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기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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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 박승남 2019-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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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마태복음5:3-12절 개역개정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5:3~12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마태복음 1:21절을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그리고 누가복음 19: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9:13절을 보면 예수님은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씀하셨고 마가복음 1:38절을 보면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 죄인들을 찾아, 불러서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이를 위해 주님은 마을로 가셔서 전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런면에서 십자가는 믿음의 핵심이요 중심입니다. 오늘 낮의 본문인 요한복음 3:17절을 보면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오셔야 할 이유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인류의 급박한 상황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미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어 가고 있었기에 하나님이 아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의 전 생애가 십자가의 그늘 안에 있고, 십자가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오셨다는 사실만 강조하다보면 주님이 이 땅에 사신 모든 삶의 의미가 퇴색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인간을 구원하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라면 길게 써진 복음서는 필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생애의 교훈을 기록해 놓은 복음서를 면밀히 읽어 보면 주님께서 오신 뜻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이 예수님에게서 본 것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14절을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라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앞에서 예수님은 처소를 거처를 예비하기 위해 돌아가실 것을 예고하셨고, 자신을 아는 자는 하나님을 알고 또 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7) 그러자 빌립은 예수님에게 하나님을 보여달라 요청하자 예수님께서 자신을 보는 것이 하나님을 보는 것과 같다고 대답해주셨습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의 권능으로 많은 기적을 베푸시며 하나님의 일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잘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아버지를 보여 주시기 위해 우신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주님이 일 하신 것은 아버지의 일을 하신 것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하신 행동이나 교훈들을 통해 사람들은 하나님을 느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마가복음 2:5절 이하를 보면 예수께서 중풍병자에게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신성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그 중풍병자를 고쳐주심으로 죄 사하는 권세가 있으신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와 함께 하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십니다. , 하나님은 용서하십니다. 누구든지 회개하는 자에게는, 그리고 예수님께 나와 그분과 사귐을 갖게 되는 경우에는 용서가 있었습니다. 용서란 그 사람을 하나님 안으로 받아 주시는 사건의 출발점입니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은 용서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누구를 대하실 때 당신을 용서해 준다는 용서를 쓰시지 않으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 앞으로 끌려왔던 간음한 여인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사람들의 손에서 건져 주신 뒤 뭐라 하셨나요?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8:11) 즉 주님은 용서한다는 말 대신 정죄하지 아니한다라는 말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정죄하지 않다 용서는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요? 용서를 해되 죄의 내용은 그대로 남습니다. 그러나 정죄하지 않겠다는 것은 죄의 내용조차 없애 주신다는 말입니다.그동안 지은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고 깨끗하게 씻어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법정 용어로 무죄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미가서 7:19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예레미야 31:34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사야 43:25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러분 여기 도말이라는 단어 마하'씻다, 닦아내다, 지워 없애다, 도말하다, 제거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씻어 주시고 닦아 주시고 지워없애 주시고 제거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주님께 돌아온 자들의 죄를 사해 주시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자신 앞으로 나온 인간들을 깨끗한 모습으로 받아 주십니다.

예수님의 이런 모습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여인을 살려 주기 위해 노력하신 모습이나 그녀의 죄를 정죄하 않고 자유인으로 보내신 것은 모두 하나님의 마음을 대변해서 보여 준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생애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고, 어떤 마음으로 사람들을 사랑하시는가를 보여 줌으로써 인간이 하나님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친히 보여 주신 것입니다.

서기관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규범을 지키려 했던 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도를 따라 살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중요시 하신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은 안식일법이나 정결법에서 종교지도자들과 크게 충돌했는데 그 이유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조상들의 전통을 강조하다가 하나님의 의도를 저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로 마침내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헤롯당과 함께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의논하게 된 것입니다.

 

자 그러면 예수님이 보여 주신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사랑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저 단순한 사랑이 아니라 모든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이었습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백성을 사랑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단순히 사랑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스프랑크니조마이라는 단어를 특별히 사용했습니다. 이는 누차 말씀드렸들이 창자가 찟어진다는 말입니다. 빌립보서 1:8절을 보면 이 단어의 명사형 splavgcnon(스플랑크논) 심장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그런데 사실 원어의 뜻대로 하면 내장, 창자라고 번역해야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는 우리 문화와 맞지 않지요. 우리는 사랑의 마음의 자리를 대표하는 것이 그 심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불쌍히 여긴다는 스프랑크니조마이는 우리 식으로 하면 가슴이 찢어진다 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기적 사건의 중심에는 언제나 스프랑크니조마이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즉 나병환자, 중풍병자, 맹인 등을 고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것은 바로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사랑하신 아픔이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40~42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마태복음 15:32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이처럼 주님은 죄에 얽매여 죽어 가는 사람들을 죄에서 건져 주시고 질병으로 오랫동안 고생하던 사람들을 고쳐 주시고 목적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길을 보여 주시고 (6: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심지어는 잘못된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얻은 무거운 짐을 벗게 해 주시며 영혼을 편히 쉬게 하셨습니다. 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그리고 이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의 결정체가 바로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그러고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의 마음으로 일생을 사셨고, 결국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그 사랑을 완성하셨습니다. 주어도 주어도 다 주실 수 없어 마침내 자신의 몸을 던져 주신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처럼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아멘~

 

하나님과 함께 사는 방법을 보여 주신 예수님

그러면 그런 하나님과 우리는 어떻게 함께 살아야 할까요?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잘 보여 주셨습니다. 우선 예수님은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1:35~38절과 같이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셨고 누가복음 6:12절 말씀처럼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셨고 누가복음 22:44절 말씀과 같이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될 정도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이렇게 기도하심으로 예수님은 아버지와 어떻게 교제하며 살아야 하는 가를 몸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 시간은 결코 짧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에서 엿볼 수 있듯이, 죄에 갇혀 가난과 어둠과 억압과고통과 그리고 어려움 속에서 살아가는 들을 건져 주시기 위해 늘 낮은 곳으로 내려가셨습니다. 높고 영광중에 계시는 아버지 하나님은 또한 이렇게 낮은 곳에 계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 바로 산상수훈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설교는 곧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특별히 8복이 그 핵심입니다.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6: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가난한 자란 당시 유대에선 회당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소위 불결하다고 해서 정상적인 삶을누릴 수 없었던 사람들이지요. 세리, 죄인, 창녀, 병자들, 해방된 노예, 심지어는 몹시 가난한 자들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난하다고 해서 무조건 천국의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은 가난한 자들에게 아첨하고 부자들을 통렬히 매도하는 세속적 민중 선동자는 아니었습니다. 외적인 가난이 만일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향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복입니다. 그러나 종종 나타나는 듯이 가난이 사람을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만든다면 그 가난은 복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 어느 곳에서도 외적 가난이 좋은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누가복음 6장 전체를 살펴보면 우리 주님은 "가난"이란 말을 세속심에 지배를 받지 않고, 부귀에 의존하지 않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가난 앞에다가 심령이라는 말을 넣어서 마음이 가난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 이 영적 가난은 자신의 결핍, 연약, 공허, 죄악 등을 분명히 알아서 겸손하게,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난하든, 병들었든 또는 건강하고 평안하고 부요하든 간에 빈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들에게 천국이 임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심령이 가난한 심령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될 것이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계시록 3:17절에 나오는 사람들 즉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만하는 자들에게는 천국이 그들의 것이 아닙니다.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당시엔 슬퍼하고 애통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자기들이 당한 상황이 너무 답답해서, 억울해서 애통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애통함이란 자신이 저지른 잘못과 죄악들 때문에가슴 아파하는 것을 말합니다. 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이것은 바리새인들의 뻔뻔한 모습과 대조를 이룹니다. 바리새인과 같이 뻔뻔하고 오만한 자들이 타인의 아픔이나 고통을 느끼기란 어려울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아름과 슬픔을 보고 함께 아파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위로해 주십니다.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성경에서 온유라는 말은 27번쯤 사용되었는데, 그 말이 윤리적 의미로 사용된 적은 한번도 없고, 인격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온유한 자가 되라,” 또는 온유해라는 의미로 사용된 곳은 한번도 없습니다. ‘온유로 하고’(4:2) ‘온유를 따르고’(딤전6:11)라는 말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본문에도 온유한 자가 복이 있나니온유한 존재(being)를 말하고 있습니다. 온유란 노력해서 되는 게 아니란 말인데, 그렇다면 온유란 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나는 본성이 아닙니다. 인간은 아무도 온유하게 태어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온유란 무엇입니까? 온유란 선물입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날 때 그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 온유입니다. 온유란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받아드릴 때 내 마음에 성령으로 주어지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온유는 한마디로 십자가 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환언하면, 온유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 같은 사람을 향해 하나님은 오래 참아주셨고, 그 온유 때문에 나와 여러분이 지금 구원을 받고 이 은혜를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유한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온유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걸어가야 할 길을 바로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기업을 주실 것입니다.

애급에서 나온 사람들 중에, 모세, 여호수아, 갈렙 이 세 사람만이 약속의 땅을 받았습니다. 기업의 특징은 자기만을 위한 기업이 아니라, 후손들에게 남겨줄 수 있는 기업까지를 얻는 다는 데 축복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와 하늘나라에서 누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차지할 것 같습니까? 누구에게 기업의 땅을 주실 것 같습니까?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하나님은 죄를 짓고 살아가는 자들과는 함께 하시지 않으십니다.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아 헤매듯이 의를 찾고 사모하는 자들만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들입니다. 이른 아침 벳세대 광야에 몰려오는 인파를 보시고 주님은 아마도 우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는 그날 주님의 마음을 목자 없는 양 같은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겼다고 기록했습니다. 파스칼은 팡세 264항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날마다 먹고 자는 일에는 전혀 싫증이 나지 않는데, 이는 고픔과 잠이 노상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지칠 것이다. 마찬가지로 정신적인 것들에 대한 배고픔이 없어도 싫증은 난다. 정의에 대한 배고픔 산상수훈의 복

우리도 먹고 자는 일에 싫증을 느끼지않듯이 의, 정의, 하나님, 말씀에 싫증을 느끼지않고 늘 목마름 갖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이 채워주십니다. 만족케 하십니다.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유대 사회는 살벌한 사회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고 했으니, 한쪽 눈 없는 사람도 많았고, 이를 몇 개씩 빼고 사는 사람도 많았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런 사회에 누가 살고 싶어 하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은 아무리 정직하고 올바르게 살았던 사람들이라 해도 남 정죄하기 바쁘고 남의 허물 들추기 바쁜 사람들이 지배하는 사회가 어찌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그들을 책망한 이유도 그들이 정직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남을 이해하지 못하고 감싸지 못하는 그들의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들이 긍휼히 여기지 않으면 하나님도 너희들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을 것이라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사실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거창한 일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마음에 아픔을 주지 않는 것이고, 잘못된 친절을 베풀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것은 이웃을 이해 해 주는 마음이고, 그리고 어려울 때 감싸주는 마음입니다.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하나님의 성품은 성결입니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말은 심성이나 행동이 순수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닮은 사람들입니다.

 

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평화, 샬롬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최고의 삶입니다. 먼저 하나님과 화평하고 이웃과 화평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정신입니다. 2:15~16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표준새번역으로 보면 여러 가지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그것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드셔서, 평화를 이루시고,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시려는 것입니다.

 

10~12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원한다면, 말씀대로 살기를 원한다면 의를 위해 살기 원한다면 위험한 일을 수 없이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위험한 길을 걸어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 사람들의 눈에 예수님은 혁망가 이시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사람들은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고난 없는 믿음의 삶이란 그리스도 없는 삶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개인이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온 인류가 함께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고 사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 주려고 짐을 나누어지고,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박해를 감수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갖추어야 할 자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 정신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정신을 이어 받은 바울은 갈라디아서 6:2절에서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마음이 가난하고 애통하자는 자라야 심령이 깨끗하고 순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의를 사랑하고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팔복에 나타난 여덟 가지 삶의 형태는 곧 예수님의 마음이고 예수님이 늘 바라보시던 곳입니다. 하나님이 눈을 떼지 않고 관심을 두시는 곳입니다.

 

그리고 끝으로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사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여기 거하시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스케노센은 장막을 치다, 거주하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출애굽기에 나오듯 하나님이 백성들 안에 성막을 짓고 자기 백성들과 함께 사셨던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동시에 에스케노센이 부정과거형으로 쓰임으로써 주님이 한 번 오셔서 영원히 함께 사신다는 의미가 강조됩니다. 이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 마을로 이사오셔서 골목길을 지날 때마다 만날 수 있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 점을 확대하여 제시한 것이 요한복음 15장에 나오는 포도나무 비유입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154절과 같이 내 안에 거하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입니다. 요한복음 151~11절에서 거하라는 단어가 모두 8번 나옵니다. 이곳에서 사용된 헬라어 거하다 라는 동사는 메노의 부정과거명령형으로 한번 포도나무에 접붙임을 받아서 영원히 그 상태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이 구절은 포도나무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의미보다는 포도나무에 연합된 그대로 살라는 위로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포도나무 비유에서 가르치시는 믿음 혹은 영생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은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하나의 나무처럼 영원히 사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죽어서 천국에 가려고 믿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지금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이 세상에서 함께 살아가며 그리스도 안에 거함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며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사람은 죽어서도 영원히 그리스도와 함께 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지않는 사람은 죽어서도 그리스도와 함께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번 믿음으로 무조건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다는 것은 아닙니다. 요한복음 3:16절에서는 믿는 자를 표현할 때 현재분사형을 사용함으로 현재 믿는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영생을 얻으리라역시 현재형입니다. 이처럼 요한복음 3:16절에 나오는 동사의 시제로 보면 다음과 같은 해석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거대한 바닷물처럼 흐르고 있다. 그런데 그 사랑을 받는 자는 현재 믿는 사람들이며, 바로 그들이 영생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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