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29:13~20 참된 사랑
양떼에게 물을 먹이고 난 다음에 야곱은 라헬에게 입맞춥니다. 라헬이 매우 놀랐겠지만 이는 야곱이 얼마나 감격과 기쁨으로 가득차 있었나 보여준 것입니다. 그리고 소리내서 웁니다. 소리내서 우는 것만이 그의 마음을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야곱은 자기를 소개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 은혜를 받아 새롭게 인생을 출발을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다가가 말을 겁니다. 다른 사람을 도와주려 합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고 입맞추고 웁니다. 비록 그에게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감격과 흥분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움과 시련을 당해도 기쁨이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도 이런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라헬은 갑자기 만난 한 나그네가 자기 친척이라는 사실을 알고 즉시 아버지에게 뛰어들어 갑니다. 그러자 리브가의 오라비이자 야곱의 외삼촌이 되는 라반이 조카 야곱의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야곱을 보자마자 껴안고서 입을 맞추고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야곱이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을 라반에게 다 말하자 이 말을 듣고 난 라반은 야곱에게 말하였습니다. "너는 나와 한 피붙이이다." 그리고 야곱은 한 달 동안 그와 함께 지냈습니다.
여러분 친척이 오면 반갑고, 머무르면 더 반갑고, 이제 떠나면 더 반갑습니다. 아무리 반가운 친척과 형제도 3일이 지나기까지 머무르면 귀찮아 집니다. 모든 것이 다 힘들어 집니다. 그런데 야곱은 한달을 이 집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야곱은 식객입니다. 문제와 갈등이 생길 확률이 높습니다.
그런데 이 때 라반이 야곱에게 말합니다. "네가 나의 조카이긴 하다만, 나의 일을 거저 할 수는 없지 않느냐? 너에게 어떻게 보수를 주면 좋을지, 너의 말을 좀 들어 보자."
아무리 야곱이 자신의 친척이지만 열심히 일하는 야곱을 보니 부담스러워서 공짜로 부려먹을 수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습니다. 야곱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 집에 와서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일을 해 준 것입니다. 이것으로 야곱이 얼마나 변했는가를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제일 보기 흉한 사람은 놀고먹는 사람입니다. 형제나 친척, 또는 교인이라는 이유로 놀고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남의 집에서 신세를 지면서 미운 짓만 골라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주인의 환영을 받습니다. 야곱은 라반이 부리는 종이나 노동자 보다 더 열심히 일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무보수로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먼저 일이 주어지고 월급이 주어지기 때문에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있고 자기 직업도 월급도 없는데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있다는 점입니다. 야곱의 경우는 스스로 일을 찾아 열심히 했고 보수를 요구하지 않았지만 라반 측에서 보수를 주겠다고 나서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직업이 없다고 놀고먹지 마십시오. 좌절하지도 마십시오. 보수를 바라지 말고 어딘가에서 열심히 일해 보십시오. 직업도 생기고 보수도 생길 것입니다. 아무 조건 없이 최선을 다해서 성실하게 열심히 사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직업이 따릅니다. 교회 와서 봉사 하십시오. 하나님이 복을 주실 것입니다. 어느 직장에 가든지 최선을 다해서 봉사하고 일해 보십시오. 라반의 반응과 같은 결과가 꼭 돌아옵니다.
그리고 16절부터 야곱의 러브스토리 그리고 노동스토리가 시작됩니다.
16~18절을 보십시오.
라반에게 두 딸이 있으니 언니의 이름은 레아요 아우의 이름은 라헬이라 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야곱이 라헬을 더 사랑하므로 대답하되 내가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 년을 섬기리이다
야곱은 엉뚱한 사람입니다. 돈으로 보상을 하겠다고 하니까 사랑하는 여자를 아내로 달라고 합니다. 야곱은 라헬을 우물 가에서 만났을 때부터 마음에 두고 있었을 것입니다.
야곱의 말을 들은 라반은 그를 네게 주는 것이 타인에게 주는 것보다 나으니 나와 함께 있으라고 말합니다. 한 달 동안 조건 없이 열심히 일하니까 월급이나 직장 정도가 아니라 아내까지 생기게 된 것입니다.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가 생긴 그의 모습을 20절은 아주 재미있게 그려줍니다.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
여러분 고상하게 섬겼다고 표현했지만 노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섬기다는 말을 원어로 보면 '아바드'인데 일하다 경작하다 노예가 되다 노동하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일하고 노동하고 땀을 흘리고 고생했다는 것입니다. 노예는 물론 아니지만 머슴살이를 한 것입니다. 집안 일을 도와주는 것을 물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열심히 양을 친 것입니다. 7년 동안을 말입니다. 그것도 아무런 보수도 받지 않고 말입니다. 그런데도 그 기간을 며칠 같이 여겼다고 합니다. 어떻게요? 라헬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사랑의 능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라헬에 대한 야곱의 사랑을 보면서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참된 사랑은 무엇인가요?
1. 대가를 바라지 않습니다.
야곱이 1달 동안 열심히 일을 하자 외삼촌 라반은 미안했던지 "네가 나의 조카이긴 하다만, 나의 일을 거저 할 수는 없지 않느냐? 너에게 어떻게 보수를 주면 좋을지, 너의 말을 좀 들어 보자." 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때 야곱은 월급을 얼마 주시던지 혹은 연봉 얼마달라고 말하지 않고 작은 딸 라헬과 결혼하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7년동안 무보수로 외삼촌을 섬기겠다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 야곱은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어릴 때부터 형의 발뒤꿈치를 잡고 태어날 정도로 욕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랑 앞에서 순수했습니다. 바보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계산을 초월하게 만듭니다. 대가나 보상을 바라고 하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 야곱이 라헬을 사랑한 것을 통해 우리는 성도가 교회를 사랑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이 교회를 섬길 때 이렇게 섬기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이 무슨 월급을 받고, 대가를 얻으려고 섬기는 것을 아닐 것입니다. 아니 도리어 시간과 물질과 재능과 몸을 바쳐서 주님의 교회를 섬깁니다. 그러면서도 행복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은 이것을 보고 계십니다. 야곱의 대가없는 헌신을 보시고 결국 풍성하게 채워졌습니다. 진정 대가를 바라지 않고 묵묵하게 사랑의 손길을 펼치면 언젠가는 그 손길은 바로 내게로 돌아옵니다. 우리의 손은 작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손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 하나님의 손길로 우리를 돌보시고 이끌고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비록 다른 사람 밑에서 힘겹게 일할지라도 거기서 기쁨을 찾고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살 때 여러분의 미래는 빛날 것입니다.
2. 즐겁게 헌신합니다.
야곱이 7년간 섬기면서 7년을 며칠같이 여긴 것은 라헬에 대한 사량으로 헌신이 즐거웠기 때문입니다. 라헬을 얻기 위해 야곱은 레아의 몫까지 도합 14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봉사했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고 수고로운 일이 많았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즐겁게 기꺼이 헌신했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마음으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섬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역대상 12장을 38~40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전투 채비를 한 이 모든 군인이, 다윗을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하려고, 충성된 마음으로 헤브론으로 왔다. 그 밖에 남은 이스라엘 사람도 모두 다윗을 왕으로 추대하는 데 뜻을 같이하였다. 그들의 동족이 음식까지 마련하여 주어서, 그들은 거기에서 다윗과 함께 사흘을 지내며, 먹고 마셨다. 또 그 근처에 있는 잇사갈과 스불론과 납달리에서도, 사람들이 음식물을 나귀와 낙타와 노새와 소에 실어 왔다. 밀가루 빵과 무화과 빵과 건포도와 포도주와 소와 양을 많이 가져 오니, 이스라엘에 기쁨이 넘쳤다.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 많은 군사들이 다윗을 왕으로 삼고자 즐거이 헌신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사랑하셔서 세우신 왕이요, 사람들에게는 자기 백성에게는 겸손하고 원수에게는 반드시 승리하는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또한 우리는 우리의 왕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즐거이 헌신할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시편 110편에서도 다윗은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로 나오는도다"(시110:3)라고 고백했습니다. 시 110편은 메시야 시편으로 신약성경에 인용되는 말씀입니다. 결국 여기 거룩한 옷을 입고 주님께 나와 즐거이 헌신하는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은 바로 우리 성도들이야 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나이가 많든 적든 상관없이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즐겁게 헌신하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청년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6절은 항상 기뻐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빌립보서 4장 4절을 보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항상에는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길 때, 수고하고 애쓸 때도 다 포함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우리아를 전장에서 죽게 하고 밧세바를 범한 후에 하나님께 벌을 받고자 드린 기도가 시편 51편인데 그는 거기서 이렇게 고백하는 것을 봅니다.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주시고"(시51:12) 무엇을 하든지 즐겁게 할 수 있는 게 은혜이고 복입니다.
3.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라헬을 사랑한 야곱은 7년 동안 한결같이 수고, 헌신하였습니다. 얼마든지 지칠 수도 있고 변할 수도 있는데, 열정이 식어지고 지칠 수도 있는데 세월이 지나거나 환경이 변해도 쉽게 변하지 았습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합니다.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요? 너무 쉽게 변하는 것은 아닌가요? 여러분 기독교와 미신의 가장 큰 차이는 미신은 환경의 변화를 추구하지만 기독교는 자신의 변화를 추구합니다. 모압왕 발락에 의해 이스라엘 저주하기 위해 초대된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것이 힘들자 여기 저기 장소를 옮겨다녔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스라엘을 저주할 수 없었습니다. 마신에는 자신의 변화라는 개념이 없기에 팔자와 환경을 바꾸는 것에 몰두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환경의 변화 이전에 자신의 변화를 통해 환경을 극복합니다. 그렇게 환경을 극복하면 점차 환경도 변하고 자신도 변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을 더욱 닮게 되어 변덕을 부리지 않고 사랑하고 감사하고 충성하게 됩니다.
여러분 충성이란 무엇인가요? 충자를 한문으로 보면 忠입니다. 즉 가운데 중자에다가 마음心자가 합쳐졌습니다. 마음의 중심을 드린다, 변두리가 아니라 마음의 가운데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속 마음을, 바치다, 진심으로 바치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2번째가 아닙니다. 악세사리가 아닙니다. 악세사리는 달아도 되고 안 달아도 됩니다. 신앙은 생명과 관련된 것으로 언제나 1번이 되어야 합니다. 중심, 중앙, 최선, 최고를 드리는 것입니다.
진정 주님의 은혜로 내가 변하게 되면 쉽게 변하지 않는 충성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세조가 왕에 될 때에 사육신이 있습니다. 충성을 세조에 바치지 않고 단종에게 바치고자 자기 목숨을 내놓기 까지 한 것입니다. 세종의 맏아들이자 세조의 형인 문종이 죽기 전에 단종을 신하들에게 부탁했습니다. 그 자리에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같은 신하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신숙주는 수양대군의 찬탈을 도와 세조의 핵심 측근이 되었습니다. 세종대왕은 수양대군의 야심을 간파하고는 처음에 진양대군에서 수양대군으로 호를 고쳐주었습니다. 그 의미는 고죽국의 백이 숙제가 왕위를 양보하면서 수양산에 들어가 몸을 숨겼던 것처럼 백이와 숙제를 본받아 형의 왕위나 손자인 단종의 왕위를 탐하지 말기를 바란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양은 계유정난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하였고 동갑인 신숙주는 그를 따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숙주의 절개가 녹두나물처럼 잘 변한다는 것을 비유하여 녹두나물을 숙주나물이라 이름하였습니다. 그리고 신숙주가 단종에게 충성을 맹세한 여섯 신하를 일러바쳐 죽게 하였기에 그를 미워하여 신숙주를 짓이기듯 숙주나물로 만두소를 만들 때 숙주나물을 짓이겨서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변절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변절과 배반의 주인공 가룟유다는 말할 것도 없고 데모데 후서 4장 10절에 밝히는 것처럼 세상을 사랑하여 사도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가버린 데마도 부끄러움의 주인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부끄러운 자들이 아니라 사랑의 힘으로 라반을 섬긴 야곱처럼 사랑의 능력으로 주님을 섬기는 자랑스러운 주의 성도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4. 힘들 때 후퇴하지 않습니다.
어디서든지 봉사하다보면 힘든 상황을 만납니다. 그 때 봉사가 후퇴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여러분 살아가면서 고난, 시련과 역경을 만납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어려움을 허락하시는 것일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그 중에 하나 자를 것은 자르고 살릴 것은 살리라는 뜻입니다. 어려움이 생기면 나쁜 것을 잘라내야 합니다. 나쁜 습관을 잘래내고 미움과 원망과 미움을 잘라내고 잘못된 말과 게으름과 나태를 잘래나고 의심과 두려움을 잘라내는 것입니다. 반면 좋은 것은 더욱 살려내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 시간을 더욱 살려내고 감사와 기쁨을 살려내고 봉사의 섬김의 자리로 더욱 나아가야 합니다.
어려운 때는 봉사를 그만둘 때가 아니고 더 봉사에 나서야 할 때입니다. 성령님은 섬김을 꿈꾸게 하시지만 마귀는 하던 봉사까지 못하게 내면에서 충동질합니다. "그렇게 봉사하는데 상처만 받잖아. 이제 그만둬. 지금 먹고 살기도 힘들잖아." 그래서 봉사를 포기하거나 봉사하다가 낙심하게 만듭니다. 반대로 성령충만하면 힘들 때 오히려 봉사를 새롭게 다짐합니다.
"힘들지만 더 사랑하고, 더 섬기자."
어느 크리스찬 잡지에 소개된 실화입니다.
미국 녹스빌 근교 농촌에 있는 미들부룩 교회를 담임하는 Frank Porter 목사님이 자기 교회에서 있었던 어느 부부의 일을 소개하고 있는데, 오 헨리란 작가가 쓴 단편 소설 '크리스마스 선물'을 연상케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젊어서 상처하고 독신으로 살아오던 한 남자가 50세에 교인들의 소개로 재혼을 하였습니다. 이들은 Poter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여행을 하던 중에, 어느 가게에 진열된 진주목걸이를 보며 이 부인이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참 예쁜 목걸이군요. 그러나 무척 비쌀 텐데, 그래도 사는 사람이 있으니 저렇게 진열하고 있겠지요?" 하고 중얼거렸습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났을 때, 이 부인이 불치의 병에 걸렸으며, 의사는 남편에게만 앞으로 6개월 정도만 살게 될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마침 결혼 10주년 기념일이 되었는데, 이들 부부는 결혼 주례를 하여 주었던 Poter 목사님을 집에 초청을 하였습니다. 남편은 그때 60세였는데, 목사님이 보기에 70세 정도로 늙어 보였다고 합니다. 평생을 가난한 농사꾼으로 힘든 노동을 하며 살아온 까닭이었지요.
조촐한 저녁 식사가 끝난 뒤, 이 남편은 부인에게 눈을 감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진주 목걸이를 꺼내어 부인의 목에 걸어주고는 조용히 입을 맞추어 줍니다.
눈을 뜬 아내가 진주 목걸이를 보고는 무척 놀랐습니다. 남편에게 그 목걸이를 살만한 돈이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혹 어디서 훔치지는 않았는가 하고 말이지요.
이 때 남편이 조용히 설명을 합니다. 신혼여행 갔을 때, 비록 아내가 혼자서 중얼거리는 말이었지만 그 말을 듣고는, 아내에게 어떻게 해서든 진주 목걸이를 사 줄 결심을 하고는, 그때부터 그동안 좋아하든 담배와 맥주를 끊었고요. 심지어는 심한 노동을 하면서도 콜라 한 깡통도 마시지 않으며, 그렇게 푼돈을 모으기를 10년 동안 계속했답니다.
아내가 눈물을 흘리며 말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어요?
백발이 다 된 이 남편은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다오."
먹고 싶은 것도 안 먹고 10년을 지속할 수 있었던 그 인내와 절제와 희생은 "사랑하기 때문에"라는 단 하나의 동기로 가능했던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 사랑하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까닭에 하고 싶은 욕망들도 참으며 그렇게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야곱은 사랑하는 까닭에 7년도 며칠 같이 보낼 수 있었습니다!
결국 문제는 사랑입니다.
사랑한다면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한다면 인내할 수 있고,
사랑한다면 용서할 수 있고,
사랑한다면 헌신하며 충성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증거 하여 주시는 바와 같이,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어도 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견디게 하여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좋은 꿈, 사랑의 꿈을 가지고 섬기는 삶이 행복합니다. "돈을 많이 벌겠다. 출세하고 명예를 얻겠다" 좋은 비전이 아닙니다. "돈을 벌어 소중한 곳에 쓰겠다."는 것이 좋은 비전, 사랑의 꿈입니다. 그 비전이 최종적으로 선교와 봉사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이웃을 기쁘게 하는 것으로 귀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교와 봉사의 비전을 가질 때 결국 성공하는 인생이 됩니다. 반면 선교와 봉사의 비전을 잃을 때 실패하는 인생, 부끄러운 인생이 되고 맙니다. 힘들과 어려울 때 성령님의 도우심을 입어 선교와 봉사의 비전을 지속시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19년 1월 27일 주일 낮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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