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낮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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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그리스도인 박승남 2020-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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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로마서2:17-29절 개역개정

17.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18.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19.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20.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21.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22.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23.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24.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25.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26.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27.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

28.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2:17~29 참 그리스도인

 

누구든지 자신의 문제, 약점, 죄가 들추어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하지만 구원의 문제에서는 다릅니다. 마치 내 몸의 병든 부분이 드러나야 치료를 받을 수 있듯이 나의 죄와 허물이 드러나야 회개할 수 있게 되고 용서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성령에 감동된 사도바울은 이방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를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유대인들과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방인들 그리스도인은 자신들의 문제와 잘못을 시인하기가 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전통,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율법과 할례 문제 등이 대단한 긍지와 자랑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너무도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사도바울입니다. 바울도 어려서부터 율법을 배웠고, 후에는 서기관으로 율법을 가르친 랍비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유대인의 자랑을 늘 암송하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 자랑을 유대인을 대신해서 17~19절까지 늘어놓는데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기에 개개인이 누린 다섯 가지 복을 열거합니다.

이 내용은 바울이 지어낸 말이 아니라, 당시 유대인이 자기네의 특권이라고 주장하던 것으로 그 시대 유대 문헌에 그대로 나와 있는 내용을 바울이 언급한 것이라 합니다. 그 내용을 보면 율법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자랑하며(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 율법의 가르침을 받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한 것입니다.

17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이 말씀은 세밀하게 읽으면 유대인의 긍지를 꼬집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유대인이라고 우쭐대는 자네 말이야" 라고 돌려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가진 좋지 못한 특권 의식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의지하며', 이 말씀은 율법에 기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는, 가장 복된 민족이라는 사실을 과시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어느 때고 율법을 들고나오는 태도를 지적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랑하며' 당연히 하나님은 자랑할 분입니다. 엄격히 따지면, 유일신 종교는 뿌리가 유대 사람에게 있거든요. 유일신 종교에 딱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 등 3가지입니다. 그리고 이 세 종교의 뿌리를 모두 아브라함에게 두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근본이 이스라엘에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유대 사람들이 충분히 자랑할만합니다. 그리고 당시 세계 종교는 그야말로 사람들이 지어낸 신화에서 비롯된 종교였으며 피조물, 동물 등과 잡신 등을 섬기는 종교였습니다. 하지만 유대 사람은 한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 유일신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으니 이를 높이 자랑할 만했습니다. 이방의 모든 나라, 모든 민족이 다 우상숭배를 하지만, 유대인들만 창조주 하나님,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믿고 있습니다. 이방의 모든 나라, 모든 민족이 캄캄한 가운데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만 인생의 등불이요, 인생길의 빛이 되시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느 나라, 어느 민족도 받지 못한, 하나님의 귀한 은혜, 특별한 은총을 받고 살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자랑했다는 말 속에는 하나님은 오직 유대인만의 하나님이라고 자부하는 그들의 독선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지름이 약 20cm 정도 되는 키파(Kippah)라고 하는 빵모자(주로 하얀색)를 쓰고 다니기도 하는데 이는 원래 자신들이 하나님의 종임을 드러내기 위해 예배할 때, 기도할 때만 쓰던 모자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일상적으로 쓰고 다니고도 합니다. 심지어 전쟁터에 나갈 때도 철모 밑에 받쳐 쓰고 간다고도 합니다. 그만큼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자신들이 유대인이라는 것에 대해 굉장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가르침을 받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한 것입니다. 여기서 율법은 축약하면 십계명을 가리킵니다. 유대인은 자녀를 낳으면 어려서부터 십계명을 철저히 가르친다고 합니다. 어른이 되어 계명을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처럼 그들은 십계명을 어릴 때부터 배우면서 자랐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아는 데 남다른 영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으며’,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는 선민이라고 주장하며 자신들이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에 있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유대인들은 율법을 그렇게 내세웠지만 정작 율법을 준수하는데는 게을렀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속하여 있다는 것을 그들이 확신하고 있었다는 그 이유만으로 교만하여 우쭐댔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자랑한다고 했지만, 실상은 조상들이 만든 전통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자부심을 가졌지만 그 말씀을 행동으로는 옮기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그 말씀의 정신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는 결국 모든 민족 앞에서 하나님을 모독한 것이 됩니다. 23~24절입니다.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24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이사야 525절을 보면 내 이름을 항상 종일토록 더럽히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 그리스도 예수님을 자랑합니다. 말씀, 복음을 자랑합니다. 구원받아 하나님의 백성된 것을 자랑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을 잘 압니다. 선하게 살아야 한다고 무엇이 선한 것인지,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도 잘 압니다. 미가서 68절을 보면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데살로니가 전서 515~18절까지 말씀을 보면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 16 항상 기뻐하라 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116절을 보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요한삼서 4절을 보면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 요한계시록 13절을 보면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우리는 이러한 말씀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특히 목사를 비롯한 항존직들은 더욱 그렇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가요? 과연 말씀대로 살고 있나요? 말씀대로 정직하고 진실하고 정결하고 정의로운가요? 따스한 마음으로 사랑하며 감사하며 세상에 소금과 빛으로 살고 있나요? 아니면 거짓과 불의와 탐욕으로, 무정하며 꺼진 등불, 맛을 잃어 짓밟힌 소금으로 살고 있나요? 말씀을 떠나서 살면서도 하나님을 자랑하고 말씀을 자랑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보겠습니까? 칼뱅은 이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자랑(glorying)이 아니라, 혀로만 나불거리는 자랑(boasting)이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5:16)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본문 19~20절을 보면 유대인이 믿고 있던 네 가지 특권을 말하고 있습니다.

1)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여기 인은 이방인을 말합니다. 유대인은 이방인을 시각장애인 취급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시각장애인을 인도해야 하는 인도자로 여긴 것입니다.

2)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당연히 맹인이니까 어두움 가운데 있는 것이지요.; 유대인들은 그런 이방인에게 자신들이 이라 여겼습니다.

3)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4)어린아이의 선생이라 스스로 믿으니

이방인은 나아가 어리석은 자였습니다. 그리고 유대교의 초신자나 새로운 개종자를, 어린아이로 여겼습니다. 유대인은 이방인을 심지어 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낮추고 천하게 여기면서 자신들은 이방인을 가르치는 교사로, 초신자나 개종자를 가르치는 선생으로 살아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만큼 그들은 우월감을 가졌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20절과 같이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공동번역으로 보면 그 율법에서 모든 지식과 진리의 근본을 터득하였으므로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당시 이방 세계를 겨냥한 유대교의 선전 책자에 있던 말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이를 늘 암송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당연히 바울도 그러했지요. 또 유대 제자들에게 늘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과거에 자신이 열정적으로 외우고 있었고, 외쳤던 말들을 이제는 유대인을 비판하는 문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유대인이 자부하며 살았듯이 그대로 순종하며 살았다고 하면, 이방인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월등한 민족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해서 그리 오랜 세월 동안 유리 방황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여러분 우리는 유대인들을 생각하면서 우리 자신들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을 책망하면서, 맹인이 맹인을 인도한다(1514, 2316; 6:39) 또한,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못 본다고, 무지하다, 부족하다 하면 그래도 괜찮을 텐데 오히려 목을 꼿꼿이 들고 다른 사람을 깔보고 무시하는 모습의 유대인들, 이게 예수를 믿었으면서도 그런 모습이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숨겨 두었던 비수를 꺼내어 유대인을 비판합니다. 21절입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우리 목사, 교사들, 교회 지도자들 마찬가지이지요. 가르치는 데 익숙하지요. 가르치는 일이 몸에 습관처럼 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자꾸 가르치려고 해요. 그런데 정작 자기는 가르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자기는 배우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잘 보면서 자기의 잘못은 얼마나 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212~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한 바가 있습니다.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결국, 유대인들은 율법을 자랑했지만, 실상은 범죄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지식과 진리의 본체를 소유하고 있다고 확신하면서, 율법을 도리어 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21~22절을 보십시오.

도둑질하지 말라고 선포하면서, 왜 네가 도둑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면서왜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하게 여기는 네가 어찌 신전의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예수님 당시 대제사장을 비롯한 성전 당국자들은 모두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줄줄 외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뭐라고 하셨지요.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 강도의 소굴이 되었다고 탄식하셨습니다.

여러분 유대인들은 교사로 가르치기는 하지만 자신들은 행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선생으로 훈계를 하지만 자신들은 따르지 않습니다. 아이러니한 모습들입니다.

이전에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외친 말은 정의 사회 구현입니다. 관공서, 경찰서에 정의 사회 구현이르는 표어가 붙었습니다. 그러나 어떠했습니까? 정말 정의 사회가 구현되었는가요? 아닙니다. 그때가 정의가 가장 짓밟힌 시대였습니다. 수많은 양민을 학살하고 세워진 정권이었습니다. 전두환은 국민이 나라를 지키라고 준 총칼을 가지고, 국민에게 들이댔습니다. 전두환 정권 동안, 부정과 불의가 끊이지 않았기에 오죽하면 전두환 정권이 마쳐진 뒤에는, 5공 비리로 5공 청문회를 열어야만 했습니다. 정의롭지 못한 사람이, 정의를 부르짖어서는, 결코 정의가 세워질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보여 준 것입니다.

어른들은 담배를 끊지 못해서 힘들어하고 학생들은 담배를 피지 못해서 힘들어합니다. 한 아버지가 담배를 피우는 아들에게 담배는 몸에 해롭다. 피지 말아라.” 말하자 아들이 아버지도 피우시잖아요. 몸에 해롭다면서 피우고 또 피우십니까?” 말하였답니다.

아이가 공부하지 않자 아버지가 말합니다. 애야 링컨은 너만 했을 때, 혼자서 고학을 하며, 힘들게 일하면서, 공부하였단다.” 아들은 아버지를 빤히 바라보면서, 아버지, 링컨은 아버지만 할 때 대통령이었습니다.” 부모가 먼저 행하지 않으면서, 자녀를 가르치지만, 자녀에게는 전혀 교육 효과가 없는 것입니다.
부모는 먼저 자신을 가르쳐야 합니다. 부모가 담배를 안 피우면서, 자식에게 피지 말라 말해야 하고 부모가 책을 보면서, 자식에게 공부해라 말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고, 선택받은 백성이고, 거룩한 백성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백성이고, 이방인들의 교사이고 선생이지만 자신들도 지키지 않기 때문에, 율법을 범하기 때문에(23)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있습니다. 사명을 주신 하나님께서,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으시고 있습니다(24). 예수님께서 이러한 유대인들에게 회칠한 무덤, 독사의 자식들, 외식하는 자들 이라고 강하게 질책하셨습니다.

우상을 가증하게 여기는 네가 어찌 신전의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물론 모든 유대인이 이런 죄를 범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면 신전의 물건을 도둑질한다는 말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슈라이너는 한 가지 가능성을 제시하며 신명기 725절을 언급합니다. 너는 그들이 조각한 신상들을 불사르고 그것에 입힌 은이나 금을 탐내지 말며 취하지 말라 그런데 유대인은 우상숭배를 혐오하며 또한 우상과의 어떤 관련성도 일축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이 몹시 싫어하는 바로 그 우상들에게서 이익을 얻음으로써 기꺼이 더럽혀졌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직접 우상숭배는 하지 않았지만, 이방인들에게 우상 숭배에 필요한 물건을 훔쳐 팔아서 돈벌이하는 데는 열을 올렸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니까 유대인들은 돈을 벌 수 있어서 좋았고 이방인들은 우상 섬기는 데 필요한 것들을 싸게 살 수 있어서 좋았던 것입니다. 훔쳐서 파는 장물은 아무래도 값이 떨어지기 마련이니까요. 어떻게 보면 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식이 된 것입니다.

그들이 율법을 몰라서 그랬다면 변명의 여지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알면서 훔치고 알면서 남을 우상 숭배하게 했으니 그 죄를 피할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이로써 사도 바울은 21절에서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라고 한 것에 대한 구체적인 예가 제시된 것입니다.

 

이어서 25을 보면 그 주제가 할례로 바뀝니다. 아마도 로마 교회 갈등의 또 하나의 원인은 할례 문제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특별히 로마 교회 안에 유대인 중에는 이미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 예수 믿는 것 좋아. 그래도 할례를 받아야 해~

유대인은 율법과 마찬가지로 할례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에 참가한 선민의 구성원이라는 유대인의 특권적 신분을 알려 주는 징표였다고 믿었고, 후기 유대교에서는 할례받는 사람은 아무도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는다라고 까지 주장했습니다.

이런 견해가 바울 시대에도 널리 퍼져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그런 할례 신앙을 숭상하는 유대인에게 바울이 할례의 근본적인 의미를 제시하면서 도전한 것입니다.

너희에게 할례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냐? 이에 대하여 바울은 할례에 대한 유대인들의 믿음을 뒤집는 발언으로 대답합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할례받은 유대인이 구원받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율법을 지키면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우리가 세례를 받는데 세례라는 형식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 그 의미가 중요하지요. 정말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내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다는 것을 고백하는, 그리고 내가 이제 교회의 일원(멤버)이 되어서 교회의 치리에 복종하고 교인으로서 의무를 감당하고 협력자로 좋은 일원으로 살아갔다는 그런 다짐과 삶의 이행이 중요한 것이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주셨는가요?

창세기 156절에 위대한 선언인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가 나오고, 157절부터는 이어서 약속의 자녀에 대한 언약을 다시 주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함께 언약의식까지 체결하십니다(1512~21). 그런데 16장에서 아브라함은 하갈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명을 지키겠다고 그렇게 다짐했는데(24)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긴 것처럼 말입니다. 이 사건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실망하셨던지 무려 13년 동안 침묵하십니다. 그 긴 기간 동안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아무런 일도 없었어요. 그게 창세기 1616절과 171절 사이입니다. 아브라함이 창세기 157~20절과 같은 하나님과 체결한 계약을 파기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하갈을 받아들인 것은 하나님과의 계약(15:7~20)을 어긴 큰 범죄 행위였던 것입니다.

13년의 침묵이 흐른 후에, 그래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17:1). 무슨 말이겠어요. 다시 그러지 마라! 그리고는 하나님의 언약을 후손 대대로 지키라고 명령하시며, 할례를 베풀게 하셨습니다(17:10). 할례는 하나님의 언약을 받고도 지키지 않은 아브라함에게 그 언약을 잊지 않도록 몸에 새겨 주신 표시입니다. 그러므로 할례의 의미다시는 언약을 잊지 말고,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하나님의 강권이 담겨 있는 (The Sign)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할례 백성이라면 하나님의 진리를 따라 살아야 한다는 사실은 너무도 자명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않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게 하려고 몸에 징표를 새긴 것이 할례인데, 할례를 받고도 또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어긴다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을 가장 멸시하는 게 아닐 수 없습니다. 유대인은 할례가 유대인의 정체성이라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으로 유대인과 비유대인을 구별하지 않으신다고 바울은 선언합니다. 실제로 할례를 받지 않고도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은 오히려 할례를 받고 기록된 율법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 율법을 어기는 사람을 심판할 것입니다(27).

이어서 28절을 공동번역으로 보면 이러합니다. 그러므로 유다인의 겉모양만 갖추었다 해서 참 유다인이 되는 것도 아니고 몸에 할례의 흔적을 지녔다고 해서 참 할례를 받았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겉모양만 갖춘 유대인은 사람의 눈으로 자신을 보고 평가하는 것이고, 진정한 유대인이란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내리시는 평가입니다. 할례를 받았다는 표적만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유다인의 속 마음을 가진,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받는 할례를 받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특별하다 하시는 것입니다. 신명기 1016절과 예레미야 44절을 보면 하나님은 마음의 할례를 행하라 하셨습니다. 마음의 죄악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귀가, 눈이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결국, 내적 변화를 보이라고 요구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됩니다. 형식적으로 됩니다. 줄줄 나오지요. 기도도, 말씀도 찬양도 잘 나옵니다. 그럴 때 그것이 진심에서 나온 것이 아닌 입술만의 립 서비스가 될 때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이게 목사에게도 가장 두려운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래서 늘 자기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늘 본질을 찾아야 합니다. 내가 정말 주님을 사랑하느냐? 내가 정말 말씀을 진심으로 자랑하고 그 말씀대로 살고자 얼마나 노력하고 있느냐?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을 구하고 있는가? 주여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날마다 이 심령을 성령으로 만져주셔서 그 말씀으로 살아갈 수 있는 새 힘을 주시옵소서.

오늘 말씀은 결코 유대인만으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입니다. 특별히 교회 오래단 분들, 습관적으로 신앙생활 하는 분들의 문제입니다. 종교적인 형식주의 주님은 절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날마다 새롭게, 새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며 살아가라고 성경은 새 노래를 내 입에 두셨다(40:3)고 합니다.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13:34)고 하십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라고 하십니다. 오늘도 새롭게 내일도 새롭게, 새로운 마음으로 하나님이 진정 기뻐하시는 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 하나님에게서 칭찬을 듣는 그리스도인이 되라(29)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자랑하는 네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지 못해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참 그리스도인은 아브라함처럼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내면적이고, 영적이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앙에 있는 사람입니다. 참으로 내실이 있고, 진실이 있고, 그리고 참믿음에 사는 참 이스라엘, 참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2020104일 주일 낮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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