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추절에 입은 은혜 | 박승남 | 2019-07-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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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룻기2:8-20절 개역개정8.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9. 그들이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이 길어 온 것을 마실지니라 하는지라 10. 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하니 11.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 12.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13. 룻이 이르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하녀 중의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하니라 14. 식사할 때에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으라 하므로 룻이 곡식 베는 자 곁에 앉으니 그가 볶은 곡식을 주매 룻이 배불리 먹고 남았더라 15. 룻이 이삭을 주우러 일어날 때에 보아스가 자기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그에게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며 16. 또 그를 위하여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에게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 하니라 17. 룻이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그 주운 것을 떠니 보리가 한 에바쯤 되는지라 18. 그것을 가지고 성읍에 들어가서 시어머니에게 그 주운 것을 보이고 그가 배불리 먹고 남긴 것을 내어 시어머니에게 드리매 19. 시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 너를 돌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 하니 룻이 누구에게서 일했는지를 시어머니에게 알게 하여 이르되 오늘 일하게 한 사람의 이름은 보아스니이다 하는지라 20. 나오미가 자기 며느리에게 이르되 그가 여호와로부터 복 받기를 원하노라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하고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와 가까우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이니라 하니라 룻2:8~20 맥추절에 입은 은혜 나오미가 모압에서 얻은 며느리 룻을 데리고 베들레헴까지 왔을 때 온 동네가 떠들썩했습니다. 남편과 두 아들과 같이 갔다가 남자들은 다 잃어버리고 며느리와 함께 두 여자가 왔으니 수군수군 거리는 사람들도 있었을 수 있고 그래도 오랫동안 못 보던 나오미가 돌아왔으니 매우 반가워서 기뻐하며 환영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동네 사람들의 환영이 반갑지만 않았습니다. 자신의 기분이 우울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가 뭐라 한 것도 아닌데 자신의 이름을 이제부터는 ‘즐거운’이란 뜻의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괴로운, 쓴이라는 뜻의 마라라 하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전능한 자가 자기를 심히 괴롭게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옆에서 이러한 말을 들어야 하는 며느리 룻은 얼마나 마음이 괴로웠겠습니까? 자신의 모습이 더욱 초라해 지고 부끄러웠을지도 모릅니다. 또한 이방여인인 자신에 대해서 사람들이 어떻게 바라보았겠습니까?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이라는 존재는 말로 할 수 없이 천대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자꾸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이제 내일에 대한 보장이 전혀 없는 가운데먹고 살아가야 일이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룻은 자신을 물론 시어머니까지 책임을 져야할 입장이 되었습니다. 혹이 하나 달린 것입니다. 그래서 자칫하면 이러한 상황 속에서는 주눅이 들어 사람 만나기가 싫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괜스레 왜 시어머니를 따라왔는지 후회가 되기도 하고 시어머니가 미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룻에게서 그늘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물론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은 있지만 그의 삶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알 수 있습니다. 두 여인이 모압에서 돌아온 때가 바로 보리를 수확하는 때 즉 맥추절 때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맥추절기에 룻기는 어떠한 그림은 보여주는가요? 이미 말씀드렸듯이 나오미와 룻에게는 매우 힘든 시절입니다. 그리고 룻은 더욱이 태어나서 처음 와본 이국 땅 낮선 곳에서 고달픈 생활을 해야 할 때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때에 어떠한 삶을 살게 되었나요? 이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2장에 나오는 단어들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2장 2절과 10절과 13절과 20절에 은혜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리고 4절과 19절과 20절에 바라크 즉 복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4:14절에는 이 복이라는 단어가 찬송이라는 단어로 번역됩니다. 또한 10절과 19절에 돌봄이라는 단어가 나오고 12절에는 보답이라는 단어와 보호와 보상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13절에는 위로, 마음을 기쁘게 14절에는 배불리 먹고 남았다는 말도 나옵니다. 이러한 단어들을 통해서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매우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어려운 시대, 힘들과 지치기 쉬운 시절을 보내고 있던 룻기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릅답고 정겹고 사랑스러운 그림을 보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을 한 단어로 하면 은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이러한 은혜를 경험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은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을 통한 은혜, 사람들 사이에 베풀어 지는 은혜입니다. 그리고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결국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자 그러면 먼저 사람들이 베푸는 은혜를 보겠습니다. 2장 2절을 보면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라고 합니다. 즉 누군가에게 은혜를 입기 원하는 것입니다. 여기 은혜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헨인데 그 뜻은 자비함, 호의, 은총, 은혜, 아름다운, 즐거운, 사랑스러운 등 여러 가지 좋은 뜻이 들어 있는 단어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사람들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호의가 필요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이 아름답고 즐겁고 사랑스럽게 됩니다. 우리는 제일 먼저 부모님의 은혜를 입게 됩니다. 가장 불행한 사람은 부모님의 사랑과 은혜를 입지 못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스승의 은혜를 입게 됩니다. 그 외에 우리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입기 원합니다. 그래서 주님께 기도할 때에 하나님 은혜 베풀어 주옵소서. 그리고 사람들에게도 은혜를 입게 하여 주웁소서. 라고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물론 나 자신이 누군가에게 은혜와 호의를 베풀어주는 사람이 되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자 그러면 이렇게 은혜를 입기 원하는 마음으로 나간 룻은 어떻게 되었나요? 10절을 보십시오. 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여기 그는 보아스입니다. 은혜 입기 원했던 룻은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이른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우연히 보아스가 그 시간에 밭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룻을 보고 호의를 베풀어 준 것입니다. 그것이 8~9절에 나옵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그들이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이 길어 온 것을 마실지니라 하는지라 보아스도 시어머니 나오미처럼 룻을 부를 때 "내 딸아!"하고 부렀습니다. 이는 룻을 모압 사람이 아니고, 베들레헴 사람으로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보아스는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고 말합니다. 보아스는 나오미의 며느리를 만나고 무척 반가웠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인으로서 자기 밭에서 이삭을 주우라고 특별 허락합니다. 보아스는 젊은 나오미의 며느리를 만나자 아버지의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이삭 줍는 사람들은 여러 밭을 거쳐야 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이삭줍는 사람들이 많았고 또 한 밭에서 주워봤자 얼마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루 종일 주워도 하루 끼니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디든지 이삭을 주울 수 있다면 다리품을 팔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보아스는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것입니다.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여기 있으라는 말은 룻기 1:14절에 나오는 붙좇았더라는 말과 같은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로 다바크인데 착 달라붙다, 들러붙다는 말입니다. 룻이 시어머니에게 찰싹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상태를(1:14) 말한 것인데 보아스가 룻에게 자신의 소녀들과 함께 달라붙으라고 한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소녀들과 똑 같은 대우를 하겠다는 뜻으로 이제 룻은 떠돌이 이삭줍기에서 즉 비정규직에서 고정된 직장에 취직한 정규직이 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리고 보아스는 룻에게 '그들이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고 한다. 그래서 이제 룻은 홀로 이삭줍기를 하던 입장에서 추수꾼의 대열에 끼게 되었으니 외롭지가 않게 된 것입니다. 더 나아가 보아스는 소년들에게 명령한다. "룻을 건드리지 말라." 여기서 '건드린다'는 단어는 '만지다,' '상처를 입히다,' '귀찮게 굴다,' '희롱하다'의 뜻이다. 그 당시에 이삭줍기하는 여인들의 안전에 문제가 있다는 의미이다. 룻은 유대 민족이 멸시하는 이방 여인이라 그를 보호하는 남자도 없다고 하면 위험합니다. 룻은 보아스의 말을 듣고 내심 놀랐을 것입니다. 이삭줍기가 만만한 일이 아니구나! 그런데 보아스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딸의 보호자로 그 안전을 보장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보아스는 룻에게 이삭줍기와 안전, 두 가지를 해결해 줍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마치 "아빠! 아버지!"처럼 후견인이나, 보호자로 행동하고 있는데 이것이 "내 딸아!"하는 보아스의 아버지 마음입니다. 그리고 보아스는 룻에게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이 길어 온 것을 마실지니라" 고 합니다. 룻은 보아스를 만나자 기대 이상의 은혜가 계속 받게 됩니다. 보아스는 자상하고, 사회적 약자에게 친절하고 따뜻한 배려를 아끼지 않습니다. 룻은 하루 종일 목이 말라도 그녀에게 물주는 사람이 없었을 텐데 이런 룻의 마음, 그 필요를 헤아려 세심하게 배려해 줍니다. 보아스는 룻이 이방 여인이라고 차별하거나 무시하거나 함부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보아스는 일반적인 [의무]를 넘어, 아버지처럼 처신합니다. [유력]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약자]를 위해 헌신, 충성, 봉사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힘 있는 사람이 세도를 부리고, 군림하고, 억압하고, 심지어 빼앗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마20:26-28)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섬기는 사람, 호의를 베풀는 사람, 도와주는 사람, 은혜를 베풀어 주는 사람, 받은 사랑을 나누어 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20절을 보십시오. 이러한 이야기를 다 듣게 된 시어머니 나오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오미가 자기 며느리에게 이르되 그가 여호와로부터 복 받기를 원하노라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여러분 여기 은혜라는 단어는 헨이 아니라 헤세드라는 단어입니다. 나오미는 보아스가 베푼 헨을 헤세드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매우 많이 나오는 헤세드라는 단어의 뜻은 인자함, 경건, 아름다운, 은총, 선행, 친절, 인애, 자비, 연민 등입니다. 헨이나 헤세드나 비슷한 뜻이긴 하지만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 “헤세드”의 사랑은 크게 세 가지 용례를 갖고 있습니다: 첫째,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 둘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사랑. 셋째, 이웃을 향한 우리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나오미는 세 번째 헤세드를 보아스에게서 본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헤세드가 보아스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3:10절을 보면 보아스가 룻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보아스는 룻에세 인애를 베풀었다고 하는 것인데 여기 인애라는 단어도 역시 헤세드입니다. 그러면 룻이 베푼 헤세드는 무엇인가요? 무엇보다 룻은 자기 고향, 자기 고국에 남아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가서 새로운 길을 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어머니를 따라 낮선 타국 이스라엘까지 왔습니다. 하지만 생활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루 종일 이삭을 주워 생계를 유지하고 시어머니를 봉양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힘도 들고 무슨 봉변을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때 룻은 시댁이 섬기는 야훼 하나님에 대해 “하나님을 경외하던 이 가정이 왜 풍비박산이 났을까? 하나님께서는 어렵고 힘든 우리의 삶을 왜 돌아봐 주지 않으시나?”라고 의문을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망하여 자신의 고향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었습니다. 삶을 체념하며 주저앉지도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룻은 은혜를 기대하면서 밭으로 나가 열심히 수고하였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보아스를 만나 헨과 헤세드의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실히 시어머니 나오미를 돌보았는데 심지어 일하는 동안 먹다 남은 음식까지도 챙겨서 나오미에게 가져다 주었습니다(룻 2:18). 또한 죽은 남편의 가문을 잇기 위해 기업 무를 자인 보아스가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결혼했습니다(룻 3:10). 룻은 자신의 민족과 고향을 떠나 청춘까지 바쳐서 나오미에게 ‘헤세드’를 베푼 것입니다. 그리고 보아스는 이것을 인정하고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라고 까지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룻과 보아스가 베푼 ‘헤세드’는 본래 하나님께 쓰이는 단어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룻과 보아스에게 쓰여진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룻과 보아스의 ‘헤세드’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룻과 보아스의 ‘헤세드’를 통해서 하나님의 ‘헤세드’가 온 인류에게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룻과 보아스에게 ‘헤세드’를 베풀었고, 그들을 통하여 다윗 왕국이 탄생했으며 다윗 왕국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고 예수님으로 인해 온 인류가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헤세드’를 통해 개인이 구원을 받고, 가정이 축복을 받으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본문에는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은 헤세드가 없는 것일까요? 1:8절을 보십시오.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아사)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헤세드)대 하시기를 원하며 여기 너희를 선대 하시기를 원한다 할 때 선이라는 말이 헤세드입니다.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하나님의 헤세드를 빈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헤세드를 받은 사람은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고 베들레헴까지 온 룻입니다. 다시 말해서 룻기에서 룻이 입게 된 보아스의 은혜는 바로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입니다.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세밀하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앞 부분에서 룻이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가고 우연히 보아스가 바로 그 때 밭으로 나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으로서는 우연한 일이었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2장 4절을 보면 마침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말의 원어의 뜻은 보라!, 자! 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저기 봐, 보아스다.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온다." 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연하게 룻이 보아스 밭에 이르러서 이삭을 줍고 있었는데 보아스가 오고 있으니 보아스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오늘 우리에게는 룻을 위해 보아스를 인도하신 하나님을 보라! 라는 뜻으로 들려지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착한 룻의 발걸음을 인도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보아스의 발길도 인도해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들의 발걸음을 인도해 주십니다. 때를 따라 돕는 사람을 보내 주시고 붙여 주십니다. 호의와 친절을 받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발길은 인도하셔서 다른 사람을 돕도록 하십니다. 룻이 맥추절에 입은 하나님의 은혜는 안전과 보호의 은혜입니다. 룻은 낯설고 물 설은 곳에 와서 보리를 주우러 간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잘 몰랐고 사람을 잘못만나면 희롱을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룻의 발길은 보아스의 밭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보아스를 통해 안전과 보호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내게 은총을 베풀어 주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 삶을 책임져 주시고 나를 안전하게 보호해 주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살아가면서 때로는 견디기 어려운 역경과 시련에 부딪힐 때가 있습니다. 고민하고 갈등하고 괴롭고 힘들어하고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불안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이들을 품어 주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보십시오. 믿음의 사람 다윗은 고백했습니다. 시34:4~7절을 보면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 여러분 다윗은 많은 불안과 두려움 속에 지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 모든 두려움, 불안을 내어 쫒고 미래를 향하여 뚜벅 뚜벅 걸어갔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외칩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34:8) 룻은 보리와 밀 추수가 끝나기까지 보아스에 의해서 은총을 입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곧 우리가 받을 은총입니다. 질병과 재난과 사고와 염려와 근심이 쉬지 않는 세상,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한 시대에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안전과 보호의 은총이 충만하시길 축복합니다. 룻이 맥추절에 입은 하나님의 은혜는 위로의 복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룻이 이르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하녀 중의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룻은 보아스로부터 물질적, 육체적인 도움만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귀한 것은 보아스를 통해서 마음이 위로를 받았고 기쁨을 얻었습니다. 여러분 은총은 물질 이상의 도움입니다. 룻이 맥추절에 입은 하나님의 은혜는 채움의 복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식사할 때에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으라 하므로 룻이 곡식 베는 자 곁에 앉으니 그가 볶은 곡식을 주매 룻이 배불리 먹고 남았더라 배불리 먹고 남았습니다. 마치 오병이어의 기적 때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의 그녀의 배를 채워주셨습니다. 물론 룻을 통해 나오미의 배도 채워졌습니다. 그리고 3:15절을 보십시오. 보아스가 이르되 네 겉옷을 가져다가 그것을 펴서 잡으라 하매 그것을 펴서 잡으니 보리를 여섯 번 되어 룻에게 지워 주고 성읍으로 들어가니라 룻이 집으로 돌아올 때 보아스가 겉옷에 곡식을 가득 담아 준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이것은 단순히 곡식으로 채워진 것만이 아니라 그의 텅 빈 가슴이 가득하게 채워진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한 말입니다. 그가 내게 이 보리를 여섯 번 되어 주며 이르기를 빈 손으로 네 시어머니에게 가지 말라 하더이다 보아스가 가득 채워준 것은 하나님께서 보아스를 통해 풍성하게 안겨준 은혜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오미와 룻은 텅 빈 가슴으로 베들레헴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빈 손이 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4장 16절을 보면 나오미가 아기를 받아 품에 품게 됩니다. 나오미 가슴에 자식까지 안겨준 것입니다. 텅 빈 가슴이 아기로 채워진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아들이 태어났다는 것은 모든 것이 채워졌다는 것입니다. 이건 나오미의 가슴만 채워진 것이 아니라 룻의 텅 빈 가슴까지도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하게 채워졌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아이에게서 다윗이 나오잖아요. 그리고 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들레헴에 탄생하시잖아요. 여러분 룻의 후손 중에 누가 있습니까? 네, 바로 다윗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진정 그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텅 빈 인생의 가슴을 가득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시간 텅 빈 가슴으로 이 자리에 계신 분이 있습니까?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의 가슴을 가득 채워주십니다. 사랑으로 채워주시고 은혜로 채워주십니다. 말씀으로 채워주시고 성령으로 채워주십니다. 그리고 사명으로 채워주십니다. 매우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가장 귀한 은총은 고엘(속량)의 은총입니다. 룻기 2장 20절 하반 절에 그 사람은 우리와 가까우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기업 무를 자는 고엘 이라는 말로 이는 '되찾다', '무르다', '구속하다'의 뜻입니다. 고엘 제도는 하나님께로부터 할당받은 기업을 영구히 보존하고, 혈족을 유지하며, 그리고 부당한 피해를 당했을 때 이를 보상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기 위한 목적으로 생겨났습니다. 이 제도는 자식이 없이 죽은 사람의 미망인을 그 사망자의 친척이 취하여 자식을 낳아 계대(繼代)시켜 줌에 대하여 사용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보아스는 모압 여인 룻을 아내로 맞아들여 그 죽은 자의 기업을 잇게 하였습니다(4:9-10). 이후 보아스는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음으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世系)가 출현하게 되었습니다(룻4:21-22, 마1:5). 그런데 보아스는 우리의 속량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요, 표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이방 여인이요, 과부로서 가진 것도 없고 연약한 룻은 곧 하나님 앞에 아무 의로움이 없고 걸레조각 같은 우리의 존재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오직 주님이 우리를 속량하실 때 거기에 안전과 보호와 위로와 채움의 복이 있고,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속량하신 주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도 회복의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맥추절을 맞이하여 여러분이 잃어버린 그 어떤 것이든지, 건강과 물질, 인간관계와 기타 등등 잃어버렸던 것들을 다시 회복하는 은총을 입으시기를 바랍니다. 채워주시는 은혜를 경험하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구원의 은총을 새롭게 하십시오. 그리고 그 은혜, 그 사랑을 힘입어 보아스와 룻처럼 다른 이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말과 물질과 행동으로 전해주시기를 축복합니다. 2019.7.7일 맥추감사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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