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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어떻게 만날까? - 기도 박승남 2019-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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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요한복음15:7절 개역개정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15:7 하나님을 어떻게 만날까? - 기 도

 

영생이 하나님과 교제하며 함께 사는 것이라면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 있어야 하고 교제하는 방법이 있어야 합니다. 그 방법 중에 첫 번재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성령이 함께 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기를 원한다면 성경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단지 읽는 게 아니라 묵상으로 말씀 안에서 하나님께 깊이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교제하는 가장 쉽고도 빠른 길은 바로 성경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피조물을 만나 주실 때는 항상 말씀으로 다가오십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말씀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하나님을 만납니다. 성경을 가득채운 메시지는 들으라입니다. 듣는 것에 관한 히브리적 사고에 따르면, 이 말씀은 단지 귀에 담는 것을 의미하는게 아니라 듣고 그대로 실천하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로마서 107절에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에서 들음이란 단순히 듣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나 뵙기 원한다면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사는 두 번째 방법은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안으로 들어가 하나님과 교제하고 대화하는 숭고한 행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하는 모습을 통해서 기도가 무엇이며,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의 기도하시는 모습을 간단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된 것이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입니다. 기드론 골짜기 건너편에 있는 겟세마네 동산은 예수님이 자주 가시던 곳이라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누가복음 22:39절을 보면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라고 말씀하고 요한복음 18:1~2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 그 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고 합니다. 결국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오시면 습관적으로 그곳에 머물며 기도하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마지막 날 겟세마네동산에서 드린 기도는 특별합니다. 잡하시기 전까지 밤 새워 기도하시면서 세 번이나 휴식을 취하셨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2244절을 보면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이처럼 열심히 기도하셨을까요? 이 때 예수님은 십자가를 놓고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의 핵심은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입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신 것을 보여 주는 마가복음 135~39절의 말씀을 보면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해뜨기 전 새벽 그러니까 오늘날로 면 새벽 기도 때에 해당하는 시간입니다. 사람들이 모여들 때까지 기도를 하셨으니 상당히 오랜 시간 기도한 셈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모여든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이면서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라고 아뢰자 예수님은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예수님이 기도를 드린 내용을 미리어 짐작해 보면 예수님의 기도는 사적인 것이기보다는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하나님과 교제하며 의논하시려 한 공적인 것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아예 기도생활을 하지 않는 것도 문제이지만 기도를 너무 이기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우리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 응답받기 위하여 아뢰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심지어 무엇이든지 구하면 주신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무조건 대답하시는 분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져야 기도가 응답받은 것이고, 내가 원하는 것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응답받지 않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과연 내가 믿고 있는 신은 하나님일까요? 아니면 내가 신인 것은 아닐까요?

언젠가 무디의 제자들이 와서 이렇게 항의했습니다. “선생님, 무엇이든지 기도하면 이루어진다고 했는데, 왜 우리의 기도는 이뤄지지 않습니까?” 그 때 무디는 조용히 요한일서 321~22절 말씀을 들려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우리의 양심이 우리를 책망하는데, 우리의 양심보다 크시며, 또한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더 우리를 책망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그 하나님의 빛 앞에 우리는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게 되고,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볼 때보다 더욱 추악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2:18에 보면 예수님을 묘사하면서 그 눈이 불꽃같으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숨은 죄까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죄까지 꿰뚫어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존재 전체가 죄악된 본성으로 가득차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일, 가책 받은 일이 비록 있다고 하더라도 크신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시기 때문에 그 죄 사함의 은혜로 우리가 마음을 굳세게 하고 담대하게 할 수 있게 됩니다. 물론 이를 위해 우리의 회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철저한 회개를 통하여 죄 사함의 은혜를 덧입게 됩니다. 그리고 그럴 때 비로소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는 21절의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도 우리를 책망하지 않으시는데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일이 없게 됩니다. 그야말로 로마서 8:32-34절 말씀을 체험하게 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20절과 21절 사이에서 깊은 회개와 죄 사함의 체험을 한 사람은 마음에 담대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기도하면 무조건 이뤄 주신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요한복음 157절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기도의 출발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셨기에 우리는 그분을 통하여 기도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좀 역설적이지만,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기도하심으로 우리가 기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면 누가 우리의 문을 두드리십니까? 요한계시록 320절을 보면 예수님이 문을 두드리십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예수님이 밖에 계신 것도 므르고 자기들까지 복과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면서 살고 있는데 그런 그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찾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마음의 문을 향해 문을 두드리시는 그 소리를 듣고 문을 열어 드림으로 그분을 만나 뵙게 되는 것 바로 이것이 기도라 하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가 기도하도록 권고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약하고 부족한 인간들의 삶이 복되고 풍성하게 채워주시기 위함일까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며 당부하신 말씀은 이러합니다.

마태복음 65~8절입니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그러면서 주님은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기도문의 내용을 보면 아홉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째부터 넷째까지는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기도할 내용입니다. 그리고 다섯째가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이고 죄 용서와 약에서 건져 주시기를 기도하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마칩니다. 균형 잡힌 기도의 모범입니다.

칼 마르크스의 딸이 어느 날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아무 신앙도 없이 자랐다.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그리고 얼마 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낡은 책 안에서 기도문 하나를 우연히 찾아냈는데, 그 기도문을 보면서 생각했다. 만일 그 기도문에 나오는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그분은 믿을 수 있겠다고그래서 친구가 그 기도가 무엇이냐고 묻자 그녀는 그 기도문을 천천히 독일어로 되뇌었습니다. 그 기도란 바로 주의 기도였습니다.

어느 독일 교수에게 한 학생이 물었다고 합니다. “당신도 기도드리는 일이 있습니까?” 이에 그렇다고 대답하자 학생이 또 물었습니다. “어떤 기도를 드리십니까?” 그 교수는 최근에는 주의 기도 외에는 다른 기도를 드리는 일이 별로 없다고 답했습니다. 학생이 그 이유를 묻자 교수는 다움과 같이 덧붙였습니다. “내가 아무리 좋은 기도를 드리다고 해도 주의 기도 이상의 기도를 드릴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의기도는 오직 자기 개인의 문제 혹은 교회의 문제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물론 하나님인 이러한 기도를 드리는 것 싫어하지 않으십니다. 문제가 많고 연약한 우리들이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입니다. 어린이가 부모의 도움을 구하는 것어럼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가 거기에만 머물러 있다면 문제가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당장에 닥친 개인의 어렵고 딱한 사정이 더 급하게 생각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지는 것, 정의가 실현되는 것에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닮아가는데 주님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 안에 내가 구하는 복이 다 들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고차원적이로 포괄적입니다. 근시안을 가진 사람은 그 안에 들어 있는 풍성한 복을 보지 못합니다.

자기의 어려운 사정만 구하면서 정작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면,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 주기도를 통해 가르쳐 주신 대로 균형잡힌 기도를 드리는 일은 그 어떤 기도보다 더 중요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급한 일만 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도 다 하는 일입니다.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 정립입니다. 요한복음 157절의 말씀대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리할 때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는 말이 의미를 가질 것입니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는 가지가 포도나무의 진액을 빨아들일 수 없습니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는데, 기도한다고 해서 그 기도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살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닮아 가는지를 살펴야 하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원하시는 게 무엇인지,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여쭙고 들어야 합니다.

바로 이런 면 때문에 기도는 하나님께 듣는 것입니다. 기도는 내가 아뢸 바를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기도는 하나님께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듣는 것이 곧 기도의 응답이기도 합니다. 자기 말만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듣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코 기도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함께 살기 원하는 사람은 그 영혼이 말씀 안에서, 그리고 기도 안에서 예민해져야 합니다. 기도를 하나님과 대화라고도 하는데 이 역시 일방통행이 아니라 상호간의 커뮤니케이션 즉 하나님과 기도하는 당자자 간의 의사소통이라는 것입니다. 이 때 중요한 것이 서로의 뜻을 살피는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 뜻을 잘 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주님의 마음과 뜻을 잘 헤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누가복음 181~14절에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에 대한 교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8절은 기도의 자세에 대해, 10~14절은 기도하는 사람들의 예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은 늘 기도하던 사람, 기도에 익숙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를 의롭게 생각하는 바리새인이지요. 또 한 사람은 기도에 좀 서툰 세리입니다. 이 두 사람이 성전에 기도하려 올라갔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18:11~12)

세리의 기도하는 자세는 이와 다릅니다. 그는 서서 기도하되,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18:13)라고 합니다.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는 자세부터 전혀 다릅니다. 이들이 기도하는 자세는 그 근본 마음의 자세를 나타냅니다. 바리새인은 자기의 기도를 드리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자신을 드러내 놓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어찌 보면 하나의 보고서 같습니다. 하나님께 들으라면서 다른 사람들을 고발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악한 사람들이나 세리와 같지 않다닥고 말합니다. “하나님 알고 계십니까? 혹 잊지 않으셨겠지요? 내가 이 사람들과 같지 않다는 사실을요?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죄를 간접적으로 고발하면서 자신은 그와 같지 않다는 것은 자랑합니다.

반면 세리는 자기 죄를 깊이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긍휼만을 의탁하며 기도합니다.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는라고 고백합니다. 세리가 무엇을 구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의 기도엔 다른 사람을 고밸하는 내용도, 자기의 억울함에 대한 호소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면 기도할 뿐입니다. 자신이 죄임임을 고백하며 오직 불쌍히 여겨주심만을 구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드린 기도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그러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세리가 더의롭고 아름다웠다는 말입니다. 세리가 어떤 내용으로 기도했는지는 모르나, 하나님이 그것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긴 기도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의 기도는 거절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의 기도를 보면서 기도를 어떻게 드려야 할까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내가 착하냐 아니냐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너 됐다 하면 의인이 되는 것이며 기도가 하나님 앞에 열납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실컷 죄를 지어도 된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앞에 나의 자세입니다. 기도드리는 나, 봉사하는 나, 예배드리는 나의 태도지수는 어떠하냐인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듣기 위하여 기다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아픔을 이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꾸밀 필요도 없고, 미사어구를 동원해 기도할 필요도 없고, 다만 솔직 담백하게 내 마음을 쏟아 놓으면 됩니다.

너무 꾸미려 하고 과장해서 전하려다 보면 진실성을 상실하고 맙니다. 하나님은 누구보다 우리를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나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께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내 놓는 것이 가장 귀한 기도 자세라 하겠습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과 바른 교제를 나룰 수 있게 될 것이며 그 다음에야 우리의 필요를 기도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로써 내공로로 응답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공로로 응답받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할 때는 하나님이 긍휼을 의지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가끔 너무나 뻔뻔한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반성할 일입니다. 사실 우리에겐 기도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분이 받아 주셔야 기도할 뿐입니다.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겨 도와주시도록 그 은혜에 의지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마치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말하듯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기도 자세일 것입니다.

 

예수님 사역 초기에 예수님께 나온 나병환자의 자세를 눈 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 나와 무릎을 고 간청하였습니다. "선생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해주실 수 있습니다"

이 환자는 고쳐달라고 사정한 게 아닙니다. 단지 하고자 하신 다면 해 주실 수 있습니다 라고만 했습니다. 이 짦은 간구 속에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분명히 안 사람입니다. 당시 불치병으로 치부되던 나병조차 고치실 수 있는 분임을 안 것입니다. 이 정도면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도 믿고 있던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만 예수님이 고쳐 주실 마음이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이것이 그가 원하시면이라고 말한 이유입니다. 당시 나병은 천벌을 받아 생긴 병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래서 주님도 그런 병이라면 고쳐 주시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예수님이 세상 사람들의 인과응보 공식으로 사람을 대하시는 분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성경에서
무릎을 꿇었다는 말은 예배나 경배의 표현으로 쓰입니다. 기도하는 내가 중심이 아니라 들어주실 주님의 입장에서 간청하는 이 나병 환자의 기도야 말로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고 "그렇게 해주마. 깨끗하게 되어라" 하고 말씀하시니, 곧 나병이 그에게서 떠나고, 그는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나병환자의 기도는 먼저 예수님의 마음과 깊은 소통을 이룬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를 불쌍히 여겨 주셨습니다. 이는 깊이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소통의 결과입니다.

기도 시간은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과 사귀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바른 모습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듣는 시간입니다. 이 점을 마음에 새긴 후에야 우리의 사정을 아뢸 수 있습니다. 끝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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