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요셉 | 박승남 | 2019-10-13 | |||
|
|||||
[성경본문] 창세기39:1-6절 개역개정1.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 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3.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4.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5.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6. 주인이 그의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하고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 창39:1~6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요셉 사람들이 싫어하는 사람이 있고 좋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미국 사람에게 가장 좋아 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90%가 링컨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태리 사람들에게 가장 좋아 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선 예전에는 구스 히딩크를 가장 좋아한다고 답하기도 했고 김연아를 가장 좋아하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이순신장군과 세종대왕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성경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이는 예수님을 빼고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아마 요셉일 것입니다. 성경에서 아주 극적인 사람 그러면서 모든 이들에게 특히 청소년들에게 귀감이 되는 인물은 바로 요셉입니다. 요셉은 아들을 낳지 못해 오매불망하던 라헬이 낳은 아들로 그 이름의 뜻은 더하다 즉 플러스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 가정에 더해 주신 아이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잘 자라 이름그대로 플러스가 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49장 22절을 보면 야곱은 요셉을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라고 축복합니다. 포도 나뭇가지가 담을 넘어 지나가는 사람들도 따 먹을 수 있도록 풍성한 열매를 맺을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입니다. 이 두 아들이 다 지파로 분리되어 각각 땅을 차지하였습니다. 그래서 요셉만 두 배를 받았습니다. 요셉의 축복은 자손으로 담을 넘은 가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요셉은 아버지 야곱과 그 가정과 당시 중동 전 지역의 미래와 희망이 되었습니다. [나는 성실과 정직으로 미국을 점령했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 백영중은 널리 알려진 인물이 아닙니다. 그저 몇몇 일간지에 슬그머니 소개되었을 뿐입니다. 그는 이북 평양에서 출생해서 공산당이 진주한 다음에 아버지가 공산당에 총살당한 것을 보고 1950년도에 혼자 서울로 피난와 고생 고생하면서 공부했습니다. 그러다가 1956년에 흥사단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돈도 없고 영어도 할 줄 모르는 상태로 말입니다. 그런데 미국으로 유학간다는 것이 그 당시로서는 특권계층의 특별한 사람이라야 가는 것이지 본인처럼 혼자 남한에 와서 살면서 미국에 온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의 인도가 아니면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그는 오직 정직과 성실로 미국에서 살겠다는 모토로 무일푼에서 패코라는 회사를 창업해 미국 철강왕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삶의 기적이 아닐 수 없는데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 사실을 차분하게 적어 놓았습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본문 1절을 보십시오.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 그것이 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형통한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형통하다를 원어를 보면 '앞으로 나가다, 발전하다, 번영하다' ‘성공하다’ ‘형통하다’를 의미합니다. 요셉이 진보한 사람, 발전한 사람, 번영한 사람, 성공자, 형통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39장에서만 봐도 보디발의 집의 가정 총무 및 총지배인이 되었습니다. 물론 요셉이 하루 아침에 보디발의 모든 소유를 맡아 책임지는 청지기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처음에 팔려가서는 보디발의 농장이 있는 들로 나가서 더위를 무릎쓰고, 인간적인 대접을 받지 못하고 일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2절과 같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들로 나가 일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셉이 형통한 자가 된 시작입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서 주인이 요셉을 눈여겨보기 시작했고 그의 성실에 감동한 주인은 마침내 요셉을 집안사람과 소유를 맡는 책임자로 세웠습니다. 가정총무가 된 것입니다. 그것이 4절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는 6절과 같이 총지배인이 되었습니다. 사실 4절과 6절을 보면 문구가 비슷하여 그 말이 그 말 같습니다. 그런데 주목해 보아야 할 단어들이 있습니다. 우선 4절과 5절의 총무와 주관하게 하다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원어로 같은 단어로 dq'P;(파카드) 세다, 계수하다, 돌보다, 시찰 혹은 방문하다, 임명하다입니다. 그러니까 처음에 요셉은 그 집 소유를 헤아리고 사람들을 돌보고 시찰하고 방문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 결과를 주인에게 때때로 보고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주목해 보아야 할 단어가 4절과 6절에 나오는 위탁이라는 단어입니다. 우리 성경으로 보면 똑같지만 원어로는 다릅니다. 4절의 위탁은 @t'n:(나탄) 두다, 놓다, 세우다 등 입니다. 그리고 6절의 위탁은 bz"[;(아자브) 떠나다, 남기다, 버리다, 놓아주다입니다. 그러니까 보디발에 4절에서는 요셉으로 하여금 자기 소유와 사람들을 헤아리고 돌보고 확인하고 보고하도록 세웠습니다. 그런데 6절에 가면 이제 요셉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자신은 집을 돌보는 일에서 완전히 손을 뗐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까요? 6절을 보면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라는 것으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여기 간섭하다는 말은 우리가 잘 아는 [d'y:(야다)라는 단어로 알다, 이해하다, 알아채다 관찰하다 입니다. 그런데 알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하도 일을 잘하니, 그가 하는 일마다 잘 되니까 이제는 아예 그에게 다 맡겨서 자신이 먹는 음식에나 신경을 썼지 다른 것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를 얼마나 신뢰했는지를 잘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 가정 총무에서 총지배인이 된 것입니다. 요셉은 어느 날 애굽의 바로 왕의 경호를 책임지는 경호실장 보디발의 집안의 모든 것을 책임지는 청지기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 보면 요셉은 결코 그렇게 될 수 없는 3가지 요인이 있었습니다. 1)말이 안 통했습니다. 요셉은 가나안에 살다가 문화, 언어가 다른 애굽으로 팔려갔기 때문입니다. 그냥 자유인이라도 말이 안 통하면 많이 불편한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노예입니다.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데 물을 가져오라 하는데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서 가만히 서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그가 언어를 배우기까지 얼마나 고생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집트 왕자를 보면 야곱이 애굽 말을 배워주지만 그것은 상상일 뿐 실제는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2)보디발의 집에는 애굽사람 일꾼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굴러들어온 돌입니다. 그런 그가 주인의 마음에 들게 되었을 때 그 다른 일꾼들이 가만히 있었을까요? 분명 모함, 시기가 있었을 것이고 왕따 취급하는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애굽 사람들 입장에서 볼 때는 출신 배경도 없었습니다. 3)또 요셉이 가정총무가 되는 것이 불가능한 이유 중의 하나가 그의 마음에 있는 한(恨) 때문입니다. 여러분 요셉은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렸습니다. 자기가 보기에는 그렇게 팔릴 이유가 없습니다. 더욱이 팔리기 전 자기는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해서 형들이 있는 곳까지 물어 물어 그 먼길을 찾아갔는데 왈칵 붙잡아 7미터 정도의 광야 구덩이에 던졌습니다. 여러분 마침 구덩이가 말랐기에 망정이지 물이 있었다면 익사하였을 것입니다. 창세기 42:21절을 보면 요셉의 형들이 곤경에 처하자 이렇게 말하는 것이 나옵니다. 21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요셉이 언제 애걸했을까요? 구덩이에 갇혔을 때, 그리고 팔려갈 때이지요. 하지만 형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괴로움이 자기들에게 임했다는 것입니다. 형들은 요셉이 애걸할 때 듣지 않았을 뿐 아니라 창세기 37장 25절 말씀처럼 앉아서 여유 있게 밥을 처먹고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비정한 일입니까? 그러다가 건져주어 안도의 숨을 내쉬었는데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돈을 받고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자신을 팔아넘기기 위한 것이었으니 얼마나 큰 분노, 절망감, 한이 컸겠습니까? 여러분 한은 탓으로 연결됩니다. 모든 책임을 남의 탓으로 돌리고 일도 제대로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핑계만 댑니다. 여러분 모두 다른 식구 탓만 하는 가족들이라면 그 가정은 불행합니다. 하지만 내 탓입니다. 하는 가정은 행복합니다. 그런데 요셉은 언어의 장벽, 그 집안의 다른 일꾼들의 시기와 질투, 그리고 형들에 대한 원한과 분노를 극복하고 모든 사람들 위에서 그들을 다스리는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1.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헬렌켈러(Keller, Helen Adams) [1880.6.27~1968.6.1]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녀는 태어난 지 9개월 만에 지독한 열병으로 시각장애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다가 귀가 있지만 들을 수 없고, 입이 있지만 말할 수 없는 삼중고통을 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런 소망 없이 비참한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었던 아이였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 애니 설리반이라는 가정교사를 통해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후 피나는 노력을 하여 1900년에 하버드 대학교 래드클리프 칼리지에 입학하여, 세계최초의 대학교육을 받은 맹농아자로서 1904년 우등생으로 졸업하였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일이지요. 그런데 어느 날 헬렌켈러에게 어느 기자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그녀는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눈이 있지만, 꿈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꿈이 없는 사람입니다" 꿈이 없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노력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렇습니다. 가장 불행한 사람은 꿈이 없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요셉은 꿈의 사람입니다. 우리는 37장에서 요셉의 꿈을 보았습니다. 그 꿈의 내용은 요셉이 그 가문의 첫째가 되는 꿈입니다. 요셉이 장자가 되어 앞으로 가문을 이끌어 갈 꿈입니다. 그런데 형들의 입에서도 왕 또는 통지자란 용어가 나오는 것처럼 이 꿈은 가문의 왕이요 통치자가 되는 꿈일 뿐 아니라 그 이상의 통치자가 되는 꿈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꿈입니다. 이 때 요셉은 자신은 이 꿈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잘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이 꿈이 그의 인생을 지탱한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꿈은 앞으로 요셉의 미래를 인도해 갈 꿈입니다. 그 꿈이 그의 삶. 그 인생. 그 미래를 이끌어 가는 위대한 비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이 꿈 때문에 많은 어려움도 겪게 되었지만 결국 이 꿈을 부여잡은 요셉 그는 이 꿈이 이뤄지는 것을 분명히 체험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요셉의 꿈은 하나님이 주신 꿈이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시105:17~19절을 보면 이를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여러분 시편 119:92절을 보면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천리포 수목원 원장으로 수고하셨던 조연환장로님이 계십니다. 이분은 학력이 그 다지 높지 않고 빽도 없었습니다. 19살에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최말단 9급 공무원으로부터 출발하여 공직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담임 목사님께서 심방 오셔서 고린도전서 3장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12~15절) 그러니 나무나 풀로 인생의 집을 짓지 말고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집을 지으라고 권면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이 분은 그 말씀을 붙잡고 최선을 다해 살았습니다. 그러다 산림청 부청장까지 올라갔습니다. 하지만 몇 차례 모함을 받아 국정감사를 2번이나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담임목사님이 장로님께 틀림없이 산림청장이 될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장로님은 믿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마음에는 두 번씩이나 국정감사를 받았지만 이상이 없었다면 청장이 되는 것은 문제가 없을 것이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가 지났는지 말씀대로 2004년 제25대 산림청장직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높은 자리에 오른다는 것은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기가 정말 실력이 있든지 아니면 술수나 빽을 쓰든지 아니면 하나님이 도우셔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분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되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냥 도우신 것이 아니가 말씀을 붙들고 성실히 일하는 모습을 보시고 도우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나에게는 그런 꿈이 꾸어지지 않을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런 방법으로 우리에게 꿈을 주시지 않을지라도 이미 우리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여러분들이 말씀을 가까이 하고 그 말씀을 묵상하면 그 말씀 속에 여러분에게 꿈을 주십니다. 성경에 나오는 약속의 말씀을 여러분에게 주시는 약속, 비전, 꿈으로 삼으면 그 말씀이 여러분을 인도하여 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할 것입니다. 2.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여러분 물론 성경에는 요셉이 노력했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가 이집트로 팔려가서 바로 왕의 경호실장 보디발의 집에서 그 재산까지도 관리하는 청지기, 가정 총무가 될 수 있었을까요? 4절과 6절을 보겠습니다.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6 주인이 그의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하고 여기 손에 위탁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리고 22, 23절을 보면 요셉의 손에 맡겼다는 말도 나옵니다. 뿐만 아니라 원문으로 보면 3절에 보디발은 여호와께서 그 즉 요셉의 손에 성공을 주시는 것을 발견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요? 손은 일하는 도구입니다. 섬기는 도구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의 손에 성공, 형통을 주셨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가 그만큼 열심히, 성실하게 일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디발에 요셉의 손에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훗날 감옥에 갇히게 되었지만 그 때도 간수장이 그의 손에 감옥살림의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잠언 21:5절을 보면 부지런한 자의 경영은 풍부함에 이를 것이나 조급한 자는 궁핍함에 이를 따름이니라 또한 잠언 13:4절을 보면 게으른 자는 마음으로 원하여도 얻지 못하나 부지런한 자의 마음은 풍족함을 얻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톨스토이는 '게으른 자의 머릿속은 악마가 집을 짓기에 알맞은 장소이다"라고 말했고, 벤자민 플랭클린은 "부지런한 사람은 만물을 황금으로 만들고, 무형의 시간까지도 황금으로 변화시킨다. 일하는 농부는 앉아있는 신사보다 존귀하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죄악은 게으름과 권태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근면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부지런한 사람들이 힘을 모아 이루어 가는 사회는 건강하게 발전합니다. 영어에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란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영어 격언 Heaven helps those who help themselves.의 번역인데, 애초에 누가 번역을 했는지 모르지만 오역에 가까운 졸역입니다. 제대로 된 번역은 "하늘은 스스로 노력하는 자를 돕는다"입니다. 왜냐하면 help oneself는 "스스로 돕는다"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무엇을) 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Help yourself.는 우리말 "드세요" "갖다 쓰세요" 등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바로 요셉이 그 비참한, 극심한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스스로 무엇을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떤 자리가 주어지든지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3.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요셉의 생애에 대해서????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39장 2절과 3절과 21절과 23절에 나오고 5절은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께서 함께 하셔서 그의 모든 불행을 바꾸어 유익하게 해 주셨기 때문에 가장 밑바닥에서도 형통한 자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대로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렇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무슨 일을 당해도’ 즉 좌절, 실패, 불행 병든 것, 죽는 것 등 인간의 고통과 시련의 모든 것을 포함해서 이러한 일을 당해도 하나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유익이 되도록 사용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가면, 때를 기다리면 시련과 고난과 고통, 문제도 결과적으로 복이 되고 선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고 한경직 목사님은 젊어서 폐 한 쪽을 절제하는 수술을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한 쪽 폐가 없는 사람을 하나님은 사용하셔서 그처럼 훌륭한 목사가 되게 하셨습니다. 목사님은 한 쪽 폐를 절제하는 수술을 받을 때 하나님을 찾았고, 그 때 하나님을 만났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고 합니다. 그분의 아름다운 생애는 바로 이런 고통의 순간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였기에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요셉의 고난 중에 함께 계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큰 복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임마누엘, 하나님께 함께 하시는 것,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시는 것 이것이 가장 큰 복인 줄 믿습니다. 고난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고통이 저주 그 자체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께 계시지 않는 것이 문제요, 저주인 것입니다. 시 127:1~2절은 이렇게 말씀하기도 합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2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이와 반대로 시128편 1~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요셉은 어릴 때 일찍 어머니를 여의었습니다. 하지만 놀라운 사실은 요셉이 어린시절부터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어렸지만 그의 마음은 하나님으로 가득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라는 구절의 말을 요셉의 입장에서 본다면 요셉이 하나님을 잊은 적이 없다는 의미가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책임이라고만 생각하게 됩니다. 그 반대의 입장, 즉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한다고 생각해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잊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요셉은 한 순간도 하나님을 잊어버린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한 순간도 요셉과 떨어져 있지 않았다는 것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태복음 1장 23절을 보면 예수님 탄생을 예고하면서 천사는 요셉에게 말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그리고 마태복음 28장 20절을 보면 우리 구주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이 땅에 구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임마누엘입니다. 그러니 걱정, 근심한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좌절하고 낙심하고 비관하고 원망 불평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 위해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하신 분이십니다. 자기 생명까지 아끼지 않고 내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언제나 변함이 없이 떠나지 않고 함께 하여준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도 하나님은 함께하십니다. 억울하게 손해를 볼 때도 하나님은 함께하십니다. 함께 하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함께 하시면서 인도하시며 이끌어 주십니다. 도와주시고 복을 주십니다. 맨 밑바닥에 떨어졌어도 그것을 극복하고 형통하게 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듣고 그 말씀을 가슴에 품을 때 하나님은 우리 속에 꿈을 주시고 그 꿈을 이루도록 늘 함께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잠언 3:5~6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아멘! 2019년 10월 13일 주일 낮 예배 설교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