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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하기(+) | 박승남 | 2019-03-0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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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창세기30:22-24절 개역개정22.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 23.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24.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창30:22~24 더하기(+) 옛날에 거북이를 사랑한 토끼가 있었습니다. 토끼는 혼자 속으로만 사랑했기 때문에 아무도 토끼가 거북이를 사랑하는 줄 몰랐고, 심지어 거북이도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토끼에게는 한 가지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거북이가 자기의 느린 걸음을 너무 자학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토끼는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토끼는 거북이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거북이에게 말했습니다. "거북아! 나랑 달리기 해보지 않을래?" 그날따라 거북이는 투지가 생겼습니다. 질 때는 지더라도 토끼와 같이 달려봐야지 하고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 한번 붙어보자!" 드디어 경주가 시작되었습니다. 순식간에 토끼는 저만치 앞서갔습니다. 그러면서도 뒤따라오는 거북이만 생각했습니다. "포기하면 어떡하지! 중간쯤 가서 기다려주자!" 그런데 그냥 눈을 뜨고 거북이를 쳐다보면서 기다리면 거북이가 자존심이 상할까봐 토끼는 길에 누워서 자는 척을 했습니다. 그래서 거북이가 가까이 와서 자기를 깨워주고 같이 나란히 언덕으로 올라가는 아름다운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북이는 자기 옆을 지나면서도 자기를 깨우지 않았습니다. 자는 척 하던 토끼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결국 거북이가 경주에서 이기게 되었습니다. 경주 후에 동네 동물 식구들과 후세 사람들로부터 거북이는 "근면하고 성실하다"는 칭찬을 들었고, 토끼는 "교만하고 경솔하다"는 욕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토끼는 남몰래 눈물을 흘리며 그 모든 비난을 감수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거북이의 기쁨이 자기 기쁨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야곱의 집안 얘기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한 남자와 네 여자이야기, 남편의 사랑받기 위해 몸부림치는 이야기와 자녀를 낳기 위해 경쟁을 벌이는 이야기 한편으론 가상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너무나 유치하기도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이야기가 길게 기록되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러분 야곱의 두 부인 레아와 라헬 자라면서 때론 싸움도 했겠지만 그래도 언니 동생으로 다정하게 지내왔을 텐데 야곱으로 인하여 이 두 여인은 시기와 경쟁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완전히 라헬의 승리였습니다.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가면서 남편의 사랑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결혼한 여인에게는 남편의 사랑 못지 않게 자식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더욱이 남편의 사랑은 조금씩 식어져 가는 것 같은데 자식을 낳지 못했으니 그의 마음이 괴로움은 점점 더 해 갔습니다. 그런데 라헬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한 것은 자신을 제외한 세 여인들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라헬의 언니 레아에게는 여섯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이 있었고, 레아의 몸종 실바와 라헬의 몸종 빌하에게도 각각 두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있어서는 아이를 낳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었는데 라헬의 경우는 아무리 기다리며 노력해도 아이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세 여인의 아들들이 쑥쑥 자라나는 것을 지켜보면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상처와 아픔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마음 아팠던 것은 레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날 불쑥 아버지에 의해 야곱의 아내가 되어지고 그래서 더욱 남편된 야곱의 밉상을 받아 살게 되었으니 사는게 사는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랑받지 못하고 의지할 데 없어 괴로워 하던 레아는 그의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라헬은 잘생긴 외모 때문에 자존심이 강해서 그랬는지 자신의 수단과 방법으로 해결하려만 했습니다. 분명 야곱은 빈 말이라도 “하나님께 기도해 보라”고 여러 차례 말 해 주었을 것 같은데도 라헬은 기도하지 않고 제 딴의 노력을 다 해 보았습니다. 언니 레아가 불임 치료제로 알려진 합환채를 얻었다는 소식을 듣고 남편을 레아와 동침시키는 대가를 지불하고 그 약을 얻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인간적인 노력은 결국 부질 없는 일이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문제를 해결해 줄 것처럼 보이는 가짜 해결책이 참 많습니다. 하지만 욕심으로 가득한 사람은 이것을 분별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문을 닫으면 열 자가 없고 하나님이 문을 열면 닫을 자가 없습니다. 이럴 때는 인간적인 노력을 하면 할수록 허사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라헬은 하나님께서 태를 열지 않으셨기 때문에 아무리 인간적으로 애쓰고 노력해도 임신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진작 깨달았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라헬온 오랫동안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남편, 언니 그리고 자식을 낳지 못하는 기구한 자신의 신세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깡짜를 부리고 시기 질투하고 마음이 상하고 고민하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분명히 있음에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안달라서 어쩔 줄 몰라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드디어 라헬이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2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그동안 라헬을 생각하지 않고 계시다가 기도하니까 그제야 생각하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분명 처음부터 라헬을 생각하셨습니다. 라헬에 관심을 가지시고 라헬을 도우시려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녀를 계속해서 지켜보신 것입니다. 라헬이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며 기도하기를 원하시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라헬은 이러한 하나님의 생각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어떠한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원하시는지,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시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라헬은 자기 생각에만 사로잡혀 그 동안 혼자 괴로워하고 슬퍼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할 때 가장 안타까워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토끼가 거북이를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은 라헬을 사랑하셔서 은혜 주시기를 원하셨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라헬을 보실 때 얼마나 아프셨겠습니까? 그래서 당장에라도 아들을 낳게 하여 주실 수 있으셨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기다리셨습니다. 라헬이 자신의 자존심을 죽이고 낳아질 때까지, 그리고 온전히 하나님의 찾고 부르짖을 때까지 참고 기다리셨습니다. 마치 탕자를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기다리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법으로 응답을 하지 않을 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를 포기하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 그 때를 기다리시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그 어느 순간 라헬은 자신의 힘과 능으로도, 자신의 수단과 방법으로도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에게는 물론 남편 야곱에게도 답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답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하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오 하나님, 저의 교만했던 마음을 용서해 주시며 저를 불쌍히 여기사 자식을 낳게 해 주시옵소서.” 드디어 라헬이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도 정말 간절하게, 절박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구한 것입니다. 그러자 우리 하나님은 그녀를 긍휼히 여기시고 그녀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 태를 열어주셨습니다. 그러자 라헬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생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라헬의 부끄러움을 씻어주시고 그녀에게 기쁨과 감사와 찬송이 넘치게 하여 주시를 원하셨습니다. 그동안 라헬은 부끄러움을 겪었습니다. 모욕적인 말, 수치스러운 말을 들었던 것이며 비난, 조롱하는 말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아기를 못 낳는다고 사람들에게 그리고 언니 레아에게서 이러한 저런 조롱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아들을 낳게 하여 주심으로 그동안 받았던 마음의 상처와 괴로움 그리고 비난과 조롱의 부끄러움을 다 씻어 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남편 야곱이 다시금 라헬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이러한 저런 부끄러움을 겪게 됩니다. 특히 크리스천으로서은혜 생활을 하지 못할 때,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할 때, 믿음의 열매를 맺지 못할 때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과 조롱과 멸시를 받게 됩니다. 심지어 가족들에게, 나아가 자기 자신이 자신을 비난하고 조롱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원수 마귀는 얼마나 우리를 비난하고 조롱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럴 때 생각이 있는 신앙인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에게 평안과 기쁨과 소망을 주시는 것인데 말입니다. 여러분 탕자는 타국에 가서 재산을 다 허비하고 거지꼴이 되었을 때 자기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말했습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 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도대체 내 신세가 이게 뭐냐, 내가 이렇게 살아야 할 사람이 아닌데, 나는 정말 아버지의 풍성함을 누려야 할 아들인데,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 너무나 가슴 아프고 통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탕자가 새롭게 되어진 것은 용기를 내어 아버지께로 갔다는 것입니다. 비록 품꾼의 하나로 살아가야지 하는 마음으로 갔지만 그래도 아버지께 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이 때 아버지의 생각은 무엇이었습니까? “이 녀석 돌아오기만 해 보라. 가만히 안 놔두겠다!” 하고 이를 갈고 있었습니까? 돌아오면 쳐다보지도 않고 종들을 시켜 쫒아내려 하였습니까? 아닙니다. 언제 돌아오던지 아들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그를 위해 잔치를 베풀려고 아버지는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요,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여러분 로마서 9:33절과 10장 11절을 보면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며 시34편 5절은 “그들이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내었으니 그들의 얼굴은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주님을 우러러보아라. 네 얼굴에 빛이 나고, 너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고 합니다. 그리고 10장 13절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진정 우리들이 주님을 믿고 의지하면, 주님을 앙망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주님은 우리를 부끄러운 자리에서 건져 주시고 우리 하여금 기쁨이 넘치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라헬이 낳은 아들이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그 유명한 요셉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시기하고 모함하고 오해해서 웅덩이에 빠뜨리기도 하고 감옥에 집어넣기도 합니다. 그러니 그 고통과 억울함과 수치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요셉은 30세가 되기까지 어렵고 고독하고 수치스러운 시기를 겪었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어느 순간 하나님은 그의 이러한 수치를 다 씻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창세기 41장 50~52절에 보여집니다. 흉년이 들기 전에 요셉에게 두 아들이 나되 곧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그에게서 낳은지라 요셉이 그의 장남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차남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 므낫세는 잊게하는 이라는 뜻으로 아들 므낫세를 얻은 뒤 요셉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고통과 억울함과 모든 수치를 이 아이를 주심으로 끝내주셨구나.” 그러니 얼마나 감사했겠습니까? 진정 므낫세는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이며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기쁨은 비단 요셉의 기쁨만이 아니라 그 아버지 야곱과 그 형제, 가족들의 기쁨이요, 애굽의 기쁨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요셉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잠시 요셉으로 하여금 수치와 고통의 자리에 있게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요셉은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창49:22) 라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가지가 담을 넘어 다른 사람에게 쉼과 열매를 주는 매우 유익한 존재가 바로 요셉이었던 것입니다. 아들을 낳은 라헬은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는 마음으로 요셉이라 불렀습니다. 그렇습니다. 요셉은 그가 즉 하나님께서 더하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이는 라헬은 또 다른 아들을 더 낳게 해 주시기를 원하는 간절히 소원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생각은 이러한 라헬의 소원을 넘어섰습니다. 라헬은 자신의 개인적 차원의 꿈을 가지고 요셉이라 이름 했지만 하나님은 라헬의 후손을 통해서 엄청난 일을 이루시고 요셉을 통하여 수많은 생명을 얻게 하시려고, 수많은 생명을 구원하실 것을 생각하시면서 라헬에게 아들 요셉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앞으로 이러한 하나님의 생각을 구체적으로 헤아려 볼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우리 교회를 향한 놀라운 비전과 계획, 생각이 있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헤아리지 못하고 그저 조그마한 내 개인적 차원에만 머물러 있으며 나아가 때론 하나님을 원망하고 세상을 비관하며 슬퍼하고 괴로워 할 때가 많습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의 자리에 들어서면,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나아가면 여러분과 저를 향하신, 그리고 우리 교회를 행하신 일들을 조금씩 알게 될 것이고 그럴 때 우리에게는 소망과 기쁨과 감사가 그 만큼 넘치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 55장 8~9절을 보면 하나님은 포로로 잡혀와 절망에 빠져 앞날의 소망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소망 없이 캄캄한 앞날을 바라보는 너희들의 생각은 비록 절망과 죽음이지만 너희들을 향한 내 생각은 다르다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다른 생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시고 소망과 기쁨을 주시려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 만일 하나님의 생각이 여러분과 저의 생각 수준과 똑같다면 우리에겐 절망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생각은 다르십니다. 우리가 처한 현실, 우리가 사는 세상, 어디서부터 해결이 있고, 어떻게 해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끝없는 수렁 같은 현실을 속에 있지만, 이 현실을 보는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그래서 내 개인의 인생에 어두움이 와서 더 이상 소망이 없을 때, 내 나이와 건강과 실력과 처지와 형편과 상황을 보며 갖는 내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다르신 하나님의 생각을 알게 될 때에 그 속에서 위로를 얻고 힘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생각은 하나님을 만날 때에만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그저 성경에 있는 이야기가 죽은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은 이 말씀이 운동력이 있어 내 심령 속에 꿈틀거리며 살아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특별한 사람들이 만나는 것이 아니라 레아와 라헬처럼 그렇고 그런 인간이라도 사모하고 찾고 부르짖는 자라면 만나주십니다. 이사야 55장 6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그러므로 하나님을 찾고 부름으로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총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여러분 더하기라는 뜻이 담긴 요셉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이제 막 글을 깨치기 시작한 어떤 아이가 엄마와 함께 거리에 나왔는데 마침 교회 지붕 위에 십자가가 눈에 띄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신기한 걸 발견한 듯이 엄마에게 “어? 저기 더하기가 있네! 더하기!”라고 소리쳤습니다. 엄마는 아이에게 곧장 “그건 더하기가 아니고 십자가란다.”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이렇게 말해주였습니다. “정말 더하기처럼 생겼네. 맞아, 십자가는 더하기야” 그 어머니의 생각처럼 우리도 십자가를 볼 때 마다 ‘더하기’를 떠올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구원도 더해주고, 사랑도 더해주고, 평안도 더해주고... 이렇게 십자가는 ‘빼기(-)’가 아니고, ‘더하기(+)’이니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더해 주시기 위해서 부끄러움, 이루말할 수 없는 치욕을 겪으셨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서 12:3절 말씀처럼 예수님은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습니다. 그 앞에 있는 기쁨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부활이요 나아가 수 많은 생명을 살리시고 아름답고 복된 삶을 살게 하심으로 얻으시는 기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예수님을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려움과 고통, 치욕의 자리에 서더라도 끝까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생명은 포기하시고 버리셨지만(-) 그것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더하시며, 사랑을 주셨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볼 때마다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우리에게 더하기를 해 주시는 주님을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진정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여러분의 삶에 더하기(+)의 역사가 충만하며 동시에 예수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더하기 인생을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 2019년 3월 3일 주일 낮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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