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낮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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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 박승남 2019-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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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창세기33:12-20절 개역개정

12. 에서가 이르되 우리가 떠나자 내가 너와 동행하리라

13.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도 아시거니와 자식들은 연약하고 내게 있는 양 떼와 소가 새끼를 데리고 있은즉 하루만 지나치게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

14. 청하건대 내 주는 종보다 앞서 가소서 나는 앞에 가는 가축과 자식들의 걸음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

15. 에서가 이르되 내가 내 종 몇 사람을 네게 머물게 하리라 야곱이 이르되 어찌하여 그리하리이까 나로 내 주께 은혜를 얻게 하소서 하매

16. 이 날에 에서는 세일로 돌아가고

17.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그의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으므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18.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읍에 이르러 그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

19. 그가 장막을 친 밭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백 크시타에 샀으며

20.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더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33:12~20 동행

 

주일 낮 설교로 526일 주일에 이어 다시금 창세기로 돌아왔습니다. 창세기 33장에서 우리는 야곱과 에서 두 형제의 감격스러운 상봉장면을 보았습니다. 얍복강가에서 그토록 간절하게 기도하여 응답받은 야곱은 제일 뒷자리에서 제일 앞자리로 옮겨 앞장섰습니다. 그리고는 마치 하나님을 대하듯이 매우 정중하게 형에게 7번씩이나 절하며 형에게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형은 그러한 동생에게 달려와서 두 팔을 벌려, 목을 끌어안고서 입을 맞추고 울어버렸습니다. 물론 야곱도 울었습니다. 이렇게 하므로 스무 해 이상 묵었던 둘 사이의 불화관계는 순식간에 깨끗이 청산되어졌고 그동안 야곱을 짓누르던 두려움과 근심 걱정이 일시에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들은 미워할 필요도 두려워할 필요도 싸울 필요도 없었습니다. 야곱이 자기를 그처럼 뜨겁게 맞이해 주는 형의 얼굴을 보니 마치 하나님 얼굴 같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이러한 형을 그처럼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에서는 야곱에게 내가 오는 길에 만난 가축 떼는 모두 웬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야곱은 형을 형님께 은혜를 입고 싶어서, 가지고 온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여기 은혜는 지난 주 말씀드린 입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은혜, 호의를 베풀었는데 야곱은 에서에게 은혜를 입고 싶다고 한 것입니다. 10절에도 은혜를 말합니다. 내가 형님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사오면 (형님께서 저를 이렇게 너그럽게 맞아 주시니)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도 필요하지만 사람들의 은혜도 필요합니다. 은혜에는 즐거운, 아름다운 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진정 서로 간에 은혜, 호의를 베풀고, 너그럽게 대할 때 우리의 삶의 즐겁고 아름답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서는 "아우야, 나는 넉넉하다. 너의 것은 네가 가져라."고 합니다. 그러자 야곱은 형님께서 저를 좋게 보시면, 제가 드리는 이 선물을 받아 주십시오 고 합니다. 에서나 야곱이나 모두 물질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형제 사랑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형제간에, 가족간에, 성도 간에도 물질 때문에 틀어지고 이런 저런 문제가 생깁니다. 사람보다 물질이 더 소중하기 때문에 미워하고 배신하고 약속을 어기고 다투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사랑하면 물질을 받지 않아도 됩니다. 또한 기쁨으로 물질을 주기도 합니다. 만일 야곱이 안 주고 싶은데 억지로, 어쩔 수 없어서 주었다면 그것은 뇌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용서를 받고 난 야곱에게는 그 물질이 뇌물이 아니라 자원해서 드리는????감사 헌금????처럼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드리는 여러 헌금들은 억지로 하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억지로나, 인색함으로 드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또 헌금을 하지 않으면 어떤 저주를 받을까봐 두려운 마음으로 해서도 안 됩니다. 다만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감격해서 자신이 가진 것 모두를 드리고 싶은 마음으로 헌금해야 합니다. 고린도 후서 8장을 보면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이렇게 밝힙니다. 마케도니아 여러 교회는 큰 환난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기쁨이 넘치고, 극심한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넉넉한 마음으로 연보하였습니다. 그들은, 힘이 닿는 대로 구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힘에 지나도록 자원해서 하였습니다. 그들은, 성도들을 구제하는 특전에 동참하게 해 달라고, 우리에게 간절히 청하였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기대한 이상으로, 먼저 자기를 주님께 드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바쳤습니다.

 

이런 만남 후에 에서가 야곱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떠나자 내가 너와 동행하리라."

동행! 이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인디언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빨리 가려거든 혼자 가라. 멀리 가려거든 함께 가라.

빨리 가려거든 직선으로 가라. 멀리 가려거든 곡선으로 가라.

외나무가 되려거든 혼자 서라. 푸른 숲이 되려거든 함께 서라

진정 삶의 지혜가 깊이 배여 있는 말입니다. 인생 길은 먼 길입니다. 이 길을 홀로 걷는다는 것은 너무도 힘들고 어렵습니다. 이 길을 부부가 같이 걷고 가족이 함께 걸어갑니다. 하지만 이런 저런 사정으로 부부나 가족이 함께 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때 우리 우리 성도들은 서로 격려, 위로하며 함께 인생 길, 순례의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에서는 야곱에게 형제가 만나 화해하고 모든 앙금을 다 풀었으니 함께 가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함께 살자는 말이기도 할 것입니다. 참으로 에서는 뒤 끝이 없는 단순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요청에 야곱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그래요. 우리 함께 가요 라고 말했나요? 아닙니다. 동행 요청을 들은 야곱은 이렇게 말합니다.

"형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아이들이 아직 어립니다. , 저는 새끼 딸린 양 떼와 소 떼를 돌봐야 합니다. 하루만이라도 지나치게 빨리 몰고 가면, 다 죽습니다. 형님께서는 이 아우보다 앞서서 떠나십시오. 그렇게 하시면, 저는 앞에 가는 이 가축 떼와 아이들을 이끌고, 그들의 걸음에 맞추어 천천히 세일로 가서, 형님께 나가겠습니다."

 

정중하게 형의 제안을 거절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야곱의 일행은 오랜 행군을 해왔습니다. 단순한 이동이나 행군이 아니라 쫓기는 행군이었고, - 처음에는 라반이 쫓아왔습니다. - 앞에는 보복 자가 복수하기 위해서 기다리는 것을 알면서도 가야만 하는 부담스러운 행군이었습니다. 그런데 에서와 얼싸 안음으로 해서 그런 위기가 모두 사라졌습니다. 극도로 긴장했다가 그 긴장이 모두 풀어졌습니다. 그때 엄습해 오는 피로감은 감당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니 야곱은 지금 급하게 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천천히 충분한 휴식을 취하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단지 이러한 이유 때문에만 형의 제안을 거절한 것일까요? 계속해서 보면 그는 에서의 두 번째 제안도 거절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에서가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나의 부하 몇을 너와 같이 가게 하겠다.”

함께 가지 못하면, 내 군사를 몇 사람 남겨 놓아, 그들이 호위하며 보호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러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형님께서 저를 너그럽게 맞아 주신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자 그러면 왜 야곱은 형 에서의 이러한 친절을 거절하였을까요? 14절을 보면 분명히 야곱이 "가축과 자식들의 걸음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정말 야곱에 세일로 나아갔습니까? 아닙니다. 그 후에 야곱의 행보를 보면 세일로 갔다는 말이 없습니다. 16절과 17절을 보십시오. 이 날에 에서는 세일로 돌아갔고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라고 했습니다. 숙곳에서 살 집도 짓고, 짐승이 바람을 피할 우리도 지었습니다. 아마 거기서 여러 해 이상을 살았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리고 이어서 간 곳이 세겜이라는 곳이었습니다.

결국 야곱은 형을 속인 격이 됩니다. 형 뒤를 천천히 좇아가겠다고 해놓고,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헤어진 것입니다. 물론 서로 왕래는 하고, 소식은 전하면서 살았겠지요. 아버지 이삭이 나이가 들어서, 별세하자 에서와 야곱이 함께 장례를 치르기도 했습니다.(35:29) 그러나 함께 살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비단 어린 자식들, 가축들 때문에 같이 못간 것입니까? 결국 이는 야곱은 형 에서와 같이 가지 않기 위해 둘러댄 말처럼 생각 들어집니다. 그러면 왜 야곱은 형과 같이 가지 않았을까요? 형과 동행을 사양한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부부는 같은 삶의 목적을 가지고 한 목표를 바라보면서 함께 인생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함께 걷기 위해서는 단지 육체적으로만 좋아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사랑은 언제 깨어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권태기가 있고 그렇게 죽자 살자 하던 사이도 그렇게 오래가지 못하는 것을 왕왕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두 사람의 인생관, 가치관 그리고 신앙관이 같아야 합니다. 물론 이것이 처음부터 맞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서로 이것을 맞추어 갈 때 기쁨으로 함께 인생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 집에 같이 살지라도 행복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부부가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인생 길에 동행하려면 세 가지 조건이 일치되어야 합니다. 첫째는 방향이 같아야 합니다. 둘째는 속도가 같아야 합니다.

셋째는 마음이 맞고 뜻이 같아야 합니다. 아모스 33절을 보면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 라고 말씀합니다. 공동번역을 보면 두 사람이 길을 같이 간다면, 미리 약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약속을 한다는 것은 서로 간의 마음이 맞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야곱과 에서는 이 세 가지 조건이 다 맞지 않았습니다. 야곱과 에서는 비록 한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온 쌍둥이 형제였지만 저들의 목적지, 방향이 틀렸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의 목적지는 형이 있는 세일이 아니라 세겜이요, 벧엘이요, 나아가 아버지가 계신 헤브론이었습니다. 방향뿐만 아니라 속도도 맞지 않았습니다. 에서는 씩씩한 사나이라 힘차게 달려야 시원합니다. 그러나 야곱과 그 일행은 빨리 달릴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서로 관점이 다르고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마음을 맞출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20년 만에 극적으로 만나 화해하고 눈물로 서로 얼싸안았지만 결코 동행할 수 없는 그런 사이였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함께 간다는 것은 어쩌면 불행이 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좋은 감정을 상하게 할 수 있고 다시 원수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함께 가고, 같이 사는 것이 좋은 일이지만 그것은 이상일 뿐입니다.

창세기 12장을 보면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데리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버지 없는 조카를 먹이고, 입히고, 길렀습니다. 그런데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헤어져야 했습니다. 둘이서는 괜찮았지만, 그들의 소유가 많아지고 딸린 식구들이 늘어나자 그들의 종들이 싸웠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함께 사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한 아브라함은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고 양보하며 갈라섰던 것입니다.

 

동행하자고 한 에서의 동기는 순수했을 것입니다. “이제 화해했으니, 함께 살자! 우리 동행하자!” 그런 것입니다. 참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그런데 야곱의 생각을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언제 변할지 모릅니다. 지금은 좋다가도 금방 싫어집니다. 지금은 무엇이든지 줄 것 같다가도 어떤 때는 무엇이든지 아까울 때가 있습니다. 항상 한결같고, 항상 좋다면 무슨 문제가 생기겠습니까? 문제는 인간은 그렇지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함께 가는 길보다는 다른 길로 가는 것을 택했습니다. 물론 에서에게 천천히 가서 세일로 가겠다고 둘러댄 것은 잘못한 것입니다. 여전히 야곱에게 속이는 옛 사람의 모습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결코 옳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야곱의 마음이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누구와 함께 인생길을 걸어 가야할 때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정말 함께 같이 가야 될 사람이냐? 물론 이와 함께 가는 길에 들어섰다면, 이왕 부부로서 맺어졌다면 서로 같이 맞추어 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생각도 같이하고, 속도도 맞추어야 합니다. 마음과 뜻을 인생관과 가치관을 맞추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럴 때 아름다운 부부, 성숙한 동행자가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때로는 남보다 더 먼, 원수 사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형과 동행하거나 형이 사는 세일로 가지 않고 세겜으로 간 더욱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으니 세일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세일이라는 뜻은 '털이 많은, 덥수룩한' 혹은 '덤불이나 숲으로 덮여 있는, 관목이 우거진'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곳은 푸른 숲으로 울창한 곳입니다. 이 지역이 1차 세계대전 후에 황폐해졌다고 말하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러니 세일은 살기 좋은 곳입니다. 그런데 살기 좋은 곳일지라도 야곱은 형 따라 가지 아니하고, 세겜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세겜은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던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가나안 땅 세겜에 까지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다. 창세기 126절부터 보면 나옵니다.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그렇습니다. 세겜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땅입니다. 그리고 세겜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최초로 단을 쌓고 예배드렸던 장소입니다.

이것을 생각해 보면 야곱이 세일로 형 따라 가지 않은 이유는 형과 함께 살 수 없다는 현실적인 이유와 함께 여기에 더 중요한 신앙적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여기서 야곱과 에서의 삶의 방식의 차이가 드러납니다. 에서는 살기에 좋은 관목이 무성하고, 숲이 울창한 그런 땅을 선택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의 조상 아브라함의 신앙을 전수 받고, 그 신앙의 전통 위에서 살기를 원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고 우선권을 주었을 때, 롯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 유익만 따라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파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던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롯이 떠나간 뒤에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 있는 곳에서 눈을 크게 뜨고, 북쪽과 남쪽, 동쪽과 서쪽을 보아라. 네 눈에 보이는 이 모든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아주 주겠다.”(13:14~15) 결국 아브라함과 롯 사이의 차이가 야곱과 에서에게서도 똑같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이 바라보는 것은 무엇입니까? 진정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날 경제가 중요합니다. 명예가 중요하고 쾌락이 중요합니다.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도 경제, 명예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세상 명예와 물질과 행복과 바꿀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세상 명예와 물질과 행복과 바꿀 수 없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습니까?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사도바울이 밝힌 것은 그 당시 너무 너무 중요했던 것들입니다.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라고 하는 하나 하나가 알짜요, 자랑거리요, 사람들에게 크게 인정을 받는 것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모든 것들을 다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겼다 했습니다. 왜 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너무 너무 고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제 바울에게는 주 예수 보다 귀한 것은 없었습니다.

에서는 내가 너와 함께 가지 못하면 내 부하들을 남겨 놓겠다이 말은 내 부하들로 하여금 너를 지켜주고 너를 보호하도록 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야곱은 그것마저 거절했습니다. 왜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동행하시고, 하나님의 군대가 그들의 일행을 지키며 보호하실 것이라는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야곱은 322절에서 '마하나임'의 하나님, 곧 하나님의 군대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군대가 앞에서 뒤에서 호위하고 지키심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므로 에서의 군대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설사 에서가 데려온 400명의 군사들이 다 야곱을 지켜 준다 해도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것과 같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이러한 믿음을 갖는 사람들은 얼마나 담대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지켜 주신다는 것을 믿는 다면 얼마나 든든하겠습니까? 그런데 왜 우리는 걱정하고 낙심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까?

이제 오늘 본문 18~20절을 보세요.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읍에 이르러 그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 그가 장막을 친 밭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백 크시타에 샀으며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더라." 17절을 보면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그의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숙곳에서 세겜으로 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18절에서는 그렇게 설명하지 않고 "밧단아람"에서 "가나안 땅 세겜"으로 갔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왜 성서 기자는 야곱이 '숙곳에서부터 평안히 세겜으로 갔다'고 설명하지 않고 밧단아람에서부터 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밧단아람'아람의 평원'이란 뜻으로 외삼촌 라반이 사는 땅입니다. 야곱은 밧단아람에서 가나안 땅을 향해 떠났습니다. 긴 여행을 하면서도, 여러 가지 위험을 만나고 유혹을 받았어도 '가나안 땅'이라고 하는 목표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곳을 향해 갔던 습니다. 야곱은 분명하고 뚜렷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드디어 거기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세일로 가자는 에서의 제안을 거절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런 목표를 놓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호를 받았고,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인생 길에 진정한 동행자가 있습니까?

여러분의 가족이 좋은 동행자입니까? 친구가 그렇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기를 원하시는 분, 언제나 동행하기를 원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28:20) 하시니라 그 분은 우리의 임마누엘(1:23)이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미 하나님은 야곱에게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28:15)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늘 함께 하여 주셨습니다.

여러분 누가복음 24장을 보면 글로바와 또 다른 제자 두 사람이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라고 하는 곳으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는데 그것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겠나. 마음에 절망으로 가득차서 고향 엠마오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들은 꿈을 다 잊어버리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이들을 찾아와 동행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여러분 두뇌를 공부해 보면 층계같이 1234층이 있는데 1층 단계에 있는 것이 애착관계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부분은 늘 이런 질문을 한다고 합니다. 나와 함께 있어줄 건가요? 내가 힘들고 어려운 데, 중요한 인생 길을 걸어가는데 나를 도와줄 사람이 있나 없나요? 동행해 줄 이가 있나 없나요? 그런데 이에 대해서 사람들의 답은 예스 일 때도 있겠지만 No! 일 때도 있을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워서, 고민이 되고 괴러워서, 근심 걱정이 되고 너무 슬퍼서 외치는 데 아내와 남편 자녀나 친구는 Yes!가 아닌 NO!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어떻게 하시나요? Yes!라고 하십니다. 그래 내가 너와 함께 해주마! 나는 늘 너와 함께 있단다.” 보십시오. 로마서 8:26절을 보면 이렇게 알려 주십니다.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우리들은 영적인 면에서는 어린아이입니다 기도를 하면서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때가 더 많습니다. 또 기도해야 할 때인데도 기도하않는 안타까운 때도 있습니다 위기가 오는 데도 태평하게 살아갈 때가있습니다. 이런 우리를 볼 때 성령님은 탄식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를 위해 성령님이 기도하기 시작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도우심을 믿고 나아가십시오. /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브리서 4:16절입니다.

 

그런데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처음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말씀을 들었을 때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리고 집에 들어가 함께 식사를 할 때 눈이 열려졌습니다. 그러자 저들에게는 삶의 이유와 용기가 생겼습니다. 꿈과 희망이 생겼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그 심령이 새로워집니다. 힘과 용기가 생깁니다. 사람이 무섭지 않습니다. 갈 방향이 분명해 집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주님이 함께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선지자는 에녹입니다. 유다서 1:14~15에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두고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은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보라 주께서 오셔서 온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앞에 세우고 공정하게 심판하실 것이다. 그 때 하나님을 대적한 자들의 무서운 반역 행위가 밝혀지고 또 하나님을 거역한 자들의 온갖 불손한 말이 백일하에 드러나 그들은 응분의 벌을 받을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선포한 에녹은 그 자신이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특히 그는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게 되었고 따라서 에녹은 죽을 때까지 하나님과 동행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억지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감사함으로, 기쁨으로 하나님과 동행하였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주와 함께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우리 주님 걸어가신 발자취를 밟겠네. 옛선지자 에녹같이 우리들도 천국에 들려올라갈때까지 주와 같이 걷겠네   한 걸음, 한 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 걸어가리…♪


세겜에 이른 야곱은 아브라함이 약속으로 받은 그 곳에서 땅을 샀습니다. 그리고는 거기서 제단을 쌓아 예배를 드리고 그 곳을 "엘 엘로헤 이스라엘"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라는 말은 이라는 뜻도 있지만 ’, ‘강한’ '전능자'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니 이 말은 '전능자, 이스라엘의 전능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스라엘은 야곱의 새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나의 전능자' ‘나의 힘이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야곱의 체험적인 고백입니다. 여러분!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나의 힘이시오, 강하신 분, 나의 전능자!'이십니다. 살아가면서 여러분도 이러한 하나님을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와 함께 길가는 것은 즐겁고 기쁠 뿐만 아니라 힘과 용기와 소망과 평안이 넘치는 것이기도 합니다. 2019.7.14일 주일 낮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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