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슬픔)과 소망 | 박승남 | 2019-08-2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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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창세기35:16-22절 개역개정16. 그들이 벧엘에서 길을 떠나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간 거리를 둔 곳에서 라헬이 해산하게 되어 심히 고생하여 17.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지금 네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18. 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19.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20. 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더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일컫더라 21. 이스라엘이 다시 길을 떠나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쳤더라 22. 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주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 창35:16~20 죽음(슬픔)과 소망 미국에 가면 마을 한가운데 묘지가 있는 것을 쉽게 접하게 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미국의 어느 묘지를 돌다가 한 묘비의 글이 흥미로워 멈춰 서게 되었습니다. “나도 전에는 당신처럼 그 자리에 서 있었소"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이어 두 번째 줄을 읽었습니다. “나도 전에는 당신처럼 그곳에 서서 그렇게 웃고 있었소" 이 글을 읽자 조금은 심각해졌습니다. 이어서 세 번째 줄을 읽었습니다. “이제 당신도 나처럼 죽을 준비를 하시오." 그렇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엄숙해집니다. 그리고. 바로 ‘오늘’을 진지하게 사는 것이 죽음을 준비하는 시작이 될 것입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다시 말해 새로운 삶의 결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죽음, 가장 큰 선물〉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가난하게 죽습니다. 최후의 시간이 이르렀을 때 우리의 목숨을 연장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리 돈이 많고 권력과 영향력이 커도 죽음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가난입니다. 죽음이라는 가난 안에 복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모두 같은 하나님 나라 형제자매로 만들어 주는 복입니다." 테레사 수녀는 임종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주여, 이제 당신이 확실히 보입니다." 당신은 죽음 앞에서 무슨 말을 하시겠습니까? 라헬은 누구 못지 않게 자식을 출산할 수 있기를 바랬던 사람입니다. 언니 레아를 비롯하여 언니의 여종 실바와 자신의 여종 빌하는 너무도 쉽게 임신하고 출산을 하는데 자신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깡자를 부리기도 하고 이런 저런 방법을 궁리하기도 했지만 쉽게 아들을 낳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녀의 소원을 들으시고는 태를 열어 주셔서 야곱의 10번째 아들 요셉을 낳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이 때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는 자신의 소원을 말했으니 그것은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아들의 이름을 자신의 소원을 담아 더함이라는 뜻의 요셉(창30:24)이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로부터 약 10여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라헬은 그 소원이 이루어져서 또 다시 임신을 하게 되었고 이제 출산을 앞두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이 때 아버님이 계시는 헤브론으로 가려고 발걸음도 가벼웁게 벧엘을 출발했습니다. 이제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졌고 그동안 아이를 낳지 못하던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임산하여 출산을 앞두고 있으니 정말 뿌듯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들레헴 근처에 이르게 되었을 때 전혀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노산(老産)인데다가 여행 중이라 산고(産苦)가 가중되었던 라헬은 해산의 진통이 가해오면서 극도의 위태한 지경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 때의 심경이 어떠했겠습니까? 이 때 종이었던 산파가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또 아들을 낳으셨어요.”라고 하면서 용기와 소망을 주려했지만 이미 산모는 숨을 거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라헬은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자기가 낳은 아들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다음과 같은 사람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열 마리 곰', '머리에 부는 바람' ‘하얀 양말’‘주먹 쥐고 일어서’ 아니 누가 이름을 그런 식으로 짓겠나 하지만 이는 엄연한 인디언의 이름입니다. 인디언들은 그 이름을 짓는 방법이 참으로 특이합니다. 그들은 사람의 특징이나 인상적인 행동을 따라 이름을 붙여 줍니다. 그래서 그것이 부정적인 의도에서 붙여진 것이면 그 사람 역사 오랫동안 다른 사람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로 남게 됩니다. [늑대와 함께 춤을]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서부개척이라는 미명하에 저질러진 백인들의 잔인한 약탈과 이에 맞서 싸운 인디언들의 눈물겨운 투쟁은 400년 가까이 이어졌고 이 과정에서 원주민들은 전쟁과 백인들이 퍼뜨린 전염병으로 거의 대부분 죽고 일부만이 살아남아 보호구역에서 살고 있습니다. 특히 여러 인디언 부족들 중에서도 수(Sioux)족은 용맹으로 이름을 떨쳤고 용기와 인내심, 그리고 관대함과 지혜를 존중한 높은 수준의 문화를 지닌 부족입니다. 이러한 수족의 운명을 다룬 영화가 바로 '늑대와 함께 춤을' 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남북전쟁 당시 서부의 한 요새로 부임한 독립군 병사인 쟌 던버 중위가 수족 인디언에게 동화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이 있는데 그녀는 원래 백인 미망인으로서 인디언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시로 괴롭히는 인디언 아이들에게 화가 난 그녀는 어느 날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섰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부터 그녀의 이름이 [주먹 쥐고 일어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이름은 미래에도 따돌림을 당하게 되는 등 부정적인 영향을 마치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도 이상한 이름이 등장합니다. 사무엘상 4장에 나오는 불명예스러움 (이가봇)이라는 이름도 있고 오늘 본문에 라헬이 죽어가면서 부른 이상한 이름도 있습니다. 그러면 라헬은 무엇이라고 어렵사리 낳은 아들의 이름을 불렀나요? 18절을 보면 산모는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자기가 낳은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고 하였다고 알려 줍니다. 그러면 ‘베노니’란 이름의 뜻은 무엇일까요? ‘베노니'(벤오니)란 말은 벤이라는 단어와 아웬이라는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그리고 벤은 아들이라는 뜻으로 뒤에 언급되는 루우벤에도 이 단어가 나옵니다. 루우벤은 ’아들을 보라‘는 뜻으로 첫 아들을 낳은 레아의 감격이 들어 있는 이름입니다. 이어서 아웬이라는 단어는 헛됨, 거짓, 사악, 불행, 고통, 공허, 무익한 일, 슬픔'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베냐민은 나의 헛된 아들, 내 고통의 아들, 내 슬픔의 아들, 내 불행의 아들 등등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이름으로 여기서 우리는 라헬이 마지막으로 가졌던 마음의 깊은 슬픔과 고통과 좌절을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여행 도중에, 그것도 노산으로 인한 신고의 난산 때문에 자신의 생명이 죽게 되어 아들을 기쁨으로 키울 수가 없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비통하고 서러운 것입니까? 더구나 남편이 살던 가나안 땅에 온 것입니다. 이제 가나안 땅에서 걱정하거나 두려워할 것없이 아이를 키우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데 죽음을 맞게 되다니 이 얼마나 비통한 것입니까? 유대인들은 라헬이 죽은 날을 어떻게 알았는지 이 날을 기억하면서 많은 유대인들이 라헬의 무덤을 방문하여 애곡합니다. 라헬은 그야말로 비극의 여인으로서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 하면서도 둘째 부인이 되었고, 장자를 낳지도 못하였습니다. 나이 들어 요셉을 낳았고 둘째 아들 베냐민을 낳다가 그만 난산으로 여행중에 죽었습니다. 죽어서도 막벨라 선조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베들레헴 길가에 장사되었습니다. 이런 라헬과 관련된 이야기를 보면 예레미야 31:15절에서는 “라마에서 슬픈 소리가 들린다. 비통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 라헬이 자식을 잃고 울고 있다. 자식들이 없어졌으니, 위로를 받기조차 거절하는구나”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북 이스라엘의 멸망과 유대인들의 멸망을 염두에 두고 전해진 말씀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성전 파괴일(티샤 브아브)’이 되면, 라헬의 무덤으로 몰려와 슬피 울며 기도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마태복음 2장 17절에 다시 언급됩니다. 즉 헤롯이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베들레헴과 그 가까운 온 지역에 사는, 두 살짜리로부터 그 아래 영아들을 학살한 것을 언급하면서 자식을 잃고 울고 있는 라헬의 아픔을 빗대어 당시 어머니들의 아픔을 상기시킨 것입니다. 이렇게 라헬은 비극의 여인, 슬픔을 당한 어머니들의 상징으로 언급됩니다. 오늘날도 수많은 곳에서 어머니들의 아픔, 슬픔의 눈물이 흘려지고 있습니다. 지난해 12월 4일 충남 태안화력발전소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숨진 하청노동자 당시 24살의 김용균군의 ‘사회적 부검’ 결과가 8월 19일 발표되었습니다. 김용균군의 사인으로 석탄화력발전소의 원·하청 구조, 이른바 ‘위험의 외주화’를 지목했습니다. 특조위는 13개 화력발전소에서 일하는 원·하청 노동자 1만5061명에게 작업환경·노동조건·안전사고 등을 설문조사해, 위험의 외주화가 김용균 개인에 그치는 게 아니라 수많은 노동자를 옥죄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22일 김용균군의 어머니 김미숙씨가 CBS의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하여 너무도 억울하고 분하고 슬픈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동안 위로받을 데 없이 얼마나 울었겠습니까? 그 어머니는 말합니다. 우리 아들도 죽고 다른 사람들도 한 해에 2400명 죽어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되고 너무 충격이 컸고요. 그런데 고마운 것은 김미숙씨는 슬피 우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이제는 사람들을 살리는 일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노동 현장, 노동 문제가 발생하는 곳마다 직접 뛰어다니면서 고통당한 이들과 그 가족들의 손을 잡아주고 힘내라고 얘기도 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미 고인이 되신 전태일열사의 어머니 이소선권사님, 이한열군의 어머니 배은심여사, 박종철군의 아버지 박정기님 같은 분들은 그냥 소시민으로 살던 분들인데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은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민주화 투사가 되었던 분들로 많은 분들의 존경을 받게 되었습니다. 비통하게 슬퍼하면서 죽어간 라헬이지만 그래도 레아와 더불어 이스라엘 민족의 어머니로 간주되며(룻4:11), 정신적 지주(Devotion of the Jewish spirit)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룻기 4장 11절을 보면 보아스와 결혼하게 된 룻을 염두에 두고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증인입니다. 주께서 그대의 집안으로 들어가는 그 여인을, 이스라엘 집안을 일으킨 두 여인, 곧 라헬과 레아처럼 되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에브랏 가문에서 그대가 번성하고, 또한 베들레헴에서 이름을 떨치기를 빕니다.” 라헬은 죽어가면서 자기가 낳은 아들의 이름으로 베노니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에 ‘베노니’ 즉 슬픔, 고통, 불행이라는 뜻이 담긴 이름을 계속해서 쓰면 그 아이의 미래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모두 이름대로 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이름은 분명 그 아이 평생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분명한 것인데 그렇다면 이 아이는 평생 슬픔과 고통과 불행을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 뿐만 아니라 아버지 되는 야곱과 그 가족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더욱이 그 이름은 전혀 신앙적이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라헬의 아픔과 슬픔은 우리 모두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 이름을 인정하거나 합의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인의 사고나 의식, 생각이나 행동은 불신앙과는 달라야 합니다. 신앙인은 상황에 정복당하는 자들이 아니라 상황을 신앙으로 정복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속상하고 기분 나쁘다고 해서, 슬프고 괴롭다고 해서 불신앙적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욥기를 보면 42장에서 욥이 하나님께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라고 합니다. 그러면 욥은 무엇을 회개한 것일까요? 욥은 자신이 받고 있는 고난의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깊이 좌절하고 인생의 삶이 허무하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빼앗으시면 체념하고 받아들이고 생일을 저주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불교적인 경건입니다. 고난 당한 욥은 비록 하나님을 저주하지는 않았지만 고난 당하는 것에 긍정적인 것은 별로 없고 부정적, 체념, 허무, 저주 투성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가장 불합리하고 의미 없어 보이는 고난 속에도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와 은혜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깊고 깊은 지혜와 은혜와 자비에 대한 신앙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가운데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비로소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저는 깨달았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 욥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는 비교가 전혀되지 않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지혜를 고백한 것입니다. 가장 불합리 하고 말도 안되고 의미 없어 보이는 고난 한 가운데에도 하나님의 신비한 계획이 이루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운명을 받아들이고 허무를 신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경건은 기독교의 경건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놀랍고 은혜로우십니다. 그 놀라운 지혜는 불합리하고 의미가 전혀 없는 고난 속에서도 놀랍게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심한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것을 믿었던 사도바울은 고린도 후서 12장 9~10절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려고,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병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것은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비록 슬프고 고통스럽고 속상하고 기분 나쁘더라도 거기에 지배당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슬프고 괴로우면 원망하고 불평하게 되고 기분이 상하면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는 등 부정적인 언행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다른 사람에게는 물론 자기 자신에게도 결코 유익하지 못한 것이 됩니다. 우리들이 화가 났을 때 그 마음으로 무슨 일을 결정한다면 그것은 거의 잘못된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잘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내 생각, 내 기분이 잘못되었을 때에는 분명히 ‘아니다’라고 하며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라헬은 아무리 사랑스러웠다 해도 신앙의 여인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을 보면 라헬은 남편 야곱과 함께 자기 아버지 라반의 집을 떠날 때 아버지의 가정 수호신인 드라빔(Teraphim)을 도적질해 갔습니다(창31:19). 그리고 분명 그것을 애지중지 하면서 섬겼을 것입니다. 또, 라헬은 언니는 아들을 낳았건만 자기에게는 아들이 없었을 때 언니를 투기하여 남편 야곱에게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겠노라”(창 30:1)고 까지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로 미루어보아 우리는 라헬이 어떠한 여인이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히브리서 6:11~12절을 보면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라 고 말씀합니다.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그러므로 성도는 극한 슬픔 속에서도 소망과 믿음의 눈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비한 기쁨을 맛볼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슬픔을 통하여 용기를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치료하실 수 없는 슬픔은 지상에 없습니다. 슬픔은 하나님의 사랑 날개 아래 그림자일 뿐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잡지 「토요 리뷰(Saturday Review)」의 편집장이었던 노만 커즌스(Norman Cousins)은 500명 중 1명 정도 완치될 수 있다는 강직성 척수염(ankylosing spondylitis)이라는 희귀병에 걸렸었습니다. 모든 관절이 약해지는 병으로 인하여 그는 처음에 목을 움직일 수 없게 되었고, 다음은 팔, 다음은 손가락, 발가락의 순서로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답니다. 그는 병상에서 책을 읽다가 부정적인 정서는 신체 전반에 나쁜 영향을 끼치고, 긍정적인 정서는 좋은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즉시 카슨은 부정적인 정서를 일으킬 만한 비극이나 폭력적이며 파괴적인 글 또는 TV는 일체 보지 않고 긍정적인 정서를 함양하기 위하여 기쁨을 주는 내용의 희극만 보고, 즐거운 노래를 감상하며 불렀고, 무엇보다도 성서를 보며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간절한 기도를 했답니다. 1년 후, 의사도 포기했던 카슨의 병이 완치되었습니다. 카슨이 경험에서 얻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인간의 몸은 재생력이 막대하다. 둘째, 병에 걸렸을 때 자신의 심적, 정신적, 영적인 태도는 병을 호전시키거나 악화시키는 데 절대적인 영향을 준다. 라헬도 불신앙의 부정적인 생각이 아니라 긍정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신앙을 가졌었더라면 죽음의 상황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라헬이 죽어가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야곱의 마음은 얼마나 미어졌겠습니까? 이런 일이 있을 줄 전혀 예상치 못하였는데 청천 벽력같은 일이 눈앞에서 일어나다니 진정 야곱으로서는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 누구보다도 몹시 사랑하던 아내, 라헬! 낮선 타국인 밧단 아람에서 만나 타향살이의 서러움과 괴로움을 다 잊도록 만들어준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니 야곱에게 라헬은 하나님의 선물이자 하나님의 미소가 되어왔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갑자기 자신에게서 떠나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떠나가면서 고통스럽게 ‘베노니’라고 아기를 부른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에 있는 남편 분들 사랑하는 아내가 죽어가면서 이렇게 아들의 이름을 지었는데 여러분 같으면 그녀의 마지막 말을 받아주지 않겠습니까? “그래 당신이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이 아이 이름을 ‘베노니’라 부를게…….” 그러나 보십시오. 옆에서 라헬의 말을 듣던 야곱은 이 때 돌연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야 이 아이의 이름은 베냐민이야!” 라고 합니다. 여러분 '베냐민'은 ‘아들’이란 뜻의 ‘벤’과 ‘오른손’, ‘남쪽’ 이라는 뜻의 야민이 합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냐민은 '오른손의 아들' ‘남쪽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오른편을 중요시했는데 성서 속에서 오른편, 오른손 그리고 남쪽은 힘, 승리, 행복, 총애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베냐민이란 행복의 아들, 기쁨의 아들, 힘의 아들, 승리의 아들, 사랑의 아들로 소망과 위로의 이름이요 긍정적이며 희망 찬 이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비록 아내가 힘없이 죽어가고 있지만 이 아들만은 씩씩하고 강하고 힘 있는 아이로서, 행복하고 사랑받으며 기쁘게 살기를 소망하면서 지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야곱은 지금 누구보다 안타깝고 비통한 가운데서 소망을 찾은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을까요? 물론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 때문입니다. 이미 야곱은 누구보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했었습니다. 세겜에서 그렇게 부끄럽고 두려운 자리까지 떨어졌건만 하나님은 그래도 여전히 그를 사랑하셔서 부르시고 다시금 약속의 자리로 이끌어 주신 그 은혜, 다시금 회복시켜 주시고 새롭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이러한 하나님을 의지하여 분명한 소망을 가질 수 있었고 그래서 사랑하는 아내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베냐민’이라고 이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인들은 괴로움, 슬픔, 절망 속에서 기쁨을 얻고, 위로를 받으며 소망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야곱의 이러한 소망으로 말미암아 오른손의 아들 베냐민 후의 후예 중에 예레미야 선지자와 에스더와 모르드개 그리고 사도바울와 같은 귀한 사람들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진정 이들은 모두 절망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은 사람, 진정한 승리의 사람, 참으로 복된 사람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야곱의 소망이 이들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인 우리는 탄식할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분명한 소망을 가지고 우리에게 베노니를 베냐민이라고 고칠 수 있는 믿음과 미래를 앞당겨 살 수 있는 신앙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하나님 안에서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는 전적인 베노니의 상황은 없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베냐민의 생을 살 수 있습니다. 믿음이 슬픔을 이깁니다. 어거스틴(Augustine)은 로마가 부패 일로에 놓여 절망 상태가 되었을 때 그의 신국론에서 난국에 처한 것을 가지고 쇠퇴했다고 단정하지 말라 과거의 재앙은 오히려 제국을 새롭게 만들지 않았는가? 지금 난국에 처하였다고 결코 절망하지 말라. 그 누가 이 일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알 것인가?라고 비관론들을 일축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시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장 귀한 선물들은 슬픔과 관계된 것들이 많습니다. 땅에서 절망적일 때 하늘의 소망을 바라보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하나님 없이 생각하는 자들은 언제나 베노니요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항상 베냐민입니다. 미국의 사상가이자, 목사였던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1803~ 1882)은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의 열쇠는 그 사람의 생각이다. 인생은 생각에 의해 기쁨도 될 수 있고 슬픔도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 여하에 따라 하나님께서 나를 책임져 주십니다. 해서 우리의 모든 생각은 그리스도를 닮아야만 됩니다. 지금까지의 베노니 생각, 베노니 눈, 베노니 말, 베노니 귀, 베노니 발걸음을 베냐민으로 바꾸십시오. 기독교 신앙은 긍정이요 기대이며 소망입니다. 2019년 8월 25일 주일 낮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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