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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판단(심판)하는 사람아! 박승남 2020-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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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 남을 판단(심판)하는 사람아!

 

생활성서사에서 출간된 배꼽 없는 사람은? 이라는 책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다른 사람이 그렇게 행동하면 볼썽사납지만, 내가 하면 단지 긴장한 탓이다. 그가 자기 식대로만 하면 고집불통이고, 내가 그러면 단호함이다. 그가 친구를 싫어하면 편견이 있는 것이고, 내가 친구를 싫어하면 그건 단지 인간 본성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가 아부를 좀 하면 손을 비벼대는 것이고, 내가 그러면 머리를 좀 쓰는 것이다. 그가 무슨 일을 하는 데 시간을 들이면 너무 느려터진 것이고, 내가 그러면 신중한 것이다. 그가 잘못을 끄집어내면 까다로운 것이고, 내가 그러면 분별력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남을 판단한 대로 자신이 하나님께 심판을 받을 것이고 남을 저울질하는 대로 자신이 저울질을 당할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중 지휘관 한 명이 막대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전방에 나갈 지원자를 뽑고 있었다. 그는 지원자는 두 걸음 앞으로 나와 서라고 했다. 그 순간 부하 한 명이 전갈을 들고 오는 바람에 그는 잠시 시선을 그쪽으로 돌렸다. 지휘관이 이야기를 마치고 다시 장병들을 쳐다보니 일렬로 늘어선 장병들의 행렬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그는 소리를 버럭 지르며 장병들을 나무랐다. 그러나 그는 모든 장병이 두 걸음 앞으로 나와 서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렇듯 우리는 모두 남들을 섣불리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본문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원문에는 그러므로 변명(핑계)할 수 없다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120절에서도 같은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 세상 창조 때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 곧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은, 사람이 그 지으신 만물을 보고서 깨닫게 되어 있기 때문에 핑계를 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도 핑계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 여기 판단하다는 단어는 남을 심하게 비난하고(14:3, 4, 10), 심지어는 정죄하고 벌하는(벧전 4:6; I8:8)’ 행동까지 포괄하는 단어로 이는 당시 로마 교회 안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현재 로마 교회 안에 존재하는 어떤 부류의 교인들이 다른 교인들을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바울이 로마 교회의 형편을 구체적으로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판단하다라는 말에는 판단(審判)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판단(審判)을 받으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로마 교회 안에 질을 하는 사람들이 있고, ‘질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인데 판단하는 사람은 누구이며 판단 받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분명하지는 않지만, 로마서 문맥으로 보아서 판단을 받는 이들은 로마서 118~32절의 내용과 관계된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이미 예수님을 믿고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그리스도인이지만, 아직도 이방에서의 옛 습관을 따라 살고 있던 이방인 신자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판단, 심판하는 자들은 누구일까요?

21절로부터 판단하는 사람을 2인칭 단수인 ’(you)라고 지칭합니다. 그래서 개인 같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문제를 삼고 있는 것은 한 개인이 아니라 무리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1절 맨 마지막에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라는 표현으로 보면 이방인들은 그들의 옛 습관에 따른 생활을 계속하고 있으며, 동시에 비판하는 자들의 비판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결과 로마 교회는 심한 분쟁에 휘말리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비판하는 자들에 대한 책망이 먼저 나옵니다.

 

이어서 2절을 보면 마지막에 우리가 아노라(오이다멘(oi[damen[])-(원어에는 제일 먼저 나옴)라고 하는데 뭘 안다는 것일까요? 남을 판단하면서 같은 일을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된다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안다는 말은 보아 알다 지각하다 경험하다 주목하다 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사실을 우리가 주목하고 있고 분명하게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사도바울만 알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남을 판단하는 이들에게 사도 바울은 심판을 선언합니다. 1절에서 핑계할 수 없고 네가 너를 정죄한다하고 2절에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고 했고, 3절에는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라고 강하게 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고 말할 정도이면 분쟁의 책임은 남을 비판하는 자들에게 더 많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죄를 지적하지만, 그들이 누구인지는 분명하게 밝히지 않습니다. 단지 편지를 읽는 독자들 스스로 느끼고 그들의 잘못을 고치도록 합니다. 복음의 힘은 사람들의 잘못을 느끼고 돌아서게 하기에 충분한 능력이 있다고 믿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로마 교회 안에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요? 로마 교회의 상황에 대해 다시 말씀드리면 로마에는 적어도 다섯 곳에 예배 처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주축은 주로 유대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후 49년에 글라우디오 황제가 유대인을 추방하는 법령을 반포한 뒤 추방된 유대인은 주후 54년에야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로마 교회는 5년 동안이나 유대인이 없는 상태에서 발전해 온 것입니다. 그러니 자연스레 로마 교회가 이방인 중심의 교회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로 돌아온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그동안 변한 교회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눈에 비친 문제점1)먼저는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다수(多數)가 되어 있는 점이고, 2)그들이 교회 밖 이방인들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하고 있는 모습이고 3)그들이 율법을 모른 채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문제를 삼은 것으로 교회 안에 갈등의 핵심이 되는 것은 율법과 할례였습니다(212~29절을 보면 율법과 할례에 집중).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율법 없는 신앙생활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모습이 로마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겠습니까?

 

유대 기독교인들은 이방 기독교인들을 비판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교회 안에는 유대인과 비유대인들 간에 갈등이 고조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울은 유대인의 잘못을 지적합니다. 가장 먼저 지적한 것은 그들의 비판적 태도였습니다. 그래서 2장은 남을 판단(심판)하는 사람아 하고 유대인을 나무라면서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유대 기독교인들의 비판이 왜 잘못된 것일까요?

바울의 책망은 두 가지 면에 집중합니다. 첫째는 유대인들의 비판하는 태도입니다. 아마도 그런 자세가 교회 안에 내분을 일으켰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비판 중에도 건전한 비판이 있습니다. 진정 공동체를 위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므로 그가 잘 되기를 바라는, 더욱 성숙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비판입니다. 이러한 비판을 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도 돌아봅니다. 혹시 내 눈에 들보가 있지 않은가 하면서 말입니다. 둘째는 그들이 남을 비판하면서도 같은 일을 저지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같은 일을, 이런 일을 행한다는 표현이 21~3절 안에 세 번이나 반복해서 언급된 것을 보면 이 일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유대인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말인 동시에 이방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상을 지적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방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로마 사회에서 자행되고 있는 죄들을 은연중 저지르거나 그러한 죄에 대해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또 다른 차원에서 판단하고 있는 죄들을 계속해서 저지르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생리적으로 비판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런 태도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인가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2:3) 하고 책망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유대인들의 비판 잘하는 태도를 책망하셨습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7:3)라고 하셨습니다.

닐 앤더슨이 쓴 [내가 누구인지 이제 알았습니다]라는 책에 권면은 하되 판단은 하지 말라는 내용을 보면 이러합니다.

권면(Discipline)은 당신이 목격한 행동에 대해 하는 것이고(6:1) 판단(Judgment)은 인격에 관한 문제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죄에 대해서는 대결해야 하겠지만, 그들의 인격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7: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14:13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행위를 권면하는 것은 우리의 할 일이지만, 인격을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우리 스스로 성령의 역할을 대행하려고 할 때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받거나 거절당하게 된다. 우리는 단지 사람들을 용납해 주면 되고, 성령께서 적절한 때에 그의 일을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을 권면할 때, 자신이 직접 보았거나 혹은 개인적으로 들은 사실에 기초해야 한다. 의심이나 혹은 소문, 추측에 근거해서는 안 된다.

또한, 우리가 권면이라고 하는 것은 대부분 인격 모독일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할 수는 있어도 그들의 인격을 모독해서는 안 된다.

 

사단은 아주 괴팍한 놈이어서 믿지 않는 사람을 죄짓게 하는 방법이 다르고 믿는 사람을 죄짓게 하는 방법이 또 다릅니다. 우리 믿음이 좋아질수록 사탄의 유혹을 경계해야 합니다.

첫째는 사탄은 신앙심 깊은 사람을 꼬여 율법주의자가 되게 합니다. 예수를 믿으려면 성경에 있는 말은 그대로 지켜야 해!” 문자대로 옛날에 지나간 율법도 지키도록 강권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처럼 해야 한다고 고집스럽게 주장합니다. 이 유혹을 받아서 살면 율법주의자가 됩니다.

둘째"너는 구원받았고 이미 깨끗해 졌으니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 어떻게 살아도 구원도 받고 축복도 받느니라." 이 유혹을 받으면 방종 하는 신자가 됩니다.

셋째"예수 믿는다는 것은 무엇이냐? 보지 않고 어떻게 믿느냐? 표적과 기적이 일어나는 곳으로만 쫓아다녀라." 이 유혹에 빠져 살면 사이비 종파로 흘러가게 됩니다. 데살로니가 후서 29, 10절 말씀을 보면 사탄이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활동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146절을 보면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사탄은 "미혹의 영"인 것입니다(요일4:6).

 

어느 분의 수필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기 마을에 두 사람의 신자가 살았는데, 한 사람은 그 사람과 싸워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만큼 마음이 고약한 사람이었고, 또 한 사람은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을 막론하고 가난하고 병든 이웃을 정성껏 도와주어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몇 해 뒤에 두 사람이 차례로 암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은 예수는 믿되 아주 고약하게 믿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마음으로 고소하게 여기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사람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죽음과 맞섰다고 합니다. 그는 집을 팔아서라도 치료를 받으라는 가족의 권유를 물리치고 거꾸로 집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마음 씀씀이도 너그러워져서 모든 것을 양보하고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층집이 다 된 후에 그는 감사하면서 숨을 거두고 운명 직전에 감사헌금까지 했다고 합니다.

일 년쯤 지나서 존경받는 신자가 죽음을 맞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의 병듦을 애석하게 생각하고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음을 앞두고 취한 태도는 사람들의 생각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냉랭해지고, 하나님을 원망까지 했습니다. "나는 교회 일에 충실했고, 불우한 이웃에게 정성껏 도움을 주었는데, 결과가 이런 것이란 말입니까?" 저축해 놓은 돈을 모두 치료비로 다 써버리고, 울부짖고 원망의 말을 쏟아 내며 가족들을 괴롭히다가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무엇이 두 사람을 이처럼 다르게 만들었을까요?

존경받는 사람의 속에는 교만과 함께 늘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무서운 악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는 저 사람하고는 다르다. 나는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저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잘 믿는다고 하는 신자들이 자기도 모르게 빠져들어 가는 것이 바로 심판하는 죄, 남을 판단하는 죄입니다.

남을 판단하는 사람은 자기를 지나치게 의인화시킵니다. 그리고 자기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다른 사람을 심판하고 정죄하는데 바쁩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기에 하나님의 소리가 그에게는 들리지 않는 법입니다. 이런 죄가 살인이나 간음이나 도적질보다 결코, 작지 않은 죄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세리가 함께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바리새인은 자신 있게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토색하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 같은 다른 사람들과는 같지 않으며, 또 는, 이 세리와도 같지 않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18:9-14).

그의 마음속에는 교만과 남을 정죄하는 의식이 가득차 있었으니 하나님께 기도가 아닌 다른 사람을 고발하려고 온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의를 자랑합니다.

반면 세리는 얼굴을 들지 못하고 기도했습니다. 가슴을 치며, ",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기도했습니다.

유대인은 우상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율법도 열심히 지켰고 도덕적으로도 훌륭했고 법 없이도 살 사람들입니다. 재산을 팔아서 구제도 하고 금식도 하고 기도도 열심히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을 향해서 당신이 죽을 죄인이다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설사 어렵게 말을 한다 해도 곧이듣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자신이 죄인이라는 말씀에 엎드릴 수 없고 남을 판단하기에만 바쁩니다.

 

이어서 바울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이유를 열거합니다. 4절을 보면 그들의 행동이 곧 하나님을 멸시하(업신여기는)행위라고 합니다. 이는 어떤 특정한 이유로 한 대상에 대해 정도 이상으로 멸시하고 무시하는 식의 행동을 계속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그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멸시한다는 것일까요?

유대인은 스스로 위대한 민족이 된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이 유대인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4절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합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오래 참으심. 거기에 덧붙여지는 것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신다 것입니다. 4절에서 인자하심이란 단어가 두 번 반복됩니다. 풍성한 인자하심회개하게 하시는 인자하심입니다. 인자하나님의 선하심과 너그러우심을 말합니다. 이방인을 정죄하는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이방인보다 월등하게 우월하다고 자부하고 있지만, 우월감을 가질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합니다. 남을 정죄하면서 자신들도 똑같은 죄를 짓고 사는 것도 그렇지만, 유대인이 존재하는 이유가 모두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너그러우심과 특별히 인내하며 기다려 주시는 은혜가 있기에 그들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유대인과 유대인 신자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들과 같았던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 보며,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자신이 긍휼을 입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셨기때문이고, 이것은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딤전 1:16)고 했습니다. 바울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과거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도덕적 인간의 잘못은 무엇인가요?

첫째, 남을 비판함으로 자기들의 의를 드러내려 하기 때문이고 둘째, 이들은 자기의 생각에만 의존하여 살기 때문이며. 셋째는 그들이 악을 행하였기 때문에 심판을 받는 게 아니라,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는데도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5절을 보면 바울은 유대인 특유의 고집을 끄집어냅니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신분상으로 우선권과 특권을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자기들이 받은 특권만을 내세우고 그렇기에 그들은 회개하거나 돌이킬 줄을 모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태도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고, 멸시하는 것이며 그것이 그날에 임할 진노를 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으니 답답할 일입니다. 여기 고집경화된또는 딱딱한, 이란 뜻을 가진 단어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동맥경화증이란 단어가 여기서 파생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은 그야말로 영적 동맥경화증 환자들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돌이킬 줄을 모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날,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 날은 반드시 오는데, 그대로 간다면 그분의 진노를 피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보응7~10절과 같이 둘로 나뉩니다. 한편은 영생영광과 존귀와 평강이고 다른 편에는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입니다. 그리고 그 대상도 둘로 나뉘는 데 참고 선을 행하는 자들즉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들 그 반대로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들입니다.

당을 짓는 것은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의 위치에 오르기를 원하는 심리입니다. 자기가 그곳에 중심 자리를 차지하고 자기의 뜻을 이루려는 음모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들에게 당연히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가 따르게 됩니다. 그런데 9절에서 유대인과 헬라인을 언급한 것으로 보면, 현재 로마 교회들 안에서 당을 짓는 사람들은 유대인 크리스천과 이방 크리스천을 모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로마 교회는 파당으로 인하여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였기에 당 짓는 무리에게 혹독한 심판을 선언합니다. 유대인에게요헬라인에게라는 것은 당을 지어 교회를 어지럽히는 일차적 책임이 유대인에게 있지만 동시에 이방인도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외모는 의인들처럼 보입니다. 이방인과 구별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외모가 아니라 속마음을 보시는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누구든지,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당을 짓고 진리를 거스르는 자들에게는 환난과 곤고가 있을 것이요(2:9),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을 것(2:10)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심판 기준은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로 나누어지지 않고 예수 십자가를 믿고 의지하며 사느냐, 주의 영광만을 위하여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승리해 놓고 망하는 우리 성도들이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랍니다. 사탄의 꾐에 빠져 교만의 죄, 남의 쉽사리 판단하고 정죄하는 죄에 떨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대신 교만한 죄, 남을 판단한 죄를 회개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풍성한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오래 참으심을 붙들며 사시길 바랍니다. 2020920일 주일 낮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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