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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이제 회복하게 하소서 박승남 2020-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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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사도행전3:19-21절 개역개정

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20.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21.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10:1, 12 마11:20~24, 3:19-21 주여! 이제 회복하게 하소서

 

어느 마을에 잘 지어진 아름다운 교회의 벽에는 선명한 글씨가 쓰여 있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는다.” 언제부터 인가 건물 벽에 담쟁이 넝쿨이 자라나기 시작해서 벽에 쓰인 글을 가리기 시작했습니다. 벽에 쓰인 글 중에서십자가에 못 박힌이란 부분을 담쟁이 넝쿨이 가려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다.”라는 말만 보였습니다. 얼마 후 담쟁이 넝쿨이 더 자라나서 이번에는 그리스도를 가리게 되어 남은 말은 우리는 믿는다는 말이었습니다. 끝내는 이 담쟁이 넝쿨이 벽을 모두 가려 원래 있던 글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어둠에 밝히는 촛불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빛을 보기 위해 그리스도가 계신 교회로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몰려드는 사람에 갇혀 빛이 보이지 않자 교회는 큰 횃불을 세웠습니다. 횃불을 본 사람들은 더 많이 몰려들었습니다. 교회는 바람에 꺼지지 않는 전등을 밝혔습니다. 밝은 전등으로 더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더 이상 촛불에 관심이 없습니다. 교회는 밝아졌으나 영혼은 어두워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전원이 나가고 말았습니다. 세상은 다시 어두워졌고 교회는 캄캄해졌습니다. 사람들은 다시 촛불을 찾기 시작합니다. 그리스도는 어둠을 밝히는 촛불입니다.

 

지금은 어두워진 세상입니다. 주님을 가리고, 주님의 뜻을 외면하고, 주님을 잃어버리고, 내 생각, 고집, 욕심, 내 습관, 내 뜻으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이 어두워진 세상에서 우리는 코로나 19사태로 말미암아 비대면 예배라는 용어가 나오고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상황도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서로를 향한 비난도 경험했고 사회적으로는 교회공동체가 반사회적인 집단으로 매도당하는 아픔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코로나 이후를 논의하면서 진지하게 질문을 던지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 우리 한국 교회가 새로워질 수 있는가? 코로나 이전의 모습으로 회복될 수 있을까?’ 여기에 부정적인 전망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상황입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합니다. 하지만 그런데도 우리는 고백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희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주여, 이제 회복하게 하소서

그리고 말씀으로 돌아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찾아봅니다.

. 공동체 회복의 원리

1. 회복의 프로세스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의 말씀인 에스라 시대에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징벌을 받아 포로로 잡혀가서 소망을 품기 어려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유대 백성들에게 분명하게 계획을 말씀하셨습니다. 유대 백성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포로로 잡혀갈 것이지만 복역한 후에는 반드시 돌아오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도 포로 생활을 하는 유대인들은 현실적인 상황을 보면서 고통과 좌절을 뼈아프게 경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유대 백성들을 해방하실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그들을 3차에 걸쳐서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모두 한국 교회의 현실과 이에 대한 분석을 보면서 소망을 이야기하기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의 탄식과 유사한 탄식이 우리 가운데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상황이 그렇다고 소망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상황을 보면 도저히 풀어낼 수 없는 것과 같은 것들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것은 우리의 상황이고 우리의 능력에 관한 이야기이지 하나님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움직이십니다. 우리처럼 계획을 세우고도 지혜와 능력이 모자라서 그 모사를 이룰 수 없는 분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전능하신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회복의 역사를진행하고 계신 줄 믿습니다.

 

2. 예배의 회복

그러면 이렇게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어떻게 누릴 수 있을까요? 에스라의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은 회복의 기회를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해방의 은총을 베풀어주셔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 에스라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포로 되었던 바벨론 땅에서 돌아왔습니다.

그가 포로에서 돌아오자마자 첫 번째 한 것은 성전 제사를 회복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의 처지에서 보면 그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생존의 문제였을 것입니다. 당장 가나안 땅에 적응해서 살아가는 것이 문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에스라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의 관점에서의 급선무는 먼저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민족에게 영적인 능력을 회복하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러 모아 율법을 가르치고 그 율례와 규례에 따라 예배의 회복을 경험하게 만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배 자리가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가 되게 했습니다. 그러면 그들에게 모든 부분에서 살길이 열린다고 믿었습니다.

이 시대에 우리에게도 필요한 부분입니다. 우리의 모든 예배의 자리가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요, 성령을 사모하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예배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생명처럼 여깁시다. 그래서 설교자, 그리고 모든 회중이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 떠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비대면 예배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이 서로 함께 예배를 드리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은 바라보며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영적으로 뵈오며 예배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에서든, 교회당에서든 드리는 예배마다 진정 주님께 드리는 헌신의 정신이 충만한 예배, 나아가서 복음에서 가르쳐 주시는 영원한 생명과 성령의 위로와 기쁨이 넘치는 살아있는 예배로 우리 교회의 예배가 진정으로 회복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에스라 시대처럼 우리에게 예배가 회복되어 우리 교단에 속한 모든 교회의 예배 자리가 하나님의 소리가 가득하고 회개의 눈물이 흐르며 성도들의 열정과 사모함이 가득하고 기도하기 위하여 무릎 꿇는 주의 백성들로 가득하여 이 땅에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게 되기를 바랍니다.

 

3. 말씀 신앙의 회복

에스라가 두 번째로 붙들었던 회복의 방향은 말씀 신앙의 회복입니다.

에스라는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7:10)한 사람입니다. 모처럼 켜진 등불이 꺼져갈 때 심지를 돋우고 기름을 쳐 등불을 살린 선구자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떠났던 것을 회개했습니다. 예언자의 말씀도 멸시했던 것을 회개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 율법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신앙 회복을 위해 힘썼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공허하게 땅에 떨어지지 않고 반드시 역사 속에서 사건으로 실현됩니다. 그것을 아는 에스라는 느헤미야 8장에서 보듯이 에스라는 특별히 지은 나무 강단에 서고 이스라엘 앞에서 율법 책을 펴서 낭독했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말씀의 권위를 드러내고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위대한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한 것입니다.

우리 장로교회는 무엇보다 말씀의 권위를 강조하고 그 권위 앞에 엎드리는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에스라 9장에 보면 에스라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내용이 나타납니다. 그중에 98절부터 10절 말씀이 인상적입니다.

“8 이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잠시 동안 은혜를 베푸사 얼마를 남겨 두어 피하게 하신 우리를 그 거룩한 처소에 박힌 못과 같게 하시고 우리 하나님이 우리 눈을 밝히사 우리가 종노릇 하는 중에서 조금 소생하게 하셨나이다 9 우리가 비록 노예가 되었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그 종살이하는 중에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바사 왕들 앞에서 우리가 불쌍히 여김을 입고 소생하여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게 하시며 그 무너진 것을 수리하게 하시며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우리에게 울타리를 주셨나이다 10 우리 하나님이여 이렇게 하신 후에도 우리가 주의 계명을 저버렸사오니 이제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이 말씀 중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10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렇게 하신 후에도 우리가 주의 계명을 버렸사오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이스라엘 땅에 남은 자들을 보호하시고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에게 해방을 선물하시는 역사를 베푸셨는데, 그런데도 여전히 그들이 주님의 계명을 어기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복은 회중이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두려워 떨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회복의 주체는 우리가 아닙니다. 교회가 아닙니다. 회복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도행전 319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우리가 주목할 말씀이 있습니다. 새롭게 되는 날, 회복의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른다고 말씀합니다.

회개가 무엇입니까? 말씀에서 떠난 데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돌이키는 것뿐입니다. 말씀에서 멀어진 것들이 있다면 그 부분이 어떤 부분이든 간에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회복은 하나님께서 이뤄주십니다. 우리 한국 교회가 코로나 시대 속에서, 그리고 교회가 기울어져 가는 시대 속에서 한 가지 분명하게 할 일이 있다면 하나님이 회복시켜 주시는 은혜를 구하며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교단의 모든 교회가 말씀으로 돌이키며 말씀을 세우며 말씀으로 가득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4. 선민의식의 회복

에스라가 세 번째로 추구했던 것은 선민의식의 회복이었습니다. 물론 이는 특권적인 의미에서의 선민 주의가 아니라 구별적인 의미에서의 진정한 선민의식이었습니다. 선민, 즉 선택된 백성이라는 의식을 바르게 갖는다면 그들은 이방인들과는 구별되게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희미하니까 이방인과 차이점이 없이 그저 그런 형편없는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선택된 백성으로 구별하여 주셨다는 믿음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불행은 이방화 되어가고 현세주의적 가치관에 의해 살아가는 데 있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특별한 사람들로 구별되었다는 신앙을 버린 데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 위에 높으시며 탁월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러하신 하나님을 믿는 교회도 이 세상 속에서 달라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켜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작금의 상황을 보면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변화되라고 담대하게 외칠만한 상황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종종 듣는 말이 있으니 세상이 교회 걱정한다라는 말입니다.

에스라가 말하는 선민의식은 특권의식이 아닙니다. 이방과의 구별된 삶을 의미합니다. 그야말로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정의롭게 살며, 사랑하며, 평화를 위해 힘쓰며 사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 사는 것이며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세상에 본이 되고 희망이 되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단은 그동안 대한민국 사회에 메시지와 사랑을 전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교회들의 대사회적 역할을 강조해 왔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주님의 몸 된 교회가 거룩해지고 변화되고 새로워져야 합니다. 이런 교회에 하나님께서 많은 크신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교회가 진정한 구별성으로 무장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의 구별성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과 부활에서 찾아야 합니다. 인류가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교회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류를 죄와 죽음에서의 해방하며, 삶의 모든 불안과 불확실 속에서 해방하는 생명과 평화와 진리의 복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교회가 복음적 진리를 다시 찾는 구별성이 없이 회복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침몰시키는 것이 무엇입니까? 현세주의적, 세속적인 가치관입니다. 교회가 여기에 물들어 있습니다. 욕심, 탐심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더 높아지려고 하고 명예를 추구하고 더 많이 가지려 하고, 이 세상에서 교회는 냉소적인 시선의 대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교회의 성도들마저 교회에 대해 냉소적입니다. 왜 그럴까요? 교회마저도 이 영원한 진리만이 민족과 세계를 살릴 수 있다는 확증과 도전이 교회 안에서 희미하거나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구별성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크리스천으로서의 자부심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교회는 에서의 팥죽을 담은 그릇처럼 왜소하고 초라해져 가고 있습니다.

 

5. 회개 운동과 백성의 참여

이제 우리 한국 교회가 통회하는 심령으로 기도의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주여 이제 회복하게 하소서,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회개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1. 주님의 복과 은혜를 값싸게 만들었기 때문에 회개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120~2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친근하게 다니셨고 은혜의 말씀도 들려주셨고 기적도 많이 베푸신 마을들이 나옵니다.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고을들이 회개하지 않으므로, 꾸짖으셨습니다. "고라신아, 너에게 화가 있다. 벳새다야, 너에게 화가 있다. 너희에게서 행한 기적들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은 벌써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23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치솟을 셈이냐? 지옥에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 가버나움에서 행한 기적들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도시는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2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 백성들도 그러했지만, 한국 교회도 하나님의 큰 은총과 복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받은 사랑을 세상을 전하는 복의 통로의 역할을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값싼 신앙으로 바꾸어 물량주의와 세속주의로 물든 교회로 만들었습니다. 교회를 기업인 양, 아버지와 아들이 주고받는 목회자 세습을 서슴없이 자행했습니다. 주님의 복과 은혜를 값싼 싸구려 종교심으로 전락시킨 것입니다. 권력과 금력을 쥐고 더 많이 출세하고 성공하는 도구로서 교회와 복음을 이용한 것입니다.

지난 829일 목회데이터연구소가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실시한 '종교() 및 종교인 과세 관련 인식조사'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천주교와 불교인은 긍정적인 이미지가 우세했지만, 개신교인에 대해서는 '거리를 두고 싶은(32.2%)', '이중적인(30.3%)', '사기꾼 같은(29.1%)' 이기적인(27.3%), 배타적인(23%), 부패한(22.1%)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가 더 많게 나왔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이게 말이나 됩니까? 통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연구소 측은 "교회와 교회 지도자의 각종 추문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고, 교인들이 남들과 다투며 자기 잇속만 차리는 것이 실생활 속에 드러나며 교회 이미지가 부정적으로 형성되고 있던 차에 설상가상으로 '코로나 19'가 기독교인의 이미지에 더 나쁜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마치 이러한 모습은 복음서에 나오는 제자들의 모습 같습니다. 그렇게 주님이 겸손하라, 낮은 자리에 앉아라, 서로 사랑하라 하셨건만 제자들은 높은 자리에 오르려고 자리다툼이나 하고 자기들 살 궁리만 찾았던 제자들 말입니다. 오늘 이러한 우리들의 모습을 진심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복과 은혜를 세상에 흘려보내는 온전한 교회를 회복해야 합니다.

 

복음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1:1). 예수 외에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새, 교회 안에는 예수-복음의 사이에 목사와 장로, 이념과 사상, 교권과 물질이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사람이, 제도와 교권이 결코 복음이 될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2. 공교회의 정신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고라신과 벳새다, 가버나움을 책망하시면서 언급하신 두로와 시돈, 소돔 땅들은 모두 한때 하나님께 큰 복을 받아 번영하고 성장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 도시도 회개하지 않았고, 복음을 복음 그대로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심판의 도시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덜 죄를 범한 고라신을 심판으로부터 피하게 하시거나, 더 죄를 범한 가버나움에만 심판에 임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죄의 무게에 상관없이 회개하지 않은 모든 도시에 심판을 선포하셨습니다. 세습한 교회는 더 큰 죄를 범했습니다. 사랑제일교회도 큰 죄를 범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방관하고 묵인한 목회자와 교회들이 있습니다. 깨어 기도하지 못한 교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교회만의 죄악이 아니라, 우리 교회 전부의 죄악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을 깨닫고, 공교회의 정신을 회복하는 회개가 필요할 때입니다.

 

느헤미야 8장을 보면 감격스러운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학사 에스라가 율법 책을 펴서 백성들 앞에서 낭독할 때 일어난 일입니다. 느헤미야 88절 말씀을 보면 이 상황을 이렇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말씀을 듣고 모든 백성이 눈물을 쏟습니다. 왜입니까? 그동안 말씀대로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편으론 그렇게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는 그 은혜가 감격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들은 하나님 앞에서, 말씀 앞에서 겸허해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살지 못했습니다. 내 안일과 내 욕심과 이익과 정욕을 추구하는데 바빴습니다. 복음을 뒷전에 두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소홀히 여기며 살았습니다. 주님을 멀리했습니다. 공동체를 세우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여서 회개하며 말씀을 따라 살았던 것처럼 우리 교회도 일어나 회개하며 기도합시다. 함께 모입시다. 물론 코로나 19 때문에 제대로 모일 수 없을지라도 마음으로 함께 모여야 합니다. 가정에서라도 간절히 주님을 향할 때 그 마음 마음이 모여져서 하나님께 상달 되고 주님께서 새롭게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교회가 살아날 때 민족과 세계가 살게 된다는 것은 세계사가 증명한 역사적 진리입니다. 이제 우리는 인류가 진리를 소유한 특별한 하나님의 공동체임을 자각하고 일어납시다. 우리 입에 있는 탄식과 냉소적인 자조(스스로 비웃는)를 불신앙과 함께 성령의 불길로 태워버립시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듯이 겸손하게 민족을 섬기고 백성들의 마음을 사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살아갑시다. 이 세계와 사람들을 넓은 마음으로 끌어안고 치유하는 교회의 관용과 능력을 회복합시다.

우리 교회와 우리 교단에 소속된 교회들이 회복시켜 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덧입어 이 세상을 위로하고 새롭게 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202096일 총회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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