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와 평화 그리고 사랑의 언약 | 박승남 | 2019-04-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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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창세기31:43-55절 개역개정43. 라반이 야곱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딸들은 내 딸이요 자식들은 내 자식이요 양 떼는 내 양 떼요 네가 보는 것은 다 내 것이라 내가 44. 이제 오라 나와 네가 언약을 맺고 그것으로 너와 나 사이에 증거를 삼을 것이니라 45. 이에 야곱이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46. 또 그 형제들에게 돌을 모으라 하니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무더기를 이루매 무리가 거기 무더기 곁에서 먹고 47. 라반은 그것을 여갈사하두다라 불렀고 야곱은 그것을 갈르엣이라 불렀으니 48. 라반의 말에 오늘 이 무더기가 너와 나 사이에 증거가 된다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갈르엣이라 불렀으며 49. 또 미스바라 하였으니 이는 그의 말에 우리가 서로 떠나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나와 너 사이를 살피시옵소서 함이라 50. 만일 네가 내 딸을 박대하거나 내 딸들 외에 다른 아내들을 맞이하면 우리와 함께 할 사람은 없어도 보라 하나님이 나와 너 사이에 증인이 되시느니라 함이었더라 51. 라반이 또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나와 너 사이에 둔 이 무더기를 보라 또 이 기둥을 보라 52. 이 무더기가 증거가 되고 이 기둥이 증거가 되나니 내가 이 무더기를 넘어 네게로 가서 해하지 않을 것이요 네가 이 무더기, 이 기둥을 넘어 내게로 와서 해하지 아니할 것이라 53.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홀의 하나님,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은 우리 사이에 판단하옵소서 하매 야곱이 그의 아버지 이삭이 경외하는 이를 가리켜 맹세하고 54. 야곱이 또 산에서 제사를 드리고 형제들을 불러 떡을 먹이니 그들이 떡을 먹고 산에서 밤을 지내고 55. 라반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맞추며 그들에게 축복하고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더라 창31:43~55 화해와 평화 그리고 사랑의 언약 없어진 재물이 아까워 도망치는 야곱을 죽어라 쫒아가던 라반에게 하나님께서는 꿈에 나타나시어 선악 간에 말하지 말라고 지시하셨는데 이는 “화난 감정으로 말하지 말라” 또는 “다정하게 말하라”(루터)고 하신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로 인해 라반은 어쩔 수 없이 야곱을 해치지 못하고 그 감정을 누그러뜨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화난 것을 어찌 할 수 없어 야곱을 책망하고 잃어버린 가정 수호신인 드라빔을 찾느라 여기저기를 무례하게 뒤졌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찾지 못하게 되자 도리어 야곱의 항변을 받게 되어 무안만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멋 적어진 라반은 이렇게 말합니다. “딸들은 내 딸이요 자식들은 내 자식이요 양 떼는 내 양 떼요 네가 보는 것은 다 내 것이라 내가 오늘 내 딸들과 그들이 낳은 자식들에게 무엇을 하겠느냐?”
이제 라반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갖고 있었던 분이 풀려진 상태입니다. 만약 하루 전의 분위기라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서 야곱을 해쳤을 것입니다. 감정을 가라앉히게 되니까 이제 현실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미움과 분노, 섭섭하고 서운한 감정이 있을 때는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죽이든지 아니면 어떻게 손을 봐서 해쳐야 할 대상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라반은 정신을 차리고 나니까 야곱은 적대시해야 할 상대가 아니라 사위이며 가족이라는 사실에 눈을 뜹니다. 야곱이 자기 사위라는 것을 20년 만에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딸들이 자기의 이익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소중한 딸들로 보이고 손자들이 사랑스럽게 보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이 눈을 뜨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싸우고 있는 대상들은 다 우리의 가족입니다. 그런데 어쩌다보니 서로 미워하고 싸우고, 심지어 죽이는 관계까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그렇게 원수라고 생각했던 대상이 바로 우리의 형제이며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하나님의 개입으로 라반은 바로 자기의 딸과 손자들을 자기의 손으로 죽이려고 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라반은 정신을 차립니다. 그리고는 돌연 야곱에게 언약을 맺자고 합니다. 그래서 둘 사이는 돌무더기를 모아 빙 둘러 쌓고 가운데 돌기둥을 세워 언약을 맺게 됩니다. 그리고는 라반은 그것을 여갈사하두다라 칭하였고 야곱은 그것을 갈르엣이라 칭하였습니다. 는 모두 증거(증인)의 무더기라는 말로 여갈사하두다는 라반이 사는 지역의 언어이고 갈르엣은 히브리어입니다.
자 그러면 이 무더기는 도대체 무엇을 증거하는 것입니까? 1.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화해와 평화를 증거하는 언약인 것입니다. 라반은 더 이상 사위와 싸우지 않기로 결심합니다. 그래서 화해를 생각하고 언약을 맺게 된 것입니다. 그동안 둘 사이는 누구보다 가까워야 할 외삼촌과 조카, 그리고 장인과 사위 사이였지만 불화하고 미워하고 등을 졌던 관계 서로 간에 믿을 수 없는 관계였습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우리는 아브라함과 롯을 통해 삼촌과 조카의 관계를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얄미운 것은 조카 롯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런 롯을 끝까지 사랑합니다. 그래서 조카 롯이 재산을 빼앗기고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수수방관하지 않고 쫒아가서 구해냈습니다. 그리고 죄로 인하여 롯이 살고 있는 소돔 성을 멸하시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아브라함은 이렇게 아뢰었습니다.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티끌처럼 작아졌고 재처럼 부끄러워 어쩔 줄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카 롯을 생각하면서 소돔을 멸하시지 않도록 위해서 6번이나 간곡하게 기도를 드립니다. 참 좋은 삼촌입니다. 그런데 라반의 경우는 아브라함과는 완전 달랐습니다. 그래서 조카 야곱을 이용해 먹고 자기 욕심만 채우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라반이 이제 화해의 몸짓을 하는 것입니다. 서로 언약을 세워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자고 제안합니다. 그러자 이 시점에서는 갈등을 멈추고 싶었던 야곱도 흔쾌히 이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돌을 가져 와서 그것으로 기둥을 세우고, 또 친족들에게도 돌을 모으게 하니, 그들이 돌을 가져 와서 돌무더기를 만들고 그 돌무더기 옆에서 잔치를 벌이고, 함께 먹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야곱은 외삼촌과 싸움을 결코 원치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외삼촌이 인격적으로 대해주고 마땅한 품삯을 주었다면 이러한 갈등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외삼촌은 야곱을 대할 때 돈벌이 수단으로 대했습니다. 사람이 앞서지 않고 물질이 앞서니 이렇게 갈등과 미움과 불화가 있을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가만히 보면 물질적 이해관계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즘은 큰 전쟁이 일어나고 있지는 않지만 사실은 또 다른 면에서의 전쟁은 계속됩니다. 이름하여 무역전쟁입니다. 지금 미국과 중국의 이 전쟁이 마무리가 되어가는 듯한 단계이지만 중요한 것은 서로 상대 나라에게 손해를 보지 않겠다. 이익을 더 많이 보아야 하겠다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국가 지도자로서 할 일이라고는 하지만 진정 우리에게 물질, 이익, 손해 보지 않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사람이요, 인권이요, 생명인 것입니다. 그래서 화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게나마 물질에 어두웠던 라반의 눈이 뜨여져 야곱과 화해를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정말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라반을 이렇게 이끄신 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십니다. 욕심과 분노에 가득 찼던 라반에게 역사하시어 야곱과 화해 하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동안 우리는 라반을 매우 나쁘게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나름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야곱과 화해하는 자리까지 나아갔으니 그래도 요즘 정치인들 보다는 낫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미안하다’, ‘잘못했다’는 말은 끝까지 하지 않은 아쉬움이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자 그런데 야곱은 언약을 맺기 위해서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또 그 형제들에게 돌을 모으라 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야곱은 2번째의 돌기둥을 쌓은 것입니다. 첫 번째는 형을 속이고 도망하던 중 들녘에서 하루 밤을 지내다가 꿈속에서 하나님을 만나 복된 약속의 말씀을 받고는 잠에서 깨어나 돌기둥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과의 화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세운 돌기둥은 인간끼리의 화해의 언약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두 개의 돌기둥이 필요합니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화해의 돌기둥이며, 다른 하나는 사람들 사이의 화해의 돌기둥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들도 화해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사도요한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해, 화목하시기 위해서 화목제물 우리에게 보내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 화목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원리 우리는 에베소서 2장 1~3절 말씀처럼 허물과 죄로 죽었던 존재이고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올 수 있게 되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된 사람들이 되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귀한 피를 흘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평화(엡2:14)가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가까워졌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은 또한 우리 사람들 간에도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이에 대해 에베소서 2장 14~1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분은 자신의 몸을 바쳐서 유다인과 이방인이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버리시고 그들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드시고 15 율법 조문과 규정을 모두 폐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희생하여 유다인과 이방인을 하나의 새 민족으로 만들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그리고 평화를 이뤄주신 주님은 “평화를 만드는 사람을 복이 있다. 저희가 하나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주님 말씀하신 대로 평화의 사람, 평화의 도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프랜시스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미움이 있는 곳에 주의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위로 받기보다 위로 하게 하소서 이해받기보다 참 이해하게 하소서. 사랑 받기보다 사랑하게 하소서 실망 있는 곳에 새로운 소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참 빛을 슬픔이 있는 곳 기쁨이 되게 하소서
그런데 여러분 우리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서 오신 예수님은 자신의 이익을 결코 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쓸데없는 자존심에 매여 있지 않으셨습니다. 실로 주님은 자신을 낮추시고 희생하시고 손해를 보셔서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손해를 보지 않고는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내가 희생하려 하지 않고는 내 자존심을 죽이지 않고는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셨지만 인간의 모습으로 오심으로 우리를 구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진정 화해와 평화를 원한다면 이러한 주님의 십자가 정신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평화의 왕이신 주님께 주님의 마음을 품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51~52절을 보면 라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나와 너 사이에 둔 이 무더기를 보라 또 이 기둥을 보라 52 이 무더기가 증거가 되고 이 기둥이 증거가 되나니 내가 이 무더기를 넘어 네게로 가서 해하지 않을 것이요 네가 이 무더기, 이 기둥을 넘어 내게로 와서 해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렇습니다. 서로 해치지 말자는 것입니다. 이제 나도 자네를 해치지 않을 것이니 자네도 나를 해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라반이 야곱의 실세를 인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야곱은 더 잘되고 강해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라반은 그동안 야곱이 자가 집에 있을 때 하나님이 복을 주신 것을 보고 알았습니다. 또한 자기가 야곱을 하려고 추격을 할 때 하나님이 막으시고 야곱을 도와주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훗날 야곱의 힘이 커져서 자기를 공격할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사전에 서로가 침범을 하지 말자며 언약을 맺자 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평화를 위해 우리가 노력을 해야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지켜 주실 때 이뤄질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평화는 사람만의 노력만으론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 평화를 위해 힘써야 하지만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고 지켜주셔야 됩니다. 하나님이 지켜 주시지 않으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된 일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민족의 안보와 평화를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라반의 마음이 화해와 평화를 원하는 마음으로 돌려진 것처럼 이 민족이, 세계가 평화의 마음으로 돌려지도록 끊임없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2. 이는 사랑을 증거하는 언약인 것입니다. 라반은 야곱에게 말했습니다. 50절입니다. "만일 네가 내 딸을 박대하거나 내 딸들 외에 다른 아내들을 맞이하면 우리와 함께 할 사람은 없어도 보라 하나님이 나와 너 사이에 증인이 되시느니라 함이었더라" 그렇습니다. 그동안 딸들의 행복이야 어떻든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 생각했던 라반이 이제 본연의 아버지의 모습으로 돌아가 딸들의 장래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 딸들을 박대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여기 박대라는 말은 억지로 ... 시키다. 강제로 복종시키다, 벌하다. ...에게 고통을 가하다, 괴롭히다 압제하다 천하게 하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박대하지 말고 다른 아내들도 취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간단히 말하면 내 딸들을 괴롭히거나 천하게 여기거나 무시하지 말고 오직 평생 동안 사랑하고 존중해 주라는 것입니다. 쉽사리 화를 내지 말고 다정하게 대하며 인격적으로 대해 주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그리고 부부간에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고 아껴주기를 원하십니다. 몸이 불편한 아내를 위해 아침을 손수 차려 주시고, 퇴근 후에도 직접 저녁을 준비하시고 설거지까지 혼자 다 하며 사시는 할아버지가 계셨습니다. 어느 날, 할아버지는 밖에서 어떤 사람과 식사를 하게 되었을 때 집에서 혼자 식사할 아내를 걱정하시며 한 말씀 꺼내셨습니다. “내가 말야, 젊었을 때는 그렇게 마누라 속을 썩였어. 저 사람 그리 된 것도 알고 보면 다 내 탓이야.” 그 할아버지는 혈기가 왕성하던 시절에 바람을 많이 피우셨고, 아내 되시는 분은 늘 그 뒤치다꺼리를 하시느라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막내딸을 낳으신 후 산후 조리를 잘못하는 바람에 연골이 모두 상해서 빗자루 하나를 들어도 통증을 호소하시게 되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정신 차리고 나니, 아내는 이미 병든 몸이 되었고, 늙어서 머리가 하얗게 변한 후였다고 합니다. 뒤늦게나마 자신의 과거를 뉘우친 할아버지는 여생을 아내의 손과 발이 되어 살아가기로 하셨답니다. 아내의 수발을 드는 것이 힘들 때도 있지만 아내와 함께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할아버지는 행복하다고 말씀하면서 진작부터 사랑하고 아껴 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후회의 말을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난 뒤에 후회하는 일이 많습니다. 학생 때 열심히 공부할걸, 젊을 때 열심히 살걸, 열심히 신앙생활할 걸 등등 말입니다. 그러나 가장 후회가 되는 것은 아마 서로 사랑하지 못한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13:34~35) 그리고 아까 요한일서 4장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을 말하면서 이어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요일 4:11)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여러 가지 분야에 있어서 다재다능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그는 그림에 대단한 솜씨가 있었는데, 예수님과 제자들이 마가 다락방에서 행한 "최후의 만찬"을 그렸습니다. 실제로 이 그림을 보노라면 사람의 얼굴 표정과 행동을 참 잘 묘사해 놓았습니다. 이 그림을 그리면서 있었던 일아 있습니다.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 얼마 전에 친구인 미술가와 사이가 나빠져 크게 싸웠습니다. 그러고 나서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다빈치는 맨 먼저 가룟 유다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유는 자기와 싸운 친구를 가롯 유다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와 싸운 친구를 가룟 유다의 모델로 삼은 셈이었습니다. 그 심사는 "너 두고 봐라 내가 너의 얼굴을 최후의 만찬 속에 넣어서 그리되 유다로 그려서 자손만대에 물려줄 것이다"라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가룟 유다의 얼굴을 완성한 다빈치는 두 번째로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며칠을 고민해도 예수님의 얼굴을 어떻게 그려할지 영감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그리려고 해도 실패만 거듭할 뿐 예수님의 얼굴을 그릴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 후 그는 비로소 실패의 원인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그린 유다의 얼굴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친구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거룩한 예수님의 얼굴을 그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캔버스에서 유다의 얼굴을 지운 뒤 친구를 찾아가 화해를 청했습니다. 그리고 난 후 예수님의 얼굴을 그렸다는 것입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데도 미움이 있으니 그림이 그려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인생의 그림을 매일 그리면서 살아가는 우리 속에 미움이 자리해 있다면 과연 어떻게 되겠습니까?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2001년 2월에 개봉된 영화 [초콜릿]이 있습니다. 영화를 보면 100년간 아무 변화가 없던 한적한 프랑스의 한 마을에 어느 날 신비의 여인, 비안느가 딸과 함께 나타나 초콜렛 가게를 엽니다. 그 마을은 신교도들을 다 몰아내고 가톨릭교도들만 살아가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며 사순절에는 금식하고 과자도 먹지 않는 철저한 금욕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 마을에서 떠돌이 여인이, 더구나 사순절 기간에 초콜릿 전문점을 연다는 것은 용납이 안 되었지요. 그러나 그녀가 만드는 초콜렛은 이상한 마력을 발휘해 마을 사람들을 사랑과 정열에 빠져들게 합니다. 노인들은 다시 활기를 찾아 뜨거운 사랑을 갈구하고, 위기를 맞은 연인들은 불타는 사랑 속으로 다시 돌아가고, 불화가 끊이지 않던 이웃들은 다시 화해를 합니다. 그런데 그 마을의 르노라는 시장은 가톨릭이라는 종교 아래 마을 사람들에게 금욕을 강요하고, 전통을 고수하려는 인물이었습니다. 르노 시장은 사순절 기간에 금욕하지 않고 초콜릿 가게 문을 열고 판매하는 주인공 비안느를 아니꼬운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과 달리 빨간 구두를 신으며 색감있는 옷과 메이크업을 한 비안느를 도덕적으로 타락한 인물로 단정지었습니다. 그래서 칼을 들고 여인의 가게를 부수러 갔습니다. 하지만 시장은 금식하느라 주렸던 배를 초콜릿으로 채우고는 쓰러져 잠들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은 부활절이었는데 시장의 학대를 피해 마을을 떠나려했던 비안느는 추한 모습으로 쓰러진 시장을 보고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갈증이 심한 시장에게 시원한 음료수를 권하고 비밀을 지켜준다며 안심시켰습니다. 여인은 먼저 용서한 것입니다. 공격을 받았고 온갖 피해를 입었으면서 상처 입은 자가 먼저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러자 화해가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변했습니다. 그로 인해 마을에는 진정한 부활의 역사가 임했습니다. 우리 크리스천이 먼저 내미는 용서의 손길이 화해를 가져올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먼저 용서하셨던 것을 이제 우리가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때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화해와 평화와 사랑입니다. 라반은 야곱은 언약을 맺었지만 서로 간에 신뢰할 수 없었기에 돌무더기, 돌 기둥으로 증인을 삼았고 나아가 하나님께서 지켜보아 주시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우리 주님은 돌로서가 아니라 바로 저와 여러분을 증인으로 삼기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무엇보다 진실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진실된 삶을 살았기에 저들은 그야 말로 화해와 평화의 사도, 사랑의 사도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기억하며 우리도 진실한 주님의 증인이 되어 화해와 평화와 사랑의 주님을 증거하며 또한 그러한 삶을 살아가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2019년 4월 7일 주일 낮 예배 설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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