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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뿌리를 둔 삶 박승남 2022-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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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누가복음6:17-26절 개역개정

17.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많은 무리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18.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받은지라

19.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

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21.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2.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23.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24.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25.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눅 6:17-26​ 하나님께 뿌리를 둔 삶 

 

우리가 살아가면서 많이 듣는 단어 중의 하나가 정체성이라는 단어입니다. 정체성(正體性, identity)은 존재의 본질 또는 이를 규명하는 성질입니다. 쉽게 말하면 정체성이란 바로 당신만의 가치관, 신념, 특성을 포함하여 당신의 내면과 외면을 모두 가리키는 말로,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 주는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나를 나 답게 만드는 변하지 않는 존재의 본질 그리고 그 본질을 깨닫는 것이 바로 정체성입니다.

정체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런 신념이 없이 남을 따라 가는 행동은 하지 않습니다. 즉 마네킹처럼 남이 입혀 주는 대로 옷을 입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정체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나는 누구인지, 나는 어떠한 사람인지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정체성은 다양한 측면에서 요구됩니다. 특별히 신앙 생활에 있어서도 정체성이 분명하게 요구됩니다. 신앙의 정체성은 어떤 어려움이 와도 변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게 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정체성에 따라 살아가야 하는 삶의 원리가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은 신앙인의 정체성에 대해서 보다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7장을 산상수훈이라고 부립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617~49절을 평지설교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 시작이 17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 그들은 누구일까요? 12~16절을 보면 예수님은 밤이 새도록 산에서 기도하신 후 12 제자를 부르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함께 내려온 사람들은 12 제자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20절을 보면 주님은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그 사이에 17~19절의 일을 밝히고 있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내려 오신 예수님께서는 17절과 같이 평지에 서셨습니다. 그러자 그 제자의 많은 무리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두로과 시돈에서부터 많은 백성들이 왔다하면서 그 중에는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받는 사람들이 고침을 받기도 하였고 이러한 능력을 보았던 군중들은 예수를 만지려고 힘을 썼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낫게 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423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리고 마태복음 122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예수님에게는 병 고치는 일이 천국 복음 증거의 일부였고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사역이었습니다. 그리고 병고침을 받고 귀신에게서 고침을 받는다는 것은 곧 이 땅에서 실현된 하나님 나라의 증거인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악한 영들을 대적하고 병 낫기를 구하는 것은 단지 한 사람의 환자를 낫게 하려는 목적만 있는 게 아닙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병이 낫게 되는 것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이심을 믿어 생명, 구원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 목적으로 예수님은 병을 고치는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제자 요한은 이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2030-31절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고 말했습니다.

 

 병자들을 치유해주고 귀신 들린 자들을 고쳐주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당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소외당한 계층의 사람들은 의료적인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들에게 관심을 가지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더욱 예수님께 희망을 두고, 예수님을 의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2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정말 이상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천대받고 멸시 받는 가난한 사람들’, ‘굶주린 사람들’, ‘우는 사람들’, ‘핍박받는 사람들들이 복이 있다니요. 아니, 어떻게 이들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까? 이들은 누가보아도 불쌍하고 불행한 슬픈 인생들인데 말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을 단순히 불쌍한 사람들로만 보시지 않으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들은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심지어 두로와 시돈에서 조차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만큼 주님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이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주님께서 전해 주시는 말씀을 즐겁게 들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자신의 죄에 대해서 슬퍼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와는 대조가 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름 아니라 당시 제사장,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율법학자 그리고 정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사회 지도층, 기득권자들로 자신들이 가진 것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자기들의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기 예수님 마저 배척하고 죽게 하였습니다. 그러니 실상 누가 복된 사람들입니까? 빼앗기지 않으려는 자들은 속으로는 불안하고 두려워하고 경계심이 발동되어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정죄하였습니다. 겉으로는 주님을 잘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말씀의 근본정신을 잃어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어리석고 불쌍한 이들입니까? 이들은 마태복음 15장 8절 말씀과 같이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하면서 실상은 하나님을 멀리했던 이들이었던 것입니다

이들에 대해 주님은 24~26절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가 가난한 자들의 것이고 지금 주린 자는 배부름을 얻을 것이고 우는 자는 웃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박해를 받는 자는 하늘의 상이 클 것이라는 것입니다. 완전한 역전입니다. 한나의 기도나 마리아의 찬양에서도 나오는 원리입니다. 지금 핍박을 받을지라도 오히려 복을 받게 되는데, 그 복은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반면, 이 세상에서 부요한 사람들, 배부른 사람들, 웃고, 칭찬받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치 않고, 자신의 만족과 안락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 모든 것을 잃게 되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주님의 시선은 세속적인 시선과 전혀 다릅니다. 따라서 이 땅에서 세상적인 가치관과 기준을 이 땅에서의 영원한 천국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영원한 멸망과 심판이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하는 것은 이 말씀은 20절과 같이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너희는 어느 자리에 서 있는지, 세상적인 기쁨의 자리, 칭찬받는 자리에 설 것인지! 아니면 비록 배고프고 고통당하는 삶이지만,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살 것인지 선택하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들에게 분명하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하늘의 기쁨을 담아 살아가는 삶이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오늘의 말씀은 제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훈련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훈련하면 외형적인 어떤 기준을 설정하고 거기에 도달하도록 하는 방법론을 생각합니다. 좋은 방법을 가르쳐 준다고만 하면 사람들이 그리로 몰려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하신 훈련은 그런 외적이고 피상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이고도 영적인 근본적인 뿌리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영국 캔터베리 대주교 도날드 코간(Donald Cogga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한 나그네로서의 삶을 통하여 영원을 향한 길을 걸어가고 있다. 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으나 그 형상에 손상을 입었으므로 어떻게 묵상해야 하는지,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배워야 한다.” 배우는 것이 훈련입니다.

 

우리는 모두 신앙 훈련을 받아야 하는데 신앙의 훈련이란 하나님을 향하여 문을 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뿌리를 세상에서 하나님께로 옮기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 제일 먼저 강조하신 것이 영적인 자기 부정입니다.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여러분 가난한 자는 사회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를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그렇게 가난하다 해도 모두가 겸손한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무리 중에는 그저 병 고침을 받는 것만 원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자기들의 소원을 성취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병을 고쳐 주신 것은 단지 육신 만이 아니라 그들의 영적으로도 치유해 주시고 구원해 주시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가난이란 영적인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영혼이 텅 비고 은혜를 받지 못해 늘 부족한 사람처럼 하나님 앞에 마음을 열어 놓고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음의 기도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우리는 영적으로 거지입니다. 지혜도 없고, 주님의 말씀으로 따라 살 능력도 없고, 때로는 내 믿음 하나 지켜갈 힘도 없습니다. 넘어지기도 잘하고 고장도 잘 납니다. 그러니 이러한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바로 늘 이렇게 기도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하사금으로 살아 가는 거지들이다.”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의 영적 파산 상태를 깨닫고 온전히 하나님께 매달려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을 얻는 사람입니다. 우리 인간 육신은 영에 의하여 살아가고, 우리의 영은 하나님에 의하여 살아갑니다. 영적인 가난은 영적인 풍요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천국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언제까지 가져야 할까요? 예수님을 믿을 때 처음에 이런 마음을 가지기만 하면 됩니까? 아닙니다. 이 마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을 믿고 따르는 날로부터 우리 생명이 다할 때까지, 주님 오실 때까지 가져야 하는 마음입니다. 우리 생명이 다하고 우리의 사명이 다할 때까지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아니하면 끝까지 믿음으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주님이 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주의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항상 가난하게 사십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일용할 양식을 늘 채움 받고 살아가십시다. 은혜를 받은 다음에도,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부족을 느끼고 마치 하나님의 문 앞에서의 나사로처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가난이란 말은 사도들의 청빈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내가 물질을 얼마나 가졌든지 간에 늘 청빈의 마음으로 살아야 하나님의 나라가 내 안에 이뤄질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주님의 제자들인 성도들은 검소하게 살아야 합니다.

가난한 신학생이 있었습니다. 그 집이 가난하여 빚을 얻어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남은 부인과 자녀들의 힘으로는 그 빚을 도저히 갚을 길이 없어 마침내는 두 아이들이 종으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엘리사가 그 집을 방문하여 보니 기름 한 그릇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자 동네에 나가서 그릇을 빌릴 수 있는 대로 빌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남아 있는 기름을 그 그릇에 부으라고 했습니다. 기름을 그릇에 붓고 또 부었습니다. 여인이 아들에게 또 그릇을 가져오라고 말했지만 다른 그릇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기름이 곧 그쳤습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빈그릇이 없다고 하자 기름이 곧 그쳤던 것입니다.

 

우리는 사무엘서를 통하여 사울 왕이 어떻게 해서 범죄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던가를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어떤 때에 범죄하여 자기 가정에 무서운 재난을 가져왔는가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영적으로 부자가 되어서, 빈 그릇이 없다고 느꼈을 때, 그들은 교만해 졌고, 하나님을 잊어버렸고 바로 그 순간 범죄하였습니다.

주린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심령이 주린 자도 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혼이 굶주린 자는 하나님의 문을 두드리게 되고 또 그런 사람만이 하나님으로 부터 채움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들 소유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날마다 채움을 받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행복합니까? 주님으로 채움을 받고 사는 사람이 이 땅에서 제일 복된 사람입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런데 왜 우리는 칭찬받기를 좋아하고, 배부르기를 좋아하고, 부유하기를 좋아할까요? 심리학자 프로이드는 우리의 무의식의 세계에 우리도 알 수 없는 욕망들이 가득하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이 시대에 세계적으로 가장 저명한 신약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월터 윙크(Walter Wink 1935년 5월 21​~2012년 5월 19일​) 나 자신을 나를 세속적인 삶으로 살도록 나를 붙들어 매고 있는 내부의 독재자가 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과거의 아픔과 상처로 인해 나를 심리적 감옥에 집어넣고 나를 가두고 감독하는 세력이 있다고 봅니다. 이러한 요소들이 우리를 더욱 세속적인 욕망에 지배당하게 만듭니다. 사실 우리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우리는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살아가는 세계와 관계하며 살아가게 되는데, 우리의 내면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집단적이 됩니다. 그리고 그 집단적인 정신이 세계의 집단적 가치를 추구하게 합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세속적인 삶을 추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주님은 자신의 아픔과 상처를 들여다보고, 나를 가두는 요소들에 대해서 깨닫게 하신 후, 그런 나를 거스리게 하면서 온전한 사람으로 이끄십니다. 그래서 그런 세속적인 감옥으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자유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그래서 자아 성찰은 세속적인 욕망을 극복하게 하여,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따라 살아가게 합니다.

오늘 우리는 세속적인 가치관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집단적 가치관 즉 유행이라는 소비문화, 경쟁의 신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무한 경쟁의 정신, 영웅주의 등 다양한 가치관에 휘둘려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세속적인 욕망을 일으키고 있는 내면을 들여다 보는 자아 성찰의 삶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그리하여 세속적인 가치관을 뛰어넘어 하나님 나라 가치를 담보하여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애통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21).

우는 자는 소리나게 우는, 흐느껴 우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참으로 슬픈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나 모든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의 영적인 상태도 잘 알고 있어서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내 마음대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대로 가연 망하는 길밖에 없는데도 내 육신의 욕망은 그 길로만 쫓아가기 때문입니다. 죄와 사탄의 권세가 끈질기게 나와 교회를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나 우리는 힘이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죄악이 갈수록 념치고 사람들이 죄 속으로 끌려 들어가고, 그대로 가면 다 망하는 것을 아는데 그저 안일하게 지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만 서면 울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늘 기쁘고 평안하게 삽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울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를 보아도 슬프고, 사람들을 보아도 슬프고, 세상을 보아도 아프고 쓰립니다. 아는 자는 탄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울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는 자가 복된 것은 주님이 보시고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5117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마태복음 5:4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21).”

슬퍼하는 속에 주님의 은혜와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위로가 있기 때문입니다. 슬퍼하는 것 자체가 복은 아닙니다. 그러나 슬픔 속에 주시는 하나님의 웃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슬퍼하는 자들은 오래 웃을 수 있습니다. 하늘의 위로를 맛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적인 목표를 버리고 하나님의 목표로 바꾸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세상적인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뿌리를 둔 삶으로 바꾸라고 훈련시키셨습니다. 그래서 내 영적인 부족을 깨닫고 하나님이 주시는 힘과 능력과 지혜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사막에 있던 나무가 오아시스로 옮겨지듯이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져 많은 열매를 맺고 그리할 때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또한 교회와 다른 이들을 유익하게 하며 우리는 온전히 행복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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