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누구신가-1 | 박승남 | 2019-08-2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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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16 예수님은 누구신가-1 이 세계역사는 누구를 기준으로 나누어질까요? 세계역사를 나누시는 분이 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즉 예수님의 탄생을 원년으로 계산해서 이 세계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졌으니까요. 역사는 그리스도 이전(B. C.― Before Christ)과 그리스도 이후(A. D.―Anno Domini-In the year of our Lord)로 나눕니다. 그리고 역사는 history입니다. 즉 이 말은 His story 그의 이야기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오심은 역사의 신기원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세계는 다 압니다. 이런 분이 이 땅에 또 있었습니까? 어떤 권력자가 억지로 자기를 역사의 기원으로 삼으려고 한들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어떤 분이실까요? 이 질문에 대해 답하기란 그리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한 인간의 정체를 밝히기도 쉽지 않은 일인데 하물려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 어찌 간단하겠습니까? 이를 위해 우리는 먼저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사람들의 고백을 들어보고 다음 주에는 예수님 자신의 말씀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의 고백입니다.(마16:16) 베드로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과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눈 사람입니다. 그도 초기에는 이분이 도대체 누구인가“”라고 많은 의문을 가졌습니다. 그러다가 베드로는 결정적인 기회를 만납니다.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시기에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에 갔을 때입니다. 그곳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고 이어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질문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고 고백합니다. 여러분 당시 사람들중에 더러는 예수님을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피상적으로 아는 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 떠돌아다니는 말들을 인용할 뿐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달랐습니다. 여기서 베드로의 고백은 베드로의 고백이면서 동시에 제자들의 고백을 대표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습니다. 헬라어 그리스도라는 말은 구약 히브리어에서는 ‘메시야’라는 말과 같습니다. 히브리적 관점에서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의미의 ‘마쉬아흐’는 본래 ‘쉐멘 미쉬하’라는 특별하게 제작된 기름 부음을 받고 정치적, 종교적 수장이 되는 왕이나 대제사장에게 쓰이는 칭호였습니다. 그래서 ‘마쉬아흐’라는 호칭은 ‘모든 백성들 위에 뛰어난 지도자’라는 의미를 가지며 백성을 인도하고 이끌 수 있는 존재를 의미하게 됩니다. 그러나 시대를 지나면서 모든 왕들과 대제사장들은 모두 ‘마쉬아흐’로 표현되며, 또 나라가 환난과 어려움에 처해있을 때 백성들을 이끌고 적에게 대항하여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해 준 인물들 역시 ‘마쉬아흐’로 표현되고 심지어는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고레스 왕에게도 기름 부음 받은 자 즉 ‘마쉬아흐’는 라는 칭호가 붙여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인류에게 궁극적으로 필요한 ‘마쉬아흐’는 인류가 죄로 인하여 당하고 있는 모든 고통과 고난과 아픔에서부터 인류를 끌어내어 하나님께서 원래 창조하셨던 에덴의 행복과 기쁨과 평화를 맛보는 곳으로 인도하는 ‘마쉬아흐’여야만 했습니다. 즉 단순히 나라를 적의 손아귀에서 구원하는 자가 아니라 구원을 통하여 이루어질 어떤 상태를 만드는 존재인 것입니다. 이런 ‘마쉬아흐’가 진정한 ‘마쉬아흐’였으며 이런 ‘마쉬아흐’를 기다리는 것이 히브리인들의 진정한 기다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베드로가 고백하는 메시야에대한 고ㅓ백은 예수를 단순히 현세적인 왕 또는 대제사장적인 개념에서 메시야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모든 인류를 고통과 고난과 아픔에서부터 이끌어 내어 에덴 동산으로 이끌여 들여 행복과 평화를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근본적인 메시아-‘마쉬아흐’로서의 고백이었다고 봐야 합니다. 더 나아가 베드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신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왕들이 자기들이 천자라고 했습니다. 일본 천황도 그리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죽을 인간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시 화려한 왕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바로 자기 스승 예수님께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귀신을 쫒아 내시고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시는 등 말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들어시고는 기뻐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혈육’이란 인간의 지식으로란 말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같은 고백은 인간의 지식이나 노력으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물론 알려고 하는 노력이 필요하지만),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셨기 때문이란 말입니다. 여러분 제 정신으로야 어찌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볼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는 영원한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있으며, 그 아들의 신비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은 사람에게서 나올 수 없습니다. 아무리 베드로가 예수님과 함께 3년을 살았다 해도 그의 신앙고백은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알게 해주신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런 것을 계시라고 합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는 3년간에나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그분께 듣기도 하고, 그분을 보기도 하고, 때로는 의심도 하며 혼란스러워했던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도록 해 주셨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그리스도인들도 예수님을 정확하게 배워야 하고, 그 위에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아무튼 베드로는 예수님을 “당신은 우리들이 그동안 간절히 기다리던 바로 그 분, 우리를 구원해 주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2. 이어서 수가성 여인의 고백을 들어보겠습니다. 언젠가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통과해서 갈릴리로 가신 적이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갈 때 좀 먼 길이기는 하지만 요단 강변길을 이용했습니다. 예수님도 이전에는 그 길로 다니셨습니다. 그런데 이 때만은 사마리아 길로 가야겠다고 고집하셨습니다.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은 엉뚱하고 갑작스럽게 사람을 찾아가십니다. 예수님의 역사는 찾아가는 삶입니다.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찾아오셨고, 베드로를 찾아가셨고, 이제는 수가성의 여인을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길로 가시다가 정오가 되어 세겜 근처 수가 성 우물 곁에 앉아 계시다가 물을 길러 온 한 여인을 만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 4장 이야기입니다. 우물가에서 나누신 여인과의 대화는 ‘물을 좀 달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당시 풍습에 의하면 물을 달라는 것은 그와 사귀고 깊다는 마음의 표현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여인은 놀라며 반문합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되묻는 여인의 말에 예수님은 답하셨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요4:10) 대화의 흐름을 보면 우물물에서 생수로 발전했습니다. 드디어 여인은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라고 반문했고 주님은 이어서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3~14)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오늘 낮에 말씀드린 것처럼 영생수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여인에게는 얼마나 신기하고 놀라웠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그런 물을 내게 주소서”라고 간청합니다. 그러자 주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남편을 데려오라고 하시고 이후 대화는 예배 이야기로 발전됩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과 긴 대화를 주고 받던 이 여인은 갑자기 물동이를 우물에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29절과 같이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라고 전합니다. 그 말을 듣고 사람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몰려 왔습니다. 여러분 이 여인이 동네 사람들에게 한 말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내가 행한 모든 일을 아시는 분,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보고 나의 과거를 모두 아시는 분이시라 자기 동네 사람들에게 말한 것입니다. 수가성 여인은 남편을 5이나 두었을 정도로 문제가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동네 사람들은 이 여인은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녀는 동내사람 마주치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물 길러 오는 것도 시원한 때가 아니라 남들이 오지 않는 뜨거운 한 낮에 물 길러 왔습니다. 그런데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뒤 대화를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분은 바로 자기의 과거를 모두 아시는 분으로 바로 그 분이 메시야, 구세주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이 여인이 예수님을 믿어 죄 용서함을 받아 구원을 받게 된 것은 말할 나위가 없지요. 그러고 보니 이 여인은 이제 사람 만나는 것이 부끄럽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동네 사람들에게 뛰어가서 예수님을 소개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모든 과거를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점쟁이들도 과거를 알아 맞춘다고 합니다. 이러한 가운데 동국대 출신의 어떤 중이 이러한 고백을 했습니다. 원래 불교에서는 관상 사주팔자 못하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절에 찾아온 부인들이 하도 봐달라고 하니까 봐주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관상을 보기는 쉽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와서 관상, 사주팔자 봐달라고 하는 여자는 무엇인가 문제가 있어서 온 것이고 여자 문제는 딱 3가지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1. 남편문제(바람), 2, 사업부진, 3, 자녀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저렇게 이야기를 시키면 자기들이 다 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자식이 속을 썩여서 죽겠다합니다. 그러면 그 때 “그래 내가 보니 자식 팔자가 사납구먼.” 그러면 용하다고 선전한다합니다. 그리고 하도 관상을 봐주니까 무엇 때문에 왔는지를 이제는 척하면 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진정 과거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과거를 아십니다. 이는 나의 과거를 지켜보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과거를 아시는 주님은 나의 현재 및 미래도 아십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만 우리의 과거와 미래를 아시는 분이신가요? 시간은 바로 직선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태어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이시다. 처음이 되시고 나중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시간은 0입니다. 하나님은 시작과 끝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에게는 과거와 미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순간이 과거고 미래고 현재고 하나님께는 그 모든 것이 다 들어갑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우리가 태어나고 죽을 것 다 아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 분께 우리의 모든 것을 우리의 일생을 맡길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가다가 길이 막혔을 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십니다. 나의 모든 일을 주님께 맡기면 주님께서 맡아주시고 나의 일을 돌보아 주십니다. 선하게 인도하시고 은혜 베풀어 주십니다. 이어서 마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백부장의 고백을 들어보겠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은 채 마지막 때를 맞으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에게 유명세가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그분의 정체성이 분명하게 알려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미지막 순간 그분은 홀로 외롭고 고독하게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사도요한 외에는 제자들도 십자가 주변에 없었습니다. 갈릴리에서 올라온 여인들만 멀찍이 서서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울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마가는 당시 십자가 주변의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놓았습니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그분의 죽음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군인들, 지나가는 사람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어느 누구도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모르고 희롱하고 모욕하고 조롱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의외로 예수님이 운명하시던 순간에 십자가 정면에서 그 현실을 눈여겨보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사형집행의 책임자인 백부장이었습니다. 그는 십자가를 똑바로 바라보다가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막15:39) 그는 예수님의 추종자도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도 아닙니다. 그저 한 사람의 이방인, 로마 백부장입니다. 더욱이 그는 사형 집행 책임자였습니다. 그는 사형수의 죽음을 확인하고 상관에게 보고하기 위하여 그분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백부장이 한순간에 변해서 험한 심자가에 매달려 죽어간 예수님을 향해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어떻게 사람이 한 순간에 그리 변할 수 있을까요? 로마 백부장은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기로 맹세하고 장교가 된 사람입니다. 그런 인물이 또 다른 신을 그것도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한다는 것은 곧 황제를 능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때문에 그런 사람은 장교에서 해임되어 본국으로 소환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정황을 참고한다면 백부장의 고백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가운데 가장 이상하고 놀라운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갑자기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여러분, 백부장은 사람을 많이 죽여 본 사람입니다. 십자가형 집행도 많이 해 본 사람입니다. 그래서 죽는 모습을 많이 보았습니다. 십자가에서 못질해서 죽이면 대부분 몸부림치고 소리를 지르고 고래고래 욕과 저주를 퍼붓고 죽습니다. 그래도 보세요. 우리 주님은 도리어 십자가에서 자기를 죽이고 욕하고 조롱하는 이들을 위해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를 하지 않나, 자기 어머니를 자기 제자에게 맡기지 않나, 한 편 강도에게 “네가 오늘날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하지 않나 “내가 다 이루었다”라고 승리의 선언을 하지 않나 정말 그 모습 하나 하나가 과거에 보았던 죄수들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래서 백부장은 “이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일본의 의사 한 분이 40년간 환자를 치료해보고 또 수많은 사람의 운명을 지켜 본 뒤 수필을 한 권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자기가 그 동안 보아온 [사람 죽는 모습]에 4가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1)안 죽으려고 발버둥치는 사람 - 이들은 죽는 모습이 험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조사해 보니 이들은 종교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2) 그리고 묵묵하게 아무소리 않고 죽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도사들이었습니다. 일본에는 도사들도 많은 모양입니다. 그리고 3)죽음을 받아들이면서 “인생은 다 나면서 죽는 것이야, 인생은 생로병사니까” 하면서 담담하게 죽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다른 아닌 불교신자들이었습니다. 4)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일은 죽으면서 좋아하면서 죽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죽으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인가 하고 조사해 보니까 이들은 다름 아니라 기독교신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의사는 결국 예수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책을 쓴 것입니다. 결국 “나도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 좋은 분들의 임종을 보면 뭔가 다릅니다. 정말 기쁜 가운데 죽음을 맞이합니다. 어떤 할머니는 죽어가면서 아들보고 “너 예수 믿어라. 예수 믿고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하나님 나라가 있음을 믿고 영생을 믿는 것입니다. 왜요?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고 그렇게 사셨으니 까요. 진정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면 영원한 세상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믿습니다. 기가 막힌 얘기가 있습니다. 대학교 2학년 여학생이 암에 걸려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버님이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십니다. 철저한 유교 집안 어른이었습니다. 그런데 딸이 아프니까 딸을 살리기 위해서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런데 새벽기도까지 나올 정도로 굉장히 열심히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런데 목사가 보기에는 믿음은 없는 것 같고 단지 딸을 살리려고 그렇게 열심을 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뿔싸 딸이 죽었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러니 목사님은 차를 타고 가면서 걱정 걱정입니다. - 이제 그 딸 죽었으니 그 집은 모두 예수 안 믿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러니 자 뭐라고 얘기해야 하나... 그런데 집에 이르렀는데 아버지 교장선생님이 대문간에서 목사님을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는 첫 마디가 “우리 딸 죽었어도 우리 예수 믿어요!” 그래서 “아니 어떻게 된 것입니까?” 물었지요. 그러자 하는 말이 딸이 운명하기 직전인데 “아버지 어머니 나 하늘나라 봤어요. 그러니 나 죽어도 아버지 어머니 꼭 예수 믿어야 돼요.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 천국에서 꼭 만나요.” 그리고 죽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듣고 아버지 어머니가 소망 중에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4. 도마의 고백 (요20:28) - 경험을 철저히 꺽으신 예수님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뒤의 일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도마에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지만 도마는 말했습니다.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그러니 이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주머니 같으면 뒤집어 라도 보이겠건만 그럴 수도 없고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8일이 지났습니다. 그때에 도마를 포함한 모든 제자들이 함께 어떤 집안에 있었습니다. 문들은 모두 닫혔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예수께서 저희들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도, 문을 여는 소리도 없이 주님이 홀연히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인사를 하시고는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도마야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자 여러분 이 때 도마가 과연 예수님의 몸을 만져 봤겠습니까 안 만져 봤겠습니까? 만져 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눈으로 직접보고 그 음성을 들음으로 벌써 확인이 되었으니까요. 그래서 도마는 그 자리에서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자 이제 여러분은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라고 믿으십니까? 예수님이 누구시라고 고백하겠습니까? 주님은 여러분의 고백에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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