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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말과 유다이야기 박승남 2019-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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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창세기38:12-30절 개역개정

12. 얼마 후에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은지라 유다가 위로를 받은 후에 그의 친구 아둘람 사람 히라와 함께 딤나로 올라가서 자기의 양털 깎는 자에게 이르렀더니

13. 어떤 사람이 다말에게 말하되 네 시아버지가 자기의 양털을 깎으려고 딤나에 올라왔다 한지라

14. 그가 그 과부의 의복을 벗고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휩싸고 딤나 길 곁 에나임 문에 앉으니 이는 셀라가 장성함을 보았어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음으로 말미암음이라

15. 그가 얼굴을 가리었으므로 유다가 그를 보고 창녀로 여겨

16. 길 곁으로 그에게 나아가 이르되 청하건대 나로 네게 들어가게 하라 하니 그의 며느리인 줄을 알지 못하였음이라 그가 이르되 당신이 무엇을 주고 내게 들어오려느냐

17. 유다가 이르되 내가 내 떼에서 염소 새끼를 주리라 그가 이르되 당신이 그것을 줄 때까지 담보물을 주겠느냐

18. 유다가 이르되 무슨 담보물을 네게 주랴 그가 이르되 당신의 도장과 그 끈과 당신의 손에 있는 지팡이로 하라 유다가 그것들을 그에게 주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그가 유다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더라

19. 그가 일어나 떠나가서 그 너울을 벗고 과부의 의복을 도로 입으니라

20. 유다가 그 친구 아둘람 사람의 손에 부탁하여 염소 새끼를 보내고 그 여인의 손에서 담보물을 찾으려 하였으나 그가 그 여인을 찾지 못한지라

21. 그가 그 곳 사람에게 물어 이르되 길 곁 에나임에 있던 창녀가 어디 있느냐 그들이 이르되 여기는 창녀가 없느니라

22. 그가 유다에게로 돌아와 이르되 내가 그를 찾지 못하였고 그 곳 사람도 이르기를 거기에는 창녀가 없다 하더이다 하더라

23. 유다가 이르되 그로 그것을 가지게 두라 우리가 부끄러움을 당할까 하노라 내가 이 염소 새끼를 보냈으나 그대가 그를 찾지 못하였느니라

24. 석 달쯤 후에 어떤 사람이 유다에게 일러 말하되 네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였고 그 행음함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느니라 유다가 이르되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

25. 여인이 끌려나갈 때에 사람을 보내어 시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나이다 청하건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이니이까 한지라

26.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27. 해산할 때에 보니 쌍태라

28. 해산할 때에 손이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이는 먼저 나온 자라 하고 홍색 실을 가져다가 그 손에 매었더니

29. 그 손을 도로 들이며 그의 아우가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터뜨리고 나오느냐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

30. 그의 형 곧 손에 홍색 실 있는 자가 뒤에 나오니 그의 이름을 세라라 불렀더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38:12~30 다말과 유다이야기

 

연거푸 아들 둘이 죽자 유다는 그 문제의 원인이 자신과 자신의 아들들에게 있는 줄을 생각지 못하고 애꿎은 며느리를 내쫒고 말았습니다. 쫒아내면서도 말로는 막내인 셀라가 아직 어리니 크면 너를 불러 대를 잇도록 해 주겠다면서 수절하고 친정에 가 있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음으론 셀라를 며느리에게 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유다는 며느리가 뭔가 잘못되어 액운이 끼어서 혹은 팔자가 험해서 자꾸 자기 아들이 죽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며느리 다말은 시아버지 명령에 순종하여 친정에 가서 수절하며 지냈습니다. 시아버지의 말씀을 믿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지 않고 과부로 계속 지낸 것입니다.

 

그런데 그 후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요? 우리 말 성경에는 얼마 후에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표준새번역이나 공동번역을 보면 그 후 많은 세월이 흘러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원어에 가깝습니다.(얼마라는 원어 '라바' 증가하다 늘다, 확대하다, 길다, 많은, 충분하다 등의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시동생이 성인이 되었을 만큼 시간이 흘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유다는 자기한 말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다말을 불러주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이걸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냥 평생 독신으로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형수가 자식 없이 과부가 되면 시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형수로 하여금 아들을 낳게 해 주는 것이 당시의 법이었습니다. 이렇게 태어난 아들은 죽은 형의 아들이 되어 형이 받을 재산을 상속하고 과부가 된 어머니를 공양하게 하는 일종의 사회보장제도가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후에 기록되어진 신명기 25:5-6절 말씀에 보면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했습니다.

 

한편 유다는 아내 가나안 여인 수아를 잃었습니다. 그래서 위로를 받은 뒤에 얼마 지나서 양털을 깎을 때가 되었습니다. 이 때는 축제와 같은 때입니다. 그런데 이 때 유다는 종들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일을 종들이 했고 다만 유다는 종들이 양털을 깎는 것을 보기 위해 그리고 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집을 떠나 양떼가 있는 지역인 딤나로 갔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다말은 너울을 써서 얼굴을 가리고 창녀로 변장해서 딤나 길 곁 두 샘이라는 뜻의 에나임 문에 앉아 기다렸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시아버지가 셋째 아들을 자기에게 줄 생각을 하지 않고 있음을 알게 되어 시아버지를 유혹하려는 비장한 계책을 꾸민 것입니다. 그런데 다말의 계책은 그대로 들어맞았습니다.

 

홀아비가 되어 적적했던 유다는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 앉아있던 그녀를 창녀로 여기고 접근하여 흥정을 했습니다. "너한테 들러 가고 싶구나. 어서 가자."라고 수작을 부린 것입니다. 그러자 다말은 화대로 무엇을 주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니 "내 양떼 가운데서 새끼 염소 한 마리를 보내마" 라고 유다가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외상이 어디 있나요? “재미만 보고 가 버리면 나는 뭐가 되느냐고 그러니 그걸 보내 주실 때까지 담보물을 맡겨 주셔요." 하고 그 여자가 말했습니다. 그러자 유다가 물었습니다. "무슨 담보물을 주어야 하나?" 그러자 그 여자가 대답했습니다. "당신의 그 줄 달린 인장과 잡고 있는 지팡이면 됩니다."

 

아마도 원통형 막대기의 형태였을 것으로 여겨지는 이 도장에는 그 소유주의 이름이나 고유한 문양이 새겨져 있어서 물렁물렁한 토판에 대고 눌러서 밀면 그 토판에 그 도장의 소유주의 이름이나 고유한 문양이 압인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도장을 그 가운데로 끈을 꿰어서 목에 걸어 지니고 다녔던 것입니다. 또 지팡이는 그 소유주의 권위의 상징이기도 했지만, 사람들은 그 손잡이 부분에 그 소유주 개인의 문양을 새기거나 고유한 장식을 함으로써 역시 그 소유주가 누구인지를 금방 알아볼 수 있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말이 유다의 도장과 그 끈과 그의 손에 있던 지팡이를 담보물로 달라 한 것은 그가 꾸민 계책이 성공할 경우 그 후에 벌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 대비한 영리하고 확실한 대비책이었던 것입니다. 다말의 그 숨은 계책을 알 리가 없었던 유다는 다말의 그 요구를 들어주어 그것을 맡기고는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 일로 인해 다말은 유다의 아이를 갖게 되었고 친정으로 돌아 가 너울을 벗고 과부 옷차림으로 바꾸었습니다.

그 후 유다는 약속대로 염소 새끼 한 마리를 그 친구에게 맡겨 그 여자에게 보내고 그 여자의 손에서 담보물을 찾아오게 하려 했지만 그 친구는 그 여자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유다가 다말을 만났던 그 곳 사람들에게 물어 그 여자를 찾으려 했으나 그곳에는 창녀가 없다는 대답을 들었을 뿐입니다. 할 수 없이 유다와 그의 친구는 그 여자 찾기를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석 달쯤 후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유다에게 그의 며느리 다말이 음행을 저질렀고 그 결과로 임신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유다는 이 소식을 듣고 격분하였습니다. 도대체 결혼한 여자가 누구와 관계하여 아기를 배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를 끌어내어 불살라 죽이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자신도 죽임을 당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다말은 사람들에게 끌려 나갈 때에 한 사람의 손에 시아버지 유다로부터 받아두었던 담보물들을 건네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시아버지 유다에게 가서 내가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보십시오. 이 도장과 끈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입니까라고 말해 주십시오. 물론 두 말 할 것 없이 시아버지는 즉시 그 물건들을 알아보았으며, 그 때 유다는 26절과 같이 그는 나보다 옳도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악하고 너는 나보다 의롭다한 것입니다.

자신의 과오를 깨달은 유다는 며느리를 죽일 수 없었습니다. 그 후 다말은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아기가 손을 쏘옥 내밀고 나오고 있었습니다. 산파가 손목에다 홍색 실을 감아 두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손을 안으로 다시 끌어 들였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동생이 나오자 "이 밀치고 나온 놈!" 하고 산파가 말하였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베레스라고 지었습니다. 베레스는 터뜨림’, ‘헤지고 나옴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뒤따라 손에 홍색 실로 손목이 묶인 아이가 뒤에 나오니 아이 이름을 세라라고 하였습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은 다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델리치라는 유명한 구약의 주석가는 다말을 가리켜 구약 성경의 기준에 따라보면 거룩한 여인 성녀라고 표현했습니다. 다말이 낳은 이 베레스의 혈통에서 훗날에 다윗이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족보에 올려지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1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그러면 어떻게 다말이 다윗의 조상이 되고 예수님의 족보에 올려지게 된 것입니까? 어떻게 이방여인이요, 과부요, 자식도 없는 비참한 운명의 다말이라는 여인이 성녀, 거룩한 여자가 되었겠습니까? 오늘 우리들의 윤리 도덕으로 본다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무엇보다 다말은 자기의 운명을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여자라는 운명, 이방인으로 태어난 운명, 남편을 잃고 시아버지에게 쫓겨나 친정집에서 눈치 보며 지내야 하는 비참한 운명을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말은 자신의 인생을 운명에 맡겨 놓고 살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녀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였습니다. 비록 우리가 보기에 비정상적인 방법이었지만 그녀는 그것이 자신이 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라 믿었습니다. 영어 속담에 "God helps those who help themselves." 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입니다. 번개 치는 폭풍우 속에 연을 띄운 일화로 유명한 Benjamin Franklin은 달력을 만들어 여기에 하루하루 격려가 될 만한 말들을 적어 넣었는데, 이 격언도 그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라 생각하면 나서서 움직이고 행하는 믿음, 그것이 오늘 우리들에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숙명론, 운명론을 믿지 않습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그는 둘째로서 장자의 명문을 얻을 수 없는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도전하여 장자의 명문을 얻게 됩니다. 진정 우리가 어떠한 모습으로 태어났고 어떠한 환경 속에서 살아갈 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확 바꾸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운명에 인생을 맡겨 되는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찬송가 515장은 이렇게 노래합니다.뜻 없이 무릎 꿇는 그 복종 아니요 운명에 맡겨 사는 그 생활 아니라 우리의 믿음 치솟아 독수리 날듯이 주 뜻이 이뤄지이다 외치며 사나니이 찬송은 암울했던 독재시대 때에 젊은이들이 즐겨 불렀던 찬송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남편도 자식도 없이 비참하게 버림받은 여인들을, 세상에서 비난 받는 죄인들을, 이방 여인들을 이 세상을 구원할 메시야를 이 땅에 오게 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통로로 사용하셨고 예수님의 족보에 올려놓으셨습니다. 다말, 라합, 룻과 밧세바 등이 그러한 것입니다. 결국 예수 안에서는 과부도, 창녀도 죄인도 이방인도 남자나 여자도 거룩한 삶으로 바꾸어지는 그런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구별이 없음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3:28절은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귀한 진리 하나를 깨닫게 됩니다.

유다는 비록 처음에는 며느리 다말을 용서할 수 없는 죄인으로 판단하고 그녀를 죽음의 형벌로 다스리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곧 그녀의 그런 행위의 근본원인이 자기 자신에게 있었음을 깨닫고는 그녀를 자기보다 의롭다고 인정하였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여러분 같으면 사람들 앞에서 그것을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다말이 옳다고 인정하는 것은 자신의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를 싫어합니다.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밝히기 꺼려합니다. 자신의 체면, 자존심 때문입니다. 이번이 총회에서 명성교회 김삼환목사께서 깜짝 나타나 사과문을 발표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교계의 다양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못했고 저희 교회를 향한 애정어린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한국교회에 많은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한 마음을 전하며 깊은 유감을 표합니다. 모든 것은 저의 부덕의 소치라고 하면서 부족한 점을 반성하고, 교회를 섬길 수 있도록 잘 품어주셨으면 좋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구체적으로 세습을 했는데 잘못했다. 그러니 그것을 거두겠다 라는 말은 없습니다. 그래서 진정성이 없다. 면피성 발언이다는 반발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총회에서 수습안 결의를 통해 2021년에는 아들 김하나목사가 정식으로 목회할 수 있도록 세습을 합법화 해 준 꼴이 되어 후폭풍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물론 이 일을 기뻐하고 잘 되었다, 다행이다 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마음에 안 든다 해도 총회의 결의이기에 존중해야 한다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단지 세습을 용인한 차원을 넘어 총회 헌법을 유린하고 하나님의 정의를 그르치고 재물의 신 맘몬에 굴복한 처사이기에 더욱 비통해 하는 것입니다. 장신대 설교학 김운용교수는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대한예수교 장로회(통합) 총회 헌법 2861호가 그렇게 명확하게 말해주는데도 1년 전, 직전 총회(103)에서 그렇게 선명하게 드러났고 지난 8, 총회 재판국이 그건 위법이라고 자정이 다 된 시간에 세상과 교계에 그렇게 선명하게 판결문을 읽어 주었는데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지 않고 그분의 주권도 인정하지 않는 세상도 그렇게 선명하게 교회는 그래서는 안된다고 말해 주는데도

교단의 신학을 책임지는 신학자들이 한마음 되어 '개혁된' 교회는 그래선 안된다고, 아니 그럴 수 없다고 그렇게 오랜 시간 성명서로, 글로 외치고 외쳤는데도 수많은 젊은 신학도들이 길거리 땅바닥에 앉아 햄버거와 밥버거로 식사 대신하며 그 먼길 포항까지 달려가 그렇게 목이 터져라고 외쳤고 2년동안이나 그렇게 줄기차게 이러면 한국교회 미래가 없어지는 것이라고 눈물로 선배들에게 호소하고 호소했는데도

한국교회 미래를 걱정하는 젊은 목회자들이 그래도 통합측 교단이 한국교회 마지막 보루라고, 우리마저 넘어지면 이 사회는 교회와 복음에 등을 돌릴 것이라고 그렇게 한결같이 외치고 외쳤는데도

세상이 교회를 향해 이젠 걱정을 넘어 절망을 하는데도 이제 종기가 되어 곪고 있는데도 자기 살은 그리도 도려내기가 어렵더란 말이냐? '이젠 교회를 떠나야겠다'는 젊은 세대를 향해 그 분명한 이야길 왜 못한다는 말이더냐? 돈과 권력 앞에서 그렇게 쉽게 무릎을 꿇었단 말이냐?

새문안교회를 섬기셨던 이수영목사님은 너무 화가 나서 밤잠을 설쳤다고 하면서 총회에서 통과된 수습전권위원회 수습안이라 하는 것은 한 마디로 명성집단과 김씨 부자에게 백기투항한다는 항복문서에 불과하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가운데 우리 동기 목사들 가운데서는 교단을 떠나야겠다는 말도 합니다. 그런 가운데 봉화군 소천면 분천리에 있는 옥방교회에서 전도사때부터 시무한 동기 목사는 저는 꽤 오래 전에 기독교농민 운동하시는 분들과 생각을 달리 했습니다. 그분들은 한국교회에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교회를 모두 떠났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저는 교회에 남아있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마음 다짐을 했습니다. '내가 변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변한다.' 그후에 비록 노회 총회에 발을 들여놓기는 했지만 지금도 그런 생각을 다시 하려고 합니다. 모두 변하지 말고 끝까지 붙어 있어 있기를 바랍니다.”

이사야 814절 이하를 보면 그는 성소도 되시지만, 이스라엘의 두 집안에게는 거치는 돌도 되시고 걸리는 바위도 되시며, 예루살렘 주민에게는 함정과 올가미도 되신다. 많은 사람이 거기에 걸려서 넘어지고 다치며, 덫에 걸리듯이 걸리고 사로잡힐 것이다. 이사야는 도무지 하나님을 믿지 않고 불의한 길을 걸어가는 아하스 왕과 백성들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외친 것입니다.그러면서 이사야는 비장하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께서 비록 야곱의 집에서 얼굴을 돌리셔도, 나는 주님을 기다리겠다. 나는 주님을 의지하겠다.

장신대 일부 교수들은 총회의 명성교회 세습관련 결의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했고 장신대 목연, 신대원 출신 저희 동기들도 뜻을 모아 성명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물론 일방적으로 총대들의 잘못을 규탄하거나 누구를 미워하는 것이 아닌, 그리고 우리가 더 의롭고 잘 나서가 아닌 우리도 죄인이며 우리 모두의 잘못임을 인정함으로 애통하며 회개하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끝까지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합니다. 당시 3.1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일제의 감옥에 갇힌, 한국의 근대 소설가 심훈은 어머니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어머님! 우리가 천번 만번 기도를 올리기로서니 굳게 닫힌 옥문이 저절로 열려질리는 없겠지요. 우리가 아무리 목을 놓고 울며 부르짖어도 크나큰 소원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리도 없겠지요. 그러나 마음을 합하는 것처럼 큰 힘은 없습니다. 한데 뭉쳐 행동을 같이하는 것처럼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우리들은 언제나 그 큰 힘을 믿고 있습니다."

 

여러분 만일 유다가 자신의 자존심과 체면을 지키기 위해 다말이 제시하는 증거물에도 불구하고 양심을 속이며 자신의 무관함을 주장하고 다말의 행위의 불가피성을 전면 부인하며 서둘러 다말을 죽여 없앴다면 그렇게 해서 자신의 범죄와 수치를 영원히 숨기려 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만일 그랬다면 다윗과 예수님의 조상이 되는 베레스는 태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레스가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뒤늦긴 했으나 유다의 자기 자신의 잘못에 대한 깨달음과 솔직한 고백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는 나보다 옳도다한 이 유다의 깨달음과 고백을 귀히 여기시고 그의 자손 가운데에서 다윗을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시고, 또 그의 혈통에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게 하시는 크고 놀라운 은혜의 역사를 이루신 것입니다. 유다의 후손 다윗도 자신이 범죄하였음을 공개적으로 시인하였고 또한 예수님은 죄가 없으심에도 인류의 모든 죄를 다 뒤집어쓰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수 많은 생명을 구원하여 주셨고 또한 구원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온갖 갈등과 죄악된 일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인 교회에서조차도 어리석고 부끄러우며 낯 뜨거운 일들이 벌어지곤 합니다. 네가 잘했느니 내가 잘했느니 싸우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서로 자신이 옳고 남이 틀렸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갈등하게 되며 오해와 미움을 증폭시키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들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만약 주님이 우리를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떠나고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식어지면, 우리 욕심과 세속에 사로잡히게 되면 우리도 추악한 일을 저지르는 장본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근신하여 깨어 있지 못하면 언제 마귀의 유혹에 빠져 부끄러운 자리에 들고 교회에 큰 심려를 끼칠지 모릅니다. 자기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손가락질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유다는 그래도 뒤 늦게 서라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옳지 못했음을 시인했습니다. 그것도 혼자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입니다. 공개적으로 말입니다. 결국 유다는 다말을 살리기 위해, 다말이 옳음을 알리기 위해 자신의 부끄러움을 드러낸 것입니다. 참으로 이는 용기 있는 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처음부터 잘못하지 않고 처음부터 신앙공동체를 떠나지 않고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을 구했다면 이러한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뒤늦게라도 깨닫고 시인하는 것, 돌이키는 것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총회나 명성교회나 이렇게 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옛날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그 때로 돌아갈 수 있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두다 죄인입니다. 모두 다 부끄러운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을 향해 그는 나보다 옳도다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네가 잘났느니 내가 잘났느니, 네가 높으니 내가 높으니 다투던 일이 있었던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어떤 일을 하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서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 또한 여러분은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아 주십시오.” 라고 사도바울은 권면합니다.

다른 사람을 낫게 여기는 사람, 다른 사람의 옳음을 인정해 주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해 주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라면 그리고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주님의 말씀대로 살려 하는 성도들이 모인 교회라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그 교회에 크나큰 은혜와 복을 베푸실 것입니다. 이사야 86~8절은 고요히 흐르는 실로아 물로 상징되는 조용히 돌봐주시는 하나님을 싫어하고, 이방세력을 의지하여 사대 정신에 사로집힌 유다에 하나님은 그들이 의지하는 열강 즉 유프라데스 강으로 상징되는 앗수르를 끌어다가 목에까지 차는 재난을 만나게 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좋아하니, 유다로 밀려들고, 소용돌이치면서 흘러, 유다를 휩쓸고, 유다의 목에까지 찰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하나님께서 날개를 펴셔서 이 땅을 보호하신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하는 것은 외세도 아니고 재물, 맘몬이나 권력도 아닌 바로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임마누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자비로운 손길로 말미암아 우리가 보호를 받고 용서와 평안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분의 날개 그늘 아래 머물러야 합니다. 우리 위해 목박히시고 아낌없이 그 귀한 생명을 내어 주신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의지하고 그의 친절한 팔에 안겨야 합니다. 그리고 이 민족과 한국교회가 우리 교단이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뜻에 순종하도록 마음을 모아 기도하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교회라면,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기 위한 진리의 선한 싸움을 계속해야 합니다. 사랑이 정의라는 믿음을 실천하면서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말씀은 다말을 통하여 결코 비극적인 현실적 운명을 저주하지 않고 그 운명에 도전한 그 정신을 보여 줍니다. 또한 유다를 통해서 그는 나보다 옳도다하며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바로 이러한 마음으로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선한 일을 이루시며, 우리가 우리의 잘못을 깨달고 회개할 때에 용서해 주시고 새 길을 열어 주시는 하나님께 모든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2019929일 주일 낮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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