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으로 새로워지는 교회 | 박승남 | 2020-01-05 | |||
|
|||||
느2:17~18, 엡5:26~17 말씀으로 새로워지는 교회 어떠한 일을 결심해 놓고 3일도 안 되어서 포기하는 경우를 두고 작( )삼( )이라 한다. 빈칸을 채우세요. 초등학생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런 답이 나왔습니다. 작(은)삼(촌) 올해는 작은 삼촌이 되지 않고 결심했던 일들을 잘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총회는 제104회기 주제를 말씀으로 새로워지는 교회로 정했습니다. 말씀을 붙들고 그 목표를 새로워지는 교회로 삼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고, 말씀으로 구원을 약속하셨고, 말씀으로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에서 개혁의 원리를 찾았고, 오직 성경으로 개혁을 이루었습니다. 교회가 새로워진다는 것은 교회가 ‘성경의 교회’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날마다 자기를 혁신하여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새로워지는 교회를 정한 것은 그만큼 한국교회가 말씀에 이탈되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붙들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정신에서 멀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씀으로 새로워지는 데 총회는 새로워짐의 영감을 느헤미야를 통해 주신 말씀에서 받았습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이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는 비보를 들었습니다. 이때 여러분 같으면 어떠한 반응을 보였겠습니까? 그냥 무관심할 수도 있고 참 안됐다 하고 그냥 잠깐 동정이나 하다가 그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아니 포로에서 돌아간 지가 얼마나 지났는데 아직도 성을 복구 못 했어. 성문들은 왜 다시 세우지 못한 거야?” 하고 비난하거나 화를 낼 수도 있었습니다. 주전 538년에 포로에서 돌아갔고 지금 느헤미야 시대는 주전 444년입니다. 그러니까 1차 포로 귀한 이후 무려 94년이 지났고 2차 포로 귀한 이후 13년이 지난 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 수일 동안 슬퍼하며 금식기도를 하였습니다. 여러분 당시 느헤미야는 고위직 공무원으로 문제없이 편안하게 살고 있을 때인데 말입니다. 여러분 그의 기도는 회개의 기도였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예루살렘 성이 허물어지고 성문들이 불탄 것은 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어림잡아도 그가 태어나기 100년보다 훨씬 이전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는 애통해한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이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나 한국교회는 문제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 문제를 수없이 나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얼마든지 비난하고 정죄하고 화를 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이제 우리도 느헤미야처럼 애통해야 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기도했습니다. 나와 내 아버지의 집에 범죄하여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자기도 범죄했다고 악을 행하였다고 말씀을 지키지 않았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무너진 것을 다시 쌓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진정한 회개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위기는 기회가 됩니다. 이러한 회개는 훗날 느헤미야 9장에 나오는 바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개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다 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 옷을 입고 티끌을 무릅쓰고 낮 1/4은 제자리에 서서 율법책을 낭독하고 낮 1/4은 죄를 자복하며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순종하지 않고 주님을 거역하며 율법을 등지고 고집하는 어깨를 내밀며 주께로 돌아오기를 권면하는 선지자들을 죽여 주님을 심히 모독하였다고 회개하였습니다. 여러분 느헤미야는 민족을 사랑한 사람입니다. 또한, 기도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의 기도는 그저 감상적인 기도로 그치지 않고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문제를 직면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의 열매입니다. 그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려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선 왕의 허락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일을 염두에 두고 기도하였습니다.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들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왕 앞에 있을 때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자기의 뜻을 밝혔습니다. 그러자 왕의 허락이 떨어졌습니다. 그를 유다의 총독으로 파송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도착하게 된 느헤미야는 도착한 지 사흘 만에 몇몇 사람과 함께 조용히 무너진 곳을 살폈습니다. 그리고는 귀족과 방백들에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당한 곤경은 너희도 보고 있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 하고는 하나님의 선한 손이 자신을 도우신 일과 왕이 자기에게 이른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러자 감동한 지도자들이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였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벽을 수축하게 되었는데 이 일은 저절로 되는 일도, 쉽게 되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안팎의 문제와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굳게 서서 대적들의 방해를 물리치고 내부 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솔선수범함으로 가능하였습니다. 이전 총독들은 백성에게서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 40 세겔을 빼앗았고 또한, 그 부하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습니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그렇게 하지 않고 도리어 성벽 공사에 힘을 다하였으며 총독의 녹을 요구하지 않고 경제적인 이득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있는 사람이 더 가지려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의 탐욕을 잘 표현해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욕심은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결국 공동체와 자기 자신까지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기에 욕심이 아니라 거룩한 비전으로 삽니다. 자기 혼자만 살려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살리려 합니다. 하나님을 의식함으로 부정하게 살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며 삽니까? 얼마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습니까? 말씀으로 새로워지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느헤미야처럼 기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며 또한, 느헤미야처럼 하나님의 경외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아니하니라(눅12:15) 그리고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 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0~21)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물질에 자유하십니까? 얼마나 하늘에 보물을 쌓고 있습니까? 아직도 물질에 매이고 물질에 인색합니까? 그러면 새로워질 수 없습니다. 여러분 물질이 여러분을 자유롭게 하고 여러분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 그렇습니다. 진리의 말씀이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사람은 물질에 매이지 않고 힘써 주님께 드립니다. 이웃을 위해 선한 일에 힘씁니다. 물질과 재능과 시간과 몸으로 헌신합니다. 느헤미야 10장 35절 이하를 보면 회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해마다 토지 소산의 맏물과 각종 과목의 첫 열매를 여호와의 전에 드리기로 하였고 또 산물의 십일조를 레위 사람들에게 주리라 결단하였습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십일조 생활을 못한 것입니다. 생활이 너무 어려워서 그랬는지 아니면 물질에 대한 인색한 마음에 그러했는지 아무튼 저들은 자신들의 삶을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구약에서 십일조는 종교적인 용도와 아울러 공동체적 축제(교제, 기쁨)와 사회복지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다는 것은 레위인들과 제사장 그리고 성전을 돌보지 않은 것이며 가난한 이들을 돌보지 않은 것이며 성도의 교제와 공동체의 기쁨을 상실케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헌금원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것이라는 사실에 근거합니다. 나의 토지가 하나님의 것이며, 거기에서 발생되는 소출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헌금의 기준이 십일조였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소득의 전부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망각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일에 필요한 것을 제공하지 않는 직무유기였으며 공동체를 돌아보지 않는 악한 것이었습니다. 수입이 있음에도 십일조를 못 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그것은 물질에 매여 있다 볼 수도 있고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것을 신뢰하지 못하는 표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헌금원리는 신약시대에도 이어집니다. 즉 교회 유지를 위해,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기 위해 그리고 복음 사역을 활발하기 이루기 위해 헌금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초대교회는 십일조가 아니라 밭을 팔아 전부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 필요한 자들이 궁핍을 해결하고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행4:34~35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물론 오늘날 십일조를 하지 않는다고 율법의 잣대로 정죄하고 위협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헌금을 관리하는 교회 지도자들이 바르게 헌금을 집행해야 할 책임도 있습니다. 인간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십일조를 사용해서도 안 됩니다. 십일조는 구원의 조건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며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진정 하나님의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어려운 이들을 돌보는 마음이 있다면 정상적인 헌금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저도 십일조를 안 드릴 때가 있었습니다. 훈련소에서 멋진 장교를 만났는데 그 분이 몇몇 크리스천 사병을 자기 사무실로 데려다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중에 십일조는 율법이기에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설득력 말했는지 제가 정확히는 모르지만 한 두 번 십일조를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장교가 구원파 신자라는 것도 말입니다. 여러분 십일조에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마음이 깊이 담아져 있습니다. 이것을 율법이라 치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못하던 성도들은 이제부터라도 느헤미야 시대의 백성들처럼 십일조를 드리라는 결단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마음을 비운 느헤미야의 결단으로 공동체의 하나 됨이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귀족과 민장들이 백성들에게서 높은 이자를 받아 원성이 높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느헤미야는 그들의 행위를 꾸짖고 이자 받기를 그치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지도자들이 느헤미야의 말을 따라주었습니다. 개혁에는 항상 반대가 있기 마련인데 느헤미야가 솔선수범하고 느헤미야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도자들이 잘못을 고치고 그러니 공동체가 평안하여서 한마음 한뜻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도움으로 52일 만에 무너진 성벽이 완공되었습니다. 참으로 말씀의 역사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에베소서 5장 26절을 보면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개인과 공동체의 허물과 죄를 보게 합니다. 그리고 회개하도록 합니다. 또한, 회개한 우리를 십자가 보혈로 깨끗하게 합니다. 나아가 영혼이 자유하게 하고 평안케 합니다. 기쁨으로 섬기게 합니다. 물질에 매이지 않고 주님께 매이게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우리 인생을 책임져 주십니다. 공동체에 기쁨이 넘치게 하십니다. 다윗은 고백했습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은혜의 잔, 기쁨과 감사의 잔, 평안의 잔이 넘치게 하십니다. 아멘! 성벽재건 이후 유다 백성들은 수문 앞 광장에 모여 에스라 그리고 레위 사람들과 함께 말씀 부흥의 시간을 갖습니다. 성벽재건에 진력한 느헤미야는 이제 한발 뒤로 물러납니다. 그리고 영적 지도자들이 앞에 나서서 말씀을 외칩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학사 에스라입니다. 에스라는 특별히 지은 나무강단에 서서 백성 앞에서 율법 책을 폈습니다. 그때 모든 백성이 일어섰습니다. 말씀에 대한 경외심을 보여 준 것입니다. 우리 식으로 하면 성경 봉독 시간에 일어서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게 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아무튼, 온 백성들이 말씀을 듣고 깨닫고 회개하고 자복하며 울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말씀으로 새로워지는 교회”라는 주제를 통하여 기대하는 한국교회의 변화된 모습입니다.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고넬료의 집에 들어선 베드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고넬료와 그 가족들이 베드로를 맞이하는 모습이 지극 정성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넬료는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놓고 기다렸습니다. 그리고는 베드로가 들어온다는 소리를 듣고 마중 나와서, 그의 발 앞에 엎드려서 절을 하였습니다. 세상에, 당시 고넬료는 옛날 우리나라 일본 헌병과도 같은 위치였습니다. 그것도 점령군 장교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어부 출신 베드로에게 지극한 존경과 경외의 표시로 절을 한 것입니다. 그는 주님을 영접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을 들고온 베드로를 영접한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것이 지나치면 인간숭배가 될 수 있기에 베드로는“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을 자기가 가로채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2:13절을 보면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자세가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 주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씀을 붙들고, 초막절을 지키고, 제사를 새롭게 하고, 이방 결혼을 금지하며 십일조를 드리고 그로인해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로 하여금 제 역할을 하게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성전 봉헌자들을 세우고, 통솔자들을 임명하고, 거주자들을 정하며 예루살렘을 명실상부한 신앙의 중심지로 세우면서 느헤미야는 마무리됩니다. 바로 이러한 모습이 우리 교단과 한국교회, 나아가 한민족 공동체가 되어야 할 그림입니다. 지금 세상은 ‘교회를 교회답게 하라’는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교회가 교회답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이 세우셨습니다. 주인도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교회가 교회답지 않았다는 것은 교회를 세우신 주님의 뜻을 무시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주인 되신 주님을 제쳐놓고 인간이 주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교회 외에 대안이 없으십니다. 그래도 교회를 통해 이 민족을 살리고 새롭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먼저 우리가 새로워져야 합니다. 다시금 주님께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는 새로워질 것입니다. 세상에 감동을 주고 희망이 될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워지면 주님이 매우 기뻐하실 것입니다. 물론 교회가 목적은 아닙니다. 교회 왕국을 세워서도 안 됩니다. 목회자는 은퇴한 후에 주님의 이름만 남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3가지 실천사항을 내놓았습니다. 1) 매일 말씀 묵상, 기도하며 말씀대로 사는 성도가 되자 2) 사랑의 섬김으로 예수 안에서 가족 공동체를 이루자 3) 세상에 나가 소금과 빛으로 칭찬받는 하늘 청지기가 되자. 우리 함께 올 한해 더욱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도록 기도하며 힘쓰시기를 소원하며 축복합니다. 2020년 1월 5일 주일 낮 예배 설교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