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질긴 유혹을 이긴 요셉 | 박승남 | 2019-10-2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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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창세기39:7-23절 개역개정7. 그 후에 그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8.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아내에게 이르되 내 주인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탁하였으니 9.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10.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11. 그러할 때에 요셉이 그의 일을 하러 그 집에 들어갔더니 그 집 사람들은 하나도 거기에 없었더라 12. 그 여인이 그의 옷을 잡고 이르되 나와 동침하자 그러나 요셉이 자기의 옷을 그 여인의 손에 버려두고 밖으로 나가매 13. 그 여인이 요셉이 그의 옷을 자기 손에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감을 보고 14. 그 여인의 집 사람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보라 주인이 히브리 사람을 우리에게 데려다가 우리를 희롱하게 하는도다 그가 나와 동침하고자 내게로 들어오므로 내가 크게 소리 질렀더니 15. 그가 나의 소리 질러 부름을 듣고 그의 옷을 내게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갔느니라 하고 16. 그의 옷을 곁에 두고 자기 주인이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려 17. 이 말로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데려온 히브리 종이 나를 희롱하려고 내게로 들어왔으므로 18. 내가 소리 질러 불렀더니 그가 그의 옷을 내게 버려두고 밖으로 도망하여 나갔나이다 19. 그의 주인이 자기 아내가 자기에게 이르기를 당신의 종이 내게 이같이 행하였다 하는 말을 듣고 심히 노한지라 20.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21.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22.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23.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창39:7-23 끈질긴 유혹을 이긴 요셉 1945년 4월 9일 디트리히 본 회퍼는, 나치의 의해 처형되었습니다. 그는 1906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겨우 40세였습니다. 본 휘퍼는 히틀러에 대항한, 목사요 신학자였습니다. 그의 작품 가운데 50쪽 내외로 된 ‘유혹’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본 회퍼는 유혹에 관해, 가장 탁월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잠자고 있는 듯하지만, 갑작스럽고도 맹렬하게 욕망을 향해 달려가는 성향이 있다.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욕망은 육신을 사로 잡아 정복한다. 갑작스럽게 비밀스런 불꽃이 연기를 피우며 끓어오른다. 육신은 타오르며 불꽃 가운데 휩싸인다. 이것이 성적인 욕망이든, 야망이든, 허영심이든, 복수심이든, 명성과 권력에 대한 사랑이든, 돈에 대한 욕심이든, 혹은 세상이나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야릇한 갈망이든 상관이 없다. 하나님 안에서의 기쁨이 우리 안에서 사러져 가는 대신, 우리는 피조물 안에서 우리의 모든 기쁨을 찾는다. 이러한 예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의 계시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에 대한 모든 실재성을 잃어버리게 되고, 피조물에 대한 갈망만이 실재하게 된다. 실제하는 것은 사탄뿐이다. 여기서 사탄은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증오감을 심지는 않지만, 하나님을 잊어버리도록 마음을 빼앗아간다....이렇게 일어난 욕망은 가장 깊은 암흑으로, 인간의 마음과 의지를 덮어버린다. 명확한 판단력과 결단력의 힘은 우리에게서 상실되어 버린다....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항하여 일어나는 것은 바로 이 때이다.’
유혹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포함하여, 지구상에 살았던 그 누구도 자유롭지 않을 것입니다. 유혹은 타락한 이 세상에서, 피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유혹은, 여러 얼굴로 나타납니다. 물질에 대한 욕망으로 드러나는, 물질에 대한 유혹이 있습니다. 작은 물건에서부터, 집 같은 큰 것도 있습니다. 명성, 권위, 다른 사람을 다스리고자 하는, 지배욕을 갈망하는 권력의 유혹도 있습니다. 국회의원, 회장, 기관장, 위원장 같은 직함들에 대한 욕망도, 여기 포함될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직은 필요한 것이고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을 부정적으로 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육욕(정욕)적인, 육체에 대한 유혹이 있습니다. 성폭력 문제와 노벨상 수장자 명단 사전 유출 문제로 작년에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선정되지 못하고 올해 두 명의 수상자를 발표하게 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또한 프랑스 경찰이 지난 10월 17일 강간, 성적 학대 혐의로 초교파 그리스도교 수도 공동체 떼제(Taizé) 현직 수사 한 명을 체포했습니다. 보도에 따르면, 피해를 호소한 이는 해당 수사가 2003년부터 자신을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성적으로 학대하고 조종했다고 주장했고 제보를 받은 알로이스 원장수사는 즉시 수사기관에 알렸습니다. 그리고 알로이스 원장수사는 "우리는 모두 충격에 빠졌다. 모든 빛이 밝혀지길 바란다. 누군가를 그렇게 지배하는 것은 우리 삶의 방식과 맞지 않다. 우리는 피해자 곁에 설 것이며 그를 돕고 지지하기 위한 모든 것을 다 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요셉도 유혹을 받았습니다. 보디발의 집으로 팔려간 요셉은 그 집에서도 가장 낮은 노예로 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얼마나 큰 고통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지 그는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자리가 자기에게 주어지든지 간에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성실하게 일했고, 또 그 위에 하나님이 도우시므로 그가 하는 모든 일들이 잘 되어갔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요셉을 이끄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보디발의 총애를 얻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지위는 한 단계 한 단계씩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먼저 그는 들로 나가지 않고 집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39:2). 세월이 흐르면서 주인은 요셉을 눈 여겨 보아왔고, 그의 성실에 감동 받아 마침내 큰 결단을 하였습니다. 그곳은 자신의 온 집을 요셉에게 맡긴 것입니다. 자신이 소유한, 모든 소유물을 다스리는 권한을 주었습니다(6). 요셉이 그 가정에 모든 책임을 지면서부터 집안일과 밭의 모든 분야가 두루 형통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복도 요셉의 지위만큼이나 확대되었습니다. 요셉이 너무 일을 성실하고 진실하게 잘 하니까 ‘자신(보디발)이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감시, 감독할 필요도 보고를 받을 필요도 못느꼈습니다. 신뢰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주인 내외의 신임이 날로 두터워진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그 결과 그는 내실(內室)까지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것은 고난 중에 함께 계시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내려주신 복 중의 복이었습니다. 요셉은 정말, 형통하고 성공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공은, 공격받기 쉬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번영의 때는, 유혹의 여신이 우리를 기다려며 누워있는 곳입니다. 창세기는 이렇게 언급합니다. 그 후에 그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다시 말해서 ‘이러한 사건 즉 강렬한 유혹이 그러한 성공 뒤에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보디발 아내의 유혹은, 노골적이고 끈질긴 접근입니다. 큰 성공은, 피할 수 없는 공격받기 쉬운 상황으로 이끕니다. 토머스 카알라일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역경은 종종 누구에게나 힘들다. 그러나 역경을 견뎌내는 사람이 백 사람이라면, 번영의 때를 실족하지 않고 제대로 견뎌내는 사람은 단지 한 사람 정도에 불과하다.’ 번영에 따르는 유혹은, 역경의 때의 유혹보다 훨씬 강하고 그리고 훨씬, 교활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정 총무 나아가 총지배인이 된 요셉의 마음에는 여유가 생기기 시작하였고, 요셉의 외모도 점점 매력적인 젊은이로 익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가 총 지배인이 되었다고 해도 그의 신분은 여전히 노예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애굽은 성적(性的)으로 몹시 문란한 곳이었다고 합니다. 어디에 예쁜 여자가 있다고 하면 관리들은 사족을 못쓰고 덤벼들던 시대였기 때문에 보디발의 아내도 아주 젊은 나이에 그 미모 때문에 그 집에 들어왔을 것입니다. 게다가 보디발은 성 불구자(고자)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애굽 왕의 최측근은 다 내시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음란한 시대에 사는 젊은 여인이 화려하고 풍성한 집에서 부족한 것 하나 없이 살면서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더욱이 남편이래야 남자 구실도 못하는 사람이었으니 요셉을 볼 때마다 얼마나 탐냈겠습니까! 또 그 당시 사회가 그런 것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시대인 만큼 요셉과 잠자리를 하는 것쯤은 가벼운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저 재미만 보고, 두 사람만 비밀을 지킨다면 누가 알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7절과 같이 주인의 아내는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한 두 번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날마다 끈질기게 요셉을 유혹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여인은 절호의 기회를 얻었고, 요셉을 적극적으로 유혹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집안에는 아무도 없고, 여인과 요셉만 있었습니다. 당시 노예는 주인의 청을 거절할 자유가 없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단호하게 거절하였고 이번에도 자신의 옷을 잡고 노골적으로 유혹하는 여주인의 요구를 거절했는데 자기의 옷을 그 여인의 손에 버려두고 밖으로 나가버렸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그리 단호하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잡힌 옷을 벗어 던지고 달아날 수 있었겠습니까? 여러분 노예가 주인의 청을 거절하는 것은 죽음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이를 알면서도 죽을 각오를 하고 그 요구를 거절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자기의 순결을 생명과 바꾼 것일까요? 8절에는, 단순히 ‘요셉이 거절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안 됩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녀의 유혹의 말을, 그는 뿌리쳤습니다. ’거절하다’(마엔)에는, 강조형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요셉이 유혹을, 완강하게 거절했음을 보여줍니다. 죄가 틈 탈, 조금의 기회도 허용하지 않은 것입니다. 죄는 늪과 같아서, 한 번 발을 들여 놓으면 계속 탐닉하게 됩니다. 마침내는 더 큰 죄악의 자리로, 끌려들어 가기에 이릅니다. 요셉이 유혹에 단호할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입니다. 8~9절을 보십시오.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아내에게 이르되 내 주인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탁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이 말을 보면 요셉의 말을 보면 단호히 거절한 이유는 주인에 대한 충성심때문이었습니다. 요셉은 여인에게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주인님께서는 나를 믿고 계십니다. 그분은 그분의 모든 소유에 대한 책임을 나에게 맡기셨습니다. 내 것이 아닌 유일한 그분의 모든 소유에 대한 책임을 나에게 맡기셨습니다. 내 것이 아닌 유일한 것은 주인님의 부인이신 당신 바로 당신입니다. 나는 결단코 그분의 신뢰를 저버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으니 그것은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는 것이며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이러한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 말씀드린 대로 주인의 아내는 아리따운 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요셉도 한창 젊은 나이였습니다. 이러한 젊은 남녀가 단 둘이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유혹은 지속되었습니다. 유혹에 한 번 저항하면, 그 유혹이 사라질 것이라고 상상한다면 착각입니다. 실제로는, 더 심한 공격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혹에 굴복하는 것은 가장 자연스러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것이 매우 큰 악이며, 자신의 하나님께는 가증스러운 죄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그곳을 빠져나왔습니다. 목사이자 저술가였던 클래런스 매카트니(Clarence E. Macartney)는, 다음과 같이 현실감있게 묘사합니다. ‘이것은 평범한 유혹이 아니었다. 요셉은 목석과 같은, 미라와 같은 자가 아니라 이십대 후반의 붉은 피가 끓어오르는 젊은이었다. 어느 날 우연히 한번 있었던 유혹이 아니라 반복적인 유혹이었다. 전해지는 한 오래 된 이야기에 의하면, 요셉이 유혹하는 여자에게, 하나님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자 그녀는, 침실 안에 우뚝 서 있는 조각된 우상 신 앞에서 그녀의 치마를 벗어 던져 그 흉상을 가리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제, 하나님은 볼 수 없을 거야.” 그러나 요셉은 “나의 하나님은 보고 계십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오늘 본문은 선악과의 의미를 잘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보디발이 요셉에게 한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했을 때 요셉의 입을 통해서 나온 것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집에 모든 것은 네 마음대로 다 해라. 네 마음대로 다 해라. 장사를 해도 좋고 뭘 해도 좋다. 그런데 내 아내만은 손대지 말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그 약속을 어길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아무리 보디발이 요셉을 신임했다고 해도 자기 아내까지 마음대로 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부인까지 줘 버리면 아예 요셉이 그 집에 주인이 되어 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 다 마음대로 해라. 그러나 아내만은 손대지 말라.” 그래서 요셉이 그 아내 하나 손대지 않으므로 청지기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선악과를 지켜야 우리 인간은 행복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어떤 생각을 하셨기에, 어떤 마음을 품으셨기에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시고 사람은 먹으려고 하고 여기에 하나님과 인간의 갈등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먹지 말고 지키기만 하면 너와 나와 평생 같이 살 수 있다”고 하십니다. “선악과 먹지 않고 바른 관계를 형성하기만 하면 에덴동산은 영원히 너희 것이고 생명과도 너희 것이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관계성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선악과는 주일과 십일조이기도 합니다. 요셉 생애에 있어서 하나님은, 이 땅에서 그 무엇보다도 그 누구보다도 실재하는 분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과 관계를 어그러뜨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사단은 이러한 요셉이 눈에 가시같았 겠지요. 그래서 쉽게 포기하고 넘어뜨리려 했습니다. 마침내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을 잡기 위해 덫을 놓았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 덫에 걸러지 않았습니다. 자기 주인을 생각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생각했기에 자기의 옷을 그 여인의 손에 버려두고 밖으로 나가버린 것입니다. 성적인 유혹에 대한, 신약성경의 단 한가지 명령은 ‘도망가라’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이성적으로,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보라고 말하지 않는다. 디모데 후서 2:2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정욕을 피하라’는 권고를, 요셉은 정확하게 따랐습니다. 마침내 보디발 부인의 가졌던 욕망은 분노로 변했습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그 여인이 요셉이 그의 옷을 자기 손에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감을 보고 그 여인의 집 사람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보라 주인이 히브리 사람을 우리에게 데려다가 우리를 희롱하게 하는도다 그가 나와 동침하고자 내게로 들어오므로 내가 크게 소리 질렀더니” 모멸감을 느낀 이 여인이, 오로지 원하는 것은 복수였습니다. 여러분 승리자가 되는 것보다, 승리자로 머무는 것이 더 어려운 법입니다. 왜냐하면 그 자리는, 더 많은 유혹과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요셉은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잘 지켰습니다. 이 땅에, 예수 믿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교회가 많아도 세상이 변하지 않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중병을 앓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멀쩡한 것 같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도처에 악취가 풍깁니다. 정치는 정치대로, 경제는 경제대로, 교육은 또 교육대로, 구태와 악습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런 현실과 무관할까여?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교회는 선한 양심을 가진, 영향력있는 평신도를 만들어 내지 못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신앙은 좋은 것 같은데 세상에 나가면 세상의 악에 맞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말씀하는데 이 세대를 깊이 본받고 따라가고 있습니다. 정의롭지 못하고 진실하지 못하고 정직하지 못하고 여전히 물질과 자리를 탐합니다. 여러분 세상은 변화시키는 주역은, 목회자가 아니라 성도들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세상이 교회를 바꾸고 말 것입니다. 여러 면에서, 매력적이고 귀감이 되는 인물인 요셉은 부당한 대우를 받았고, 역경의 인물이었으나, 기쁨으로 자신의 일을 잘 감당했습니다. 그리고 요즘식으로 말한다면, 요셉은 정직한 직장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직장이나 혹은 어디서든지, 의로움과 정직함을 버리는 것은 영적간음입니다. 혈기 왕성한 나이에 집을 떠나 외로웠을 그에게는, 보디발 아내의 유혹은 그 어떤 것보다 인간적으로 뿌리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이런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고, 심지어 악의 모양까지도 버렸습니다(10). 요셉은 결코, 타협이나 거짓이 없었습니다. 부정한 제안에 대해 거절할 수 있는 용기가 있었으며, 이후에 따를 불이익을 감수했습니다. 결국 여주인의 청을 거절한 요셉은 강간 미수범으로 몰려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감옥으로 들어간 것은 그래도 다행이었습니다. 노예인데다가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자가 되었는데도 죽이지 않고 왕의 죄수를 가두는 감옥에 던져 넣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인은 자기 아내의 호소를 들으면서도 요셉에 대하여 어떤 믿는 바가 있었다는 말인가요? 아니면 충성스런 요셉에 대한 한 가닥의 배려였던가요? 아무튼 요셉은 너무도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다시 세상으로 나갈 수 없는 곳일 수도 있었습니다. 이집트 왕자 요셉편으로 보면 요셉이 감옥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그 외로움과 고통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성경을 보면 요셉은 마치 자기 집에 들어온 사람처럼 평안한 마음으로 한결같이 충실하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참 이상한 사람입니다. 이 땅에 누구도 그런 억울한 일을 당하면, 게다가 캄캄한 미래를 생각하면 미치든지, 절망하고 말았을 터인데, 그는 형통할 때의 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며 산 것입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런 어려움도 이기고 평온을 유지하며 살게 했을까요? 요셉은 비록 감옥에 갇혔으나 자기 관리도 철저하게 했을 뿐 아니라, 매사를 깔끔하게 처리했던 것 같습니다. 그 모습을 간수장은 주의 깊게 보고 있다가 마침내 자기의 모든 일을 요셉에게 철저하게 맡겨버렸다. 요셉은 간수장 아닌 간수장 노릇을 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가만히 보면 요셉의 이야기는 간음의 문제를 넘어 정직의 문제입니다. 정직은, 하나님의 존재인정하는데서 비롯됩니다. 그렇다면 정직은, 곧 신앙의 문제입니다. 진실한 신앙인, 늘 하나님을 의식하며 사는 사람은 정직하고 유혹을 잘 극복하게 됩니다. 물질, 권력, 명예, 정욕적인 유혹 등에서 말입니다. 유혹에 비틀거리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승리자가 되려면 비전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은, 현실의 유혹보다 더 강합니다. 또한 신전의식도 필요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코람데오(Coram Deo) 의식입니이다. (9하)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인간은 착각 속에서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만이 진실하고 정직하며 남에게 아량을 베풀고 신앙 생활도 제일 잘하는 줄로 착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비록 밖으로 드러내놓고 자기 자신을 자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잘난 것으로 생각하며 자기가 사는 방식이 옳은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자신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주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다. 시139편을 보면 하나님은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신다고 고백합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의 말을 다 아십니다. 우리가 쓸데없는 말을 하건 선한 말을 하건 하나님께서 다 아십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 더 나아가 그 안에 들어있는 동기까지라도 꿰뚫어 보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생각을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하는 말을 듣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행동을 보고 계십니다. 이것을 깊이 의식한다면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말과 행동을 할까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러한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그릇된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고 버젓히, 또는 은밀하게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늘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간다면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달라질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14절을 보면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그러므로 우리는 욕심에 끌리지 말고, 성령에 이끌려야 합니다. 시119:9절을 보면 젊은이가 어떻게 해야 그 인생을 깨끗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주의 말씀을 지키는 길, 그 길뿐입니다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시험을 받으셨지만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길, 구원의 길, 생명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식하고 성령에 이끌려 살 때, 말씀을 따라 살 때, 정직하게 믿음으로 살아갈 때 주님이 함께 하시고 범사에 형통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때로 우리는 어리석게도 유혹이 넘어갈 때가 있습니다. 부끄러운 자리, 죄악된 자리에 들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좌절이 되고 하나님 뵐 면목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럴 때 다시금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 지신 주님, 나의 허물과 죄악을 다 짊어지시고 골고다 언덕에 오르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다시 주님 앞에, 주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요셉처럼 살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길을 걷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 다시 일어나서 말씀으로 살고 싶습니다. 주님을 따라 살기 원합니다. 성령에 이끌려 살기 원합니다. 나를 도와주십시오. 십자가를 붙들고 나아가십시오. 주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일어켜 주시고 새롭게 우리의 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2019년 10월 27일 주일 낮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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