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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김과 잊(있)게 하시는 하나님 박승남 2019-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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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창세기41:46-57절 개역개정

46. 요셉이 애굽 왕 바로 앞에 설 때에 삼십 세라 그가 바로 앞을 떠나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

47. 일곱 해 풍년에 토지 소출이 심히 많은지라

48. 요셉이 애굽 땅에 있는 그 칠 년 곡물을 거두어 각 성에 저장하되 각 성읍 주위의 밭의 곡물을 그 성읍 중에 쌓아 두매

49. 쌓아 둔 곡식이 바다 모래 같이 심히 많아 세기를 그쳤으니 그 수가 한이 없음이었더라

50. 흉년이 들기 전에 요셉에게 두 아들이 나되 곧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그에게서 낳은지라

51. 요셉이 그의 장남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52. 차남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

53. 애굽 땅에 일곱 해 풍년이 그치고

54. 요셉의 말과 같이 일곱 해 흉년이 들기 시작하매 각국에는 기근이 있으나 애굽 온 땅에는 먹을 것이 있더니

55. 애굽 온 땅이 굶주리매 백성이 바로에게 부르짖어 양식을 구하는지라 바로가 애굽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요셉에게 가서 그가 너희에게 이르는 대로 하라 하니라

56. 온 지면에 기근이 있으매 요셉이 모든 창고를 열고 애굽 백성에게 팔새 애굽 땅에 기근이 심하며

57. 각국 백성도 양식을 사려고 애굽으로 들어와 요셉에게 이르렀으니 기근이 온 세상에 심함이었더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43:46~57 섬김과 있(있)게 하시는 하나님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삼은 바로는 요셉의 이름을 '사브낫바네아'(차프나트파네아)라 하였습니다. 이는 애굽식 이름으로 '그 신이 말한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살았다은밀한 것을 열어보이는 자비밀을 드러내는 자라는 의미와 함께 '생명의 지탱 자' 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오(38).” 이는 바로 왕이 애굽의 술사, 박사들을 모두 불러 자신의 꿈을 해몽케 했으나 아무도 해석하지 못하는데 그 꿈을 명확하게 해몽한 요셉을 보고 탄복하면서 이름을 '사브낫바네아'라 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들어 하나님의 비밀을 들러낸 요셉에게 '애굽의 생명과 운명을 맡긴다'고 한 것입니다.

보십시오. 애굽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려 부르짖을 때 바로 왕은 모든 백성에게 말했습니다. "요셉에게 가서 그가 너희에게 이르는 대로 하라" 그러면 살 길이 있으리라는 것이지요. 실로 하나님의 사람 요셉은 애굽을 살리고 그 운명을 바꾸어 놓은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사브낫바네아! 요셉의 13년 굴욕의 삶이 끝났습니다. 노예로 끌려갔던 자가 당시 최강국의 총리로, 비참한 죄수에서 영광의 복된 자리로 옮겨졌습니다. 자기 생명하나 지키기도 힘겨웠던 그가 전 애굽인의 생명을 구원하고, 그들의 운명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밑바닥 인생이 높고 귀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역전, 반전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야 말로 역전시켜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누가복음 146절부터 나오는 마리아 찬가를 보면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5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51~53)라고 합니다. 사무엘상 2장을 보면 사무엘을 낳은 한나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용사들의 활은 꺾이나, 약한 사람들은 강해진다. 한때 넉넉하게 살던 자들은 먹고 살려고 품을 팔지만, 굶주리던 자들은 다시 굶주리지 않는다. 자식을 못 낳던 여인은 일곱이나 낳지만, 아들을 많이 둔 여인은 홀로 남는다. 주님은 가난한 사람을 티끌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사람을 거름더미에서 들어올리셔서, 귀한 이들과 한자리에 앉게 하시며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4~8)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하여 성도를 강하게 만드시고 빛나는 영예로 높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을 당하든지 겸손히 주님을 의지하며 범사에 감사함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요셉이 해몽한 대로 대 풍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것도 일곱 해 풍년입니다. 토지 소출이 심히 많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해 풍년 뒤에 그 엄청난 일을 알려 주지 않으셨다면 그 풍년동안 식량은 매우 값이 싸지고 천해지고 마구 버려졌을 것입니다. 그 뒤에 엄청난 재난이 닥칠 것도 모르고 말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애굽 땅에 있는 그 칠 년 곡물을 거두어 각 성에 저장하되 각 성읍 주위의 밭의 곡물을 그 성읍 중에 쌓아 두었습니다. 쌓아 둔 곡식이 바다 모래 같이 심히 많아 세기를 그쳤으니 그 수가 한이 없음이었더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풍년으로 다른 사람들이 흥청망청 살 때 철저하게 남는 곡식을 사 모아 산더미같이 쌓아 놓아 흉년을 대비하였습니다. 그리고 7년 흉년이 들었을 때 굶주린 백성들을 먹여 살리는 데 그의 삶을 바쳤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언제 흉년이 올지 모릅니다. 기후환경의 문제 때문에 농작물 흉년이 들 수도 있고 이런 저런 이유로 건강, 재물 등에 흉년이 들어 우리 가정에, 사업장에 위기가 닥칠 수 있습니다. 특히 영적인 위기가 닥칠 수도 있습니다. 심령이 곤고해지고 신앙이 밑바닥까지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한국교회에도 큰 흉년이 들 수 있습니다. 아니 한국교회는 진작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큰 위기를 겪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기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죄 때문입니다. 그런데 니느웨 성처럼 멸망 직전까지 가더라도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그 재앙을 걷어 가십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으면 이스라엘 백성처럼 나라를 잃고 그발 강가에서 슬피 울게 하십니다.

또 하나의 위기는 죄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발생합니다. 창세기 41장에 나오는 7년의 흉년이 바로 그런 위기입니다. 이는 구속사 측면에서 반드시 필요한 위기입니다. 그래서 기도해도 이런 위기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한국교회에 불어닥치고 있는 위기 역시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한국교회의 죄악 때문입니다. 소금과 빛으로 살지 못한, 제자 답게 살지 못한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니느웨 성 사람들처럼 지도자부터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회개하고 삶을 갱신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아직 밝히 알 수 없으나 하나님이 이끌어 가시는 거대한 구속사에서 지금 위기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앞으로 10년이 한국교회의 마지막 골든 타임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지금은 위기의 시작에 불과하며 이대로 가면 더 큰 위기가 찾아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한국교회 내부에서 일어나는 위기, 자중지란은 더 커지고 심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한국교회를 살리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초대형 교회라도 다가오는 위기와 몰락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한국교회를 살리는 것은 위기에 처한 한국 사회를 살리는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에는 여러 가지가 문제가 있지만, 그중 하나 지적하고 싶은 것은 개인주의 신앙입니다. 요즘 목사를 위시한 항존직 그리고 교인 모두가 점점 자신만을 위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교회보다는 개인이 우선하는 개인주의 신앙이 팽배해 가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개인적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각 개인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 지시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요, 삶의 주인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그리고 구원 받은 이후에는 지체요, 공동체로 살아야 합니다. 개인 구원은 있어도, 개인주의적 신앙은 비성경적입니다. 물론 현대 한국교회의 교인들이 개인주의 신앙에 물드는 것은 사회 속에 만연한 개인주의 윤리와 신뢰 결핍의 영향이 크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세상을 거스른 것이 아니라 세상에 휩쓸렸다는 것입니다. 말이 안되는 것이지만 세상을 주님의 빛을 비춘 것이 아니라 세상의 어둠에 빨려 들어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위기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때에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본문 46절을 보면 요셉이 애굽 왕 바로 앞에 설 때에 삼십 세라고 합니다. 그러니 한창 젊은 나이에 권력의 정상에 오른 것입니다. 얼마나 놓기 좋은 나이입니까? 그러나 그는 축제와 연회 속에서 지내지 않았습니다. 세마포 옷을 입고 인장 반지를 끼고 금 사슬을 걸고 거들먹거리며 예쁜 아내를 거느리고 궁중에서 향락을 즐기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성공을 다른 사람을 섬기는데 사용했습니다. 높은 지위를 남을 위해 봉사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보십시오. 본문 46절을 보면 요셉이 애굽 왕 바로 앞에 설 때에 삼십 세라 그가 바로 앞을 떠나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 라고 합니다. 애굽 온 땅을 순찰하면서 백성을 섬기고 보살피고 봉사하는 데 전력을 다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소금과 빛으로 산 것입니다. 여러분 요셉의 성공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닙니다. 요셉은 노예로 있을 때 노예로서 성공했고 감옥에 있을 때는 죄수로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돈을 쥐어 줘 봐라. 지위와 명예를 줘 봐라. 그러면 그 인간 됨을 알 것이다.” 하나님은 요셉을 13년 동안 연단과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귀한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그 직분은 사람을 섬기고 사람을 살리는 직분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진정한 성공입니다. 바로 우리 한국교회가 여러 가지 면에서 고쳐야 할 것이 많지만 이렇게 섬김과 살림의 자세, 섬김과 살림의 영성으로 돌아간다면 분명 한국교회는 다시금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흉년이 오기 전에 국가적으로 잘 준비한 요셉에게 하나님은 위로와 기쁨을 주셨습니다. 바로왕을 통해 아내를 맞이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가정이 탄생한 것입니다. 서양에 내려오는 말 가운데 영어에 가장 아름다운 세 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무엇인지 아시나요? 그것은 하늘(heaven)이라는 단어, 그리고 어머니(mother)와 가정(home)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가정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로 가정에서 태어나고 가정에서 자라나고 가정에서 사랑을 받고 또 가정에서 행복을 누리고 치유를 받고, 가정에서 새로운 가정이 태어나고 우리는 가정에서 생명을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동물과 달리 우리 인생은 오랫동안 가정에 머물면서 가정과 함께 살게 되어 있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누구든지 좋은 가정,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서 훌륭한 자녀들을 키워서 교회와 나라와 사회에 공헌하는 그런 부모가 되고 가정이 되길 모두가 소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동안 노예로서 감옥살이 신세로서 지내다 오붓한 가정을 이루게 되었을 때 얼마나 기쁘고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런데 우리는 새롭게 탄생 된 이 가정을 보면 순간 긴장하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또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그에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니라 생각해 보십시오. 요셉은 당시 애굽의 제사장의 사위가 된 것입니다. , 그러면 이 제사장은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 아닙니다. 그 당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공식적인 제사장은 없었습니다. 있다면 아버지가 제사장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애굽에는 공식적인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상을 섬기는 제사장입니다. 이 제사장은 카이로 북쪽에 있는 헬리오폴리스 즉 온이라는 곳의 대제사장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그 이름입니다. 그 이름이 보디베라인데 이는 '(태양신)가 준 자'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이름은 요셉의 주인이었던 보디발 이름과 거의 같으며 그 뜻은 동일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영화 이집트 왕자 요셉 편을 보면 요셉의 아내가 된 아스낫이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있으면서 보디발의 처를 이모라고 부르게 함으로 보디발과 밀접한 관련을 짓고 있습니다. 물론 이는 작가의 상상력이지만 어떻든 이름이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요셉의 아내가 된 그 딸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그 이름은 아스낫입니다. 그런데 이는 '네이트(Neith) 여신에 속한' 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면 요셉은 이방신을 섬기는 가정에 그것도 그 일의 선봉에선 사람의 집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칫하면 그 영향을 받아서 우상을 섬기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신앙생활을 잘 하다가 이방 여인들 때문에 급기야 우상을 섬기는 자가 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달랐습니다. 그는 우상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끝까지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명철로 주신 직분, 사명을 잘 감당하여 많은 생명을 살렸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자신의 아내에게 히브리신앙을 철저하게 가르쳐 지키게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 점은 후에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받아들여 열두 지파의 수장으로 삼은 것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48:5) 아스낫이 자녀들에게 바른 신앙교육을 하지 않았다면 그런 일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으셨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바로 이러한 요셉과 같이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는 아름다운 인물들이 되며 여러분의 가정이 모두 예수 믿고 구원받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렇게 가정을 이룬 요셉은 두 아들을 낳게 됩니다. 그런데 그는 아들을 이름을 지으면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선 첫 번째 아들입니다. 그는 그 아들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는잊어버리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잊어버리게 하셨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동안 자신이 당했던 모든 고난과 아비의 온 집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형들에 의해 노예 신세가 되어졌던 것이며 또한 억울한 누명으로 죄수가 되었던 일들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우리는 간단히 말할 수 있지만 요셉에게서는 그야 말로 엄청난 상처와 고통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러한 것을 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17살 나이에 늙은 아버지에게 작별인사 한 마디도 못하고 노예로 팔리게 한 인신매매범 형제들, 성실하게 일하면서 살아보자 했더니 자기를 파렴치범으로 몰고 감옥에 넣은 그 여자, 그리고 어쩌면 알면서도 자신을 감옥에 넣었을 보디발, 감옥에서 도와달라고 애걸했는데도 까맣게 잊었던 관원장. 어떻게 이들을 잊을 수 있었을까요?

5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그렇습니다. 내 힘으로는 평생 못 잊을 것입니다. 인간의 감정 두뇌구조가 그렇습니다그렇게 인간의 뇌가 인간 자신을 스스로 무너뜨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잊게 해주셨습니다.

이제 더 이상 과거의 아픔과 상처로 인해 괴로워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과거의 그 아프고 괴로웠던 시간들, 상처들은 그냥 어이없고 재수 없고 고통스러웠던 시간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애굽으로 데려오시고 훈련시키고 총리가 되도록 하시기 위해 나아가 애굽뿐만 아니라 자기 가족을 구원해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이룰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 허락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자신에게 아픔과 상처를 준 이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밉고 저주스러운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섭리 그 인도하심을 깨닫게 되었을 때 형들을 향해 가졌던 미운 마음들이 몸 눈 녹듯이 녹아졌을 것입니다.

여러분 만일 요셉이 여전히 미움 가운데, 증오심 가운데 그리고 그 상처 가운데 그대로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는 분명 망가진 인생, 저주스러운 인생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만일 여러분 마음에 아직도 누군가를 향해 미운 마음이 있다면 싫어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저주입니다. 그렇다면 그 생각이 바르게 될 수 없습니다. 성령은 사람을 증오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아니 도리어 원수까지도 사랑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마귀는 친한 사람, 가까운 사람조차도 미워하게 만들고 멀어지게 만들고 보기 싫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다른 사람은 물론 자기 자신까지 괴로워하게 만듭니다. 그 공동체를 파괴하게 만듭니다. 잊어야 치유되고 살 수 있었습니다. 기억이 치유되지 않으면 살 수가 없었습니다. 기억이 힐링되어야 살 수 있었습니다. 잊게 해달라고 잊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또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래야 내가 치유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정말 중요한 한 가지는 꼭 짚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요셉은 잘못이 없었을까요? 이 부분, 영적 성숙에 중요한 부분이라서 깊은 묵상이 필요합니다. 요셉이 왜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았을까요?
고자질을 잘해서 그랬다고 성경이 말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숨겨진 어두움이 있었을까요? 요셉은 친어머니 라헬이 일찍 별세했습니다. 동생 베냐민을 낳고 죽었으며 그 후 코흘리개 친동생 베냐민과 함께 계모들 밑에서 나이 많은 형들의 눈치를 보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자기편이 없다는 강박관념으로 유일한 아버지 사랑을 지키려고 독점하고 싶어서 그 사랑을 빼앗기지 않고 점수를 따려 하다 보니 형제들의 잘못을 일일이 고자질하는 성격이 형성되어 있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창세기 37장 요셉 이야기 설교에서는 요셉이 형들의 과실을 고자실 했다는 것은 형들을 비난하려는 것보다 자기 자신에게 있어서 악은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했다.) 그런데 요셉이 과연 이런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인정할 수 있었을까요? 그런 수준이 되었을까요? 자기 성찰의 지혜 없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되지도 않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아프고 힘든 것이 내 잘못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가장 아픈 일입니다. 그런데 아마도 노예생활과 감옥생활을 통해서 요셉은 철저히 깨어졌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나라는 인간이 문제였구나. 그 증거가 형제들을 나중에 만났지만 복수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했을 것입니다형제들의 잘못도 보디발 가족의 잘못도 잊게 하시고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문제점과 죄책감도 용서하시고 그리고 잊게 하소서!
그리고 하나님께서 잊게 하셨습니다! 요셉으로 하여금 미래로 능력 있게 나아가는 첫걸음이 잊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이 크게 성공하지 않았어도 여기에서 이미 요셉은 성공했다고 믿습니다.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알고 치유한 것만 해도 그는 이미 성공한 것이었습니다!
잊게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잊게 하셨습니다분노의 기억, 억울함의 기억, 상처의 기억을 므낫세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는 영원히 기억하는 것, 부끄러움만 잊는 것, 주님! 우리의 기억을 치유하소서!

 

그런데 잊게 하시는 하나님은 또 있게 하셨습니다!

본문 52절을 보십시오. 차남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

'에브라임'열매를 많이 맺음이라는 단어에서 유래된 두 배의 결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는 풍성한 복이 가득하다는 뜻입니다. 빈손으로 노예로 끌려왔던 이 애굽 땅,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는데, 아무것도 없었는데 열매가 있게 하셨습니다. 그것도 두 배로 말입니다. 빈손으로 시작했는데 가득 채워주셨습니다! 그는 실로 있게, 풍성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복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므낫세 해야 에브라임이 옵니다! 우리의 삶에도 풍성한 열매가 가득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 풍성한 복은 그냥 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요셉은 내가 수고한 땅이라고 말합니다. 성실히 부지런하게 남보다 열심히 수고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도움을 기다렸습니다. 또 기다렸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번성하게 하시는, 즉 있게 하시는 복을 주신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진심을 다해 수고하면 주님께서 도우실 것을 믿습니다!

1281~2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에베소서 3:20~21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그런데 여러분 요셉이 둘째 아들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부른 것에서 우리는 이날까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배은망덕한 사람은 은혜를 배반하고 베풀어준 덕을 잊어버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은 짐승만도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하는 사람은 귀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내게 은혜를 끼쳐 주신 고마운 분들의 그 은공 잊지 맙시다.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부모님의 은혜, 형제들의 도움, 스승의 은혜, 고마운 이웃들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근원적인 큰 은혜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마시는 공기와 물, 밟는 땅, 쪼이는 햇빛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더구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이 땅에 보내셨기에 우리가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대림절 기간을 맞고 있습니다. 대림절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고대하며 주님의 성탄절을 맞을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아기의 몸으로, 가축들이 머무는 축사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과 용서하심과 평화를 얻고 하나님의 자녀, 천국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결코, 잊지 않고 늘 감사하고 더욱 주님의 사랑과 은총을 깊이 묵상하며 대림절 기간 지내시기 바랍니다. 2019128일 주일 낮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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