 찾아오신 것이다. 그리고 지금 한 없이 고통당하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자유를 주려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 7~8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그러면 이제 이 말씀에서 동사만 골라 읽어 보십시오. 보고 듣고 알고 건져내고 인도하여 데려 가리라. 이 말씀을 정리 해 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늘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로부터 직접 듣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직접 들으시면 하나님은 아시고, 고통 가운데 있는 우리를 건져주시기 위해 행동하십니다. 늘 보시지만 우리에게서 직접 듣기를 바라신다는 것은 우리와 소통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여기서 주목해야 할 단어는 ‘안다’라는 동사입니다. ‘안다’는 말은 친밀한 교제를 의미합니다. 더 깊게는 결혼한 두 남녀가 몸으로 직접 체험해서 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신 후에 우리의 요구를 들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정리해 보면 우리 하나님은 사람을 부르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며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지키시는 계약의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인간의 고통 가운데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시고 친밀한 교제를 나누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교제 속에 우리를 아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는, 체험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2017년 6월 18일 주일 오후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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