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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성(性) 그리고 벧엘 박승남 2019-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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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1~7, 35:1~3 몸과 성() 그리고 벧엘

 

 

야곱은 하나님을 만난 뒤 벧엘에서 이렇게 서원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28:20-22)

자 그렇다면 이제 형과의 문제도 해결되어 편안히 고향으로 갈 수 있도록 되었으니 당연히 벧엘로 가서 이 약속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요단강을 건너 세겜이라는 곳에 이르러 거기에 장막을 치고 그 곳의 밭까지 구입하였습니다. 물론 세겜으로 간 것 자체를 나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아니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신앙정신을 상기하고 배울 수 있는 곳이니 잘한 일입니다. 야곱은 거기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예배하였으며 그 곳을 "엘 엘로헤 이스라엘"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라는 말은 이라는 뜻도 있지만 ’, ‘강한’ '전능자'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니 이 말은 '전능자, 이스라엘의 전능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스라엘은 야곱의 새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나의 전능자' ‘나의 힘이신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야곱의 체험적인 고백입니다. 여러분!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살아가면서 여러분도 이러한 하나님을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예 세겜에서 눌러 살 것처럼 했다는 것입니다. 비록 세겜이 살기 좋다 할지라도 그 다음 가야 할 곳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벧엘입니다. 그런데 그는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과 약속조차 잊어버린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언젠가 하나님께 충성하고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살겠다고 약속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문제가 해결되고 편안하게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입을 싹 닦고 내 멋대로 살 때가 많습니다. 내 눈에 보기 좋은 대로, 내 기분 내키는 대로,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하나님과 맺은 약속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순종하며 살겠습니다. 열심히 충성하겠습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겠습니다. 날마다 믿음으로 살아가겠습니다. 그 고백, 그 약속을 얼마나 지키고 있습니다. 혹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거짓말쟁이가 아닙니까? 마음이 불편하다고, 몸이 말을 안 듣는다고, 때가 아닌 것 같다고, 세상 살기에 바쁘다고, 너무나 즐길게 많다고 하나님께 올바르게 나오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까?

 

그런데 약속을 지키지 않고 거짓말쟁이가 된 야곱에게,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은 세겜에서 뼈아픈 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야곱에게는 아들들은 많았지만 딸은 단 하나, 레아가 낳은 디나뿐이었습니다. 디나는 당시 16,17세쯤으로 한창 호기심도 많고 활동적인 소녀였습니다. 디나는 들뜬 마음으로 얼굴을 매만지고 옷매무새를 단장하며 혼자 세겜 읍내로 들어가 이것 저것 구경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디나의 모습을 줄곧 지켜 보던 청년이 있었으니 그 성읍의 족장 하몰의 아들 세겜입니다. 그는 디나에게 다가가 손을 잡고 으슥한 대로 끌고가 성폭력을 했습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입니다. 디나는 눈물을 흘리며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었습니다. 어찌할 바를 보랐습니다. 몸도 그렇지만 그녀가 입게 된 마음의 상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깊었을 것입니다.

성폭력이란 무엇인가요? 성폭력이란 상대방의 의사에 반하여 이루어지는 성적 언행으로 상대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모든 행위를 말합니다. 성희롱, 성추행, 강간 등으로 불리던 것을 묶어 성폭력이라고 부르게 된 까닭은 그것이 폭력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성폭력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나 공포심, 그로 인한 행동제약도 간접적인 성폭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폭력은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 우리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심각한 범죄입니다.

지난 17일 통계청 사회조사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여성 중 57.0%가 범죄 발생에 대한 불안이 있다고 답했습니다. 이는 1997년 보다 5.5%가 늘어난 수치입니다. 실제 여성 성폭력 피해자는 연간 3만명에 육박하는 수준입니다. 대검찰청 자료에 따르면 2017년 기준 성폭력 피해 여성이 29272명이었습니다. 2016년보다 10% 이상 증가했습니다. 스마트폰 보급 확산을 등에 업고 디지털 성범죄가 활개를 치면서 피해자들의 고통이 가중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성폭력의 가해자는 절대 다수가 남성인가요? 왜 심각한 성폭력의 피해자의 절대다수가 여성인가요? 80%가 넘는 성폭력이 아는 사람에 의해 발생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요?

 

기독교 성 이해에 대한 기초개념

v2천 년의 신학형성의 두 가지 사상적 영향이 있었습니다.

1. 기독교로 St. Agustine어거스틴의 영혼중심적 신학전통입니다.

육체는 영혼의 성장을 방해 / 죄의 세력이 지배하는 악한 곳이라는 것입니다.

2. 헬레니즘 (계층적 이원론 : 정신중심적철학전통)

정신, 영혼, 이데아, 이성: 남성 = 우월하고

, 육체적, 자연, 감성: 여성 = 열등하다는 것입니다.

러니까 이 두 사상에 영향을 받은 전통신학은 몸과 성에 대하여 오염되고 불경한 것이며, 거룩함에서 벗어나는 주제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면 전통신학처럼 되어진 어거스틴의 몸에 대한 이해를 살펴보겠습니다. 어거스틴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남자는 혼자서도 하나님의 형상이 되지만, 여성은 죄악에 빠지기 쉬운 열등한 육체를 대변하기 때문에 남편과 함께 있어야만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란 썩어 없어질 성관계, 아내의 고유한 속성들을 증오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것을 보면 어거스틴은참 훌륭한 신학자였지만 그가 죄와 성을 관련시킨 것은 성에 대한 왜곡된 신학을 형성하였습니다. 동시에 육체의 상징인 여성을 죄의 원인의 제공자로 보는, 남성보다 쉽게 타락하는 본성의 소유자로 보는 여성 혐오적 신학전통을 만들었습니다.

 

여성에 대한 신학자들의 발언, 생각들을 보겠습니다.

제롬: 베들레헴에 수도원을 세우고 평생 혼자 살면서 금욕생활을 했고 기도와 성경에 몰입했던 인물이며 라틴어 성경인 불가타(Vulgate) 성경을 번역한 학자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그는 여성은 하수구 위에 세워진 성전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어거스틴:여성자체를 놓고 볼 때 여성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다. 오직 남성만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여성은 불완전하고 형편없는 존재이다.”

루터:“여성이 현명한 척하는 것보다 더 봐주기 힘든 겉치장은 없다.”

칼빈:“모든 여성은 자신이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도록 태어난다.”

그러면 왜 우리가 알기에 훌륭한 신학자, 성직자들이 이러한 말을 했을까요? 그것은 그 시대의 일반적인 사람들의 사고에 매여 있었다는 것이며 그들 역시 일반적인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닐까요? 당시에는 이러한 사고에 대해 사람들은 반박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나요? /성에 대해 적대적이었을까? 고전 3:16“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사도 바울을 통해 알려 주시는 은 단순한 육체를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전, 성령의 전으로서의 몸입니다.

로마서 12:1“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은 자신의 몸, 영혼과 전 존재를 하나님께 굴복시키는 것을 의미하며 내 몸에서 그리스도를 존귀히되게 하는 것은 나의 인격을 통해서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을 의미합니다몸은 인간의 한 부분이 아니라 인격적 존재 양식이고 영혼의얼굴입니다. , 인간의 몸은 단지 하나님의 창조의 한 부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깃들어 있는 곳으로 하나님께서참 좋다라고 긍정하신 몸입니다.

 

요한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 - 성육신

Ø성육신의신학 : 성스러운 몸과 감각적 영 : Sacred Body and Sensual Soul

몸에 대한 신학적 토대로서 성육신의의미

1. 성육신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매 (1:14)

몸으로 세상 영지부터 육신, 물질 구원받을 수 없는 영역

2. 몸을 통한 신앙 체현된(embodied) 몸으로 나타나는 신비, 신앙, 인격 - 몸은 영혼의 얼굴/ 몸은 예배의 장 : 12:1

3. 몸은 하나님 형상예배의 장소,하나님 영이 머무는 곳 : 하나님이 당신을 완전히 비우신 케노시스의 사건입니다.

 

몸의 아름다움

우리의 입이 바다와 같이 찬양으로 가득하고 우리의 입술이 하늘의 숨결로 가득하고 우리의 눈은 어둔 세상 밝게 하는 태양과 같이 빛나고 우리의 손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 가운데 아름답게 만들고 우리의 발은 땅 끝까지 사랑을 전하여도 하나님의 사랑은 다 표현 할 수 없습니다.”

 

몸에 대한 성서적(바울)이해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며, 몸에 대한 존중은 모든 인간의 권리에 대한 존중으로 이어진다. 바울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습니다.”갈라디아서 3:28절 말씀으로 도 예수 안에서 하나됨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러면  바울은 왜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 당시의 대표적 위계관계들을 언급하며 아무런 차별이 없다고 말했을까요? 그것은 당시 이러한 위계관계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히고 인권을 침해하는 폭력이 흔히 자행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위계관계 속에서는 아래에 위치하는 이의 존엄성이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는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상하관계에서 성폭력이 주로 일어나는 이유를 설명해줍니다.

피해자들의 몸은 굳이 존중하지 않아도 되는 아랫 것들의 몸인 것이다.

바울은 음행의 문제를 매우 단호하고 엄격하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음행을피하라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있거니와 음행하는자는자기몸에 죄를 범하느니라”(고전6:18) 바울은 (소마)’라는 단어와 (하마르테마)’라는 단어를 특이하게 사용합니다. 일반적으로 하마르티아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신약에서 173회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신약에서 4번 밖에 사용하지 않는 하마르테마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죄의 행위자체보다는 죄로 인하여 초래될 결과, 인간의 생명작용까지도 악화시키고 타락시키는 것을 강조합니다.

 

고전6:18~19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어떤 죄는 몸의 외부에 영향을 주지만 음행은 몸의 영적인 부분에 직접적인 영향을 줍니다, 그리고 음행만큼이나 전인격을 파괴하는 죄는 없습니다. 더 나아가 음행은 상대방에 대해서 죄를 지을뿐아니라, 주께 속하고 주를 위해 써야하는 자신의 몸에 죄를 범함으로써 주님을 욕되게 하는 일입니다.

 

한편 영국 기독교신문 크리스천투데이의 페트릭마빌로그 목사는 "이 세상의 영역에서는 어떤 죄는 다른 것보다 더 중한 무게를 지닌다. 살인은 다른 대부분의 죄보다 더 무겁다. 그러나, 영적인 관점에서는 모든 죄는 영적인 죽음으로 이끄는 동일한 무게를 지닌다. 성적인 죄가 우상 숭배 죄보다 더 빨리 영혼을 죽이는 것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모든 죄는 우리를 영적인 죽음으로 인도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죄의 경중의 차이가 있다 할지라도 죄의 결과는 사망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든 죄를 담당하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자유하게하셨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요즘 미투 운동이 활발합니다. 미투 운동(Me Too movement)은 성폭행이나 성희롱을 고발하기 위한 것으로, 미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201710월 할리우드 유명 영화제작자인 하비 와인스틴의 성추문을 폭로하고 비난하기 위해 소셜 미디어에 해시태그(#MeToo)를 다는 것으로 대중화되었습니다. 직장 및 사업체 내의 성폭행 및 성희롱을 SNS를 통해 입증하며 보편화되었습니다. 우리 나라의 미투 운동은 2018129일 현직 검사 서지현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그녀는 JTBC 뉴스룸에 출연해 검찰 내의 안태근을 시작으로 성폭력 실상을 고발했습니다. 안태근 전 검사장은 서지현 검사를 성추행한 뒤 이를 숨기기 위해 좌천성 인사를 지시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지난 18일 서울중앙지법 2심 재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재판부는 ““(안 전 검사장이) 검사 인사권을 사유화하고 남용하였고 서지현 검사는 제대로 된 사과도 받지 못하고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본질과 무관한 쟁점으로 검사로서의 명예가 실추되는 등 큰 정신적 고통을 입어 엄중한 양형이 불가피하다고 밝혔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서지현 검사로 시작된 미투 운동 여기서 미투는 나도 그렇다라는 뜻입니다. 즉 성범죄를 겪었던 이들이 'Me Too'에 해시태그를 달아(#MeToo) ‘나도 피해자(Me Too)’라며 자신이 겪었던 성범죄를 고백함으로써 그 심각성을 알리는 캠페인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에 이러한 운동이 있을리 없었으니 피해를 입은 여성들은 그냥 고통, 아픔을 감내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요즘 회교권의 중동 여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피해를 당한 여성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기도 하니 기가막힌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디나에게는 그런 일은 없었으니 다행이라 할까요? 더구나 성폭행을 한 세겜은 일시적 충동으로 끝나지 않고 진심으로 디나를 사랑하여 디나와 결혼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이들 부자가 혼사를 의논하려고 야곱의 집으로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밝고 명랑하던 소녀가 갑작스레 당한 일로 얼마나 괴롭고 우울하고 슬펐을까요~ 그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심했을까요? .

야곱의 아들들은 들에서 디나가 당한 일을 듣고 돌아와서 그들 모두가 근심하고 심히 노하였습니다.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은 피의 복수를 다짐했습니다. 디나와 결혼을 하고 싶어 안달이 난 세겜은 무엇이든 하라는 달라는 대로 다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야곱의 아들들이 말했습니다. 안 됩니다.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에게 우리 누이를 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제안하였습니다. "한 가지 길은 있습니다. 당신네 남자가 모두 우리처럼 할례를 받겠습니까? 그래야만 우리는 당신들의 청혼을 들어줄 수 있습니다.“ 그러자 하몰과 세겜은 그 조건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세겜 성문으로 가서 사람들에게 말하였고 세겜의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할례받은지 사흘이 되는 때에 시므온과 레위가 주동이 되어 세겜 성으로 처들어가 눈에 보이는 남자들을 쳐 죽였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할례 때문에 몸이 아파 고통스러워하던 그들은 손 한 번 써보지 못하고 고스란히 당했습니다. 그리고 시체가 널부러진 세겜 성읍을 들아다니며 약탈을 하였습니다. 물론 저들은 세겜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디나를 데리고 나왔습니다.

여러분 야곱의 아들들이 자행한 피의 복수는 몇 배, 아니 몇십 배나 잔인하고 끔찍했습니다. 세겜이 잘못한 것은 맞지만 야곱의 아들들의 잘못은 더욱 심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과 맺은 신성한 언약의 징표인 할례를 속임수와 살육의 도구로 이용하였으니 자신들의 복수를 위해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함을 크게 훼손시켰습니다. 과연 이들이 정말 언약의 백성들인가요?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야곱은 얼굴이 벌거졌습니다. 그리고 아들들을 나무랬습니다. 특히 시므온과 레위를 불러 크게 나무랐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잘못했다는 말도 없이 도리어 성질을 부리며 말대꾸를 했습니다 "그자가 우리 누이를 창녀 다루듯이 했는데도 가만히 있어야 한단 말입니까?" 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이제 야곱의 가정은 세겜 주위에 있는 족속들에게 상종할 수 없는 추한 인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야곱은 이제 주변의 사람들을 적으로 만들어 언제 그들의 공격을 받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세겜에 살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편안함에 안주하여 떠날 줄 몰랐던 야곱은 이제 엄청난 위기를 맞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야곱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351절입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벧엘로 올라가라!” 처음에 말씀을 들었던 곳, 은혜를 받고 헌신의 약속을 굳게 했던 벧엘의 현장으로 돌아가라”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야곱은 자기의 사랑하는 딸이 성폭행을 당하고 아들들이 살육자들이 되었을 때야 비로소 그의 영혼을 일깨우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차린 야곱은 찬송가 272장처럼 낭패와 실망 당한 뒤에, 죽음의 길을 벗어나서 주님께로 나아갑니다. 힘겹고 외로웠던 피신 길에서 하늘의 환상을 보고 위로를 받았던 벧엘, 귀한 복을 약속 받고 감격적인 서원기도를 드렸던 벧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 시점에서부터 야곱은 본격적으로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답게 성숙한 모습으로 성큼 발걸음을 내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야곱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여전히 그를 사랑하시고 다가오셔서 새롭게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아마 이 때 하나님께서 디나의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셨을 것입니다. 1473절을 보면 하나님은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마음이 깨지고 부서진, 상처 난 마음을 고치시며(ap;r라파) 치료하다, 건강하게 하다)

새롭게 출발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여러분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시는 하나님, 상처를 치유하시고 싸매어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야곱은 벧엘로 올라가기 전 온 가족을 모아 놓고 명령하였습니다.

 

1.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라

아마도 하란에 살던 야곱의 식구들은 그곳의 우상 숭배에 깊이 빠졌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 우상을 섬기는 것은 자신을, 가정을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상은 그야 말로 헛된 것입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이 대단한 뭔가를 줄 것처럼 착각하여 섬깁니다. 그러나 그 결국은 허무함 뿐입니다. 여러분 만일 야곱의 집안에 우상숭배가 계속되었으면 그 자녀들 특히 요셉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만일 영적인 것에는 별 관심이 없고 세상이 빠져 지내고 있다면 우리 아이들의 장래는, 신앙적 미래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제 야곱은 정신을 차렸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이래서는 우리 집안아 망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상을 버리고 벧엘 즉 기도의 자리로, 은혜의 자리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속에 우상은 없습니까? 하나님보다 더 중히 여기는 것은 없습니까? 내어 버리시기 바랍니다.

 

2. 자신을 정결케 하라 (깨끗이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어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그리고 야고보서 48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사실상 야곱의 자식들은 내적으로도 악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세겜 사람들에게 행했던 일들을 보면 잔인하고 무자비하였습니다. 세겜사람들의 청을 들어주는 척하면서 할례를 받게 해놓고는 저들이 아파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 때 기습해 다 죽이고 또 저들의 재산을 빼앗은 것입니다. 참으로 야비하고 더러웠습니다. 여러분 사도바울은 경건치 못하여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특성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1:30~31)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마음은 정결합니까? 우리는 무정하지 않습니까? 쌀쌀맞고 냉정하지 않습니까? 화가 난 것을 쉽게 풀지 않고 용서 해줄 것을 쉽게 용서하지 못하고 마음을 꼭꼭 닫아 두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성도입니다. 거룩한 백성입니다.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그러므로 우리는 계속해서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자신을 정결케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순결하시고 정결하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과 동행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3. 의복을 바꾸라

몸을 깨끗이 씻은 뒤에 새 옷으로 갈아입으라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야곱의 식구들이 입고 있는 옷들은 세겜에서 행했던 증오와 살인의 피가 묻어 있었고 노략의 냄새가 배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땅 벧엘에 들어가야 하는데 이 모든 옛 옷들을 벗어버리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도바울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4:22~24)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13:14) 그렇습니다. 새사람,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정신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2019721일 주일 낮 예배 설교

 

(몸과 성에 대한 신학적 자료는 장로회신학대학교 기독교와 문화 김은혜교수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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