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를 만나 주신 하나님 | 박승남 | 2016-02-0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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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이사야6:1-8절 개역개정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4.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6.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7.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사6:1-8 이사야를 만나 주신 하나님 성경은 만남의 이야기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수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 중에 하나님을 만난 이야기를 직접 기록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 한 사람이 모세이며 또한 본문에 나오는 이사야입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사야는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웃시야 왕은 아사랴라고도 하는데 지혜롭고 총명했으며 정치적으로도 성공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달라졌습니다. 제사장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제사를 집전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다 결국 나병에 걸렸고, 결국 왕위에서 쫒겨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그는 왜 이전과 달라 교만해졌을까요? 그 이유는 말씀을 제대로 가르쳐 주는 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의 곁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가르쳐 주는 스가랴가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뜻을 찾았고 하나님도 그가 하는 일마다 형통하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에 하나님을 찾았고 그가 여호와를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더라 (대하26:5) 그러나 선지자 스가랴가 그 곁에서 사라지자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가르쳐 주는 선지자가 없으므로 그는 곧 교만해져서 결국 나병에 걸리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왕위에서 쫒겨났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는 날까지 나병환자가 되었고 나병환자가 되매 여호와의 전에서 끊어져 별궁에 살았으므로 그의 아들 요담이 왕궁을 관리하며 백성을 다스렸더라) 웃시야 사건은 이사야의 마음에 깊이 새겨져 잊을 수 없는 교훈이 되었을 것입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바로 그 해, 한 왕의 인생이 그처럼 비참해 지는 것을 슬퍼하고 나라를 염려하면서 매우 착잡한 마음으로 성전에 있을 때, 하늘의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은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셨고,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습니다. 그리고 스랍들이 하나님을 모시고 서 있었습니다. 스랍들은 하나님 보좌 위와 주변에서 그분을 모시는 영물들로, 히브리어로는 세라핌인데 그 본뜻은 ‘불타는 자들’ 입니다. 스랍들은 신분이 높은 천사라고 생각되는데, 본문 2절과 같이 스랍들은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다고 나머지 두 날개로는 날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특별한 점은 스랍들도 하나님을 감히 바라볼 수 없어 두 날개로 자기의 얼굴을 가렸다는 점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 앞에서 얼굴을 가렸습니까? 그것은 죄 없고 눈부신 천사들까지도,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과 단 하나의 존엄에 압도되어져 거룩하신 하나님을, 하나님의 영광을 감히 바라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두 날개론 항상 하나님의 명령만 떨어지면 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든지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 중에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10)라는 구절이 있는데, 바로 이 스랍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100% 순종하는 것처럼 이 땅에서도 그리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런 곳이 천국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 선지자를 통해 귀한 진리를 알려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무엘상15:22절과 같이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순종이나 듣는 것이나 다 같은 의미입니다. 사울과 다윗의 차이는 바로 순종의 여부에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8절을 보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여정은 순종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순종에 대한 명언들을 보면 1) 순종은 모든 덕행의 면류관이며 영예이다. - 마틴 루터 - 2) 부분적인 순종은 신실치 못함의 증명이다. - 토마스 만톤 - 3) 진정한 순종은 뒤로 미루는 것도 아니요, 의심하는 것도 아니다-프란시스까를레즈 4) 영적인 성숙은 학식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 하는 데서 온다. - 레나르 라빈힐 - 5) 우리는 오직 순종 가운데서만 하나님의 뜻의 가장 위대한 기쁨을 발 견할 수 있다. - 싱클레어 퍼거슨 스랍들이 부르는 찬양은 3절과 같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로 쓰여 있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도 없었고, 표기하는 것도 금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표기할 때는 신성한 네 개의 문자 (YHWH, 이것을 테트라그라마톤 이라고 함)를 사용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원래는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후대에 이 문자들에 모음을 추가해서 ‘여호와’ 또는 ‘야훼’로 부르게 되었지만 성경에는 처음부터 자음만 기록되었으니까 신성한 네 문자의 정확한 발음은 지금도 정황히 알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성경에서 신성한 네 문자가 나오면 그 부분을 ‘아도나이’라고 읽습니다. '주'(主, Lord)라는 뜻입니다. 스랍들도 그 앞에서 발을 가리워야 하는 분, 하늘에서 그분의 뜻이 완전하게 이뤄져야 하는 분, 모든 존재들이 이유없이 그분을 경배해야 하는 분, 그분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만드신 인간들만이 늘 그분을 배반합니다. 그런 이유로 하나님은 이사야를 찾아오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모습을 본 이사야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6:5) 라고 말합니다. 이 고백은 스랍들이 두 날개로 발을 가리고 있다는 것과 상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천사들조차 자기들의 수치를 하나님 앞에 드러낼 수 없는데, 하물며 죄인인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서겠습니까? 이처럼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 순간부터 자기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깨달았습니다. 그 때문에 이사야는 특히 죄에 예민한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죄에 대한 경고를 많이 한 선지자 역시 바로 이사야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는 무수한 제물을 하나님 앞에 드렸지만 형식만 있을 뿐 그들 마음은 다른 데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저들은 성전 마당만 밟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1:13)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진실치 못한 이익을 추구했고 고아와 과부, 가난한 이들을 돌아보지 않고 괴롭혔습니다. 지도자들, 공무원들은 타락하여 뇌물을 좋아했고 뇌물을 받고 악한 자를 의롭다 하였으며 도적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탐욕이 한없어 부동산투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지극히 방탕하여 성적으로 타락하였으며 독주를 즐겨 마셨습니다. 연회를 열어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저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무관심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59장 2절을 보면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그런데 이사야는 하나님을 만난 뒤에 먼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았습니다. 다른 이들의 죄악을 지적하기 전에 자신의 죄된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자신도 주홍같고 진홍같이 붉은 죄 가운데 있는 백성들과 똑같은 죄인이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런 경험을 통하여 그는 하나님 앞에서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실감하였고, 심지어 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어서 은혜를 주실 수도 없고, 인간들이 기도해도 하나님이 들으실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한 것입니다. 실로 하나님을 너무 아프게 하는 인간들의 죄, 여기서 자유로운 인간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로마서 3:10절을 보면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라고 말씀하고 또한 3장 23절을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은 줄줄이 지옥으로 끌려가야 합니다. 그러나 지옥이 어디고 어떤 곳인지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안히 끌려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옥이 어딘지를 아시는 하나님의 마음만 타실 뿐입니다. 또 지으신 인간들이 모두 멸망을 당한다고 할 때 마음이 아프고 타시는 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원의 길, 용서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보십시오. 이사야는 고백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죄악된 세상, 죄악된 문화 속에 살다보면 그게 죄인줄 모르고 자신이 죄인 줄 모릅니다. 도리어 습관에 젖어서 그게 익숙하고 자연스럽습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사야가 살던 당시 유다는 엄청나게 타락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에 젖어 살던 이사야는 그동안 그런 죄를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성전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면서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 그리고 자기 백성들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 나는 망했다.”고 하면서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입술이 부정하다는 것은 말이 부정하다는 것이요 그의 전 인격과 행위가 부정하다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만난 순간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았고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두려움으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외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다르게 보면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찾아주셔서 자신의 실체를 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얼마나 큰 은총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앞에서 자신을 바로 보게 되는 사람, 그래서 자신의 죄인됨을 고백하고 철저히 자신을 낮추는 사람, 바로 거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오스 기니스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중국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사회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4년 이후로는 미국에 체류하면서 현재 기독교 문명과 철학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명저 [소명]에 마르틴 루터에 관한 감동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틴 루터는 개혁을 위한 종합적 비전을 품고 치밀한 계획을 세운 사람이 아닙니다. 죄인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앞에 구원받고자 괴롭게 몸부림치다 지금 우리가 종교개혁이라 부르는 16세기 격변의 순간이 시작되자 깜짝 놀란 사람입니다. 루터가 구원받고자 몸부림친 것은 그의 모든 경건, 모든 선행, 모든 고행, 모든 의식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려는 갈망을 채워 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여전히 죄인이었으며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 문제를 고민하면서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는 우리가 얻어 내거나 우리가 가진 자격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선한 행위를 쌓으며 선해져도 하나님의 은총을 얻기에는 부족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설계하시고 우리에게 목적을 주신 하나님만이 죄 문제를 해결하시어 그 둘 사이의 긴장을 없애실 수 있습니다. 이런 몸부림이 종교개혁을 이끌었습니다. 진심으로 자신의 죄인됨을 바로보고 겸손히 주님 앞에 엎드릴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다시말해 나는 이제 죽었구나! 그런데 6~7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제단은 속죄 받기 위해 희생제물을 태워 제사를 드리는 곳입니다. 그런데 스랍들 가운데 하나가 제단에서 타고 있는 숯을 부젓가락으로 집어 들고 날아와서 이사야의 입에 댐으로 네 악이 제하여 졌고 죄가 사해졌다고 선포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이 시켜서 하신 일입니다. 숯불이 입술에 닫는 순간 입이 성결해 졌습니다. 즉 죄의 용서함을 받은 것입니다. 심령이 새로워진 것입니다. 속마음이 성결해 진 것입니다. 이사야는 진정 하나님께 죄 사함을 받고 새로운 자유와 기쁨을 얻었습니다. 이제 소망이 생긴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사야가 만난 하나님은 바로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그는 외쳤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사1:18) 그리고 마침내 고난의 종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치유와 용서를 전하였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53:5~6) 이사야 선지자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였습니다. 여러분 용서란 단순한 말이 아닙니다. 과거의 잘못을 지워주고, 출발 지점에 세워 놓고는 다시 시작하게 하는 것입니다. 고장 난 심령을 다시 고쳐서 쓰시는 것입니다. 회개가 단순한 말이 아니고 행동이듯이 용서도 결코 말이 아닌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이사야에게는 하나님이 천사를 통해 그 입술에 숯불을 대시는 행동을 통해서 용서를 체험하게 하셨고 때가 되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십자가를 통해 우리 모두의 죄악을 모두 담당케 하심으로 용서와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인간들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보혈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보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들을 이처럼 사랑한다."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사는 자이다"는 자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이 자의식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 자의식이 우리를 믿음으로 인도하고, 바른 신앙으로 인도합니다. 우리를 담대하게 만들어 줍니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도 "나는 주님의 사랑을 받는 자다."는 마음이 모든 어려움을 이기도록 만들어 줍니다. 어렵고 낙심될 때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십자가에서는 "내가 너를 참으로 사랑한다!"는 하나님의 음성이 언제나 들려옵니다. "나는 주님의 사랑을 받는 자다"는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어떻게 삽니까? 용서받은 은총, 기쁨으로 삽니다. 하나님을 깊이 경험한 다윗은 시32편 1~2절에서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같은 죄인의 회개 기도를 들으시고 허물을 사해주시고 죄를 가려주시고 정죄하지 않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심령에 용서받은 기쁨, 감격이 너무도 컸던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만난 사람은 용서하며 삽니다. 여러분 우리는 보통 죄가 미워지면 그 사람까지도 미워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떠하십니까? 우리 하나님은 분명 죄를 미워하시지만 그럼에도 사람은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은 십자가의 역사를 이루신 것입니다.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는지 그 죄를 벌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가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고전15:3~4)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엡1:7)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신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마6:12~13) 그러므로 우리도 그 사람이 행하는 죄가 밉다고 사람까지 미워하지 말고 용서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죄를 사함 받은 이사야 선지자는 이어서 이러한 주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8절입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가 만난 하나님은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한국 장로교의 아버지요, 최초의 선교사인 언더우드는 선교사가 되려고 공부를 마쳤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국 선교사가 시급하다는 논문 발표를 듣고 누군가를 한국 선교사로 보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자기 자신은 인도를 위하여 기도하며 다른 사람을 보내달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순간 “너는 왜 가겠다고 못하느냐” 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때 언더우드는 “예!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한국에 보내 주십시오. 아멘” 하였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온 것입니다. 슈바이처는 30세가 되던 어느 날 기숙사 책상위에 놓인 공고에 선교사가 심히 필요하다는 겉표지를 보았을 때 마음이 설렜습니다. 누구든지 서슴치 않고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는 사람들이 바로 교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라는 내용을 읽고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저 가난과 질병에 신음하는 암흑의 대륙 아프리카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찾아야 합니다.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깨닫게 될 때 절대로 우리는 나이의 많고 적음이나 건강을 핑계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 내가 할 일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사야처럼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렇게 하나님 앞에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사람을 필요로 하십니다. 기도의 사람, 사랑으로 섬김의 사람, 전도의 사람, 진실되고 충성된 일꾼을 필요로 하십니다. 사랑하는 한국교회를 위해, 그리고 아름다운교회를 위해 일할 사람이 누구인가? 문경지역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며 섬길 사람이 누구인가? 주님은 찾으십니다. 그러므로 이사야와 같이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주십시오. 저를 사용해 주십시오. 라고 응답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도 또한 부름받아 충성되게 헌신하는 일꾼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충성된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25:21,23) 적은 일에 충성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조그마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일을 주님사랑하는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충성할 때 주님은 너무도 기뻐하시고 더 많은 것을 맡겨주십니다. 더욱 귀하게 사용해 주시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 주시는 상급이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만나셨습니까?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는 가운데, 기도하며 찬양하는 가운데,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가운데 주님을 만나보셨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이 만난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만난 귀한 경험을 가지시고 더욱 아름답게 주님을 섬기는 주님의 귀한 성도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2017년 7월 2일 오후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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