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지 않고 사는 길 | 박승남 | 2019-12-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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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창세기42:1-5절 개역개정1. 그 때에 야곱이 애굽에 곡식이 있음을 보고 아들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바라보고만 있느냐 2. 야곱이 또 이르되 내가 들은즉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다 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 그러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하매 3. 요셉의 형 열 사람이 애굽에서 곡식을 사려고 내려갔으나 4. 야곱이 요셉의 아우 베냐민은 그의 형들과 함께 보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의 생각에 재난이 그에게 미칠까 두려워함이었더라 5.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양식 사러 간 자 중에 있으니 가나안 땅에 기근이 있음이라 창41:54~42:5 죽지 않고 사는 길 7년간의 대 풍년 때에 총리가 된 요셉은 두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총리, 풍년, 두 번의 득남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 모든 것들이 요셉에게뿐만 아니라 그의 이야기를 듣는 모든 이들의 마음을 밝고 행복하게 해 주고 있지 않습니까? 요셉은 두 아들을 통하여 그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 잊게 해 주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해 주셨다. 이렇게 함으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 것입니다. 어느덧 7년의 그 풍요롭던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고 요셉이 해석한 대로 무서운 7년 흉년이 시작되었습니다. 팔레스타인 땅과는 달리 정기적으로 범람하는 나일강을 가진 애굽에서 이처럼 오랫동안 가뭄이 계속되는 것은 매우 특이한 일입니다. 그러나 애굽의 기록들에 의하면 이따금 몇 년 동안 기근이 지속하기도 하였었던 사실이 비교적 상세히 언급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설움 중에 배고픈 설움 이상이 없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 보릿고개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가을에 추수한 것 가지고 겨울 동안 살고 보리 추수 때까지 식량이 없어서 죽도 쑤어 먹기 어려워 문자 그대로 나무껍질, 풀뿌리를 캐서 쌀 몇 알 넣고 멀겋게 죽을 쑤어 배 만 부르게 하던 시절, 아무런 영양가가 없으니까 배만 불렀지 맥이 없어 허덕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도 이 지구상에는 20억이 넘는 사람이 기근에 허덕이고, 매일 먹지 못해 순전히 굶어 죽는 사람이 수만 명이 된다는 것입니다. 아니, 멀리 갈 것 없이 우리나라만 해도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끼니를 걱정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청년 실업률과 혼인율을 비롯한 청년층의 ‘미래’를 보여주는 각종 지표는 바닥으로 치닫고 있는 가운데 청년실업 문제가 청년 빈곤 문제로 바뀌고 있어 배고픈 청년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공황장애와 같은 정신질환이 파고들어 와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청년들은 이제 남의 얘기가 아니라고 합니다. 또한, 어려운 가정 형편 탓에 정부 지원을 받아 끼니를 해결하는 아동이 2016년 현재 33만 2천865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아이들은 공휴일이나 방학 중에도 급식 지원을 받아야 하는 아이들입니다. 그렇다면 온 나라가 기근이 든다면 어떠한 형편이 되겠습니까? 기근이란 지상의 지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열왕기하 6장 24절 이하에 나오는 사마리아의 기근 때 여인들이 자기가 친히 낳은 자식들을 잡아먹어야 했던 그 비참한 상황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이러한 기근이 애굽을 비롯한 가나안 땅에도 기근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벌써 야곱의 아들들은 식량에 대해 극심한 부족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사실 야곱은 가진 것이 많은 부자였기 때문에 먹고 사는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얼마나 기근이 심각했는지 야곱의 집안마저 먹고 사는 문제를 걱정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야곱의 식구는 종들은 치지 않고 온전한 식구만 합쳐도 66명에 달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많은 식구가 무엇을 먹고살 수가 있습니까? 이제 식량이 떨어졌으니 그저 상대방의 얼굴만 쳐다볼 뿐 아무런 대책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양식이 없어서 주리는 기근도 무서운 것이지만 또 다른 기근도 있습니다. 아모스 8장 11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말씀의 기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도 들을 수 없는 '말씀의 기근'입니다. 그러면 '말씀의 기근'을 내린다는 것이 과연 무슨 뜻일까요? 아무리 잘 먹고 잘산다 해도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면 인간의 삶이 무가치해지고, 그것은 결국 죽음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는 종들이 사라지고, 제멋대로 외치는 거짓 선지자들이 판을 치거나, 아예 하나님의 말씀은 전할 수 없는 시대가 되어 말씀을 듣지 못하게 되면 그 영적 상태가 바로 지금 야곱 가족의 상태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이것이 큰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이미 그 심령은 죽은 심령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말씀으로 살아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말씀을 먹고 영혼이 소생하고 힘을 얻어 섬기며 살아야 하는데 그 심령이 완전히 빈털터리 된 상태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의 영혼은 양식을 얻지 못해서 자신의 심령의 배를 채워줄 것이 공급되지 않아서 그냥 굶주림에 허덕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강퍅해집니다. 그래서 쉽게 화를 내고, 쉽게 짜증 내고 원망을 합니다. 그리고 불안해하고 두려워합니다. 아무리 은혜의 말씀이 흘러넘쳐도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고 귀를 막아 버리면 우리는 영혼의 기근에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말씀을 사모하고 가까이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1~2절 말씀을 보면 “그러므로 여러분은 모든 악의와 모든 기만과 위선과 시기와 온갖 비방하는 말을 버리십시오. 갓난아기와 같이 순수하고, 신령한 젖을 그리워하십시오. 여러분이 그것을 먹고 자라서, 구원에 이르게 하려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합니다. 말씀의 풍년을 위해 우리는 먼저 버릴 것을 버려야 합니다. 내 삶의 거짓되고 죄악 된 것을 버리고, 시기와 질투를 버리고, 악한 말, 그릇된 말, 부정적인 말을 그치고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영혼이 자라고 살찌우게 됩니다. 저는 여러분의 영적 위가 크기를 바랍니다. 저는 위가 튼튼하지 않아서 밥을 많이 먹지 못합니다. 그래서 밥을 쑥쑥 잘 먹는 사람을 보면 부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더욱 부러운 것은 말씀을 잘 먹는 사람입니다. 어떤 이는 일주일 살면서 주일날 하루 한 끼 양식을 먹어도 잘 사는 사람이 있지만 어떤 이는 매일 먹어야 양이 차는 그런 분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또 중요한 것은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들을 위해 힘써 기도하는 것입니다. 목회자들에게 말씀이 막히지 않도록, 영감을 위해, 성령의 충만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예배 시간에 맛있고 영양가 있는 영의 양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기근으로 인하여 굶주릴 때 아름다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야곱은 믿음의 귀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기근을 당했을 때 야곱은 하나님께 자기 가족들을 구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드렸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 가족 중에서 제일 먼저 애굽에 양식이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먹을 것 때문에 근심하고 있는 자녀들에게 이 좋은 소식을 들려주었습니다. “얘들아, 내가 들은즉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단다. 그러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양식을 사 오라. 그리하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 이 말을 들었을 때 그 자식들의 마음은 얼마나 기쁘고, 흥분했을까요? “그래 이제 살았다. 애굽으로 가면 된다.” 애굽은 빨리 다녀오면 며칠이면 다녀올 수 있는 길입니다. 그래서 요셉의 아들 10명이 곡식을 사기 위해 즉시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여러분 앞서서 열왕기하 6장 24절 이하에 나오는 사마리아의 기근에 대하여 잠시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후에 어떻게 됐습니까? 당시는 아람 나라가 쳐들어와 사마리아를 포위하여 생긴 기근입니다. 그런데 이때 성문 어귀에 나병 환자 네 사람이 있었는데 이들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이니까 아람 군대에 가서 항복하자 하고는 황혼에 일어나서 아람 진가로 가 보았지만 놀랍게도 아람 진영에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병거 소리와 말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일으켰는데 이 소리를 듣고 아람 군대가 모두 줄행랑을 친 것입니다. 그래서 나병 환자들이 장막에 들어가 먹고 마시고 재물을 취했습니다. 그러다가 서로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은 올바른 일이 아니다. 오늘은 좋은 소식을 전하는 날이다. 이것을 전하지 않고 내일 아침 해 뜰 때까지 기다린다면, 벌이 오히려 우리에게 내릴 것이다. 그러니 이제 왕궁으로 가서, 이것을 알리도록 하자.” 하고는 사마리아 성에 가서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도바울도 고린도 전서 9:16절에서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라고 말하면서 힘써 복음을 전했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아름다운 소식이 있습니다. 이 소식은 영적 기근을 면한 소식입니다.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소식입니다. 풍성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소식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양식이라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다른 복음서와 같은 성찬식 기사가 없습니다. 대신 6장을 보면 보리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천 명을 먹이신 사건을 성찬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몰려오는 굶주린 백성들을 지극히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기적을 베풀어 식사를 제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먹이신 빵과 물고기는 단순한 빵과 물고기가 아닙니다. 그냥 마술 부리듯 쉽게 만들어 주셨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주께서 자기의 몸을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빵을 먹이시면서 교훈하신 것은 ‘내가 생명의 빵이니, 너희는 내가 주는 빵만 먹으려 하지 말고,나를 먹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 자신을 먹으라하시는 말씀은 단순히 빵을 요구하고 예수님을 당시에 왕으로 삼아 잘살려고 하지 말고 빵이신 주님을 믿으라, 주님 자신을, 주님의 말씀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을 먹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자녀들입니다. 주님을 먹고 주님의 마음을 닮아 세상을 윤기 있고 행복하게 만들 수 있고 세상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야곱의 가족은 당시 양식이 풍성한 애굽으로 가면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양식인 예수님께로 가야 합니다. 그러면 살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 주변에 육신의 양식은 풍성하지만,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하고 지옥의 죽음으로 달려가는 우리들의 가족, 친지, 이웃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굶주리는 가족들을 보고도 관망만 하고 있던 야곱의 아들들처럼 아무런 대책도 노력도 없이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큰길과 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데려다가 내 집을 채워라"(눅14:23)고 말씀하십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 하셨는데 이토록 고귀한 영혼이 죽어가고 있는데도 서로 얼굴만 쳐다만 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러분 요셉이 있는 애굽에는 정말 곡식으로 창고마다 가득하였습니다. 야곱의 66명의 대가족뿐만 아니라 애굽의 모든 사람이, 그리고 다른 나라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양식도 가득하게 저장되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요구하는 것 이상 하늘 창고에는 넘치는 것으로 채워져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을 따라,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더욱 넘치게 주실 수 있는(엡3:20) 분이십니다. 또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광 가운데서, 그분의 풍성하심을 따라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을 모두 채워주실”(빌4:19)분이십니다. 조지 뮬러는 기도할 때 이 말씀에 손을 얹어 놓고 하나님 이렇게 채워주신다고 하셨지요 하면서 기도했다 합니다. 그는 무려 5만 번이나 기도 응답을 받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 이 역사 속에 존재했던 또한, 앞으로 존재할 그 어떤 사람이라도 다 용납할 수 있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양식으로 삼지 않고 그냥 물질적인 양식으로만 만족해하고 세상의 헛된 것만 추구하는 인생들은 결코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애굽에 곡식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 관리자가 누구인지는 알지도 못했습니다. 41:55절을 보면 바로 왕은 주린 백성들이 부르짖으며 양식을 구할 때 “요셉에게 가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요셉이 누구입니까? 바로 야곱의 사랑하는 아들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요셉이 양식을 거저 주지 않겠습니까? 아니 요셉과 함께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알지 못한 야곱은 아들들을 보낼 때 그냥 보내지 않고 돈을 가지고 가게 했습니다. 야곱은 물론 원래가 부유한 형편이어서 식량을 살만한 돈은 있었습니다. 그래서 애굽으로 식량을 구하러 떠날 때 은전을 가지고 가게 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영의 양식을 얻기 위해 누구에게 나아가는 것입니까? 알지 못하고 무작정 나아가는 것입니까? 바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은혜의 주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영적 기근을 타개하기 위해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까? 주님은 지치고 굶주린 인생에 말씀하십니다.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55:1)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예수님께 와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찬송합니다. 찬송 494장 3절 ♪빈손 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드네! 의가 없는 자라도 도와주심 바라고 생명 샘에 나가니 나를 씻어 주소서♬ 빈손 들고, 아무것도 없이, 내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탕자는 거지 모습 그대로 아버지께로 돌아갔습니다. 옷이라도 좀 갈아입고 돈이라도 조금 가지고 간 것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 나아갔습니다. 찬송 214장 ♬1 나 주의 도움 받고자 주 예수님께 빕니다. 그 구원 허락 하시사 날 받아 주소서 후렴)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아주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아주소서 4. 내 주님 서신 발 앞에 나 꿇어 엎드렸으니 그 크신 역사 이루게 날 받아주소서 ♪ 그렇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간절한 심령입니다.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를 바라고 그 말씀으로 심령을 채우길 원하는 그 심정입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께 나아가면 어떻게 됩니까? 구약성경 예레미야 17:7-8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아멘!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의뢰하는 성도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 그 심령의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 시냇가 심은 나무의 진가는 가뭄의 때에, 기근의 때에 더욱 나타납니다. 여러분 흉년, 기근, 가뭄은 위기요, 문제입니다. 고민과 고통과 슬픔과 눈물과 시련의 시기입니다. 그러나 흉년의 때는 한편 감동과 울림이 있게 되는 시기이며 하나님의 새로운 은혜의 역사가 나타나는 때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풍년은 짧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흉년은 42~47장까지 무려 6장에 걸쳐 길게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역사, 감동과 감격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기는 영적으로 흉년의 시기입니다. 그런데 그럴 때 더욱 신앙인의 진가를 보일 수 있는 때입니다. 여러분 요셉도 그러했지만, 다윗도 큰 인생의 흉년을 겪었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었으면 “만일 내게 비둘기같이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머무르리로다”(시55:6~7)라고 했겠습니까? 실로 그의 일생의 많은 부분은 두려움과 떨림과 조롱과 멸시와 압제를 당했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수없이 당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눈물도 수없이 흘렸습니다. 오죽하면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라고 했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그러한 슬픔과 고통과 고난의 강물에 잠겨버리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찬송하고 감사하고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요? 보십시오. 그는 분명히 선포했습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시55:22) 그리고 시 57편을 보면 사울에 의해 쫓겨 아둘람 굴속에 있으면서도 “하나님, 내 마음은 흔들림이 없습니다. 진실로, 내 마음은 확고합니다. 내가 가락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를 현대어 성경으로 보면 “하나님, 내 마음, 이렇듯 편할 수 있을까요! 이렇듯 든든할 수 있을까요! 주께 노래 불러 드리겠습니다. 주님께 찬양을 바치겠습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그 억울하고 모진 위협 속에서 말입니다. 그런데 요셉과 마찬가지로 다윗도 그의 인생의 뿌리를 주님께 내린 것입니다. 비록 인생의 기근을 만났어도 그는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바라봄으로 주님 주시는 은혜의 생수를 마셔서 해갈하고 영혼의 풍성한 은총을 누릴 수 있었기에 이러한 고백을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야곱은 막내아들 베냐민은 보내지 않았습니다. 왜요? 애굽에 관리자로서 요셉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혹시나 재난이 그에게 미칠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요셉의 실종으로 인해 한없는 슬픔과 고통을 겪은 야곱은 이제 결코 베냐민만은 잃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과거의 불행한 경험이, 그리고 그 두려움이 이제는 야곱의 마음을 움츠리게 하여 베냐민을 보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과거의 불행한 경험이, 과거의 부정적인 일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은혜받는데, 지장이 됩니다. 사실 그 불행한 일도 알고 보면 자신들을 살리기 위한 일인데, 자신들을 구원해 주시기 위해 애굽으로 팔린 것인데 그것을 알지 못하는 야곱은 혼자 가슴앓이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일들은 슬픈 일이건 기쁜 일이건 결국 은혜로 연결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생각과 두려운 마음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은혜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풍성한 하나님의 은총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은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우리 주님은 전능하십니다. 그리고 한없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문제라면 우리가 믿지 못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의 마음을 닫아놓고 염려하고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미 우리는 복된 소식을 다 들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기근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주님의 품에 안겨, 풍성한 주님의 사랑 가운데 기근이 아닌 심령의 풍년 속에 찬송하며 살아가시기 축복합니다. 아멘! 2019년 12월 15일 주일 낮 예배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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