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를 위한 만남의 준비 | 박승남 | 2019-04-2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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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창세기32:1-20절 개역개정1.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2.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3. 야곱이 세일 땅 에돔 들에 있는 형 에서에게로 자기보다 앞서 사자들을 보내며 4.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 주 에서에게 이같이 말하라 주의 종 야곱이 이같이 말하기를 내가 라반과 함께 거류하며 지금까지 머물러 있었사오며 5. 내게 소와 나귀와 양 떼와 노비가 있으므로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알리고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 하라 하였더니 6.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이르되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 7.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 한 동행자와 양과 소와 낙타를 두 떼로 나누고 8. 이르되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 하고 9. 야곱이 또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10.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11.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 12.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13. 야곱이 거기서 밤을 지내고 그 소유 중에서 형 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택하니 14. 암염소가 이백이요 숫염소가 이십이요 암양이 이백이요 숫양이 이십이요 15. 젖 나는 낙타 삼십과 그 새끼요 암소가 사십이요 황소가 열이요 암나귀가 이십이요 그 새끼 나귀가 열이라 16. 그것을 각각 떼로 나누어 종들의 손에 맡기고 그의 종에게 이르되 나보다 앞서 건너가서 각 떼로 거리를 두게 하라 하고 17. 그가 또 앞선 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내 형 에서가 너를 만나 묻기를 네가 누구의 사람이며 어디로 가느냐 네 앞의 것은 누구의 것이냐 하거든 18. 대답하기를 주의 종 야곱의 것이요 자기 주 에서에게로 보내는 예물이오며 야곱도 우리 뒤에 있나이다 하라 하고 19. 그 둘째와 셋째와 각 떼를 따라가는 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도 에서를 만나거든 곧 이같이 그에게 말하고 20. 또 너희는 말하기를 주의 종 야곱이 우리 뒤에 있다 하라 하니 이는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 함이었더라 창32:1-20 화해를 위한 만남의 준비 인생의 문제 또는 고생의 연속이기도 합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개입으로 위기를 벗어나고 외삼촌과의 문제를 잘 해결하였습니다. 하지만 또 한 고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신을 죽이려 하던 형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라반과 헤어진 뒤 야곱은 길을 재촉하여 요단 동편의 길르앗 산악 지대를 출발하여 남쪽으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요단 강 동쪽 지역으로 압복 강 가까이에 이르렀습니다. 이곳은 후일 가나안 정복 이후에는 갓 지피와 므낫세 반 지파의 접경지대를 이룬 곳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하나님의 천사들이 야곱 앞에 나타났습니다. 여러분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도망치던 중 루스 광야에서 돌베개를 베고 잠들었을 때 꿈에 사닥다리 환상이 보이고 그 위에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천사들이 다시금 나타난 것입니다. 그것도 이번에는 꿈에서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야곱은 이 때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그런데 이번 본 천사들은 큰 세력과 위엄을 갖춘 신비롭고도 깅력한 군대로 두 진영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천사들로 구성된 휘황찬란한 천군(天軍)이었던 것입니다. 야곱은 그들을 보고 감탄하며 “와, 이곳은 하나님의 진영이 있는 데로구나" 그리고는 그곳 이름을‘마하나임’이라 불렀습니다. ‘두 진영’ 또는 ‘두 군대’란 뜻입니다. 그러면 천사들이 왜, 그것도 두 진영의 군대로 나타난 것일까요? 그리고 천사들이 나타남으로 야곱이 갖게 된 마음은 무엇이었을까요? 천사들이 나타난 것이 라반에게서 벗어난 뒤에 그리고 에서를 만나기 전 중간에 나타난 것을 보면 이렇게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1)라반에게 있었던 일과 마침내 라반과 화해하고 평화조약을 맺을 수 있게 되어 무사히 고향 길에 오를 수 있게 모든 일이 다름 아닌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사실을 깨우쳐 주려 한 것이며 2)이제 에서를 만나야 하는데 비록 그것이 마음에 큰 부담스럽고 두려운 일이지만 이 때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어 도와주시겠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려는 하신 것이며 고향으로 가는 길을 격려해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자상하신 하나님은 바로 이 때 천사를 보내어 주심으로 야곱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담대하게 해 주시려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자상하시고 세밀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격려해 주십니다. 때로는 사람을 보내어 주심으로 위로해 주십니다. 때로는 설교 말씀이나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위로해 주십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가운데 위로해 주시기도 하시며 구체적으로 도와주시기도 하십니다. 그리고 두 군대를 생각해 보면 한 군대는 라반쪽에 그리고 한 군대는 에서쪽을 막아 주기 위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야곱의 앞 뒤에서 하나님의 군대가 이렇게 호위하고 있으니, 조금도 겁먹지 말고 의연하게 대처하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야곱에서 이렇게 말씀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며, 내가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 오겠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내가 너를 떠나지 않겠다." (창28:15절)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이처럼 주도면밀하게 야곱을 보호해 주시고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라반의 간계와 위협속서도 지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물질도 채워주셨습니다. 보십시오. 10절을 보면 야곱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이 모든 은총과 온갖 진실을, 이 종은 감히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제가 이 요단 강을 건널 때에, 가진 것이라고는 지팡이 하나뿐이었습니다만, 이제 저는 이처럼 두 무리나 이루었습니다. 여러분 민수기 23장 19절을 보면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다. 거짓말을 하지 아니하신다. 사람의 아들이 아니시니, 변덕을 부리지도 아니하신다. 어찌 말씀하신 대로 하지 아니하시랴? 어찌 약속하신 것을 이루지 아니하시랴? 라고 말씀합니다. 자 그러면 야곱은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요? 히브리서 13장 5~6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에 얽매어 살지 말고, 지금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십시오. 주께서는 "내가 너를 떠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겠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담대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나를 도우시는 분이시니, 내게 두려움이 없다. 누가 감히 내게 손을 대랴?" 그러므로 야곱은 이제 담대하게 앞을 향하여 나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야곱은 하나님을 믿고 감사하는 하였지만 형을 대면해야 한다는 생각에 밀려들어오는 두려움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불안했고 과연 형이 자신을 어떻게 대할지, 오만 가지 생각어 머릿속을 어지럽혔습니다. 20년이라는 긴 세월도 형의 분노를 삭이지 못한 것은 아닐까? 물론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다. 형과의 대면시간이 다기올수록 야곱의 두려움과 번민은 깊어만 갔습니다. 물론 우리는 얼마든지 야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같았어도 그런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그런 야곱을 나무라지는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두려움과 위기속에서, 불안하고 근심충만한 상황에서 신실하신 하나님을 깊이 의지했다면 그렇게 두려워하고 불안해 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걱정이 된 야곱은 형 에서를 만날 준비를 합니다. 이름하여 화해를 위한 준비입니다. 그리고 이런 야곱의 모습 속에서 나름대로 긍정적인 모습을 발견하게 되기도 합니다. 야곱은 먼저 형 에서가 사는 세일이라는 곳에 종들을 보내 은혜 받기를 요청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아니 야곱이 어떻게 해서 에서가 사는 곳을 알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분명 에서는 야곱이 고향을 떠날 때 아버지와 함께 브엘세바에 거하였습니다. 브엘세바는 유다 땅 남쪽 제일 밑에 있는 땅입니다. 그런데 언젠가 에서는 고향 브엘세바를 떠나 거칠고 험악한 산악지역인 세일 땅 에돔 들로 옮겨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은 형이 그곳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물론 우리는 그것을 정확히 알 길이 없지만 분명한 것은 에서를 통해 직접 들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모른 척하고 그냥 지나칠 수 있었습니다. 에서에게 알리지 않고 조용히 조용히 고향 땅 브엘세바로 갈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에서를 만나지 않는다고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 야곱이 형 에서를 만나는 것이 매우 껄끄러운 일입니다. 에서는 야곱을 죽이려고 별렀고 그래서 야곱이 에서를 피해 외삼촌 집으로 도망하다시피 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야곱은 그런 에서에게 사람을 보내 문안을 하려 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사자, 하나님의 군대를 만난 뒤에 진정 야곱이 에서와 화해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제껏 살펴 본대로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등졌던 라반과 화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야곱의 마음은 얼마나 기쁘고 시원했겠습니까? 이제는 라반을 미워할 필요도 없었고 두려워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화해를 하고 나니 소중한 외삼촌이요, 장인어린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경험을 했던 야곱은 이제 형님과도 화해를 하여 그 관계를 새롭게 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후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계속해서 이대로 살아서는 안 되겠다. 언제까지 형님과 원수처럼 등지고 살아가겠느냐?”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 동안 과거 철이 없을 때 형을 속이고 형의 미움을 샀지만 이제는 형을 만나고 가깝게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에서와 화해를 시도하는데 그럼에도 자신이 직접 찾아갈 용기는 없었고 그래서 먼저 종들을 보내서 준비하게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언제까지 숨어 지내고 언제까지 등을 돌리려 살아가겠습니까? 언제까지 미워하고 미움 받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까? 한 때 우리가 살아가면서 인간관계가 껄끄러워진 때도 있을 수 있지만 그러나 언젠가는 풀어야 합니다. 더욱이 내가 잘못해서, 내 실수로 그런 것이라면 더욱 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야곱은 지금 고향 땅 부모님께로 가는 중입니다. 그런데 그가 진정 부모님을 기쁨으로 만날 수 있기 위해서 형님과 화해를 하기 원했던 것입니다. 형 에서와 화해를 했다는 소리를 듣고 제일 기뻐할 사람이 바로 부모님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야곱과 에서의 부모인 이삭과 리브가는 형제가 불화하고 원수처럼 된 것이 얼마나 마음에 아픔이 되고 상처가 되었겠습니까? 그러기에 부모님을 기쁘게 만날 수 있는 길은 형과 진심으로 화해하는 일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면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24) 이것은 무엇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사람간의 화해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시는 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누군가 나를 미워하고 증오하고 원망하는데 그 예배가 참된 예배가 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우리 형제들이, 우리 성도들이, 이 민족이 화해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들이 미움과 반목과 질시와 갈등과 대립 가운데 있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어느 부모가 이를 원하겠습니까? 자 그런데 혹 여러분 가운데 아직까지 누구와 불편한 관계, 서먹한 관계, 미움의 관계로 계속 지내는 사람은 없습니까? 여러분의 가족 친지와 또는 친구 이웃과 또는 같은 성도 사이에 얼굴을 붉히고 얼굴을 마주보기를 꺼려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잘 해결되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그리할 때 하나님이 도우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사람과 화해를 중요하게 여기시면서 동시에 고후5:20절을 보면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화목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하나님과 등지고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찾지 않고 하나님을 떠나 우리들 마음대로 살아간 때가 얼마나 많이 있었습니까? 이 자리에 계신 분들 가운데서 아직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과 화목한 가운데 있지 않은 분들이 혹 있다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막힌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죄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찾지 않은 것이 죄요, 그 외에 우리의 마음과 생각으로 손과 발로 지은 그릇된 것들이 죄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 나와 이러한 죄를 회개하고 주님의 용서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그동안 지은 죄를 고백합니다. 주님,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진정 이제 제가 하나님과 화목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원합니다. 오 하나님, 도와주시옵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 하나님께서 어찌 그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어찌 용서해 주시지 않으며 어찌 은혜를 베풀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진정 우리 주님은 어떠한 죄인이라도 회개하며 주님께 나오기만 하면 그를 받아주십니다. 그리고 화목케 하여 주십니다. 누구든지 주 예수를 믿기만 하면 의롭다 하심을 받고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화해하기를 원하는 야곱이 취한 행동은 어떠한 것입니까? 예의를 갖추고 겸손히 자기를 낮추는 야곱 먼저 4~5절을 보십시오. 야곱은 심부름꾼들을 보내면서 이렇게 말하게 합니다. 표준새번역으로 읽어드립니다. “너희는 나의 형님 에서에게 가서, 이렇게 전하여라. 주의 종 야곱이 문안드립니다. 그간 라반에게 몸 붙여 살다가 보니 이렇게 늦었습니다. 지금 저는 황소와 나귀와 양떼가 생겼고 남종과 여종까지 거느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형님께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아무쪼록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 여러분 여기서 주의 종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종이라는 말이 아니라 형님의 종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당시 아내가 남편에게 종이 주인에게 그리고 이웃끼리 겸손하게 예의를 갖출 때 쓰던 말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쌍둥이 형에게 이런 말을 쓴 것입니다. 형이라 해 봤자 단지 몇 초 몇 분 먼저 나왔을 에서를 주라고 그리고 자신을 종이라고 하기가 어색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야곱은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고 진정한 화해를 위해 그토록 자신을 낮추었던 것입니다. 겸손하게 예의를 갖추면서 형과 새로운 관계를 갖게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화해를 위해 필요한 것은 겸손과 예의입니다. 진정 마땅한 예의를 갖추고 자신을 겸손히 자신을 낮출 때 화해의 길을 열려 질 수 있습니다. 겸손히 자기를 낮춘 야곱은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하라 했습니다. 이는“아무쪼록 지난날의 잘못을 용서하고 자신을 너그럽게 맞이해 주기를 바랍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했을 때 에서의 반응은 어떻게 나왔습니까? 야곱은 심부름꾼들을 보내 놓고는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런데 심부름꾼들이 돌아와 전한 소식은 야곱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종들이 다녀와서 야곱에게 고하였습니다. "주인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에서님께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에서님께서는 지금 사백 명 부하를 거느리고 주인님을 만나러 오십니다." 뭐 형이 400명의 부하와 함께 맞으러 온다고? 아니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한판 붙어 보자는 것인가? 노가 아직 안 풀려 나를 죽이러 오나 보다…….” 이런 저런 생각이 미치자 야곱의 기슴은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심히 두렵고 답답한 마음이 들게 되었고 돌연 긴장되고 불안하고 답답해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외삼촌의 손에서 겨우 벗어났다 싶었더니 이제는 더 무서운 형님의 칼이 기다리고 있다니! 훌몸도 아니고 처첩과 자식들과 남녀종들까지 딸린 마당에 꼼짝없이 모든 식솔이 몰살당할 판국이었습니다. 한편으론 겁이 덜컥 나고 걱정이 물밀 같이 밀려오면서 또 한편으론 자기는 진정으로 화해하기를 바라는데 그 마음을 몰라주고 복수심으로 온다는 형이 야속하기도 했습니다. 쉽지 않은 화해의 길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배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화해의 길은 그리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말 한마디로 다 해결될 것이라면 그렇게 미운 마음도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화해하는 것이, 평화를 이루는 길이 그리 쉬운 길이라면 예수님도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었고 십자가를 지시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죄인된 우리를 화목 시켜 주시기 위해, 하나님과 화목 시켜 주시고 또한 우리 사람들을 서로 화해하게 해 주시기 위해 화목 제물이 되시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주신 것입니다. 내 피가 흘려지고 내가 죽어야 되는데 내 대신 귀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지시고 피 흘리시고 죽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은 쉽지 않은 화해의 길을 열어 주시기 위해 자신이 희생을 하시고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때 아직 아무도 야곱을 위해 희생해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할 때 야곱은 순간적으로 인간적인 꾀를 부리려 하였습니다. 보십시오. 야곱은 일행과 양떼와 소 떼와 낙타 떼를 두 떼로 나누었습니다. 왜냐하면 형 에서가 한 패에 달려들어 쳐 죽이면 나머지 한 패라도 피하게 해야겠다는 속셈을 지녔기 때문이었습니다. 희생을 최소화하고 여차 하면 저차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쪽으로 치면 저쪽으로 도망치겠다는 것입니다. 그야 말로 이 순간 화해의 길보다는 도망치는 쪽으로, 36계 쪽으로 마음을 먹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화해의 길이 될 수 없습니다. 도망친다고, 보지 않는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까? 만일 그렇다면 벌써 문제가 해결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20년 전에 도망쳤던 야곱은 아직도 형과 화해를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의 마음에는 아직 진정한 평화가 깃들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렵고 힘들어도 진정한 화해를 원한다면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도망치고 피하는 것이 아닌 화해의 길로 뚜벅 뚜벅 걸어가야 합니다. 이 민족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한과 북한이 화해의 길로 걸어가야지 뒷걸음을 치거나 다른 길로 가면 안 됩니다. 밉다고 해서, 보기 싫다고 해서 피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대결보다는 평화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북한은 체제붕괴를 두려워하지 말고, 핵을 버리고 민족 화해의 길로 나와야 합니다. 남한도 과거의 길로 회귀하지 않고 북한이 개혁, 개방의 길로 나설 수 있도록, 국제사회 속에 문을 열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올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어야 합니다. 진정 우리에게는 화해를 위해 앞으로 나아가는 길 밖에 없습니다. 화해를 하고 화목 하는 길이 이 민족의 살 길이요, 우리의 나아갈 길입니다. 답답한 마음을 안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야곱 (9~12) 여러분 야곱은 두 떼로 나누었지만 그래도 그것으로 안도가 되지 않았습니다. 무엇인가 찜찜한 하였던 것입니다. 도망칠 준비는 해 놓았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고 두려운 마음이 생겼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이때 어떻게 하겠습니까? 어떻게 하는 길이 지혜로운 길입니까? 답답하고 두려울 때, 근심되고 걱정이 앞설 때, 또 다시 도피자 인생이 되고 싶을 때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런데 이때 참 다행하게도 야곱은 이제껏 도와주신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생각하니까 기도하고픈 마음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되었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저에게 고향 친척에게로 돌아가면 앞길을 열어 주마고 약속하신 여호와여! 주님께서 이 종에게 베푸신 한결같으신 사랑을 저는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이 강을 건널 때 제가 가진 것이라곤 지팡이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저는 이렇게 두 무리를 이루었습니다. 저를 형 에서의 손에서 건져 주십시오. 에서가 와서 나와 제 처들과 자식들까지 모두 죽여 버리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주님께서는 '네 앞길을 정녕 열어 주고 네 자손이 바닷가 모래처럼 셀 수 없이 불어나게 해 주마.'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무서운 기세로 다가오는 형을 만날 일을 앞두고 어찌할 바를 몰랐던 야곱은 조상 적부터, 다시 말해 할아버지 때로부터 자기에게 이르기까지 삼대에 걸쳐 섬겨 오는 하나님께서 지난날 자기에게 베풀어 주신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면서, 자신은 그런 은혜를 입을만한 사람이 못됨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는 은혜를 받고 싶습니다. 자격이 없지만 그러기에 그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도록 간청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현재 자기의 불안한 상태를 솔직히 말씀드리면서 자기에게 하신 약속을 근거로 자기를 형 에서의 손에서 건져내어 주실 것을 간절히 빌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도 괴롭고 답답한 일이 있을 때, 사람간의 불화가 있을 때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그 어느 순간, 어느 때라도 기도의 줄은 놓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우리는 야곱처럼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여러분 은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호의입니다. 만일 우리가 은혜 받을 마땅한 자격이 있다면 기도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 앞에 한 없이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릎 꿇고 자비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화해를 위한 선물을 보내는 야곱 (13~20) 그러면 기도한 뒤 야곱은 어떻게 했습니까? 다름이 아니라 화해를 위해 그 날 밤 거기에서 묵으며 자기 소유 가운데서 형에게 선물로 보낼 것을 골라내었습니다. 암염소 이백 마리, 숫염소 이십 마리, 암양 이백 마리, 숫양 이십 마리, 젖을 빨리는 낙타 삼십 마리와 딸린 새끼들, 암소 사십 마리, 황소 십 마리, 암나귀 이십 마리, 수나귀 십 마리입니다. 야곱은 이것들을 따로 한 떼씩 떼어 종들의 손에 맡기며, 앞서 가되 떼와 떼 사이에 거리를 두라고 일렀습니다. 야곱은 앞장설 종에게 이렇게 지시하였습니다. "내 형 에서가 너를 만나 '너는 누구의 종이냐? 어디로 가는 중이냐? 네가 몰고 가는 이것들은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묻거든 '이것들은 당신의 종 야곱의 것입니다. 형님 에서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야곱은 뒤에 오십니다.'"라고 대답하여라. 야곱은 둘째, 셋째, 그리고 나머지 떼를 몰고 가는 자들에게도 에서를 만나면 꼭 같은 말을 하도록 일렀습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어마어마한 분량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형에게 선물로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나니 그의 마음에 여유가 생기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고 나니 이제 도망치고, 피하고 싶은 생각보다는 형님의 마음을 풀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형님께 지난날의 잘못을 용서 받고 화해하고 싶은 생각이 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주고 싶은 생각이 들게 되었습니다. 아까운 재산, 그의 피와 땀이 어린 재산이지만 그것을 아까워하지 않고 주고 또 주고 싶은 마음이 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가복음 16장 9절에서 예수님은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우정을 위해서는 재물을 아끼지 말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처럼 “화해를 위해서도 재물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진정 화해를 위해서는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남한이 북한과 화해를 위해 주는 것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된 것입니다. 내가 아끼는 것,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주는 것을 줄 때 화해가 일어납니다. 물론 물질이 다가 아닙니다. 물질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입니다. 용서를 위해, 화해를 위해,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내 마음을 주는 것입니다. 사랑해 주고, 기도해 주고, 염려해 주고, 용서해 주고, 이해해 주는 것입니다. 북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북한에 퍼주는 것을 안 좋게 생각하고 불안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북한을 공격하여 정권을 무너뜨리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엄청난 전쟁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분들은 북한의 체제붕괴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이 갑자기 망한다면 우리에게는 엄청난 부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중국이 가만히 있지않고 북한을 자기네 땅으로 만들려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아직까지 전시작전권이 없습니다. 노무현 정부때 반환받으려 했지만 성사되지 못했고 보수적인 인사들은 우리 군대가 북한보다 약한 것처럼 하면서 결사 반대를 합니다. 참 아이러니 한 일입니다. 아무튼 이런 저런 사정을 보아서도 그리고 신앙적인 입장에서보아도 우리는 지혜롭게 북한을 도와야 합니다. 그래서 북한 동포들에게 남한사람들이 북한을 사랑한다는 것을,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라는 것을 더욱 깨닫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북한 체제 붕괴이후에도 흔들리지 않고 한 나라를 이룰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물론 이를 위해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독일의 경우처럼 교회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일산의 모 교회는 지금도 외국의 시민권을 가진 이들을 통해 북한 돕기를 지혜롭게 잘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선물을 보낼 때 에서가 어떻게 반응할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그는 형님이 마음을 풀고 반갑게 맞아 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선물을 보냈습니다. 자신이 잘못한 것을 솔직히 인정하고 그에 따른 잘못을 지려는 마음뿐이었습니다. 자기의 잘못으로 형제간의 사이가 벌어진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여 형에게 어떠한 책임도 지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회개요 화해의 첫 걸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화해를 준비하는 야곱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한반도의 남과 북, 동과 서의 반목 대립, 불화관계를 해소하고 화해할 수 있도록 형제자매끼리 부모자식끼리 그리고 성도 간에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며 살수 있도록 힘써 기도하고 노력하고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이 일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실 것입니다. 2019년 4월 28일 주일 낮 예배 설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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