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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행복 박승남 2019-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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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창세기30:9-21절 개역개정

9. 레아가 자기의 출산이 멈춤을 보고 그의 시녀 실바를 데려다가 야곱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더니

10. 레아의 시녀 실바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으매

11. 레아가 이르되 복되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갓이라 하였으며

12. 레아의 시녀 실바가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으매

13. 레아가 이르되 기쁘도다 모든 딸들이 나를 기쁜 자라 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아셀이라 하였더라

14. 밀 거둘 때 르우벤이 나가서 들에서 합환채를 얻어 그의 어머니 레아에게 드렸더니 라헬이 레아에게 이르되 언니의 아들의 합환채를 청구하노라

15. 레아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내 남편을 빼앗은 것이 작은 일이냐 그런데 네가 내 아들의 합환채도 빼앗고자 하느냐 라헬이 이르되 그러면 언니의 아들의 합환채 대신에 오늘 밤에 내 남편이 언니와 동침하리라 하니라

16. 저물 때에 야곱이 들에서 돌아오매 레아가 나와서 그를 영접하며 이르되 내게로 들어오라 내가 내 아들의 합환채로 당신을 샀노라 그 밤에 야곱이 그와 동침하였더라

17. 하나님이 레아의 소원을 들으셨으므로 그가 임신하여 다섯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은지라

18. 레아가 이르되 내가 내 시녀를 내 남편에게 주었으므로 하나님이 내게 그 값을 주셨다 하고 그의 이름을 잇사갈이라 하였으며

19. 레아가 다시 임신하여 여섯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은지라

20. 레아가 이르되 하나님이 내게 후한 선물을 주시도다 내가 남편에게 여섯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는 그가 나와 함께 살리라 하고 그의 이름을 스불론이라 하였으며

21. 그 후에 그가 딸을 낳고 그의 이름을 디나라 하였더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30:9~21 진정한 행복

 

우리는 계속해서 야곱의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그 자식들에 대한 이야기를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편으로 생각해 보면 그냥 야곱이 12아들을 낳았다. 아니면 레아를 통해서 누구누구를 라헬을 통해서 누구를 그리고 그 시녀들을 통해서 누구누구를 낳았다고 간단하게 기록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렇게 그 이름의 뜻까지 밝히며 상세하게 기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선 이는 이스라엘이 야곱의 12아들을 통해 이뤄진 12지파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두 소중한 지파들이기에 그 유래를 자세하게 언급하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야곱과 그 아내들의 치졸한 시기, 질투, 경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까지 기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성경은 사람들 특히 이스라엘의 조상들을 미화시키는 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그렇고 이삭과 야곱도 그렇게 그로 인해 만들어진 12파도 그렇게 그들을 이상화시켜서 이스라엘 민족을 높이려는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인간을 미화시키는 책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보여줌으로 통해 결국 해답은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가 없이 인간들만의 역사로 끝났다면 결국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며 또한 구원의 역사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명기 77-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을 자신의 백성으로 택하셨는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뜻은 무엇인가?를 잘 말씀해 주십니다. 말씀을 보면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실 구세주(3:16)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실 민족이 되게 하기 위해 이스라엘 나라를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이후에 처음으로 구세주를 약속하셨습니다(창세기 3). 그 후에 하나님께서는 그 메시아가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의 혈통에서 오실 것을 확인해 주셨습니다(12:1-3).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자신의 특별한 백성으로 택하신 궁극적인 이유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어떤 국가로부터 오셔야 했는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다만 이스라엘을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서 말입니다.

여러분 도대체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그 사랑이 무엇이기에 야곱은 그 오랜 세월 동안 기꺼이 수고의 땀을 흘리며 섬긴 것일까요? 사랑이 무엇이기에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보내주신 것이며 독생자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까지 아끼지 않고 이 땅에 오셔서 그 귀한 사랑의 수고와 섬김과 헌신과 희생을 하신 것일까요?

진정 이 세상에 이러한 사랑이 없다면 정말 너무도 삭막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인생 다하는 그날 까지 사랑으로 살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주님을 더욱 뜨겁게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창세기 특히 야곱의 이야기를 읽고 묵상해 보면서 진실한 사랑에 감동을 받기도 합니다. 동시에 사랑을 받지 못해 괴로워하며 몸부림치며 시기 질투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되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는 야곱과 같은 그런 특별한 가정이 아니기에 이 가정과 같은 그러한 문제는 발생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다른 모습의 질투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가정에서 형제, 자매간의 시기 질투는 물론 심지어 부부간에도 남편과 아내 중 누가 더 우월한가를 입증하기 위해 끊임없이 갈등하고 싸우는 일이 많습니다. 남편은 자신이 항상 아내보다 우월하지 않다는 사실 그리고 아내가 가정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사실에 고민하고 실망하고 분노하기도 하고 아내에 대한 반감을 갖게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내의 잘못을 거침없이 비난합니다. 이러한 남편은 아내가 자신보다 앞서나가는 것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가정에서 이루지 못한 것을 찾으려고 가정 밖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친구들, 사업, 운동 나아가 다른 여자 등 가정 밖에서 만족을 찾으려고 합니다.

요즘은 아내도 역시 나와 남편 중에 누가 더 우월한가를 따지고 은연 중 가정의 머리가 되기를 원하고 주도권을 쥐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남편으로 하여금 가정의 머리 역할을 포기하도록 만들기도 하고 또 다른 면에서 남편이 가정의 머리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비난합니다.

그리고 아내는 남편에게서 얻지 못한 만족을 얻으려고 자녀들에게 애정을 쏟거나 각종 모임에 참가하고 직장에서 심지어 다른 남자에게서까지 만족을 찾으려 하기도 합니다.

결국 이들 부부는 부부의 사랑보다 자신들의 자존심과 자신의 삶의 만족이 더욱 중요하게 되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아름다운 사랑의 가정이 있습니다.

엘레나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열 살 때 고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소망을 잃지 않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결혼을 하고 그녀의 남편이 39세가 되었을 때 남편이 소아마비에 걸려 다리를 못쓰면서 절망의 그림자가 짙게 깔렸습니다. 그 때 불구가 된 남편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 아직도 나를 사랑하오?"

그러자 엘레나는

"내가 언제 당신의 다리만 사랑했나요?" 하며 웃었습니다.

이 부부가 바로 미국의 32대 대통령 '루즈벨트'와 그의 아내 '엘레나'입니다. -사랑은 좋은 것 뿐 아니라 약점도 결점도 모두 사랑하는 것입니다.-

 

시기, 질투, 경쟁심은 교회에서도 흔히 나타납니다. 빌립보서를 보면 두 여인 즉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언급하면서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합니다. 우리는 이들이 누구인지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들은 모두 빌립보교회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여인들이었다는 것과 이들 간에 시기와 질투로 갈등과 대립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은 각각 자신들은 옳고 상대방은 틀렸다고 멸시하며 무시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가 평안할 수 없었습니다. 이들의 하는 일이 많고 그 영향력이 크면 클수록 더욱 교회는 불안하고 시끄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생각 있는 사람들이라면 가슴아파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여인들은 서로의 자존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감옥에서 이러한 소식을 전해들은 사도바울은 몹시 안타까워하면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말씀합니다. 즉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 되라는 것이고 주님의 교회를 위하여 서로를 조화시키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살아가면서 때론 누가 미워지고 싫어질 때가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은근히 시기와 질투심이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때는 바로 마귀가 틈을 탈 때이고 내 신앙에 큰 손해가 있게 될 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때 무릎 꿇어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 할 수 있도록, 이해할 수 있도록, 감싸 않고 함께 더불어 살아갈 수 있도록, 상대방을 존중할 수 있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진정 우리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사랑 가운데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시기 질투로 인하여 태어난 아들이 누구입니까? 우선 지난 주 본 단과 납달리입니다. 라헬의 시녀 빌하를 통해서 태어난 아이들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레아의 시녀 실바를 통해서 태어난 아들들이 나오는데 레아는 그 첫 번째 아들을 보고서는 복되도다.” 하고는 그 이름을 이라 하였습니다. 갓이라는 이름은 '행운‘, ’행복이라는 뜻입니다. .

그리고 갓에 이어서 태어난 아들을 보고 레아는 말했습니다.

기쁘도다 모든 딸들이 나를 기쁜 자라 하리로다 하고는 그 이름을 아셀이라 하였습니다.

여기 아셀은 행복이라는 뜻입니다. 이제 자신이 기쁘고 행복하니 다른 여자들이 자신을 부러워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레아는 빌하를 통해 난 아이들을 행운, 행복이라 이름하였습니다. 자신에게 행운이 있고 행복이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은 누구나 행운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행운의 4잎 클로버를 찾고 로또에 당첨되기를 바라고 복권을 삽니다. 그리고 또한 내가, 내 가정과 내 자식이, 내 교회가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만사형통하고 어렵고나 힘든 일이 없이 평안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다가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나면,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인간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불운하거나 불행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원망, 불평을 하고 낙심하고 좌절합니다.

그러면 행복은 무엇일까요? 영어로 행복을 ‘Happiness’라고 합니다. 이 말은 영어 동사 ‘happen’에서 파생되어 나왔는데 이 말은 우연히 발생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말하는 행복이라는 것은 인생을 살다가 우연하게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일이 잘 풀리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좋아 지고 기분이 좋아질 때 우연히 행복하다고 느낀다는 것입니다.

2014년도에 <행복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출판되었습니다. 하버드 대학의 탈 벤 샤하르라는 교수가 심리학 과목으로 개설했던 강의 내용을 정리해서 책으로 펴낸 것입니다. 이 책을 보면 샤하르 교수는 행복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어놓고는 막상 행복이 무엇이라고 명확하게 정의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구지 행복에 대해 정의해 놓은 것을 찾아본다면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감정이라고 할 것입니다.

전반적으로 이 책은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는 여러 가지 구체적인 방법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방법이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의외인데 운동을 열심히 하는 것이랍니다. 그러니까 행복은 일상을 성실하게 사는 중에 어느 날 우연히 느끼게 되는 그런 감정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이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언제 어떻게 오는 것인지 모른 채 우연히 맛보고 누리게 되는 감정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성경은 행복을 영어로 ‘Blessing’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복 또는 축복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이 말은 영어 동사 ‘bleed’라는 말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이 말은 피를 흘리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말씀하는 행복은 피를 흘리는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것 그것이 바로 행복이라는 말입니다.

민수기 6:23 이하를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제사장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축복하라고 일러주신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한마디로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어떻게 복을 빌어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이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우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행복이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행복은 하나님과의 좋은 관계로부터 얻어진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행복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평강이 핵심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신명기 3329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이 말씀은 모세가 느보산에서 저 멀리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바라보고 죽기 전에 12지파 별로 축복을 하고는 결론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한 것입니다. 사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험한 광야를 거쳐왔고 아직도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을 정복해야 하는 막중한 일들디 남아 있기에 행복을 느끼거나 누릴 그런 때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성령의 감동을 받은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고 행복한 자들이라고 감탄을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애굽에서 어린양 보혈로 구원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역시 어린 양 예수의 피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돕는 방패가 되시는 하나님의 도움을 누리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영광의 칼이 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승리를 누리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성도는 세상 사람들 보다 물질이 많지 않고 지위가 높지않고 많이 배운 것도 없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인줄 믿습니다. 전도서 518절을 보면 사람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에서 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보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그것이 그의 몫이로다.”고 말씀합니다. 전도자가 인생을 두루 살펴보니 각 사람에게 저마다 각양 다른 것들을 베풀어주셨다는 것입니다. 먹고 사는 것, 가지고 누리는 것, 그리고 일하고 땀 흘리는 것들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닫고 그 안에서 즐거움을 누리는 것 그것이 행복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행복은 깨달음을 통해서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너무도 많은 것들, 너무도 귀한 것들, 너무도 멋진 것들을 주셨는데 우리가 발견하지 못하고 우리가 깨닫지 못해서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야고보서 1:16 이하를 보면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을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우리가 속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너무도 귀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풍성하게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정말 소중한 사람들로 이 땅에 살아가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남들의 장점과 우리의 부족한 점을 비교하게 하거나 우리의 욕망을 부추겨서 불평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끼게 만듭니다. 속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만의 장점을 갖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들을 풍성하게 채우셨습니다. 이 점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아셀이 태어난 후에 합환채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맥추 때 그러니까 5월 초순에 들에 나갔던 레아의 아들 르우벤이 합환채를 얻어왔습니다. 합환채는 다년생 식물로 그 잎사귀는 색깔이 검푸른 것 외에는 상치와 아주 닮았고 꽃은 자주빛이며 뿌리는 대부분 두 갈래로 되었고 열매는 5월 초순에 익는데 그 크기는 작은 사과만하고 매우 향기가 좋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합환채를 가져왔다는 것은 그 열매를 따왔다는 것일 것입니다. 이 열매는 오늘 날의 비아그라 같은 약리 효과를 가졌다고 믿어졌습니다. 즉 아이를 많이 생산하게 해주고 성적으로 그 역할을 증대시켜 준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 열매를 사랑의 과실로 불렀습니다. 물론 미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녀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어떤 열매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닙니다. 보십시오. 합환채를 사용한 라헬은 아이를 낳지 못하고 정작 그렇지 않은 레아는 아이를 쑥쑥 낳게 됩니다.

아무튼 이러한 합환채를 차지하기 위하여 라헬과 레아가 싸우는 모습은 정말 가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과연 라헬과 레아만 나무랄 수 있습니까? 저들을 그냥 비웃기만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정말 다른 사람보기에 아니 하나님 보시기에 별거 아닌 것 같지고 다투고 심지어 목숨 거는 일은 없습니까? [우리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는 책이 나오기도 하였지요. 어쨌든 사람들은 대개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대단히 중요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것은 꼭 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되어져야 해, 그러다 보니까 다른 사람에게 그 일을 하라고 강요해 피곤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일이 이뤄지지 않으면 화를 내거나 속상해 하고 심지어 앓아눕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정작 중요한 것을 바라보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할 때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그 문제를 바라보는 일이 필요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일까? 정말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일까? 내 마음의 소원이 주님께서 주신 것일까? 그리고 진정 우리 교회에, 성도들과 다른 이들에게 유익된 것일까?

여러분 우리 주님의 특징은 수시로 한적한 곳을 찾아가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가셔서 무릎 꿇어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님은 자신이 하시는 일을 돌아보시며 어떻게 하면 더욱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 드리고 사람들에게 유익을 줄 것인가를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가운데 자연스레 기도를 하시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종 실바를 통해 또 두 아들을 얻은 레아, 동생에게 합환채를 빼앗긴 레아를 또 잉태케 하셨습니다. 그래서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에 이어 다섯째인 잇사갈과 여섯째인 스불론을 낳게 되었습니다. 또 뿐만 아니라 디나라고 하는 딸도 낳게 하셨습니다. 디나는 단과 관련된 딘의 여성형입니다. 그러니까 과 그 뜻이 같은 것으로 이름으로만 보면 라헬이나 레아나 다 비슷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레아의 5번째 아들 잇사갈 보상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시녀를 남편에게 주었기에 그 값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서 그런 것입니까? 아니 시녀를 남편에게 첩으로 준 것이 그 무슨 상 받을 일입니까? 진정 그녀에게 아들을 주신 것은 보상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레아는 이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살아가면서 은혜로 주신 것을 모르고 내가 기도를 얼마 했기에, 내가 봉사를 얼마 했기에, 내가 얼마만큼 희생을 했기에 그 상으로 주셨지 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고 고백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상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 상도 은혜로 주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내가 열심히 수고할 수 있는 것도 그리고 상을 받게 되는 것도 오직 하나님의 사랑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감사와 찬양을 드릴 것뿐입니다.

 

이어 레아는 여섯째 아들을 얻게 되었는데 그 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후한 선물을 주시도다 내가 남편에게 여섯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는 그가 나와 함께 거하리라 그리고는 그 이름을 스불론이라 하였습니다.

결국 레아의 소원은 남편 야곱이 자기와 함께 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야곱이 가끔가다 들르긴 했지만 남편과 함께 사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남편과 동거하는 일에 목을 맨 레아야 말로 참으로 불행한 여인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진정 사랑하는 사람하는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이 복입니다. 그래서 시1331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그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가! 형제자매가 어울려서 함께 사는 일!)

그런데 여러분 우리 주님의 소원은 바로 우리와 함께 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5:9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그리고 요한복음 1:14절을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말씀합니다. 즉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천막을 치고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복된 말씀입니까? 우리의 진정한 행복은 주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심령에 함께 거하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진정 우리 안에 거하시는 주님은 우리를 치유해 주시고 우리의 삶을 인도해 주시고 도와주십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다른 것에 목매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힘쓰며 진실한 사랑을 베푸시는 우리 주님께 몸과 마음을 온전히 드리며 섬기시길 축복합니다. 2019217일 주일 낮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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