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럽고 처참한 교회의 모습 | 박승남 | 2024-12-2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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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은 보지 마시오. 부끄럽고 처참한 교회의 모습이니. 개신교 신자들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글을 읽으시오. 교회가 그렇게 무너지고 있으니. 그리고 그대들이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취할 도리를 고민하시오.
탄핵 관련 광화문 집회 장소라 생각하고 시청역 출구를 나왔다가 기함을 했다. (기함(氣陷)-땅바닥이 위로 불쑥 솟거나 밑으로 푹 꺼지는 것으로 기함을 하다는 갑자기 몹시 놀라거나 아파서 소리를 지르면서 정신을 잃다는 뜻) 거대한 태극기 부대, 어마어마한 출력의 앰프 소리. 규모를 볼 때, 탄핵 찬성 시민들의 집회의 규모에 결코 밀리지 않았다. 그런데 가만 보니, 참석자들이나 진행자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다. 목회자들이 단상에서 예배 시간의 용어를 사용하며 윤석렬 탄핵 반대를 외치니, 사회자는 발언자들의 외침에 연신 '아멘, 할렐루야'로 화답했다. 시민들과 함께 하는 대중 집회라면 도저히 가능하지 않은 기독교 용어가 난무했다. 태극기 부대 실체가 교회였구나, 비로소 확인되었다. 급기야, 그 목회자는 윤석렬의 탄핵 반대를 외치며 아모스서 5:24을 인용했다.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 윤석렬을 지키는 것이 공의라는 전제였다. 당혹스러웠다. 한 목회자는 마이크를 잡더니, 자신이 이때만큼 목회자라는 것이 한스러운 적도 없다며, 충격적이게도, 내 평생에 한번도 목회자 입에서 들어보지 못한, 아니 이웃 중 어떤 사람에게도 듣지 못한 거친 쌍욕 세트를 쏟아부으며 야당 대표를 공격했다. 집회 참석자들은 환호했다. 이후, 집회 운영 자금을 모으기 위해,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며 헌금했다. 거대한 기독교 광장 예배 같은 느낌. 기독교의 외피는 있지만, 사랑과 박애의 기독교 정신은 없고, 단상에 오른 목회자의 증오에 가득한 갈라진 목소리엔 기품이라고는 찾을 수 없었다. 참석한 사람들. 특별히 악할 것 같지 않은 평범한, 60-80대가 대부분인, 제 몸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두르며 쥐고 있는 전단 속 이재명 대표의 얼굴을 이쑤시개로 찍어 누르며 분풀이를 하는, 특별히 동원된 것 같지 않은 저 확신과 증오의 몸짓, 혐오스러웠다. 광화문 앞 쪽 탄핵 집회에 가기 위해 시민들은 그 불쾌한 길을 거쳐 가야 했다. 그 장소를 스쳐 가는 시민들의 관점에서 보면, 기독교는 혐오의 종교가 틀림없다. "기독교는 원래 그렇지 않고, 그들은 일부 극단적인 세력일 뿐입니다." 그런 말이 소용 없는, 혐오 그 자체였다. 내부를 결집시키고 정치적 규탄을 하기 위해 동원된 혐오로 교회에 관심을 갖고 찾을 수도 있는 시민들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다시는 교회에 오지 말라!" 그렇게 쫓아내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아주 극적인 퍼포먼스였다. 저 극우 집단이 개신교의 옷을 입고 교회를 대표하며 시대에 역행하니, 한국 개신교의 앞날은 어둡다. 나 역시, 저 분들과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같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느 부분에서 같고 어느 부분에서 달라야 우리는 같다고 할 수 있을까? 과연 우리는 같은 부분에서 같은가? “어찌 하다, 한국 개신교가 이렇게 되었는가?” 내 판단은 하나다. 교회가 기득권에 빌붙으면서다. 아니 기득권이 되면서다. 카톨릭교회가 그래도 정신을 차린 것은, 교회가 국가교회로서 정치 권력의 모든 지위를 다 잃어버렸을 때부터였다. 가진 것이 없으니 지킬 것이 없고, 그래서 정신을 차렸다. 그런 의미에서 개신교 교회는 더 잃어야 한다. 그래도 기득권의 종교라는 오명을 씻기 위한 자기 혁신은 어려울 것이다. 예레미야와 이사야, 아모스가 와도 쫓겨날 것이다. 문자 그대로 기득권을 잃고 바벨론 포로 생활로 쫓겨 가야, 회복을 위한 성찰의 시기가 올 것이다. “교회가 어찌 하여 이렇게 되었는가? 도대체 목회자 그대들은 교회를 왜 이렇게 망쳤는가! 신학교 교수들이여, 그대들은 신학교에서 목회자 후보들에게 무엇을 가르쳤던가?” 젊은이들에게 혐오스러운 종교, 양심적이고 정의로운 시민들에게 납득될 수 없는 종교, 고단한 마음을 의탁할 수 있는 기품이 실종된 아스팔트의 종교, 무엇을 외치는지도 모르며 가장 악한 자들을 옹호하는 자리에 선 종교… 고상해 봤자 말만 교양 있을 뿐 속은 아스팔트의 교회들과 다를 것 없는, 세상의 고통와 약자들의 슬픔에 별 관심이 없는,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들. 그 모든 가진 것들을 다 날리고 나서야, 집착하던 기득권을 다 잃고 나서야 교회는 정신을 차릴 것이다. 자녀들이 떠나고 청년들이 떠나고 죽은 자들의 공동묘지 같은 종교가 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것이다. 기득권을 지키고 특정 정치세력을 옹호하기 위해 동원할 노인들조차 없어질 때가 되어서, 비로소 교회는 불탄 빈들에서 망연자실할 것이다. 그때가 될 때 교회는 통곡할 것인가? 공의를 회복할 것인가? 고단한 사람들의 벗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자신 없는 예측이다. 그러니 지금부터, 다들 정신 차리라.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을 그날에 그래도 저 사람들이 있으니 소망이 있다, 그대들의 교회가 있으니 비로소 위로가 된다, 그렇게 기억될 교회들을 지금부터, 건설하라. 그대들이 출석하는 교회가 건강하다는 것에 자족하지 말고, 나라의 교회가 무너지는 것에 애통해 하라. 그리고 그리스도 외 누구도 의지하지 말며, 성경 말씀에 입각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며, 그대들의 자녀들을 그대들이 책임지며, 몇몇이라도 함께 목회자들에 기대지 말고 홀로 교회를 이루라. 아니면 그대가 머무는 교회에서 생명을 걸고 싸우라, 온전한 교회됨을 위해! 송인수 대표 사범대를 나와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교육철학을 공부한 교육운동가로, 1989년부터 13년간의 교직생활 중 학생들의 고통에 응답하는 일이 자신의 소명임을 깨닫는다. 교육계에서 하나님 나라를 일구려는 열망으로 1992년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산하 ‘기독교사모임’을 만들어 활동했고, IMF 이후 교실 붕괴 상황에서 교육계 및 교직 사회의 변화를 목표로 ‘좋은교사운동’을 출범시킨다. 2003년 3월, 좋은교사운동 대표로서 책임을 다하고자 교직을 떠나 5년간의 임기를 마친 후, 2008년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을 창립해 입시 경쟁 완화와 사교육을 줄이는 일에 전념한다. 이후 입시 경쟁과 사교육 문제가 학벌 중심 채용 관행에 잇닿아 있음을 주목해 2020년 ‘교육의 봄’을 창립, 우리 사회의 채용 관행 변화를 위해 매진하고 있다. 복음을 통한 세상의 변화와 타자지향적 삶을 꿈꾸며 여전히 ‘학생들의 고통에 응답하는 학교 밖 선생님’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품고 살아간다. 오랜 기간 사회 이슈와 씨름하는 과정에서 찾아오는 힘겨움과 메마름에 잠식당하지 않고 달려온 힘은 성경 묵상과 새벽기도에서 나왔다. 평신도도 스스로 성경을 읽고 해석해야 한다는 믿음으로 세워진 평신도 공동체 ‘산아래교회’를 17년간 일구면서 평신도교회 운동에도 몸담고 있다. 청소년기 자녀들을 믿음으로 양육하고자 함께 성경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나온 《만남》(IVP)을 비롯해, 교육운동 현장에서 길어올린 성찰을 담은 교육 에세이 《우리는 아이들에게 모두 빚진 사람들이다》(우리학교), 《무모한 교사들》(좋은교사) 등을 썼고, 우리 시대 평신도 5인의 분투하는 성경 읽기와 삶의 고백을 담은 인터뷰집 《읽다 살다》(잉클링즈)를 냈다. 최근 《평신도교회가 온다》(잉클링즈)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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