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 이야기 2 | 박승남 | 2019-09-1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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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37:12-36 요셉 이야기 2 요셉이 꿈을 꾸었을 때 기분은 어떠했겠습니까? 비록 꿈속에서 이긴 하지만 밭에서 형들의 곡식 단이 자기의 단을 향하여 둘러서더니 꾸뻑 절을 하지 않나 또 해와 달과 열한별까지도 자기에게 절을 하니 이 얼마나 신기한 일이며 얼마나 들뜨게 하는 일이겠습니까? 그는 얼마나 좋았던지 그 꿈을 누군가엔가 이야기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형들에게 그리고 부모님 계신 자리에서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은 꼴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형들이 이 일 때문에 요셉을 더욱 미워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요셉을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말했습니다. ""네가 알고 있듯이, 너의 형들이 세겜 근처에서 양을 치지 않느냐? 내가 너를 너의 형들에게 좀 보내야겠다." " 여러분 세겜은 어떠한 곳입니까? 그곳은 좋은 목초지가 있는 곳입니다. 하지만 그곳은 야곱의 아들들이 사고를 쳤던 곳이기도 합니다. 여동생 디나가 그곳 추장의 아들에게 겁탈 당한 것 때문에 할례를 빌미로 세겜 성의 성주 하몰과 그 아들은 물론 모든 성인 남자들을 다 죽여 버려 야곱으로 하여금 악취를 풍기게 했고 그래서 주변 사람들의 보복을 피해 야곱이 가족들을 데리고 도망쳐야 했던 곳입니다.(창34:30) 그런데 약 7년의 세월이 흐르긴 했지만 야곱의 마음이 위험한 곳으로 남아 있는 그런 곳에 자신의 아들들이 양을 치러 갔으니 아버지 야곱의 마음이 편할 수 없었습니다. 비록 요셉을 편애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다른 아들들을 미워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야곱은 요셉을 불러서 형들의 안부를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이것이 그토록 사랑하는 아들 요셉과 오랜 동안 이별하게 될 일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요셉도 자기 앞에 어떠한 일이 전개 될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끝나자 요셉은 아버지에게 대답합니다. "다녀오겠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시원하게 대답할 수 있었을 까요? 여러분 이 때 요셉의 나이 17세입니다. 과거 세겜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세겜까지 얼마나 먼 길인가도 알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형들이 자기를 미워하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사랑하시고 믿어주시는 아버지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요셉의 즉각적인 순종은 그가 자기를 미워하는 형들을 싫어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여러분 살아가면서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 중의 하나가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누군가 나를 미워하고 싫어하고 힘들게 하는 이들, 귀찮게 하고 화나게 하고, 무례하고, 속상하게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또한 나에게 손해를 끼치고 해를 가하고 억울하게 하는 이들도 있으며 나의 길을 가로막는 사람도 있습니다. 심지어 극단적이지만 나를 죽이려 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들을 어떻게 대하면 좋을까요? 여러분 아버지가 요셉을 세겜으로 보내는데 당시 야곱과 요셉은 헤브론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헤브론에서 세겜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될까요? 헤브론에서 세겜까지는 직선 거리로 약 77km나 됩니다. 그런데 유대나라 길이 굉장히 꾸불거리고 험한 길입니다. 그러니 실제로는 훨씬 더 먼 거리인 약 120km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요셉이 세겜에 있는 형들을 찾아갔던 때가 8월 말 정도 되지 않은가 추측을 하는데 그렇다면 엄청나게 뜨거운 길을 100킬로를 넘게 걸어서 갔다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보통 하루에 3,40킬로 걸었다고 한다면 나흘은 걸어가야 되는 거리입니다. 더구나 맨 몸이 아니라 아버지가 준 음식 가지고 말입니다. 그런데 형들이 세겜에 없었어요. 그래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방황하고 있는 중 어떤 사람을 만나 형들이 도단으로 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도단’은 세겜에서 북서쪽으로 21km지점에 위치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면 적어도 요셉이 형들을 만나기 위해서 적어도 5일 이상을 헤메고 갔다고 봅니다.
여러분 이러한 요셉에게서 여러분은 무엇을 느끼십니까? 특히 우리 청소년들은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요즘은 조그만 일을 시켜도 하기를 귀찮아하고 거절하기도 일수인데 길게 잡으면 1주일씩이나 걸리는 아니 왕복으로 하면 2주간이나 걸릴 수 있는 그 일을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순종하며 또한 그 일을 위해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는 그런 모습을 그려보면서 무슨 생각이 듭니까?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우선 요셉의 증조할아버지 아브라함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명령을 들었을 때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서"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습니다. 이어서 다윗입니다. 사무엘상 17:17~21절을 보면 어느 날 그 아버지 이새가 다윗에게 말했습니다. "여기에 있는 볶은 곡식 한 에바와 빵 열 덩어리를 너의 형들에게 가져다 주어라. 너는 그것을 가지고 빨리 진으로 가서, 너의 형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이 치즈 열 덩이는 부대장에게 갖다 드리고, 너의 형들의 안부를 물은 뒤에, 형들이 잘 있다는 증거물을 가지고 오너라." 그 무렵 사울은, 다윗의 형들을 비롯하여 이스라엘 군인을 모두 거느리고, 엘라 평지에서 블레셋 사람과 싸우고 있었다. 아버지 이새는 전쟁의 형편이 어떤지, 자식들이 잘 있는지 궁금하여 다윗을 보내고 싶었던 것입다. 그러면 아버지의 말씀을 들은 다윗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성경을 보면 다음날 아침에, 다윗은 일찍 일어나서, 양 떼를 다른 양치기에게 맡기고, 아버지 이새가 시킨 대로 짐을 가지고 길을 떠났다 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이나 다윗이나 모두 그 명령을 준행하기 위해서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서둘렀다는 것입니다. 마지못해서, 억지로, 어쩔 수 없어서 행한 것이 아니라 기꺼이 행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그러면 우리 예수님은 어떠하십니까?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에 기꺼이 순종하여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시되 왕궁이 아니라 천한 직업 중 하나인 목수의 아들로 그것도 냄새나고 지저분한 구유에서 태어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리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철저히 아버지의 뜻대로 사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 29절을 보면 예수님은"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하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 뿐만 아니라 누가복음 2:51절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는 말씀처럼 육신의 부모에게도 순종하셨습니다. 이러한 순종이 있었기에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요셉은 수 많은 생명을 살리는 애굽의 총리가 다윗은 골리앗과 싸워 승리할 수 있는 길이 있게 되어졌으며 우리 예수님은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이 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입니까?
드디어 요셉이 그 형들의 뒤를 따라 가서 도단까지 갔습니다. 이제 저 멀리 보니까 형들이 있는 것이 보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쁘고 반가웠겠습니까? 그런데 요셉을 멀리서 형들은 요셉과는 다른 마음이었습니다. 그렇게 멀리서 무진 애를 쓰고 먹을 것을 가지고 찾아오는 동생을 반갑게 맞이하지는 못할망정 죽이려고 음모를 꾸민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 말했습니다. "야, 저기 꿈꾸는 녀석이 온다. 자, 저 녀석을 죽여서, 아무 구덩이에나 던져 넣고, 사나운 들짐승이 잡아먹었다고 하자. 그리고 그 녀석의 꿈이 어떻게 되나 보자." 이게 인간입니까? 아무리 동생이 미워도 그렇지 어떻게 이런 마음을 품을 수 있는 것입니까? 그런데 ‘꿈꾸는 자가 온다’고 하는 이야기와 ‘채색 옷을 벗겨가지고 찢는 것’을 보면 여기에 형들의 아픔의 트라우마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에게만 채색 옷을 입힌 것과 요셉의 꿈이 얼마나 형들을 얼마나 괴롭혔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의 가정에 이런 트라우마가 없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결코 미움이 품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고 무시를 당하고 속상하다고 해서, 미움의 마음이 가득하여 엉뚱한 일을 저지르는 일들이 없기를 바랍니다. 야곱에 비록 요셉을 더욱 사랑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다른 아들들을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소중한 아들들이 분명 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랑하는 요셉을 그 멀리까지 보낸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러한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려야 할 것인데 아버지의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했습니다. 물론 야곱이 자초한 것도 있기는 합니다. 형들은 힘들게 찾아 온 요셉을 죽이려는 모략을 꾸밉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그의 꿈도 제거하려고 합니다. 맏아들 루우벤을 제외하고 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너무도 반갑고 기뻐서 뛰어 오는 동생을 요셉을 화락 껴안은 것이 아니라 짐승 잡듯이 꽉 잡고는 사정없이 구덩이에 던져 넣었습니다. 이 구덩이는 목동들이 우기에 빗물을 받아 두고, 나중에 가축에게 먹이는 물 저장 탱크입니다. 마치 항아리 같은 형태로 입구는 좁고 밑으로 내려가면 큰 방 같은 곳으로 입구를 돌 하나로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비어 있었습니다. 이것으로 건기의 후반부인 8월 말 쯤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여러분 형들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달려갔지만 옷을 벗기고 잡아 구덩이에 집어넣을 때 얼마나 공포감에 사로잡혔겠습니까? 그리고 얼마나 울부짖었겠습니까? "형님들 왜 이래요, 형님들 제발 목숨만을 살려줘요." 그러나 형들은 무심했습니다. 더욱이 요셉을 구덩이에 던져 놓고는 자기들끼리 앉아서 태연히 음식까지 먹습니다. 구덩이로부터 요셉의 애걸하는 소리(창42:21)가 들렸지만 형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요셉이 가져간 것으로 자기들의 배만 채운 것입니다. 그러니 이 때 요셉이 받은 상처는 얼마나 컸겠습니까? 얼마나 형들이 미웠겠습니까? 그리고 도대체 내가 꾼 꿈이 무엇이란 말인가? 왜 그런 꿈을 꾸었단 말인가? 한탄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그들이 앉아서 밥을 먹고 있는데, 고개를 들고 보니, 마침 이스마엘 상인 한 떼가 길르앗으로부터 오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러자 유다는 동생을 죽이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 그러니 차리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자 그래도 그는 우리의 피붙이여, 우리의 동생이 아니냐?고 제안합니다. 그리고 형제들이 그 말을 그대로 들어줍니다. 여기서 유다의 지도력을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로 인해 요셉은 구덩이에서 건져지게 되었습니다. 순간 요셉은 이제는 살았구나, 그러면 그렇지 형님들이 내가 미워서 잠시 혼내 준 것이지 하며 안도의 쉼을 쉬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게 웬일입니까? 대상들에게 당시 청년 노예의 값인 은 20 개를 받고 자신을 팔아넘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가룟유다에 의하여 은 30에 팔려졌지요. 대상들에게 끌려가고 형들과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게 될 때 요셉은 눈앞이 캄캄해 졌을 것이며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기분으로 "아, 이제 나는 노예가 되는구나!"라고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귀하게 사랑받던 요셉, 일도 하지 않고 고생이란 전해 해 보지 않은 요셉 그가 이제는 노예로 살아가야 할 신세가 되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타이밍이 절묘하다고 느껴지지 않습니까? 더구나 우리가 눈여겨봐야 될 것은 이 대상들이요 그냥 싸구려 장사하는 사람들이었다면 요셉의 운명은 또 바뀌어졌을 거에요. 그런데 향품과 유향과 몰약 등 고급 향료를 파는 대상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대상이 만나는 사람은 적어도 애굽의 상류층이 될것입니다. 요셉이 하층구조로 갔더라면 결코 총리가 못 되었을 텐데 상류층을 상대하는 대상을 만났기 때문에 애굽의 상류층의 가정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요셉이 구덩이에 던져졌을 때 마침 대상이 지나가게 되고 그것도 애굽으로 가는 대상이고 그다가 샹류층을 상대하는 상인들이었으니 아주 절묘하게 맞아 들어가잖습니까?
하나님의 역사 참여 여러분 하나님이 뭘 가지고 우리 인간역사에 참여하시는가요? 시간과 공간입니다. 어떻게 꼭 그 시간 그 장소냐는 말이죠? 생각해 보십시오. 요셉이 조금만 빨리 갔어도 안되고 조금만 늦게 갔어도 안됩니다. 세겜에서 헤맨 것 까지도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계획속에 있었다 볼 수 있지요. 전도서 9장 1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모든 것을 내가 마음에 두고 이 모든 것을 살펴 본즉 의인들이나 지혜자들이나 그들의 행위나 모두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힘들고 어렵고 불행한 일들, 억울하고 속상하고 답답한 일들, 그렇게 만드는 사람들에 대해 너무 괴로워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잖아요. 로마서 8장 28절 표준새번역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다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을 끝까지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시 바랍니다. 여러분을 힘들고 어렵게 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왜냐하면 우리의 힘으로는 그런 이들을 좋게 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군다가 사랑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신명기 32장 35절을 보면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이니, 내가 갚는다 고 말씀하십니다. (롬12:19, 히10:28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그리고 로마서 12:20절을 보면 그러므로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고 하십니다. 결국 우리는 힘들고 어려울 때, 속상하고 답답하고 미움과 증오가 쌓일 때 나의 감정에 충실할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나는 할 수 없으나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이 할 수 있게 하십니다. 항상 선을 따르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5~18) 여러분, 왜 요셉에게 이토록 큰 시련과 고난을 겪게 하신 것일까요? 요셉에게 주신 꿈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주신 비전, 꿈처럼 쓰임을 받기 위해서는 꿈 하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고난과 연단을 통해서 당신이 쓰실 만한 하나님의 사람의 인격과 실력을 고루 갖추게 합니다. 한 마디로 준비된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단지 꿈만 있다고 쓰시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준비되는 것입니다. 꿈은 있지만 준비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몽상가에 불과합니다. 능력은 있으나 꿈이 없는 사람은 단지 전문가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꿈이 있으면 준비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 일을 할 수 있는 실력,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그는 젊어서 자신의 동족이 고통 받는 것을 보고 민족 해방의 꿈을 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큰 꿈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정작 한 일이라고는 단 한 사람의 애굽 사람을 쳐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서 40년 동안 양을 치며 삽니다. 40년이라니요. 애굽의 학대와 압제 속에서 신음하는 동족을 구원해야 할 사람에게 40년이라는 세월은 너무 길고 지루한 것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서두르지 않습니다. 그 시간 동안 모세는 온유한 사람으로 훈련되었습니다. 젊어서는 혈기로 사람을 때려죽이던 모세였습니다. 그러나 40년의 연단을 통해서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고 민수기 12장 3절은 말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고난과 시간을 통해서 훈련되어졌을 때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실력을 갖춘 사람으로 빚어 가신 것입니다. 그래도 꿈은 사라지지 않는다.(36절) 여러분 요셉의 형들은 요셉의 꿈을 인정하지 않고 나아가 그 꿈을 막아섰습니다. 요셉을 죽여서라도 그 꿈을 막아보겠다 한 것입니다. 그래서 말했습니다. "그 꿈이 어떻게 되는 것을 우리가 볼 것이니라"(20절) 그렇습니다. "네가 죽는데도 꿈이 이루어 질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느냐? 어디 네 꿈을 이루어 봐라" "어디 너의 꿈이 이루어지나 이루어지지 않나 우리들이 한 번 지켜보리라"며 조소를 보낸 것입니다. 마치 사단이 우리들을 향해서 조소를 보내는 것처럼 말입니다. 결국 요셉은 죽을 위협을 당하다가 마침내 노예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꿈은 영원히 끝장난 것 같습니다. 이런 분위기를 보여 주는 것이 슬퍼하는 아버지 야곱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 앞에 오열하며, 그 누구의 위로로도 위로 받을 수 없는 아버지 야곱의 모습은 이제 요셉의 인생과 꿈이 물거품처럼 사라진 것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게다가 모른 척하면서 아버지를 위로하려는 형들의 간악한 위선을 보면 더더욱 요셉의 꿈은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37장 마지막 절인 36절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그 미디안 사람들은 그를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았더라" 그렇습니다. 요셉이 팔려 간 곳은 바로의 신하 친위 대장, 요즘으로 하면 청와대 경호 실장 집으로 팔려간 것입니다. 소설로 말한다면 이것은 복선입니다. 무언가를 암시합니다. 요셉이 시위 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무언가 일이 생길 것임을 암시하는 대목입니다. 그곳에서 그의 꿈이 새롭게 펼쳐질 것을 살짝 엿볼 수 있는 구절인 것입니다. 요셉과 요셉의 꿈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시편 37편 23-24절은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분명 요셉은 넘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을 아주 엎드러지지 않도록 당신의 손으로 붙드십니다. 요셉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에 함께 하십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길에는 고난이 있어서 넘어지지만, 아주 엎드러지지 않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붙드십니다. 야곱은 아들은 죽고, 아들의 꿈은 사라졌다고 생각하고 한없이 슬퍼합니다. 그 형들은 아버지를 위로하면서도, 그의 꿈은 영영 사라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애통과 달리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형들이나 아버지 야곱의 생각과 달리 요셉은 애굽 사람 보디발의 집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이루기 위해 힘찬 전진을 준비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주신 꿈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은 어둡고 답답한 현실이 나의 시야를 가로막고 서 있어서 하나님이 주신 꿈이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요셉은 죽지 않았고, 따라서 그를 통한 하나님의 꿈은 여전히 살아 있고 사라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주신 꿈도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사단이 아무리 대적해도, 아무리 우리의 꿈을 빼앗고 좌절시키려는 세력이 있다 저들이 승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계시거나 모른 척 하시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지키시며 보호하십니다. 아무리 사탄의 포화가 대단하고 계속된다 하더라도 그 가운데서 하나님은 우리들을 지키실 것이며 우리들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사단의 모든 궤계를 박살내고 승리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2019년 9월 15일 주일 낮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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