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들로부터 떠났기에 | 박승남 | 2019-09-2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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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창세기38:1-11절 개역개정1.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하니라 2.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데리고 동침하니 3.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유다가 그의 이름을 엘이라 하니라 4.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오난이라 하고 5. 그가 또 다시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셀라라 하니라 그가 셀라를 낳을 때에 유다는 거십에 있었더라 6. 유다가 장자 엘을 위하여 아내를 데려오니 그의 이름은 다말이더라 7.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8. 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 된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 9.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그의 형에게 씨를 주지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 10. 그 일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11. 유다가 그의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버지 집에 있어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다말이 가서 그의 아버지 집에 있으니라 창38:1~11 형제들로부터 떠났기에 오늘 본문은 유다 가정의 이야기입니다. 37장에서부터 요셉이야기가 시작되었는데, 그 요셉 이야기의 중간에 전혀 연관성도 없는 유다의 이야기가 불쑥 들어 있습니다. 그것도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성적인 관계를 하는 이야기…. 소설로 생각해도 3류 음란 소설 같은 이야기가 말입니다. 전후 관계로 볼 때, 전혀 불필요한 이야기, 차라리 없으면 이야기 전개가 더 매끄럽게 잘될 것 같은데도 말입니다. 그러면 왜 창세기 기자는 이 이야기를 여기에 삽입했을까요? 창세기 자체만으로는 유다 가정의 이야기가 왜 여기에 삽입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더 넓은 눈으로 보아야합니다. 이스라엘 역사 전체, 그리고 메시아의 오심과 관련시켜 보아야 합니다. 본문 1절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하니라.” 문제의 시작, 발단이 여기서부터 입니다. 유다 가정의 불행, 그의 곤경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 간 것"에 있습니다. 여기서 '자기 형제들' 이라고 표현된 공동체는 그 당시 유일한 신앙공동체였습니다. 유다는 단순히 형제들을 떠난 것이 아니라 신앙공동체를 떠난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교회를 떠난 것입니다. 시골 어떤 교회에서 한 성도가 성도들과의 관계에서 상처를 받고 교회 나오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심방오신 목사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교회에는 안나가겠습니다. 나는 혼자서도 하나님을 잘 믿을 수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목사님은 아무 말 없이 난로 옆에 있는 부젓가락을 집어 들고 불속에서 반쯤 타고 있는 석탄 덩어리를 하나 꺼내 따로 놓았습니다. 그러자 그 석탄 덩어리의 불은 이내 껴져 버리고 회색 빛 덩어리만 남았습니다. 난로 안의 석탄들은 여전히 불에 활활 타고 있는데 말입니다. 이것을 보고 있던 그 성도가 입을 열었습니다. "목사님! 다음 주일에 교회에 나가겠습니다." 유다가 그 형제들을 떠났습니다. 그 신앙의 공동체에서 떠나자 그의 신앙과 믿음은 식어버렸습니다. 신앙생활은 신앙공동체가 없이는 그 신앙이 유지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중요합니다. 물론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이지 교회 믿고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예수를 믿을 수 있게, 아니 이미 믿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곳이 바로 주님이 세우신 교회라는 신앙공동체입니다. 교회에 모순이 많고 갈등도 많습니다. 교회가 완전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교회를 아주 떠나버리면, 결국 그 떠난 사람이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유다가 왜 형제들을 떠나서 내려갔을까요? 돈벌려고 내려갔습니까? 쾌락을 쫓아서 내려갔나요? 오늘 본문에서는 특별한 이유가 나와 있지 않습니다. 37장에서 보면, 유다가 그 형제들 가운데 상당히 지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을 구덩이에 빠뜨리고 어떻게 처리할까를 의논할 때, 유다가 나서서 “요셉을 죽이지 말고 팔아버리자”고 제안했고 이에 그 형제들이 다 동의했습니다. 그래서 팔아버리고 요셉의 옷에 양의 피를 묻혀 아버지를 속였는데,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그 뒤의 이야기를 성경 뒤의 숨어 있는 이야기를 기록한 유대인들의 성서해석서인 미드라쉬를 보면 아버지가 그렇게 슬퍼하는 것을 보고 그 형제들 사이에 요셉을 팔아버린 것에 대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 라는 논란이 오가다 요셉을 팔자는 의견을 내 놓고, 형제들을 그렇게 설득했던 유다에게 모든 책임이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형제들이 '네가 팔자고 하지 않았으면, 그냥 구덩이에 빠뜨렸다가 데리고 왔을 텐데, 너 때문에 우리가 요셉을 팔게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자 유다는 이렇게 따돌림을 당해서 그 형제들을 떠났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혹시 우리가 어느 누구를 시험에 들게 하거나 상처를 주지는 않았습니까? 의도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누구를 소외시키지는 않았습니까? 그가 문제가 있고 잘못 했다고 해서 차별하지 않습니까? 유다는 형제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해서 결국 자기 형제들을 떠나게 되었는데, 그것이 그의 인생을 불행으로 이끌었습니다. 유다는 이방여인과 결혼하게 되었고, 그 결과 자녀를 신앙으로 양육하지 못해 악을 행하는 자로 만들었습니다. 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장자 엘은 하나님께서 그를 죽이실 만큼 악했습니다. 그 악함의 정도가 얼마이기에 하나님께서 죽이셨을까요? 구체적인 악행의 내용이 나오지 않아 알 수는 없지만, 가나안 사람과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악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나안 사람들은 가만히 내버려두시고 엘은 죽이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은 이방민족의 범죄보다 자기 백성의 범죄를 더 심각하게 다루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식과 다른 사람의 자식을 다루는 기준이 다르듯이 하나님도 자기 백성을 다루는 기준과 세상 사람들을 다루는 기준이 다릅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을 동일하게 취급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다른 윤리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용서를 받고 은혜를 입었으면, 그런 사랑과 은혜를 모르는 사람과 구별된 삶이 있어야합니다. 계속해서 유다의 둘째 아들도 오난도 하나님의 징계로 죽게 되었습니다. 맏아들이 죽자 유다는 둘째 오난에게 형수에게 들어가 형의 후손을 이어주도록 하라고 권고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오늘날 우리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지만 고대 사회에서 보면 이것은 꼭 필요한 제도로 형의 가문을 잇고 형수의 생존을 보장해 주는 사회복지 제도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형수를 아내로 취하는 이 제도는 고구려 시대에도 존재했다는 것을 역사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제도는 후에 모세의 율법에 의해 제도화되었습니다(신25:5-10). 룻기에서도 보아스는 룻의 시가의 친척이었습니다. 따라서 자녀 없이 죽은 친척의 대를 이어주고 기업을 전수할 후손을 보게 하는 책임이 가장 가까운 친척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발적이지 강제로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할 사항은 아니었습니다. 룻기에서도 보면, 보아스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보아스는 그 친척을 찾아가 '기업 무를 의무를 이행하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그 의무를 포기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때 보아스가 비로소 그 의무를 행했던 것입니다. 형제나 가까운 친척의 사랑과 배려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아버지로부터 이런 형제의 의무를 행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권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오난이 형수와 잠자리를 같이 한 것으로 보아 동의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속과 겉이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9절을 보면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그의 형에게 씨를 주지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라고 말씀합니다. 형은 비록 죽었지만, 오난이 형수에게 씨를 주어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니라 형의 아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자신보다 재산을 더 많이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오난 자신에게 돌아오는 재산은 적어도 1/3으로 줄어듭니다. 그러므로 계산을 해 보니 이만저만 손해가 아닙니다. 그래서 아버지 앞에서는 형제간에 우애가 좋은 척하며 그렇게 하겠다고 해 놓고, 잠잘 때는 엉뚱한 짓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내가 혼자 은밀한 가운데 행하는 하나님은 다 보고 계십니다. 내가 착하고 의로운 일, 주님의 교회를 위해 봉사했던 일 다른 사람이 다 몰라줄지라도 상관없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알아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알아주시고 기억해 주시면 족한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아무도 모르게 행한 죄악들, 완전범죄일지라도 하나님은 아시고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입니다. 요즘 DNA가 분석 기술이 발달되어 화성연쇄살인 범인이 드러났습니다. 물론 당사자는 아니라고 발뺌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 범인이 밝혀지지 않는 소위 미제사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는 벌을 받지 않는다 해도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그야말로 ‘꼼짝마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행한 잘못된 일들, 죄와 악한 일들을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10절에 보니까 “그 일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무엇인가 가나안 사람들과 차별된 삶을 요구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세상 사람과 얼마나 차별화 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고 말씀하셨는데, 여러분은 얼마나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까? 11절에 “유다가 그의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버지 집에 있어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같이 죽을까 염려함 이라. 다말이 가서 그의 아버지 집에 있으니라”고 했습니다. 유다 가정에 이러한 불행의 근본적인 원인은 유다 자신에게 있습니다. 자신이 형제, 신앙의 공동체를 떠났고 그로 인해 자녀들을 신앙으로 기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고 신앙인의 바른 삶의 모습에 대해서 가르치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패하고 타락한 죄가 그 가정을 슬픔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아직도 그의 인생에 닥친 불행의 원인을 파악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막연한 불안감만 증폭되었습니다. 아들 둘을 연거푸 잃고 나서 나머지 하나, 막내도 잘못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에 휩싸였습니다. 그래서 막내아들이 어리다는 핑계로 다말을 친정으로 보냈습니다. 유다가 다말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서방 잡아먹는 여자! 집안 망치는 여자! 로 생각 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집안에 무슨 문제, 우환이 생기면 며느리 잘못 들어와서 그렇다고 말하기도 하지요.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유다처럼 자신의 허물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7:3)고 하시면서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마7:5)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먼저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어내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의 티도 뺄 수 있을 것입니다. 유다를 본받은 유대민족은 성결한 사람과 부정한 사람을 구별하다보니 비판하는 게 습관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자연 제자들이나 초대교회 신자들도 그런 태도를 지니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람은 그런 자세를 가지고 살지 말고 먼저 자신 속에 있는 허물, 아집과 선입견을 제거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하시면서 주님과 교회공동체를 떠나지 말라고 하십니다. 언제 어디서나 주님과 주님의 교회를 떠나지 않고 끝까지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 되길 바랍니다. 2019년 9월 22일 주일 낮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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