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낮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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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주님만, 궁극적 관심 박승남 2019-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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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창세기22:1-19절 개역개정

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4.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5.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7.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9.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15.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16.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19. 이에 아브라함이 그의 종들에게로 돌아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주하였더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22:1~19 오직 주님만, 궁극적 관심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여러분 시험하다 라는 단어의 주어가 하나님일 경우는 하나님이 사람을 테스트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언제 테스트 당합니까? 언제 시험을 보는가요? 어디에 들어갈려고 할 때 시험 봅시다. 대학교 가려면, 직장에 들어가려면, 어떠한 자격을 얻으려면 시험을 봅니다. 저도 많은 시험을 보았습니다. 재작년과 작년에는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얻으려고 이런 저런 시험을 치렀습니다. 계명대학까지 가고요. 물론 써먹을지는 모르지만 자격증을 얻었습니다. 아무튼 시험이란 어느 단계에 이르면 치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험을 치르면 그 다음 단계로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시험 즉 테스트라는 말은 창세기에서 볼 때 어떤 사건과 어떤 사건에 끼어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시험을 이삭을 바치라고 하심으로 치르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이삭을 바치라고 한 사건이 아브라함의 사건의 핵심사건이 아닙니다. 아브라함 신앙의 극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이 시험은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서 거쳐야 할 단계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아브라함을 시험하셔야 했을까요?

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여러분 번제는 어떠한 제사인가요? 태워서 죽이는 것입니다. 태워서 바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삭을 태워서 바치라는 것입니다. 단지 영적인 헌신을 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아비에게 아들을 불로 태워 바치라는 것인가요? 자녀들이 고통을 견디지 못할 때는 차라리 내가 당하고 싶다고 말하는 게 부모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삭을 태워서 바치라는 것은 다르게 말하면 이삭의 존재를 다지워 버리라는 것입니다. 이건 이삭의 존재만 지우는게 아니라 이삭에 관한 모든 기억까지도 완전히 지우라는 거에요. 이삭을 바치라는 말은 그 동안 아브라함에게 주었던 모든 복을 반납하라는 말과 같기도 합니다. 아니 그렇게 인자하고 사랑많으신 하나님이 왜 갑자기 변해가지고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니요. 주실 때는 언제이고 이제와서 반납하라고 하시다니요? 이삭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증표가 아닙니까?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인간의 육체로 싸여 있는 희망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희망불태우라고 하실까요? 왜 이삭을 잔인하게 죽여서 바치라고 하실까? 하나님은 왜 인간에게 요구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요구를 하신 것일까요? 하나님의 시험은 불가해한 신비(mystery), 불가사의한 수수께끼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런 엄청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아브라함이 아무 말을 안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아브라함은 소돔을 위해서는 항의하면서 6번이나 간청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아들을 바치고 자기와의 관계를 지우라고 하는데는 아브라함은 한 번도 간청을 하지 않습니다.

어떤 분은 아브라함이 한 마디도 안하고 행동만 한 것은 하나님이 이삭을 살려서 돌려 보내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에 그리했다고 말합니다. 이게 맞는 말일까요?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들은 어떤 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아브라함은 사기꾼입니다. 다 하나님이 살려줄 줄 알고 했으니까 쇼 한 것밖에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또 그 분이 하는 말이 만약 아브라함이 그렇게 믿었기 때문에 바쳤다면 앞에 긴 문장이 다 필요없다는 거에요. 앞에 문장이 길다는 이야기는 아브라함이 고통을 당하고 고민했다는 것이 전제가 된 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반응을 우리에게 잘 설명해주는 것이 바로 3절입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그러면 왜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을까요?

아마 잠이 오지 않아 일찍 일어났을 수도 있습니다. 또 자기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실천에 옮기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이 엄청난 사실을 아내에게 알리지 않기 위해서 그리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행동으로 옮기기에 가장 어려운 점은 사라를 설득시키는 일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사건 후 창세기 23장에 사라가 죽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고대 유대 랍비들의 성경주석서인 미드라쉬에서는 사라의 죽음이 이 사건과 연관되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난 아브라함은 나귀에 안장을 지웁니다. 여러분 나귀에 안장은 누가 지워야 되요? 종이 해야 합니다. 지금 아브라함은 당시 족장, 작은 나라의 왕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어디 간다고 하면 말 안장 지우고 준비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날 아침에는 아브라함이 친히 안장을 지웠습니다. 게다가 여느 때와 달리 자기가 직접 나무를 쪼갭니다. 여러분 이것은 더더욱 하인이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왜 하인들이 패야될 장작을 자기가 패는 것일까요? 학자들은 이런 동작은 아브라함의 감정을 표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이삭의 나이는 적어도 15세에서 20세 사이 정도는 됐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아들을 태워 죽이라니 아무렇지도 않은 아버지가 어디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결단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니까 무조건 해보자.” 하지만 그 속의 감정을 어떻게 표현할 길은 없고 장작을 팬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칼날도 날카롭게 갈았을 것입니다. 드디어 출발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아브라함은 손에 불을 들고 뒤에는 이삭이 따르고두 종들은 나무 실은 나귀를 몰고 모리아 산을 향하여 떠났습니다.

그러면 그 거리가 얼마나 되었을까요? 4절을 보십시오.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제삼일은 브엘세바에서 모리아까지 걷는 시간입니다. 80km을 하루에 약 27km 정도씩 여행해야 했습니다. 하루에 60~70리를 걸어야 했던 것입니다. 사흘 동안 200리의 거리를 무거운 짐을 지고 간다는 것은 고달픈 일정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그곳까지의 거리는 삼일 길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조석변이(朝夕變異)'라고 했는데삼일 길을 걷는 동안 아브라함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요? 그러나 아브라함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때 삼일째 되는 날에 보여준 아브라함의 행동도 남다릅니다. 5~6절을 보십시오.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여러분 당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데 첫 번째 장애물이 아내였다면 두 번째 장애물은 두 종입니다. 만약 종이 모리아 산까지 올라갔다면 당연히 이삭을 바칠 수가 없었습니다. 이삭 묶어 가지고 바칠라 그러면 두 종이 양쪽에서 딱 잡고 요즘 같은 정신병원으로 끌고 가겠지요.

그러니까 두 종을 아래에 머물게 했다는 이야기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걸 방해할 수 있는 요소를 제거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이와 함께 가서 예배하고 돌아오리라 고 합니다.

그리고 6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여러분 얼마있지 않으면 자기 아들이 죽어야 합니다. 그럼 아버지 마음이 어떠할까요? 조금이라도 아들 고생을 덜 시키고 싶겠지요. 그렇다면 나귀에다가 장작을 싣고 갈 수 있게 할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나귀도 놓고 그 나무를 죽을 애한테 짊어지게 하고 갑니다. 아니 나귀를 가지고 가지 않는다면 자기가 나무 짐을 지고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죽을 아들한테 나무를 짊어지게 하고 자기는 편하게 불과 칼만 들고 갑니다. 이게 정상인가요?

 

평소에 제사 드리러 갈때는 나무를 종들로 하여금 짊어지고 가게하거나 아니면 나귀에게다 지워 갔습니다. 그리고 그전에는 어린 양을 준비해서 갔는데 이번에는 없거든요. 이렇게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벌어지니까 궁금해한 이삭이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까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갔습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정말 어린 양을 준비해 주고 이삭을 살려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대답한 것일까요? 아니면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준비해 주시리라고 한 '어린 양'은 곧 이삭을 가리킨 것인가요? 아브라함은 마음속으로 '아들아하나님이 지정해 준 어린양은 바로 너란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요?

 

드디어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했습니다'. 왜 간단하게 할 수 있는 말을 이렇게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일까요? 이런 표현은 곧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아버지의 비장한 마음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그만큼 애비의 마음이 무거웠다는 말입니다.  

드디어 아브라함은 아들을 잡으려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내리치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어찌하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런 잔인한 부탁을 하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왜 이삭을 복으로 주신 하나님께서 이런 명령을 하신단 말입니까? 번제로 바치라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복을 모두 취소하신다는 말과 같고이삭을 태워 사르라는 말은 아브라함의 기억 속에 이삭의 기억조차 지워버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런 잔인한 명령을 하셨을까요? 

 

오늘 이야기를 시작하는 말을 보면그 일 후에입니다. 말이 함축하고 있는 건 무엇일까요? 이는 앞에 있는 그러니까 20장과 21장에 나오는 문제가 다 포함이 됩니다. 어떤 문제였지요? 이삭이 크고 이스마엘이 크니까 집안에 공기가 냉랭해지고 험해졌지요. 그래서 마침내 이스마엘을 하갈하고 내 보냅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이삭을 괴롭게 할 사람이 집안에 아무도 없게 되고 그 가정에 평화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는 블레셋 왕 아비멜렉과 아브라함 간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2122절에 아비멜렉과 아브라함이 평화 화친조약을 맺어요. 그래서 아브라함을 괴롭게 한사람이 없어요 그러면 이게 무슨 이야기냐면 이제부터 아브라함이 근심하거나 걱정하거나 염려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을 때에 그런 뜻이 되는 거에요. 정말 참된 평화가 왔을 때입니다. 그런데 이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아브라함을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삭을 부르는 표현이 좀 이상합니다. "네 아들네 사랑하는 독자이삭"이라고 부르십니다(2). 그냥 이삭이라고 하시면 될 것을 "네 아들네 사랑하는 독자이삭"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가운데 이런 표현이 12절과 16절에도 나옵니다. 이 표현을 보면 하나님의 시험은 이삭과 관계가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이삭을 좀 시기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만큼 이삭을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는 말은 무엇 때문에 시험하셨다는 말인가요?

오늘 본문은 단순한 순종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모든 것을 다 주신 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이 복()은 이삭에게서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삭에게 장애되는 것은 누구라도 다 제거해 버렸던 아브라함입니다(21:1114). 그런 그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하신 것은 단순히 이삭을 바치라는 말씀이 아니라내가 네게 준 모든 복지금 누리고 있는 이 모든 것 앞에서도 '오직 하나님인 나를 하나님으로 섬기고 있느냐?''이 모든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너의 궁극적 관심은 아직도 하나님인가?'를 행동으로 대답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쳤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자기의 신앙을 행동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지금도 이 모든 것보다 하나님을 사랑합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쳤고하나님은 받으셨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 사자의 급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의 손을 멈추게 한 후에 다시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12)." 그리고 준비된 양으로 제사를 드리도록 하셨습니다. 여기서 강조된 말씀은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했다"는 말과 "네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는 줄을 알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아들을 순수하게 하나님 앞에 바쳤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 믿음을 칭찬한 게 아니라행동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준 사실을 칭찬한 말입니다. 그가 가진 모든 것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준 것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어떻게 그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을까요? 그는 일생을 통하여 하나님을 경험했고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바른 신앙으로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이 땅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복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혹 받은 복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건 아닐까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모두 우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희가 받은 복을 넘어 이 모든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말입니다. 대답은 말이 아니라행동을 요구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이삭(여러분이 받은 모든 축복)보다도 하나님을 더 존귀한 분으로 섬기노라고 행동으로 고백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온전한 사랑을 요구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말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을 때 아브라함이 모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온 인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보십시오. 창세기 22장은 주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아름다운 사랑, 신앙을 잘 보여 주시면 동시에 눈물겨운 하나님의 아버지의 사랑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은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한 희생제물로 바치실 것을 염두에 두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신 장소가 그냥 뒷산이 아니라 3일 길을 걸어야 하는 모리아산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산에서 훗날 성전이 지어졌고 나아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들을 위해 준비해 두신 '어린 양'이신 독생자 예수님을 내어줄 생각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삭이 번제에 쓸 나무를 지고 올라같듯이 우리 예수님은 자신이 달리실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물론 그러다 너무 지쳐 쓰려지셔서 구레네 시몬이 대신 지기도 했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이삭은 제단 위에 잠시 올려져 죽음을 위협을 잠시 경험했지만 예수님은 온전히 죽음을 경험하시어 약 35시간을 무덤에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을 다 아시는 하나님 아버지, 이러한 일을 다 계획하시는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경험한 것 이상의 고통, 아픔을 겪으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이처럼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 너희는 내게 이처럼 소중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니 너희도 마음과 뜻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너의 긍극적 관심은 어디 있느냐? 너는 무엇을 가장 사랑하느냐? 네게 준 복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면 여러분은 무엇이라, 어떻게 답을 드리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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