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본질 | 박승남 | 2019-08-2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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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요한계시록2:1-7절 개역개정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계2:1~7, 3:20 믿음의 본질 지난 주 말씀드린 것을 정리합니다. 믿음이란 바울은 주 예수, 복음을 믿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복음이란 마가복음 1장 1절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바로 복음이 되십니다. 예수님의 삶과 정신, 그 말씀이 모두 복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1장을 보면 예수 그리스에 대한 5가지 내용을 간추려 복음이라고 이렇게 설명합니다. 1) 예수님은 예언대로 이 땅에 오신 분 2)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분 3)십자가에서 죽으신 분 4)부활하신 분 5)그리고 로마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마지막 심판을 위해 이땅에 오실 분 그리고 사도바울은 복음을 믿는 것을 가리킬 때 ‘피스티스’라는 명사를 사용했습니다. 피스티스는 본래 신실함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단어를 신실함이 아닌 복음을 받아들이는 행위인 ‘믿음’의 표현으로 사용했습니다. 바울이 이처럼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한 이유는 그의 영적 체험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아무 일도 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을 죽이려 했을 뿐입니다. 그런 그를 예수님은 다메섹에 나타나 만나 주셨고 그를 받아주셨습니다. 그 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님을, 복음을 깊이 받아들였습니다. 이러한 그는 자기의 경험을 전도에 적용할 것이 전도의 방법이 되었습니다. 그는 순회전도자였기에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믿음을 말할 때 명사형을 사용함으로써 어떤 역사적인 사실이 단번에 영원성을 지니게 됨을 나타내고자 했습니다. 물론 믿음에 대해 동사형을 사용한 경우도 약간 있습니다. 이 때도 부정과거형을 사용함으로써 한 번 믿음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표출시켰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사용된 믿음이란 단어는 이 정도에서 정리될 그리 간단한 개념이 아닙니다. 바울은 믿음을 매우 강조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은 믿는다는 말을 별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믿은 사람은 믿는다는 말을 강조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다양한 믿음의 의미를 크게 요약하면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위에서 말한 대로 바울처럼 주로 명사를 사용한 경우이며 다른 하나는 후기 문서에서 동사형을 사용한 경우입니다. 이는 바울 서신보다 훨씬 후에 기록된 요한복음 요한 일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 두드러집니다. 요한복음의 경우 피스티스란 명사형은 전혀 쓰지 않고 대부분 동사형을 사용했습니다. 즉 피스튜오와 피스투오 에이스가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동사들은 거의 현재시제를 취하고 있습니다. 피스튜오는 신실하다 믿는다는 의미이고 에이스는 전치사로 관계를 명시해 주는 안으로 라는 뜻입니다. 영어로 believe in 이라고 하는데 바로 이것이 피스튜오 에이스에서 온 것입니다. (로마서 6장 3절에서는 ‘에이스’를 합하다로 번역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바울이 선교 구호와 같이 믿음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도식화하여 사용하였다면 요한복음에서는 믿음을 예수 그리스도와 생생한 관계로 설명합니다. 특별히 요한복음은 믿음을 단지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을 칭하기 보다는 듣고, 보고, 아는 것 그리고 그 사실을 자기의 생명 안에 받아들이는 것을 믿음이라고 가르칩니다. 신약성경에서 ‘안다’는 표현은 우리가 생각하는 지식적인 앎이 아니라 듣고 본 것을 경험함으로 알게 된 것을 말합니다. 헬라어로 기노스코, 히브리어로는 ‘야다’입니다. 요한복음은 알지라는 단어를 무려 41번 사용합니다. 그중에는 물론 일반적으로 안다는 단어도 있지만 기노스코가 쓰인 경우도 많습니다. 1:10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그리고 17:3절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한복음은 구원이라는 단어는 6번만 사용학도 나머지 영생이라는 단어를 19번이나 사용합니다. 생명이라는 단어는 16번 사용하고요. 그런데 요한복음 17:3절을 보면 본분은 영생은 아는 것 즉 ‘기노스코’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지요. 여기서‘안다’는 것은 인격적인 연합, 교제, 참여를 말하는 것으로 동사는 `동거한다'는 뜻도 지니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그처럼 주님과 긴밀한 교제를 갖는 것입니다. 주님과 동거하면서 주님을 더욱 더 알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 주님의 능력을 아는 것입니다.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주님을 사랑하고 더욱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더욱 주님께 순종하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신다는 것은 그만큼 친밀한 교제를 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믿는 자는 현재분사형으로 쓰였습니다. 즉 현재 믿고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를 믿는다고 말할 때 주로 현재형을 씁니다. 왜 그럴까요? 사랑은 항상 현재적입니다. 과거의 사랑으로 현재 깨진 사랑을 싸맬 수 없고, 미래에 올 사랑으로 잘못된 현재를 극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은 현재진행형이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믿음은 곧 사람을 신뢰함으로 일어나는 사랑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시제로서 ‘믿는 자’란 말은 한번 믿은 것으로 구원이 자동으로 영원히 지속되는 생각을 거부하는 말입니다. 현재 믿는 자가 지금의 믿음 상태를 계속 유지하며 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이런 인간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불변합니다. 그 사랑은 그대로 그 자리에 머물러있습니다. 다만 인간편에서 그사랑을 진정으로 받으들이고 현재의 믿음을 계속해서 이어 가려 할 때에만 그 불변성이 적용됩니다. 하나님이 사랑의 불변성과 인간의 믿음이 변질을 요한복음 저자는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히브리서 6:7~8절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요한복음이나 후시 문서를 읽는 사람들은 바울이 믿음을 왜곡시켰다고 바울의 믿음관을 비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바울 서신들을 잘못 읽은 결과입니다. 빌립보서 2:12절을 보면 사도바울은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권고 했고 로마서 11장 20~22절을 보면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고 했고 또한 고린도후서 13:5절을 보면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고 했습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너히 안에 계신지를 시험해 보고 그 사실을 증명하라는 것입니다.만약 그리스도가 너희 안에 계시지않으면 너희는 버림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이는 불신자가 아닌 고린도교인들에게 한 말입니다. 한 번 믿음으로 구원이 영구불변하는 것이라면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이 말은 구원 받았다는 사람들 중에 떨어지는 자도 있음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떨쳐내시는 게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나는 사람들을 어찌할 것입니까? 히브리서를 보겠습니다. 2:1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흘러 떠내려가다(pararjrJuevw(파라레오) 떠내려 가버리다. '흘러 지나가다, 미끄러지게 하다'를 의미합니다. 이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안전한 정박지를 그냥 지나쳐 떠내려가는 것'을 나타내는 비유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일정한 상륙장소를 지나 하류로 떠내려가서 목적지에 안전하게 이르지 못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구원받았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러면 교인들은 구원받았음에도 취소될 수 있는가요? 그런데 히브리서에서는 구원받았을지라도 떠내려갈 수 있다고 전제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은 구원하고 싶으십니다. 절대 변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하나님을 버리고, 놓아 버렸으면 멸망할 수도 있다. 복음을 갖고 있다가 놓아버렸다면 흘러 떠내려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히브리서 3:12절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분명히 믿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믿음을 놓아버리려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떠내려가려고 있습니다. 그러니 떨어질까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히3: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돌맹이처럼 딱 굳어지지 않게 하라. 이단에 빠진 사람들은 귀신에 씌운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돌아오지 못합니다. 나이아가라 폭포에 가면 NO HOPE가 있습니다. 상류는 시냇물입니다. 그래서 한참가다보면 폭포가 있다는 것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물이 조금씩 빨라집니다. 거기서 놀다가 사람들이 죽는다. 그 선을 넘어가면 아무도 구조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에게도 이 선이 있지 않을까~ 참으시고 끝까지 붙들어 주십니다. 그런데 NO HOPE 선을 넘어갈 때는 하나님도 어찌하실 수 없는 단계가 됩니다. 베드로후서 3:1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이런 말씀들은 믿음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 있음을 전제합니다. 배교하는 사람들, 이단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다는 말씀은 여지없이 불변의 진리입니다. 그런데 한 번 믿으면 무조건 영원히 구원을 받는다는 사상은 성경이 말하는 절대 진리가 아닙니다. 여러분 히브리서도 그렇지만 요한복음이 쓰인 시기는 바울 서신과 상당한 시간 차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읽어야 합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교회는 안정되었지만 한 편으론 교회에서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한 결과 많은 문제가 빚어지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야고보서나 요한일서를 보면 교회 안에 그런 갈등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영지주의 이단이 일어나 주장하기 시작하면서 믿음에 대한 혼란은 한층 가중되었습니다. 이 문제를 심각하게 다룬 책이 요한일서입니다. 2:3~3절을 봅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사도바울은 믿음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선교적인 구호롤 사용했습니다. 그렇다고 바울 사도가 믿음을 이렇게 단순한 것으로 전하지는 않았습니다. 즉 바울도 믿음은 복음을 받아들이는데서 출발하되 그 단계에 계속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친밀한 교제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바울은 이 점을 그리스도와 연합이란 말로 설명합니다. 롬6:5절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이 연합이라는 단어는 suvmfuto"(쉼퓌토스)로 함께 심겨지다 또는 함께 자라다는 단어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또 남녀 두 사람이 만나 결혼해서 일생을 같이 살게 된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있습니다. 그래서 유대 랍비들은 이를 ‘결혼’에 해당하는 말이라고 정의합니다. 결혼을 단지 예식을 올리는 것으로 긑나는게 아니라, 일생을 같이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면 그분과 영원히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살아가야 하는데 가장 필요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요한계시록 2:1~7절을 보면 참된 증인이시요 이긴 자의 대표가 되시는 주님이 에베소교회에 보내는 편지가 나옵니다. 구구절절 칭찬을 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참 귀한 교회입니다. 그런데 4절을 보면 이러한 교회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에베소 교회는 오랜 시간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거짓 사도들과 싸웠습니다. 그들과 저항했습니다. 예수님의 정신을 지키려고 부단히 노력한 것입니다. 에베소는 교회가 세워지기도 어려웠던 도시였지만 진리를 사수하기도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에베소는 로마 총독이 주재하는 소아이사에서 정치의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문물이 모여 드는 곳이어서. 그 안에는 다양한 그룹들과 이단들이 존재해 있었습니다. 유대인을 비롯하여 세례 요한의 제자들 그리고 아데미 여신 숭배자들까지 그만큼 많은 위험들도 산재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교회가 처음 사랑을 버렸습니다. 여기 처음(프로스핍토)이라는 말은 최상의, 주요한, 먼저 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최상의 사랑은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혼인으로 이미지화 한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햐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생명처럼 지켜야 할 그 사랑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버렸다(앞히에미)는 말은 보내다 버리다 떠나다 포기하다, departed from 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과 첫사랑을 헌신짝처럼 버린 상태를 말합니다. 당연히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지 예수님을 향한 사랑을 버린 것입니다. 아피에미의 법정용어로는 이혼하다는 뜻입니다. 완전히 버려서 회복하기 어려운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회복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리라. 이건 교회문을 닫아야 할 상황을 말합니다.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늦기 전에 잘못된 행위를 리고 즉시 돌아오라는 급박한 호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호세아서를 연상케 합니다. 주님을 뜨겁게 사랑했던 에베소 교회! 그런데 바른 정통 교리를 사수하는 교회가 되려고 이단들을 대적하고 싸우다 보니, 교회의 본질을 떠나 조직에 집착하거나 교리적 교회가 되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지식화) 처음 사랑,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버린 것은 에베소 교회가 지금까지 열심히 해 왔던 모든 이들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에베소 교회에 주신 말씀을 보면 이런 공식이 성립됩니다. (봉사,헌신,사랑,인내,이단색출, 정통 신앙사수)<첫사랑. 여러분 여러분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아니 주님을 사랑하기는 하십니까? 좋아하기는 하십니까? 처음 사랑은 교회의 본질적인 것입니다. 로마서 5:1~2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이 구절에 나타난 중요한 단어는 ‘믿음, 의 그리고 하나님과 화평’입니다. 믿음에서 출발하여 의에 이르며, 믿음의 최종 목적지는 하나님과의 화평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전체 구원의 과정에서 믿음은 출발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며 사는 과정에서 믿음은 그 속에 녹아든 끈끈한 신뢰감, 사랑이 바탕이 됩니다. 화평이란 그동안 불화했거나 반역하고 살던 태도에서 돌이켜 평화를 이루며 산다는 뜻입니다. 로마서에서 말하는 의는 죄를 용서받고 깨끗해지고 정결하게 되는 것만은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롭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롭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 안에 들어와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데만 집중했습니다. 이는 로마서 4장에만 머물러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것은 히브리서 5장에서 전하는 하나님 말슴의 초보에 머물러 있는 신앙의 모습입니다. 12절입니다.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여러분 사도바울은 믿음을 통해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게 된 사실을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예수님은 임마누엘이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낮선 사람과 만나서 함께 걷는 정도로 주님과 동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분과 함께 산다고 합니다. 요15:9절을 보면 예수님도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하십니다. 누구에게? 일차적으로 제자들에게입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에게 말입니다. 함께 살자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들을 구원하기를 원하실까요? 그냥 한 번 고백하고 그것으로 끝나기 위해서일까요? 아니면 계속해서 긴밀한, 친밀한 관계를 나누시기 위해서일까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하나님이 믿는 자들을 하나님 안에 받아들이시고 믿는 자들은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날마다 화평을 누리고 사는 것입니다. 단지 복음만을 받아들이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한다면 사도 바울의 주장을 크게 오해한 것이요 성경을 단편적으로 읽으서 생긴 과오입니다. 계시록 3:20절을 보십시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내(예수 그리스도)가 문밖에서 두드리노니 예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문밖에 계십니다.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 문밖에서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교회 안에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주님이 없는 교회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주님을 잃어버렸거나아니면 예수님을 문밖으로 쫒아내고선 자기들끼리 은혜받고 영적으로깨어있다고 자랑하는 교회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부요하게 되었다고 자랑하는 교회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문밖으로 몰아낸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까? 그런 교회의 믿음을 살아 있는 믿음이라 할 수 있을까요?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듣고 열면이란 동사는 모두 제1부정과거 능동태 가정법입니다. 이 본문의 시제를 통해 구원의 과정을 설명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한 번 듣고, 한 번 문을 열면 영원히 구원을 누린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1부정과거는 한 번 된 상태에 계속 머무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한 번 문을 열였지만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이 예수님을 문 밖으로 내보내고 문을 다시 닫았다면 버림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 분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주의 음성을 계속해서 잘 듣지 않기 때문에 주님을 잃어버리고, 영적으로 거지처럼 되고, 영의 눈이 어두워져 아무 것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주님의 음성을 들은 지가 너무 오래 되어서 그 영혼이 다 죽어 있는데도 자기들은 영적으로 부요하고 부족한 게 없다고 자만하고 있으니 기가막힐 일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이것은 변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는 엄청난 은혜가 됩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라오디게아 같은 교회도 사랑하셔서 회개하라고 촉구하십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문을 열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님의 그 귀한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쌓아 둔 벽에 하나님의 사람의 빛은 막히고 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파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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