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과 흘린 눈물 | 박승남 | 2020-01-1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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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창세기42:6-25절 개역개정6. 때에 요셉이 나라의 총리로서 그 땅 모든 백성에게 곡식을 팔더니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 7. 요셉이 보고 형들인 줄을 아나 모르는 체하고 엄한 소리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이르되 곡물을 사려고 가나안에서 왔나이다 8. 요셉은 그의 형들을 알아보았으나 그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더라 9.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 10.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아니니이다 당신의 종들은 곡물을 사러 왔나이다 11. 우리는 다 한 사람의 아들들로서 확실한 자들이니 당신의 종들은 정탐꾼이 아니니이다 12.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아니라 너희가 이 나라의 틈을 엿보러 왔느니라 13. 그들이 이르되 당신의 종 우리들은 열두 형제로서 가나안 땅 한 사람의 아들들이라 막내 아들은 오늘 아버지와 함께 있고 또 하나는 없어졌나이다 14.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한 말이 이것이니라 15. 너희는 이같이 하여 너희 진실함을 증명할 것이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너희 막내 아우가 여기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여기서 나가지 못하리라 16. 너희 중 하나를 보내어 너희 아우를 데려오게 하고 너희는 갇히어 있으라 내가 너희의 말을 시험하여 너희 중에 진실이 있는지 보리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는 과연 정탐꾼이니라 하고 17. 그들을 다 함께 삼 일을 가두었더라 18. 사흘 만에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노니 너희는 이같이 하여 생명을 보전하라 19. 너희가 확실한 자들이면 너희 형제 중 한 사람만 그 옥에 갇히게 하고 너희는 곡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안의 굶주림을 구하고 20. 너희 막내 아우를 내게로 데리고 오라 그러면 너희 말이 진실함이 되고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니 그들이 그대로 하니라 21.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22.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그 아이에 대하여 죄를 짓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더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핏값을 치르게 되었도다 하니 23. 그들 사이에 통역을 세웠으므로 그들은 요셉이 듣는 줄을 알지 못하였더라 24.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끌어내어 그들의 눈 앞에서 결박하고 25. 명하여 곡물을 그 그릇에 채우게 하고 각 사람의 돈은 그의 자루에 도로 넣게 하고 또 길 양식을 그들에게 주게 하니 그대로 행하였더라 창42:6~25 진실과 흘린 눈물 이러한 말이 있습니다. "사대문 다 막지 말고 한 대문은 남겨라" "이 우물물을 다시는 먹지 않겠다고 침을 뱉고 돌아서지만, 다시 와서 그물을 먹을 날이 있다." 이 말들은 모두 비슷한 의미가 담겨 있는데, 사람을 대하되 다시는 보지 않을 사람처럼 극단적으로 대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오늘 봉독한 하나님의 말씀에는, 다시는 볼 기회가 없을 사람으로 알고 동생을 노예로 팔았습니다. 그리고 22년의 긴 세월이 흐른 어느 해 극심한 흉년이 들어 양식을 사려고 애굽으로 갔습니다. 곡물의 모든 관리를 그 나라의 국무총리가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그 총리 앞에 엎드려 양식을 구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이 노예로 팔아넘겼던 동생 요셉이 이 나라 국무총리의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런 기이한 만남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형제 사이에 스스로 원수의 장벽을 쌓아놓고 그 동생에게 지금 생명의 양식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형들은 지금 자신들 앞에 있는 사람이 요셉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요셉을 팔아넘긴 지 22년이 지나 지금 요셉의 나이가 39살이 되었고 더구나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으므로 알아보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런 저들 10명은 요셉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들이 자신을 팔아버린 형들임을 단번에 알아보았습니다. 여러분, 이때 요셉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여러분 같으면 여러분은 배신하고 고통 속에 빠져 놓은 사람을 오랜만에 만났다면 그것도 여러분이 높은 위치에서 그 사람을 만났다면 어떠한 태도를 보이시겠습니까? 여러분 9절을 보면 이때 요셉이 그들에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였습니다. 그 꿈은 창세기 37:6절 이하에 나옵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꾼 꿈을 들으시오 7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8 그의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의 꿈과 그의 말로 말미암아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요셉은 아버지가 형들보다 자기를 더 사랑함을 보고 형들에게 미움을 받았고 꿈꾼 것을 이야기하자 더욱 미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미움으로 자신을 노예로 팔아버리는 일까지 일어나게 했습니다. 자 그러면 그렇게 자신을 미워한 형들이 자신 앞에 절을 하는 것을 보았을 때 요셉은 어떻게 했나요? 요셉이 형들에게 복수, 앙갚음하지 않을까요? 자기를 미워했다고~ 요셉도 사람이기에 순간적으로 그런 마음이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자 그러면 요셉이 형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1. 모르는 체하고는 엄한 소리로 대하였습니다. “너희가 어디서 왔느냐?” 여러분 옛날 형들은 요셉을 물 없는 구덩이에 던져 넣고는 그의 절규는 들은 체하지 않고 자기들끼리만 음식을 먹었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의 애처롭게 부르짖는 것을 외면하고 은 20에 요셉을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팔아넘겼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러한 일을 당했던 요셉은 이제 강자가 되어 형들을 모른 체하고 차갑고 거칠고 혹독하게 대한 것입니다. 참으로 세상만사 이렇게 역전이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2. 나아가 형들을 간첩 취급하였습니다. 형들을 알아본 요셉은 형들이 이렇게 되리라 꾸었던 꿈을 생각하면서 "네 이놈들, 너희들은 간첩이지? 이 땅의 허점을 살피러 왔지?"라고 을러메었습니다. 여러분 간첩누명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아십니까? 지금 이 시대도 간첩이라 하면 중죄를 받고 큰 곤욕을 치르게 되는데 그 옛날은 오죽했겠습니까? 그런데 요셉은 다른 것이 아닌 간첩누명을 씌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말을 들은 형들의 가슴은 얼마나 덜컥했으며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그런데 시57:6절을 보면 다윗은 이렇게 토로합니다. “그들이 내 걸음을 막으려고 그물을 준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이는 다윗이 자신을 죽이려 하는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었던 때에 외친 말입니다. (抑-누르다, 굽히다 鬱-막히다 히브리어(#p'K;(카파프)는 숙이다, 구부리다, 굽히다) 세상에는 이런저런 억울한 일이 많이 있습니다. 내 사정을 헤아려주지 않고, 내 기분, 내 마음을 이해해 주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대할 때 억울한 마음이 들게 되기도 합니다. 여러분 형들이 억울하다면 요셉은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배신당하고 감옥에 갇히고, 잊히고 하나님 외에 누가 그 사정을 알아주었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억울한 일을 당했던 요셉은 이제 형들을 억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형들은 “나리, 무슨 당치도 않은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저희는 곡식 사러 왔을 뿐입니다. 저희는 모두 다 한 사람의 아들로서 진실(정직)한 사람들입니다. 어찌 그런 저희를 보고 간첩이라 하십니까?” 3. 또한, 요셉은 이렇게 자신들이 간첩이 아니라고 땀을 뻘뻘 흘리며 이야기하는 형들을 사흘 동안 감옥에 가두기까지 했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어느 감옥에 넣었을까요? 혹시 자신이 갇혔었던 그 감옥에 넣은 것은 아닐까요? 아마 간첩누명을 씌웠으니 보통 감옥에 넣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전혀 예상치 못하다가 갑작스레 감옥에 갇힌 형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아니 이게 웬 날벼락인가? 정말 눈앞에 캄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심적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형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불안에 떨어야 했습니다. 요셉은 감옥에 갇혔을 때 하나님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바라보았는데 형들도 과연 그리하였을까요? 거기서 하늘의 위로를 받을 수 있었을까요? 진정 어떠한 가운데 처하든지 하늘의 위로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다윗은 감옥 같은 현실 속에 살면서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았고 그 결과 하나님의 위로와 도우심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했습니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62:2) 4. 그런데 삼일 뒤 형들을 석방시킨 뒤 요셉은 형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도 하늘 무서운 줄 아는 사람이니 너희들을 그냥 해칠 수야 있겠느냐? 너희가 정말 진실(정직)한 자들이라면 너희들 가운데 한 사람만 옥에 남고 나머지는 곡식을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가 너희 식구들이 굶주려 죽지 않도록 한 다음, 너희 막내 동생을 데리고 다시 내게로 올지니라. 그러면 너희 말이 참일 줄 내가 알고 너희도 죽음을 면하리라.” 여러분 형들의 처지에서 불 때 이 무슨 심술궂은 장난입니까? 막내를 데려오라니요? 이거 정말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막내 베냐민은 아버지 야곱이 몹시 아끼는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전에 요셉을 그렇게 아끼던 아버지는 요셉이 죽었다는 말에 위로를 받지 않고 그토록 애통하며 상심하였는데 또다시 아버지에게서 베냐민을 떼 놓게 된다면 이는 그야말로 아버지의 마음에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은 고통을 드리는 것입니다. 비록 옛날 철이 없을 때는 요셉을 팔아넘겨 아버지를 그토록 괴롭게 해 드렸지만 이제 어떻게 또다시 아버님께 그러한 엄청난 심적 고통을 안겨 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 막내를 데려오라니 이걸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자 그러면 도대체 요셉은 왜 이러한 일을 행한 것입니까? 정말 기가 막히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해도 해도 너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니 자신이 그토록 엄청난 고통을 당했다고 해서 이제 와서 앙갚음 하자는 것입니까? 그렇게 함으로 은근히 즐기자는 심사입니까? 여러분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형들은 11절을 보면 “우리는 다 한 사람의 아들들로서 확실한 자들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확실한 자란 무슨 말입니까? 여기 확실한 자들(@Ke(켄)이라는 단어는 ‘그러므로’, ‘따라서’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본래 의미는 똑바로 ‘세우다’입니다. 그리고 이에 따라서 상징적으로 ‘정당한’, ‘옳게’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을 보면 정직한 자들(RSV) 혹은 진실한 자들(KJV)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시 51편 10절을 보면 이 말과 뿌리가 같은 쿤이라는 단어를 ‘정직한’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물론 요셉의 형들이 자신들은 확실한 자들이라고 한 것은 물론 자신들은 간첩이 아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이 듣기에는 자신들은 똑바로 세워진 사람들이라, 정당한 사람들이다, 옳은 사람들, 정직한 사람들이라고 들릴 수 있었습니다. 형들이 간첩이 아닌 것은 요셉이 너무도 잘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정당한 사람들이냐, 옳은 사람들이냐 라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자신을 미워하였고 웅덩이에 넣었다가 이스마일 상인들에게 종으로 팔아넘겼고 아버지에게 가서는 채색옷을 발견하였는데 이것이 요셉의 것이 아닌지 보라고 거짓말을 하므로 야곱이 악한 짐승이 잡아먹은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고 오래도록 요셉을 위해 애통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얼마나 못된 사람들입니까? 형들은 거짓말쟁이였고, 인신매매 범이었고 살인 미수범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자신들은 확실한 자 즉 정직한 자, 옳은 자, 똑바로 세워진 자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도 요셉의 형들과 비슷한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정직한 자이고 옳은 자이고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요셉의 형들처럼 착각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우리가 확실한 자라고 생각하지만, 아직도 진실하지 못하고 인격과 생활에 문제가 많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일부의 선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비판합니다. 다른 사람의 부족한 것을 보면서 감싸주지 못하고 무능하다 합니다. 다른 사람이 살인하고 간음한 것을 보고 비판하면서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 손가락질하면서 “나는 저런 죄인과 같지 않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런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음욕을 품은 네가 바로 간음한 자다.” “미워하는 마음을 품은 네가 바로 살인자다.” “비판하는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다.” 매일 신문에서 방송에서 보도되는 여러 문제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있고 그들의 모습을 보며 자신과 자녀들을 돌아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확실한 자라고 생각을 하면서 남들을 손가락질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나는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돌아보십니까? 물론 정당한 비판은 필요하지만 그럴 때라도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 한 사람의 아들들로서 확실한 자들이니 당신의 종들은 정탐꾼이 아니니이다 라고 말한 형들에게 요셉은 말합니다. 아니라 너희가 이 나라의 틈을 엿보러 왔느니라 그리고 15절을 보면 너희는 이같이 하여 너희 진실함을 증명할 것이라 그리고 16절에서 “내가 너희의 말을 시험하여 너희 중에 진실이 있는지 보리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요셉이 형들을 잠깐 모르는 체하고 억울하게 하고 고통스럽고 당황스럽게 만든 것은 결코 형들이 미워서가 아니라 형들에게서 진실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형들의 진실을 확인하지도 않고 자기를 들어낸다면 서로 간에 불행할 뿐입니다. 자신의 죄, 잘못을 알지 못하고 있다면 그러한 죄를 얼마든지 반복할 수 있고 그러한 이들을 용서할 수도 없고 그러한 가운데는 화해와 평화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은 진정한 용서와 화해의 삶을 위해 먼저 진실을 원한 것입니다. 진실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tm,a,(에메트)인데 이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126회 나오는 아주 중요한 단어입니다. 시51편 6절을 보면 다윗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 (마음속의 성실과 진실을 기뻐하시는 주님) 우리 하나님은 진실함을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시86:15)이시며 진리의 하나님(시31:5)이시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진리이신 예수님은 진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요셉은 형들이 진실한지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형들을 테스트해 보기 위해 정탐꾼으로 몰아붙인 것입니다. 그러면 진실이 무엇입니까? 히브리어로 ‘에메트’라는 말인데 이는 아멘, 곧 신실, 정실, 확실함, 진리라는 뜻으로 이 단어의 뿌리는 '확고하다'를 뜻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사상, 의견, 주장이 정말 끝까지 확고하게 지킬 수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도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타인에 의해서, 아니면 거짓 정보나 착각 혹은 순간의 기분으로 되는 것입니까? 여러분 요셉이 원한 확고한 진실은 무엇입니까? 1) 그는 이를 위해 먼저 “너희 중 하나를 보내어 너희 아우를 데려오게 하고 너희는 갇히어 있으라.”고 말합니다. 그러다가 그것이 너무 지나친 것이라 생각 들어 “너희 형제 중 한 사람만 그 옥에 갇히게 하고 너희는 곡식을 가지고 가서 굶주림을 면하고 막내아우를 내게 데려오라” 고 말을 바꿨습니다. 그러면 왜 막내를 데려오라고 한 것입니까? 그것은 물론 막내가 보고 싶어서 그리한 것이기도 하지만 형들이 과연 이제는 동생과 나아가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공경하는가를 확인하고 싶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우리의 사랑을 확인해 보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명하시기도 하셨고 또한 시몬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묻기도 하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과연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가를 확인해 보고 싶어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사랑이 없을 때 “처음 사랑을 다시 가지라”고 질책하시기도 하시고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라고 말씀하시며 또한 서로 우애하며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롬12:10)”고 말씀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면 과연 형들이 막내 베냐민을 사랑하고 아버지 야곱을 진심으로 공경하는 마음을 가졌을까요? 이것을 우리는 42장 후반과 43장 44장에서 잘 살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2) 그리고 무엇보다 요셉이 원한 형들의 진실은 과연 자신들이 저지른 죄를 깨닫고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으로부터 엄청난 일을 당한 형들은 마침내 이렇게 서로 말합니다. 21절입니다. "사실이지, 우리가 동생에게 그 짓을 하고 어떻게 벌을 면하겠니? 그렇게 가슴 아프게 애원하는 것을 보면서도 못 들은 체했는데! 그 때문에 우리가 이런 곤경에 빠진 거야." 이어 큰 형 르우벤이 한마디 했습니다. "그 애에게 못 할 짓을 하지 말자고 내가 너희에게 말하지 않았더냐? 그런데 너희는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이제 그의 피가 앙갚음하는 것이다." 드디어 형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지은 죄를 인정하고 한탄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저들에게 서서히 진실의 문이 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진실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신의 부족과 허물을 깨닫지 못하고 교만하며 사랑 없이 여전히 무정하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한 사람들의 심령에 과연 주님이 함께하시겠습니까? 오바댜서를 보면 야곱의 형, 에서의 후손인 에돔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 형제의 날, 그가 재앙을 받던 날에, 너는 방관하지 않았어야 했다. 유다 자손이 몰락하던 그 날, 너는 그들을 보면서 기뻐하지 않았어야 했다. 그가 고난받던 그 날, 너는 입을 크게 벌리고 웃지 않았어야 했다. 너는 그 재산에 손을 대지 않았어야 했다. 14 도망가는 이들을 죽이려고, 갈라지는 길목을 지키고 있지 않았어야 했다. 그가 고난받던 그 날, 너는 살아남은 사람들을 원수의 손에 넘겨주지 않았어야 했다. "네가 한 대로 당할 것이다. 네가 준 것을 네가 도로 받을 것이다. (1:12~14) 여러분 자신이 듣고 있는 줄로 모르고 말 한 형들의 이야기를 들은 요셉은 그들을 떠나가서 어떻게 했습니까? 24절을 보면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었다고 했습니다. 이후 요셉은 43:30절에서도 울고, 45:2절에서는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릴 정도로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야곱이 돌아가신 뒤에도 형들로 인하여 울고 말았습니다(50:17절). 그야말로 울보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요셉은 왜 울었습니까? 그것은 우선 형들이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형들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 그 오묘한 섭리에 감사하여 울었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억울하고 고달픈 세월을 지냈습니까? 얼마나 많은 상처와 슬픔, 한숨 눈물이 얼마였겠습니까? 그런데 이제는 그 모든 것을 거두시고 이렇게 진실에 눈을 뜬 형들과 만날 수 있게 되었으니 어찌 감사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저에게도 눈물을 많이 흘렸던 적이 몇 번 있습니다. 첫 번째는 1975년 11월 8일 주님의 소명을 받을 때였습니다. 당시는 제가 고등학교 2학년으로 교회에서 학생 부흥회가 열렸지만, 야간고등학교를 다녔기에 갈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참석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날에 갑작스러운 장학 검열이 있었고 그래서 다른 날보다 일찍 수업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그날 너무도 좋아서 가방을 옆에 끼고 뛰고 용두동에서 제기동으로 달려 버스를 타고 망우교회에 도착하니 당시 강사 전도사님께서 말씀을 선포하고 계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일러라”라는 제목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냥 스쳐 지나가려 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을 찾으려 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삭개오처럼 주님께 발견됐습니다. 설교 이후에 헌신자를 찾았고 응답하여 제가 강대상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는데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주님의 부르심에 감격하여 비 오듯이 눈물이 쏟던 그 날을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한 번은 제가 은행에 다니던 어느 토요일 일이 밀려 청년부 토요집회에 갈 수 없어서 전화하다가 당시 어린이 찬양대 지휘자였던 사람, 이제 막 군 인대를 앞두고 있었던 한 젊은 선생이 물에 빠져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주변을 의식하지 못하고 펑펑 눈물을 쏟아버렸습니다. 그리고 어느 때인가 한 주간 내내 눈물이 쏟아진 때도 있었습니다. 그 눈물은 여러 가지가 교차한 것입니다. 우선, 이 부족한 종의 허물 때문입니다. 깨어 있지 못하고 무능한 이 종으로 인하여 우리 성도들이 상하고 힘들어하는 것을 생각할 때 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주님의 은혜가 너무나 감격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지난 세월을 회고해 보면서 이런저런 시련, 사건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래도 부족한 이 종과 사랑하는 우리 교회를 사랑해 주시는 주님의 은혜, 그 사랑이 너무도 감사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성령께서 이 강퍅한 마음을 깨뜨리시고 눈물을 흘리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통하여 더욱 주님 앞에 진실한 심령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물론 아직도 허물진 것이 많지만 말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신다(시51:6)는 것을 안 다윗은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51:10)라고 간구하였습니다. 이제 여러분 각자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나는 얼마나 진실한가? 나도 모르고 거짓되고 위선적이고 무정하고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모습이 많지 않은가? 여러분 그런 우리를 위해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피를 흘리셨습니다. 진실하신 주님, 아무 죄가 없으신 주님, 거짓이라고는 조금도 없으신 주님이 진실하지 못한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주님께 나아오십시오. 자신의 죄와 허물을 주님께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진실한 사람이 되도록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끝까지 확고하게 지킬 수 있는 것은 주님의 말씀이며 주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끝까지 붙들 수 있는 확실한 분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진실하신 주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감사와 감격의 눈물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복합니다. 2019년 1월 12일 주일 낮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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