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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먹이시는 공동체 박승남 2019-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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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4~44 주님이 먹이시는 공동체

 

여러분 교회를 사랑하십니까?

교회는 어떤 분에게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생활의 지혜를 배우거나 유익한 정보를 얻는 배움의 터가 됩니다. 어떤 분에게는 외로움을 달래주는 사귐의 장이 됩니다. 어떤 분에게는 험한 세상살이로부터 얻은 마음의 상처와 육신의 병을 치유 받는 힐링 센터로, 어떤 분에게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곳이, 어떤 분에게는 주님을 찬양하며 경배하는 예배 센터가 됩니다. 또한 어떤 이들에게는 위험과 곤경으로부터 자신의 몸을 피할 수 있는 피난처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를 사랑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교회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에베소서 1:23절 말씀처럼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사실을 교회를 박해하기 위해 피냄새를 맡은 전마처럼 달려가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뒤에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주님과 교회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교회를 박해했는데 예수님은 자신을 박해한다고 하셨으니 교회를 때리니 예수님이 아프다고 하시는구나. 그래서 철저히 회개한 바울(사울)은 그 때부터 그는 교회를 매우 사랑했고 또한 교회를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교회가 주님의 몸이라면 교회는 그리스도다 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는 교회가 존재합니다. 우리 아름다운교회도 역시 그분의 몸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사랑합니다.”

오늘 우리는 설립 25주년 기념주일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사실 지난 1994630일에 개척된 이래 지금까지 25년 동안 주님께서는 그 은혜로우신 손으로 우리 교회를 돌보아주셨습니다. 더 나아가 그분의 교회를 통해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해주셨습니다.

우리 교회는 그야말로 다사다난 그러니까 여러 가지 일도 많기도 했고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예배당에 불이 나기도 했고 경매로 인해 예배당을 비워주어야 하기도 했습니다. 구역장에 의해 한 구역이 빠져나기다 시피 한 적도 있었고 사랑하는 성도들이 이사, 별세, 타 교회에 출석 등으로 헤어져야 아픔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교회를 떠나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쁘고 감사한 일도 많았습니다. 화재가 났지만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성도들이 달려와 한 마음으로 쓸고 닦고 정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화재가 난 뒤에 더 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래서 위기가 기회가 되어 새로운 터전으로 이전하였습니다. 교회가 미약할 때부터 선교사님을 후원했고 자립 대상 교회를 지원하였습니다. 교회학교 어린이들이 어린이 대회에 나가 입상을 한 적도 여러 차례 있었고 300평 이상의 대지를 구하는 기도에 응답하셔서 11년전 오늘 이 터전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항존직을 세울 수 있게 하셨습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있었고 또한 우리 사랑하는 성도들의 사랑의 수고, 눈물과 땀과 기도가 있었습니다.

요즘 많이 위축된 바가 있어서 안타깝기도 합니다. 숫자적으로나 공 예배 출석으로 보나 그 열정이 식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교회는 주님이 세우신 주님의 교회라는 사실입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길 수 없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다시금 처음 사랑을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새롭게 하여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고 또한 주님의 교회도 더욱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공개적으로 교회를 사랑한다고 고백했습니다. 고전16:24절을 표준새번역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 모두를 사랑합니다. 아멘.” 당시 사람들이 교회를 비난하고 그리스도인들을 백안시 하던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이같은 교회 사랑고백은 무모한 행동이었습니다. “나는 교회를 사랑합니다.” 여러분도 이같이 교회를 사랑한다고 세상사람들을 향해 외칠 수 있나요?

 

오늘 말씀을 보면 주님이 먹이신 아름다운 공동체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때는 유월절이 가까이 온 시기로 보리와 밀이 막 익어갈 때입니다. 그 시기에 가면 노란 겨자씨꽃들이 마치 제주도 유채꽃처럼 들판마다 피어납니다. 본문에도 그 시기에 풀이 많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반면 그때는 우리로 말하면 보릿고개 같은 시기라 먹을 것이 없어 배고플 때입니다.

그때 제자들과 함께 산 위에 오르신 예수님은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찾아 산을 오르고 있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요한복음 610절을 보면 수가 5천 명쯤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 온 것은 단순히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고 기적을 행하신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고상한 이유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살고 싶어서 온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들을 특별한 눈으로 바라보셨습니다. 마치 교회를 특별한 눈으로 바라보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10313~14절을 보면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이 바로 교회의 출발점입니다. 우리는 모두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허물이 많고 약점도 많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늘 함께 하여 주십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무리들을 먹여야겠다고 생각하신 주님은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하겠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빌립은 "이 사람들에게 모두 조금씩이라도 먹게 하려면, 빵 이백 데나리온 어치를 가지고서도 충분하지 못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200데나리온을 가지고도 모자란다고 말한 것을 보면 실제적으로 이들을 먹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한 데나리온이 장정의 하루 품삯이라면 적게 잡아도 2천만원입니다. 여러분, 2천만원을 들이면서 사람들을 대접할 사람이 있습니까? 더구나 제자들에게는 엄청난 금액이었습니다. 또한 있다고 해도 대량생산하는 빵공장이나 대형마트가 있는 것도 아니니 살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빌립의 말은 100번 옳습니다. 하지만 빌립이 못 본 것은 주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시면서 얼마나 마음이 안타까웠으면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인데도 그들을 먹이시고 싶어하셨느냐는 말입니다. 주님은 40일 동안 금식하시며 기도하셨을 때 기적의 빵을 거절하셨습니다. 그리고 오직 말씀으로 살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백성들을 먹이시려고 하십니다. 주께서 말씀대로 살겠다고 하신 것은 인생의 우선권(priority)을 말하는 것이지 말씀을 위해 목석처럼 사시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굶주린 백성들에 대하여 냉담하고병든 사람들의 질병에 무관심하면서 말씀만 가르치시겠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대로 살기 위하여 사람들의 아픔을 몸소 담당하시고 그들을 위로해 주시고치료해 주시고먹여 주시고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자기에게로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서 느끼셨던 감정을 본문 34절에서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불쌍히 여기사이 단어는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팠다는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라도 먹이려고 작정하신 것이지요! 복음서에 이 단어만 나오면 그 뒤에는 반드시 기적이 일어납니다(6:34; 7:13). 2천만 원이 들더라도아니 그보다 돈이 더 많이 들더라도 기어코 먹여야겠다고 생각하신 것은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한 대단한 사랑입니다. 사랑의 윤기가 흐르는 마음이 마음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고 그 은혜 안에서 사는 것이 아닙니까? 주님은 1998년에 저에게도 이러한 마음을 주셔서 화재난 울진의 감리교회에 60만원을 보내도록 하셨고 그로 인해 50배의 기적을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드리는 교회, 주님의 비전, 주님의 꿈이 무엇인지, 주님이 원하시고 이루시려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행하는 교회, 그리고 주님의 뜨거운 사랑을 깊이 체험하고 그 사랑으로 살아가는 교회, 참으로 복된 교회입니다. 지난 주오후 에도 말씀드렸지만 주님의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자격이 있고 매력이 있고 잘 나고 뭔가 도움이 될 것 같고 내 마음에 들고 나랑 친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허물과 약점이 있지만, 문제가 있지만 더 나아가 나를 싫어하고 나에게 함부로 대하고 나를 괴롭히고 나를 속상하기 만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44~47절을 보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3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34~2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예수께서 이들을 먹이라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빌립이 어리벙벙 하여 있는 동안에 안드레(6:8)는 벌써 가서 아이가 가져온 도시락을 주님 앞에 내놓았습니다. 그것은 보리로 만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마리였습니다. 보리로 만든 빵은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음식입니다. 그리고 물고기는 아주 작은 물고기를 가리키는 옵사리온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옵사리온이라는 물고기는 조미료로 소금을 치고 말린 것으로 멸치처럼 작은 물고기를 말하는데 빵과 함께 먹는 음식으로 우리로 말하면 반찬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가난한 집의 음식입니까? 이 음식 한가지만으로도 그 시대가 얼마나 가난했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또 그 시대가 얼마나 가난했으면 5천 명이 넘는 남자들 가운데 음식을 내어 놓은 사람이 이 아이 한 명이라는 말입니까?

 

떡에 마련되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명하여, 모두들 떼를 지어 푸른 풀밭에 앉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40절을 보면 떼로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 앉은지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914절을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떼를 지어 한 오십 명씩 앉히라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떼를 지어 앉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기서 공동체를 볼 수 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영적인 공동체를 형성하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50100명이면 서로의 삶을 나누고 서로가 이야기를 하고 들을 수 있는 숫자입니다. 우리 교회의 사이즈입니다. 만일 그냥 그 많은 사람들을 줄을 세우셨다면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떼를 지어 앉게 하심으로 질서를 세우셨고 서로 얼굴을 마주 대하고 오손도순 대화를 나누면서 함께 맛있게 먹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34절과 같이 처음에 이들은 무리였습니다. 무리는 그야말로 오합지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들을 떼를 지어 앉게 하셨습니다. 우리 생각으론 별 의미가 없어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보면 이 라는 말을 3가지 단어로 사용했습니다. 우선 1)마가복음 639절을 보면 쉼포시온으로 이함께 음료수를 마시다는 뜻으로 일반적으로 잔치를 할 때 식탁에 앉는 것을 가리킵니다. 비록 광야지만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만찬을 하신다는 그런 감정이 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2)마가복음 640절을 보면 프라시아정원의 화단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제자들이 볼 때 마치 화단에 꽃들이 정렬된 것 처 럼 빨강노랑파랑 색깔들로 아름답게 보였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3)누가복음 914절을 보면 클리시아로 기댄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식사할 때 서로 기대어서 먹거든요.

그런데 사실 그곳은 정원화단도 아닙니다. 연회나 만찬장도 아닙니다. 더구나 거기서 무슨 만찬을 하듯이 서로 기대어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의 옷은 거의 다 비슷한 옷이라 오늘처럼 알록달록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러한 단어를 사용한 것은 무슨 뜻일까요? 거기 복음서 저자들의 시선이 그리고 나아가 주님의 마음을 담은 것이 아닐까요?

주님은 주님은 오합지졸인 무리들을 귀하게 여기시어 정원 화단에서 연회를 베풀어 주시고 서로 만찬자리처럼 서로 기대어 먹을 수 있게 하시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 이것이 주님이 먹여주신 공동체입니다. 비록 주님의 떡을 받는 무리들이 힘이 없고 작고 연약한 자리도 매우 소중히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를 서로 소중히 여기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서로 얼굴을 보고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고 서로 즐거운 시간을 지내도록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주님 주시는 생명의 떡과 음료를 먹고 마시는 연회장의 사람들니다. 샤론의 꽃 되시는 주님의 정원에서 자라는 아름다운 꽃들입니다. 서로 성격이 다르고 학력과 가진 것과 사회적인 지위가 다르다 해도 모두가 아름답게 보여지는 정원의 꽃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주님 보시기에 말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보십니까? 여러분 우리 모두 다 단점, 허물, 약점들이 있지만 그러나 주님 보시기에 좋은 점들, 칭찬하고 싶어하시는 것들, 기뻐하시는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들을 더 크게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아름다운 성도들의 정원으로 볼 수 있고 그렇다면 서로 사랑하고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만찬장의 귀한 사람들로 서로 기대고 대화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공동체입니다. 결국 주님의 교회는 기쁜 곳, 즐거운 곳, 웃음이 넘치는 공동체입니다. 사랑과 희망과 평화가 아름답게 피어나는 공동체입니다. 주님 주시는 풍성한 양식을 먹고 배부르며 만족해 하는 공동체입니다. 서로 기대 수 있고 서로 의지하고 기쁨과 슬픔, 어려움을 함께 하는 공동체입니다. 우리 교회는 그러한 공동체입니다. 아니라면 무엇이 문제인가요?

여러분 교회는 서로 기댈 수 있는 공동체 즉 버팀목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 버팀목 사명을 고취시켜 주었습니다. 살전 5:14절을 보면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인정이 메마른 거친 세상 속에서 우리 교회가 꼭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살이에 지쳐 홀로 설 수 없어 쓰러지는 사람들에게 버팀목이 되어 저들을 일으켜 세워주어야 합니다.

또한 주님께서 빵을 먹이시면서 교훈하신 것은 너희는 내가 주는 빵만 먹으려 하지 말고나를 먹으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먹으라는 말은 단순히 빵을 요구하고 왕으로 삼아 잘살려고 하지 말고 빵이신 주님 자신을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먹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자녀들입니다. 주님을 먹고 주님처럼 되어야 세상을 윤기 있고 행복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주님은 기도하시고 앉은 자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 주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이 한 사람도 예외없이 다 먹었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이냐고요? 그것은 먹고 남은 것을 다 거두었을 때 열두 바구니가 가득 찼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누구는 먹고 누구는 먹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억측을 성경은 잘라말합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 성도 여러분 모두 풍성한 주님의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생명의 양식, 음료를 먹고 마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생명의 양식입니다. 주님이 생명의 음료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또한 그러합니다. 그리고 지치고 피곤한 세상, 짜증나고 속상한 일이 많은 세상을 살아가는 여러분 마리아처럼 주님의 발치에 앉으십시오. 말씀을 가까이 하십시오. 주님은 설교를 통해서, 말씀 묵상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을 먹여 주시고 채워주십니다. 그리고 힘을 얻게 하시고 주신 사명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주님이 먹여주시는 신령한 양식과 음료로 기뻐하며 건강하게 움직이는 공동체, 참으로 아름답고 복됩니다.

 

여러분 먹고 남은 것이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찼습니다. 이처럼 살다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을 아시고 우리가 기대하지 않았는데도 채워 주실 때가 많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어떠한 기관입니까? 에베소서 123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충만이라는 명사는 채운다는 뜻을 가진 플에루 이란 동사에서 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충만입니다. 자신의 몸인 교회의 충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충만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질 때 이 세상을 충만하게 채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은혜와 사랑과 소망과 평안과 기쁨과 감사로 충만하게 하십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십니다. 아름다운 열매로 충만하게 하십니다. 히브리인들의 생각은 이스라엘의 충만은 온 세계의 충만, 이스라엘의 복은 온 세상의 복이다.(8:13, 3:8)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39절을 보면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다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흙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그 위에 활동하시면 모든 좋은 것들을 자라게 할 수 있는 풍요로운 땅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주님의 비전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바르게 서면, 교회가 건강하면 세상이 바르게 되고 세상이 건강하게 됩니다. 선한 기운이 퍼지고 생명이 약동하고 평화의 꽃이 활짝 피게 됩니다.

여러분 교회 ‘church’ 란 용어의 유래를 아십니까?

church 라는 말이 고대 스코틀랜드어 ‘kirk’ 에서 비롯 되었습니다. 그 의미는 ‘circle’ 동그라미’ ‘입니다. 그 이유는 교회란 결코 모가 나지 않으신 예수님을 닮아 circle 동그라미 어야 하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교회. 세상을 향해 문이 활짝 열려져 있는 교회. 그래서 누구나 서로 연결되고, 서로 부족함을 채워주고, 서로 쓰러지지 않게 버팀목이 되어주는 교회. “동그라미 교회” “Circle Church” 이제 25년을 넘어 3050년을 내다보며 우리 교회가 이런 아름다운 교회가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소원을 품어봅니다.

 

주님은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누군가도 아셨습니다. 그들의 속셈을 아시고 그들의 생활도 아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아시는 대로 행동하지 않으시고그들을 감싸 주시고, 사랑하시고치료해 주시고구원해 주셨습니다. 이 마음은 질서와 법을 파괴하는 게 아니라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는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 안에서만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가정과 사회가 형성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인간은 행복하고 복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앞으로 우리는 이제 30, 50년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저는 길어야 35주년까지 있을 수 있겠지만 여러분들은 그 이상을 보아야 할 분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교회가 주님이 더욱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도록 오늘 주님이 먹이신 공동체를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런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마음을 품고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진정 아름다운 교회가 될 것입니다.                           2019630일 교회설립 25주년 기념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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