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마누엘의 사랑 | 박승남 | 2019-12-2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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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마태복음1:18-25절 개역개정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24.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임마누엘의 사랑 마1:18-25 어제 우리 어린이들 학생들 그리고 아동센터 어린이들과 부모님들과 함께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하는 발표회를 했습니다. 참으로 기뻤고, 감사했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각자 살 수 없지요. 혹 고고하게 혼자 살아가는 이들도 있지만, 그 사람도 그 누군가의 도움과 협력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함께 한다는 것이 귀하지요. 친구와 함께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고 가족과 함께하고 성도들과 함께하고 주님과 함께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왜 오셨나요? 함께 하시기 위해서이지요. 임마누엘,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는 것입니다. 사실은 하나님은 늘 함께하셨습니다. 구약시대에도 자기 백성들과 함께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부족하다고 여기셨는지 주님은 사람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셔서 친히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셨습니다. 그러므로 함께하시는 것을 친히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영으로 함께 하시지요.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고 느낄 수 없기도 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주님을 사모하는 사람들은, 깨어 있는 사람들은 그 주님을 느끼고 함께 하심을 경험하고 그 사랑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마태복음을 보면 1장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서 임마누엘이 언급되었습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 구절 28:20절에서 예수님이 제자들과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임마누엘입니다. 처음과 끝이 임마누엘입니다. 사실 마태가 들려주는 예수님의 이야기는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이 기록될 당시 사람 중에는 예수님은 이미 승천하셨기 때문에 더 자신들과 함께 계시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마태를 통해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다. 나는 늘 함께한다. 내가 사랑하는 공동체와 함께한다. 모든 조속을 제자로 삼기 위해 선교하는 제자들 가운데 함께 한다"고 말입니다. 아프리카 선교사업에 큰 공헌을 한 리빙스턴이 아프리카에서 헌신하다가 영국에 돌아와 옥스퍼드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던 날 예배 시간에 학생들에게 설교하게 되었다. 그때 리빙스턴은 사자에게 공격을 받아 불구가 된 한쪽 팔을 옆구리 아래로 늘어뜨리고 고통스럽던 나날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강조했다. "사랑하는 학생 여러분, 내가 어떻게 고독과 고통과 역경을 이겨나갔는지 그 비결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는 주님의 약속이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내 곁에 서서 나와 함께 하심을 확신할 수 없었다면 저는 버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지난날을 회고하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함께 하시고 도우시는 그 주님을 간증할 때 분위기는 숙연해지고 도우심을 체험한 리빙스턴의 얼굴에는 기쁨의 미소가 넘쳐흘렀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마태복음 18:20절을 보면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시기 위해 오신 날 그날이 성탄절입니다. 우리가 슬플 때나, 기쁠 때나, 병들었을 때나 건강할 때나 기분이 좋을 때나 그렇지 않을 때나 외롭고 풀이 죽고 기가 죽어서 측은해 보일 때도 늘 우리와 함께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왜요?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함께 하고 있잖아요. 여러분 마태복음을 위시한 복음서 전체가 예수님이 사람들과 함께하신 이야기입니다. 임마누엘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그 가운데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지요. 기적이 일어났지요. 치유가 있었지요. 기쁨과 소망이 넘치게 되었지요. 뜨거운 감격의 눈물이 흐르게 되었습니다. 보십시오. 1. 임마누엘 사랑은 죄인들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지난 13일(금) 경향신문에서 사건이 있었습니다. 진보적인 신문이고 제가 자주 들어가서 기사를 확인하고도 있는데 아주 안 좋은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기자가 어느 기업(SPC)의 잘못된 일을 취재하고는 기사화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그 기업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신문사에 전화했습니다. 그리고 어쨌든 이런저런 과정을 통해서 5억을 협찬 받고 그 기사를 삭제한 사건입니다.(경향신문지회에서 공개사과했음) 기가 막힌 일이지요. 진보적인 신문에서 말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다른 신문사에서 이 일을 보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특히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는 그 반대편의 처지에 있는 신문사들인데, 그래서 호재가 될 수 있는 내용인데, 얼마든지 이것을 알리고 싶을 텐데, 왜 그들은 이것을 알리지 않았을까요? 그들 역시 그런 관행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래서 그들 보기에는 그것이 별문제가 되지 않으니까. 자기들도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모든 신문사가 다 마찬가지이지요. 이런 것을 보면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보수도 진보도 결국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누가 상대적으로 더 낫냐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주님 앞에서는 죄인인데 그런데 그 죄인 중에서는 자기의 죄 됨을 깨달은 사람, 부끄러워하고 가슴 아파하는 이들, 시인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숨기고 가리고 안 지은 척하며 끝까지 자신은 잘못이 없다고 뻔뻔하게 굴며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도 있습니다. 주님은 죄인들을 위해 오셨는데, 주님 앞에서 어떻게 할 것입니까?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주님의 사랑에 감격해서 주님 앞에 자기의 죄와 허물을 드러내는 사람들은 아무리 중한 죄인일지라도 주님은 그들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십니다. 사실 주님이 용서하지 못할 죄인이 없습니다. 김대두 같은 사람도 고재봉 같은 사람도, 지존파 김언양 같은 사람도 그리고 저 같은 사람도 주님은 얼마든지 용서하실 수 있는 한 없이 넉넉한 분이십니다. 회개하면 말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마9:12-13) 여러분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짧은 인생을 사셨지만, 그는 부유한 사람들과 많은 시간을 하지 아니했습니다. 권력으로 천하를 호령하던 사람들과 모든 것이 갖추어진 사람들과 함께하지 않으셨습니다. 깨끗하고 죄 없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보다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과 함께하였습니다. 세상에 비난을 받는 세리와 함께하시고 병든 몸으로 인해, 신체장애로 인해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정죄를 받고 희망없이 살아가던 이들과 함께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고 위로해 주었고 그들의 아픔을 싸매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변하여 새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유명한 아씨시의 성자 프랜시스에게 어느 날 제자 한 명이 물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의 생애 속에 놀라운 기적들이 나타날 수 있는 이유와 선생님이 가지신 성자와 같은 인격의 비밀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선생님의 기도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 보이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이때 프랜시스는 이런 유명한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거야 간단한 말이네.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지구를 내려다보셨네. 그리고 가장 추한 사람은 누구인가, 가장 불결한 삶으로 고통받고 고민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찾으셨네. 하나님의 그 눈길은 나에게 머물렀지. 나를 본 순간 하나님은 박수를 치셨다네. '저 사람이야. 저 사람을 붙들어 내가 한 사람의 생애를 어떻게 놀랍게 변화시킬 수 있는가를 보여주어야지' 이것이 하나님이 나를 선택한 이유일세!" 여러분 사람들은 죄인을 싫어하지만, 우리 주님은 죄인들이 자기에게 나오시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십니다. 우리는 누구나 죄를 범하여 하나님 앞에서 쫓겨난 자요, 하나님과 원수 된 자요, 본질상 진노의 자식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자들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의인에게는 예수가 필요 없습니다. 죄인에게만 예수가 필요합니다. 만일 우리가 의인이라고 스스로 생각한다면 우리에게는 예수가 필요가 없는 자일 것입니다.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할 때 임마누엘- 하나님이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하시어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여러분 본문 21절 말씀을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그 이름 자체가 여호와는 구원이시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죄 가운데 있을지라도 주님께 나오면 임마누엘 주님의 사랑과 용서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2. 임마누엘 사랑은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야드 바셈(Yad Vashem)이라는 박물관이 있습니다. 6백만 유대인의 학살을 절대로 잊지 말고 영원히 기념하라고 1945년을 기점으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역사를 정리해 놓은 유대인 학살기념관입니다. 어린아이의 희생을 기념하는 기념탑 뒤편 언덕에는 어린아이 10여 명을 끌어안고 있는 어른의 동상이 있습니다. 동상의 이름은 '코르작과 게토의 어린이들'(Korzak und die Kinder des Getto)입니다. 코르작(Janusz Korczak)은 폴란드의 아동작가이며 교육자입니다. 독일 나치가 폴란드의 유대인 학교를 급습하였습니다. 교실에서 공부하던 아이들이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고 있었습니다. 코르작은 아이들을 양팔로 감싸 안으며 내놓지 않았습니다. 독일군 장교가 말합니다. "당신은 유대인이 아니니, 선생은 물러나고 유대 아이들만 내놓으시오!" 그러나 코르작은 필사적으로 독일군에게 저항합니다. 끝내 아이들과 함께 가스실로 향하는 트럭에 올라탑니다. 스승으로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아이들을 그냥 보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과 동행하였습니다. 가스실에도 함께 들어가 죽음 앞에 두려워 떨고 있는 아이들을 위해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이 말합니다. "선생님,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끝까지 함께 해주시니 편안해요. 하나님이 지켜 주시니 더는 두려워 떨지 않을 거예요." 본문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에 기초하는 내용입니다. 이사야 7장 14절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 말씀을 주신 배경을 보면 당시 유다는 전쟁의 위협으로 사시나무 떨듯이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북이스라엘과 아람 나라가 동맹을 맺어 쳐들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왕을 비롯하여 온 백성들이 두려워 떨며 전전긍긍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럴 때 하나님은 믿기만 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임마누엘의 예언을 주셨습니다. 진정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을 굳게 믿지, 아니하면 굳게 서지 못하게 (사7:9) 됩니다. 여러분 세상은 성난 파도 같습니다. 때로는 황량한 사막과도 같습니다. 이러한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는 질병과 불행과 죽음과 미래에 대한 염려와 근심으로, 불안해하고 두려워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때 주님께 나아가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아픔과 고통이 변하여 기쁨과 감사의 조건으로 변합니다. 왜입니까? 임마누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걱정하지 말라 염려하지 말라……. 모든 것을 내게 맡겨라. 내가 항상 너와 같이하겠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주님 앞에 모든 것을 다 맡깁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감사와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되었고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 되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370장 1,2절) 3 임마누엘 사랑은 잃어버린 자들에게 나타났습니다. 어떠한 사람은 "미움받는 것보다 잊히는 게 더 무섭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불행하게도 잊힌 자, 잃어버린 자가 많이 있습니다. 마땅히 관심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무관심 속에 버려져 있는 사람들, 소외된 이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대부분 사람은 유유상종, 자기의 유익 때문에 사람을 만나고 교제합니다. 자기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사람과는 같이 하려 하지 않습니다. 대신 배움과 소유와 환경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입니다. 그 사이에는 누구도 끼어들어 올 수 없는 높은 담벼락이 있습니다. 그래서 외로워하고 슬퍼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좌절하고 절망합니다. 참으로 세월이 지나갈수록 사랑은 식고 살기가 더욱 각박해져 갑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이 땅에 오신 가장 커다란 이유를“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심이라(눅19:10)”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위한 삶을 살지 아니하고 죄인과 잃어버린 사람들, 병든 이들을 위한 삶을 사시다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는 우리는 바로 이러한 주님의 정신을 본받아 살아야 합니다. 이 땅에 잃어버린 사람들, 가난과 싸우고 질병과 싸우고 수많은 상처와 싸우고 있는 저들에게 힘을 주고 용기를 주는 일을 우리 교회가 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 그러니 작은 자, 무시당하고 업신여김을 받는 사람을 큰 사람처럼 높여 주라는 것입니다. 아시시의 성자 프랜시스는 어떤 때 길을 가다가 한 가난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그때 제자들에게 "우리 입은 옷을 그 주인에게 드리자. 우리가 입은 옷은 우리보다 가난한 사람을 만날 때까지 빌려 입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면서 옷을 벗어 주었습니다. 제자 중 한 사람은 "너무 옷을 입지 못하고 다니면 우리 하는 일에 장애가 됩니다."고 만류를 하니까 "나는 절도 자가 되기보다는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 가난한 사람에게 주지 아니하는 것은 절도에 해당한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주시는 삶을 사셨습니다. 용서와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자기 생명까지 아끼지 않고 내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참 신앙은 무엇인가요? (약1:27)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나누어 주면서 살기를 바랍니다. 웅크리고 끌어안지만 말고, 손을 펴고 가슴을 펴고 너그럽게 나누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함께하시어 더욱 나누어 주고 베풀 수 있도록 해 주실 것입니다. 또한, 더욱 성탄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임마누엘, 복된 성탄절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가난하고 병들과 지치고 두려워하는 인생들, 죄에 매여 신음하고 소외되어 슬퍼하는 이들과 함께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여러분과 저와 함께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믿어야 합니다. 아무리 주님이 함께하시어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 주시기를 원하셔도 우리가 믿지 않으면 마음에 모시지 않으면 주님의 사랑은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뜨겁게 환영하며 영접함으로 임마누엘 그 사랑을 깊이 체험하며 감사와 기쁨과 영광을 돌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2019년 12월 25일 성탄절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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