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기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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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자 예수님을 만난 사울 박승남 2019-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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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사도행전9:1-9절 개역개정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6.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9:1-9 성자 예수님을 만난 사울

 

오늘 말씀을 보면 사울이란 사람이 나옵니다. 사울은 신분도 특별할 뿐 아니라, 예수님을 만난 경험도 특별했습니다. 사울은 당시 유대에서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사울 스스로 자신이 어떻게 성장했으며 어떻게 생활했는지를 예루살렘 사람이면 다 알고 있다고 산헤드린 앞에서 자신 있게 말했을 정도(26:4)입니다. 그는 당시 최고의 학자였던 가마리엘의 문하생으로 자기를 소개했습니다. 여기 문하생이란 가마리엘에게서 배우는 제자들 중에 으뜸가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이런 사람은 보통 선생의 추천을 받아 산헤드린 회원이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학자 부르스는 그가 회심하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산헤드린 회원이 되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그는 안수받은 서기관이었습니다.

사울은 당시 유대에서 최고의 지성인으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리고 그는 바리새인으로 예수 믿는 것을 가장 수치스럽게 생각한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를 믿는 교회를 몹시 싫어하고 박해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를 단지 인간인 것으로만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구약성경 신명기 21:23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라는 말씀에 따라 예수를 저주받은 자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는 토라 때문에 예수를 거부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저주를 받아 십자가에 달려 죽은 자를 부활했느니 하면서 메시야로 믿고 따르는 것을 보고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이단을 단호하게 잘라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명문가의 아들이라면 또 모르겠는데 나사렛의 촌사람인 나사렛 사람 예수를 메시야라고 믿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지성인이었던 사울의 자존심을 더욱 상하게 한 것입니다.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교회를 핍박하였습니다. 특히 스데반을 죽이는데 앞장섰습니다. 그런 그는 이제 예루살렘 밖으로 도망간 그리스도인들을 잡기 위하여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다메섹을 향하여 가고 있었습니다. 마치 전장의 냄새를 맡은 전마와도 같이 그 숨 속에는 위협과 살기가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부하들을 데리고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강한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습니다. 그래서 말을 타고 가던 그는 그만 말에서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엎드러졌습니다. 사도행전 26:14절을 보면 가던 자들이 모두 땅에 엎드러졌다고 했습니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사울이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주여, 누구시니이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사도행전 26:13절의 표현대로 하면 예수님이 해보다 더 밝은 빛으로 사울에게 오신 것입니다. 태양보다 더 밝은 빛이란 태초에 있었던 하나님의 빛입니다. 그리고 계시록 22:5절을 보면 이 빛이 다시 나타납니다.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해보다 더 밝은 빛이란 표현은 사울이 만난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암시합니다. 죄인으로 나무에 달려 죽어 그 생애가 끝났다고 생각했던 그 분이 나타났으니 얼마나 놀겠습니까? 더욱이 사람들이 나무에 달아 죽인 그 분이 하나님이시라니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사울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죽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기가 그동안 해 온 짓이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었는데 어떻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겠습니까? 그는 앞이 캄캄했습니다. 자신의 인생이 한꺼번에 다 무너져 버리는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머리가 어지러워서 아무것도 생각할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예수님은 사울을 죽이지 않고 그와 대화를 시도하신 것입니다. 그 대화는 아주짧았습니다. 하지만 그 짧은 대화는 사울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꿔 놓았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너는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말해 네게 이를자가 있느니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말씀에 따라 일어나기는 했지만 도저히 걸음을 걸을 수 없었습니다. 앞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는 수 없이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 유다라는 사람의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사흘 동안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기도했습니다. 그의 일생 최대의 충격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금식 기도하면서 그동안 자신이 한 일, 그리고 다메섹으로 오는 길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며 하나하나 자신의 삶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위하여 아나니아라는 제자를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를 유다의 집으로 보내시어 사울을 만나 안수하여 시력을 회복시키고 세례를 받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물론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어 사명자로 나서게 하신 것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주여, 누구시니이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말해 네게 이를자가 있느니라

이것이 바로 예수님과 사울의 대화내용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철없이 날뛰던 사울에게 성자 하나님은 찾아주시어 먼저 말을 걸어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3마디를 통하여 놀라운 진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는 다메섹에서 주님께 교육을 받아 신학교를 다 졸업한 셈이 되었습니다. 보십시오.

그가 만난 주님은 어떠한 분이셨습니까?

1. 부활하신 주님이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그냥 십자가에 달려 죽은 줄만 알았습니다. 그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말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말도 안 되는 허탄한 이야기를 전파하는 무리들, 그야 말로 혹세무민하는 무리들을 보고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날뛰었는데 바로 그 분,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신을 찾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자신이 직접 그 분이 살아 계신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 분의 빛을 보았고 분명히 그 분과 이야기를 해 본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주님의 부활을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그 분이 살아계심을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 분이 부활하셨다면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구나! 진정 부활이 있고 신령한 몸이 있고, 영생이 있구나, 재림과 함께 심판(종말론)이 있구나 라는 것을 이 한 사건을 통하여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몸이 회복된 뒤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였고(9:20) 주님이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되셨다 (고전15:20)는 것을 힘차게 증거한 것입니다.

 

2. 사울이 만난 분도 인격적이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아담을 찾아주셔서 아담아! 하시고 모세를 찾아주셔서 모세야, 모세야! 하고 불러 주신 하나님은 사울도 찾아주셔서 사울아 사울아 하고 불러주셨습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43:1) 이름을 불러 주신 주님은 바로 인격적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때 주님의 음성은 어떠한 음성이셨겠습니까? 호되게 질책하는 투의 목소리였을까요? 아니면 ...?

정확히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사울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사랑의 음성이셨을 것입니다. 알지 못하고 그릇되게 행하는 사울을 불쌍하게 여기시고 그를 불러 회개케 하시고 일꾼 삼으시려는 주님의 사랑의 음성인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때로는 회개케 하시기 위해, 때로는 위로, 격려하시기 위해 그리고 때로는 사명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3. 교회의 하나님이셨습니다. - 교회관

주님을 만난 사울은 교회가 무엇인가도 깨달았습니다. 유대 회당과는 전혀 다른 교회가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될 내용이 있습니다. 그는 서기관이었고 산헤드린 사법부에 속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인간적으로 대면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산헤드린 사법부에 속한 서기관으로서 죄인의 범죄 내용을 수집, 정리하여 범죄자의 죄를 정하는 직책을 맡았기에 그는 예수님에 대한 정보를 이미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정보가 주님을 믿도록 하지 못했습니다. 그 정보는 주님과 교회가 잘못되었다는데 초점을 맞춘 정보였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사울은 예수님을 한 번도 직접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그가 예수를 박해한 적이 없습니다. 박해했다면 오직 교회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이는 교회와 예수님은 분리될 수 없는 한 몸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바울의 교회론이 시작되었습니다. 교회가 무엇인지, 그리고 교회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여기서 알게 된 것입니다. 몸이란 무엇인가 몸은 다시 말하면 몸뚱이 입니다. 그리고 몸뚱이는 때리면 아픔을 느끼고, 채찍에 맞으면 심한 고통을 느끼고 편하면 기분이 좋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주님의 몸이라는 것은 내 발로 교회를 차면 주님이 아파하고 주님이 괴로워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 사울은 통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교회를 핍박한 것이 하나님을 대적한 일이었구나, 하나님을 박해한 일이었구나.

하나님, 하나님, 저는 몰랐습니다. 몰라서 그랬습니다. 용서해 주소서. 이제는 이 생명을 바쳐 죽도록 충성하겠습니다.”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참으로 초라하게 보이는 교회라도 소중합니다. ? 주님의 몸뚱이 이기 때문이지요.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와 함께 아파하고 교회와 함께 즐거워하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분과 함께 영원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교회를 기쁘게 하면 되고 주님을 아프게 하려면 교회를 박해하고 해롭게 하면 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사랑해야지 왜 교회를 사랑하라고 하느냐?”라고 합니다. 그럴듯한 말입니다. 그러나 모ᅟᅥᆷ이란 어떤 인격체를 나타내 보이는 현실입니다. 몸이 없는데 어떻게 그 사람의 실체를 볼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돌르 사랑하는 길은 곧 보이는 그의 몸인 교회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완벽하기에 사랑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주님이 세우신 가장 귀한 기관이고, 지상에서 그분을 대표하는 몸이기 때문에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병원이 깨끗하고 아름다워서 사람들이 귀히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병원은 각종 환자들이 모인 곳이고, 고통과 아픔이 있는 곳입니다. 그렇지만 그곳에서 치료받고 건강해져 세상으로 나갈 수 있기에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우리 영혼의 치유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를 귀히 여겨야 합니다. 교회를 그토록 박해했던 사울은 이 때부터 주님의 몸(뚱이)인 교회를 위해 생명을 바치게 되었습니다.

 

4.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 구원을 체험 (6)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너는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말해 네게 이를자가 있느니라

여러분 구원이란 무엇이고 화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무조건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벌써 주님은 사울을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죄가 있음에도 책망하지 않으시고 받아들이셔서 함께 생활하게 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돌아온 아들 재판하지 않고 얼싸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이게 바로 구원이요, 용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돌아만 오면 얼싸 안고 구원해 주십니다. 아니 사울의 경우를 보면 회개하기도 전에 주님이 먼저 찾아주셔서 용서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해 보다 더 밝은 빛되신 하나님,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 죄에 빠져 죽어가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인간과 똑같은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사울을 찾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용서해 주시고 새 사람으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를 통해 사울은 자신은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는 가장 강력한 느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웠겠습니까? 여기서 바울은 주님의 사랑과 은총을 깊이 체험한 것입니다. ! 나 같은 죄인도 용서해 주시고 사랑해 주시는구나? 주님의 사랑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주님의 강력한 사랑에 붙잡힌 그는 철저히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동안 아끼고 자랑하던 것을 내어 버리게 되었습니다.

3:8~9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그리고 이제는 주님만을 위해 살게 되었습니다.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5. 자신을 예정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주님이 나를 언제부터 알았을까? 나를 당신의 그릇으로 점찍어 놓았단 말이지? 그렇다면 어제부터? 이 분은 내 모든 것을 알고 지금가지 나를 지켜보셨구나! 그리고 다메섹에서 나를 만나주셨구나.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정이 아니겠습니까? 예정은 다른 사람에게 막연히 적용시킬 수 있는 교리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이 자기가 받은 은혜를 더욱 확실하게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게 하는 진리인 것입니다. - 바울은 하나님이 자기를 예정하시되 창세전부터 하셨다고 고백했습니다. (1:4~5)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사명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너는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말해 네게 이를자가 있느니라(6)

그리고는 때가 되어 주님께서 제자 아나니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chosen instrument) (15)

여러분 구약법대로 하면 사울은 스데반을 죽였던 방법대로 돌에 맞아 죽어야만 했습니다. 다메섹에서 죽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바울의 죄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나를 위하여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내 이름을 전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땅의 임금이 준 사명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주신 사명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은총을 입은 사울은 그때부터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그의 증언자가 되어 그 분에 대한 복음을 전하러 온 세계에 다니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보십시오. 사울 곧 바울은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딤전1:12)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고전4:1)라고 말했습니다. 여기 일꾼이라는 말은 노예선의 깜깜한 지하실에서 노 젖는 노예와 같은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잡힌 노예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물론 마지못해 억지로 노예가 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뜨거운 사랑에 붙잡힌 사람, 말씀으로 자유 함을 얻은 노예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죽도록 충성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얼마나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있습니까? 교회가 참으로 귀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사명 주신 주님께 얼마나 충성하고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아버지를 너무 멀리 떠나 있습니다.; 그 사랑을 받은 기억도 없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마음이 더 아프고 급하십니다. 이런 아버지의 마음의 극치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랑의 주님은 오늘도 우리 같은 사람들도 부르셔서 보내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랑을 깊이 새겨보고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깨달아 아버지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명을 감당하기를 바랍니다. 2017. 7. 23일 오후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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