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 그리고 사랑 | 박승남 | 2020-01-19 | |||
|
|||||
[성경본문] 창세기42:26-38절 개역개정26. 그들이 곡식을 나귀에 싣고 그 곳을 떠났더니 27. 한 사람이 여관에서 나귀에게 먹이를 주려고 자루를 풀고 본즉 그 돈이 자루 아귀에 있는지라 28. 그가 그 형제에게 말하되 내 돈을 도로 넣었도다 보라 자루 속에 있도다 이에 그들이 혼이 나서 떨며 서로 돌아보며 말하되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 하고 29. 그들이 가나안 땅에 돌아와 그들의 아버지 야곱에게 이르러 그들이 당한 일을 자세히 알리어 아뢰되 30. 그 땅의 주인인 그 사람이 엄하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우리를 그 땅에 대한 정탐꾼으로 여기기로 31. 우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는 확실한 자들이요 정탐꾼이 아니니이다 32. 우리는 한 아버지의 아들 열두 형제로서 하나는 없어지고 막내는 오늘 우리 아버지와 함께 가나안 땅에 있나이다 하였더니 33. 그 땅의 주인인 그 사람이 우리에게 이르되 내가 이같이 하여 너희가 확실한 자들임을 알리니 너희 형제 중의 하나를 내게 두고 양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안의 굶주림을 구하고 34. 너희 막내 아우를 내게로 데려 오라 그러면 너희가 정탐꾼이 아니요 확실한 자들임을 내가 알고 너희 형제를 너희에게 돌리리니 너희가 이 나라에서 무역하리라 하더이다 하고 35. 각기 자루를 쏟고 본즉 각 사람의 돈뭉치가 그 자루 속에 있는지라 그들과 그들의 아버지가 돈뭉치를 보고 다 두려워하더니 36. 그들의 아버지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에게 내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 37. 르우벤이 그의 아버지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오지 아니하거든 내 두 아들을 죽이소서 그를 내 손에 맡기소서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리이다 38. 야곱이 이르되 내 아들은 너희와 함께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의 형은 죽고 그만 남았음이라 만일 너희가 가는 길에서 재난이 그에게 미치면 너희가 내 흰 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 창42:26~38 두려움 그리고 사랑 2016년 기준으로 미국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것은 공직자 부패, 테러리스트의 공격, 충분한 재산을 갖지 못하는 것, 정부의 총기 규제,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것이나 매우 아픈 것, 재정 붕괴 등입니다. 일본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것은 1) 지진 2) 번개 3)화재 4) 아버지라고 합니다. 물론 통일 대한민국을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한국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조선 시대는 1) 호랑이 2) 보릿고개 3) 양반이었고 일본강점기는 1) 염병 2) 공출 3) 순사였다고 합니다. 그러면 요즘 무서워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암과 치매가 있습니다. 그리고 경제적인 두려움이 있습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9년 2월 비경제활동인구 가운데 활동상태가 '쉬었음'으로 분류된 이들의 수는 216만 6천 명으로 2003년 1월 통계를 작성한 이후 가장 많았다고 합니다. 안전에 대한 두려움도 커지고 있습니다. ‘묻지마 범죄’는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 어떤 관계나 이유가 없이 그냥 전혀 예상치도 못한 상태에서 당하게 되는 범죄입니다. 한 통계자료를 보니까 국민 10명 중 7명은 '묻지마 범죄'를 자신 또는 가족이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느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과거의 죄가 드러날까 두려운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요즘 묻히어져 있던 죄들이 드러나서 곤욕을 치르는 사람들의 소식을 자주 듣습니다. 언제 내 대화의 내용이 범죄의 증거가 될지 모르는 세상이다 보니까 일단 흔적 지우기에 세심한 신경을 쓰고 있답니다. 치명적인 질병에 걸릴 것 같은 건강에 대한 두려움, 배신, 거절당하고 외롭게 될 것 같은 두려움, 심은 것이 없기에 거둘 것이 없을 것이라는 상황인식에서 오는 두려움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두려움의 결과로 찾아오는 것 중의 하나가 낮은 자존감입니다. 자신감을 잃습니다. 그리고 두려움을 느끼게 되면 불안하게 됩니다. 그리고 두려움은 내장 건강에 나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의학자들에 의하면 "불안·공포에 자주 노출되는 사람은 건강한 사람보다 심장병 등의 질환으로 숨질 확률이 3~4배 높다"라고 말합니다. 요셉은 진실에 목말라 있었습니다. 과연 형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있는가? 또한, 아버지를 공경하며 동생 베냐민을 사랑하고 있는가? 그래서 형들을 모질게 대하였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말했습니다. “만일 너희가 정직한 사람이라면, 너희 형제 중 한 사람만 감옥에 남겨 두고 나머지는 너희 집안 식구들이 굶어 죽지 않도록 곡식을 가지고 가거라. 그리고서 너희 막내를 나에게로 데려오라. 그렇게 하면 너희 말이 참말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너희는 죽음을 면할 것이다.” 그들은 그대로 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취하여 그들의 목전에서 결박하였습니다. 시므온은 결박되어 감옥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때 시므온은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이 감옥생활을 어떻게 하고 언제까지 해야 하는가? 만일 형제들이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 나는 어떻게 되는가? 등등 불안과 염려와 두려움은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러면 10명의 형 중에서 왜 하필이면 시므온이 결박됐을까요? 혹시 요셉이 시므온을 제일 미워하였을까요? 아니, 결코 그렇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일까요? 그냥 단순하게 어쩌다가 그리 한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시므온이 대표되는 사건이 있으니 34장에 나오는 것입니다. 창세기 34:25절을 보면 제삼 일에 미쳐 그들이 고통 할 때 야곱의 두 아들 디나의 오라비 시므온과 그 동생 레위가 각기 칼을 가지고 가서 부지중에 성을 엄습하여 그 모든 남자를 죽여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일로 인해 심히 근심하게 된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나를 오히려 더 어렵게 만들었다. 이제 가나안 사람이나, 브리스 사람이나,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이, 나를 사귀지도 못할 추한 인간이라고 여길 게 아니냐? 우리는 수가 적은데, 그들이 합세해서, 나를 치고, 나를 죽이면, 나와 나의 집안이 다 몰살당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 하지만 아버지의 고민, 근심, 불안은 생각지 않고 저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 다루듯이 하는 데도, 그대로 두라는 말입니까?” 미안해하는 기색도 없이 그래도 자기들이 한 일이 옳다고, 자신들이 잘했다고 당돌하게 말한 것입니다. 이들 생각에는 자신들이 하는 일이 의로운 일이었습니다. 아니 그래 사랑하는 여동생이 그토록 모욕을 당했는데 오빠로서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찌 보면 저들의 행동은 사랑과 정의감에서 나온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러할지라도 저들은 자신들이 심판자가 되어 무고한 생명을 무참히 학살하였고 또한 결과적으로 이 일로 인해 아버지 야곱의 마음에 두려움을 안겨 주는 등 심히 괴롭게 하였습니다. 여러분 야곱이 이 일을 얼마나 마음에 담아 두었는지, 아니 하나님께서 이 일을 어떻게 평가하셨는지 그로부터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야곱이 임종 직전에 한 말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단짝 형제다. 그들이 휘두르는 칼은 난폭한 무기다. 나는 그들의 비밀 회담에 들어가지 않으며, 그들의 회의에 끼어들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화가 난다고, 사람을 죽이고, 장난삼아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다. 그 노여움이 혹독하고, 그 분노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다. 그들을 야곱 자손들 사이에 분산시키고,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흩어 버릴 것이다. (창49:5~6 새번역) 여러분 전도서 7:16절을 보면 “그러니 너무 의롭게 살지도 말고, 너무 슬기롭게 살지도 말아라. 왜 스스로를 망치려 하는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바르게 살아야 한다. 의롭게 살아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듣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이 무슨 말씀입니까? 너무 의롭게, 너무 슬기롭게 살지 말라니요. 이는 극단적인 자기 의에 빠지지 말라는 말씀으로 인간 행위의 한계성을 인정하라는 뜻입니다. 가만히 보면 세상은 소위 의로운 사람들이 많아서 오히려 자기를 죽이고 이웃도 죽이고 많은 사람을 죽이고 해를 끼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언제나 원칙만 내세우고 따지고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기도 죽일 뿐만 아니라 남도 죽이는 것입니다. 헬무드 틸링케라는 사람은 “작은 불의가 해를 끼치는 것보다 그 작은 불의를 들춰내고 그것을 문제 삼음으로 해서 오는 해가 더 심각하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진정 우리는 이 사실을 결박된 시므온을 통하여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므온만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것은 아닙니다. 요셉의 형들은 이미 한 사람을 볼모로 남기고 가라는 요셉의 명령에 형들은 옛날 저질렀던 일이 생각나 불안과 두려움에 떨었었습니다.(21-22절) 형제들이 불안한 것은 자신들에게 회개할 거리가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혹 그 죄 때문에 화가 미치면 어쩌나 하는 마음 때문에 불안합니다. 그런데 그 불안함은 계속됩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가축 먹이를 주기 위해 곡식 자루를 풀어 보니 돈이 그대로 들어 있습니다. 그러자 "내가 낸 돈이 도로 돌아왔다. 나의 자루 속에 돈이 들어 있어!" 이 말을 들은 형제들은, 얼이 빠진 사람처럼 떨면서, 서로 쳐다보며 한탄하였다. "하나님이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런 일을 하셨는가!"(28절) 라고 말했습니다. 얼마나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혔던지 얼이 빠진 사람처럼 떨었다고까지 했습니다. 여러분 요셉을 팔아버린 일은 20년 전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다 잊었었습니다. 그러나 그 잊어버린 죄가 이제 자신들을 죄어 매어 두렵게 만드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정 저들이 회개하였다면 그래서 양심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들은 여전히 그 죄를 묻어두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말입니다. 그러나 죄지은 사건을 잊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인생의 순간순간 그 죄악이 불쑥불쑥 솟아올라 자신들의 뒤 쫓아 두렵게 만드는 것입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두려워서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었습니다. (창3:8)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많은 죄를 짓습니다. 알고도 짓고 모르고도 짓고 약해서도 짓고 고의로도 죄를 짓게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죄를 짓고 살지 않을 수 없는 우리 인생을 보고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우리가 짓는 죄가 우리에게 멸망과 심판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만 또 어떤 때는 그 죄가 오히려 은혜와 복된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기도 합니다. 성경에 보면 죄짓고 망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죄짓고 복 받은 사람의 이야기, 죄짓고도 하나님의 마음에 든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그는 다윗입니다. 그는 무서운 간음죄와 살인죄를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회개하였습니다. 회개하기 전의 그의 심령은 메마른 땅에 거하는 사람과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실로, 나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죄인이었고, 어머니의 태 속에 있을 때부터 죄인이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파산된 모습을 깨달은 다윗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신 분은 하나님뿐임을 알고 다음과 같이 기도 합니다. "아, 하나님, 내 속에 깨끗한 마음을 새로 지어 주시고 내 안에 정직한 새 영을 넣어 주십시오." 원래 자기가 소유했던 깨끗한 마음을 다시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깊은 회개의 기도 가운데서 태어날 때부터 파산된 자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겸손히 평생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깨끗한 마음'을 그의 마음 안에 창조해 달라고 기도를 한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회개가 필요합니다. 천국은 죄를 회개한 사람들의 왕국이며 오늘의 교회당은 회개의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진실한 신앙인은 회개한 사람입니다. 회개는 반드시 용서를 받습니다. 그리고 용서함을 받은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고 평안하게 됩니다. 여러분 두려움이 우리를 지배하게 되면 크게 4가지로 우리를 황폐화합니다. 첫째, 두려움은 모든 능력을 마비시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한한 잠재력를 받았지만 두려움이라는 괴물에 압도당하면 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둘째, 두려움은 관계를 파괴합니다. 두려워하니 야곱과 그 아들들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깁니다. 그리고 지금 중요한 것은 양식을 사 오는 것인데 집안에서 실랑이하느라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시므온에 감옥에서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지금 불화가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문제들 대부분은 두려움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두려움은 사람들을 정직하게 대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거절당할까 봐 두려워 원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가장하기에 진실한 만남을 이룰 수 없습니다. 또한, 두려움이 많은 사람은 사랑을 주고받는 것을 힘들어하기 때문에 진실한 친밀감을 형성하지 못합니다. 두려움은 우리가 맺고 있는 모든 인간관계를 점점 파괴합니다. 셋째, 두려움은 행복과 성공을 방해합니다. 사실 이 가정에는 행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요셉을 만나 굶어죽을 염려 없이 잘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려워하니까 그것을 지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바라는 일이 일어날 것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일이 발생할 것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실패를 준비합니다. 두려움은 두려워하는 일이 생기게 합니다. 그리고 실패와 불행의 길로 걸어가게 합니다. 넷째, 두려움은 분별력과 판단력을 상실하게 만듭니다. 두려움에 빠진 사람은 건강한 생각과 판단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시험을 보는 사람이 두려움에 휩싸이면 아는 것도 틀립니다. 운동선수도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제대로 실력 발휘를 하지 못합니다. 두려움은 분별력을 상실하여 잘못된 결정을 하게 만듭니다. 두려움은 눈앞의 현실만 바라보게 만들고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심령이 요동치고 두려움에 떨리는 상황에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무릎 꿇고 기도함으로써 믿음을 회복하여 두려움을 극복하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마음에 평화가 깃듭니다. 여러분 아들들의 불안은 야곱에게로 연결됩니다. 35절을 보면 야곱과 그 아들들은 애굽에서 가지고 양식 자루에서 각인의 돈뭉치가 나오자 야곱까지도 두려워 떨게 됩니다. 그러면 야곱이 왜 두려워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살아있다는 것과 그 요셉이 아들들의 자루에 돈을 넣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왜 두려워했겠습니까? 아니 잘 모르더라도 선하신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사랑하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하지만 그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두려워합니다. 그렇습니다. 모르면 겁 없이 하나님의 아들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모르면 두려움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여러분 우리가 혼자 다른 나라에 떨어뜨려 졌다면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고 그 도시를, 그 지역을, 그 길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중에 한 사람이라도 아는 사람이 있으면 그리고 그를 만나 함께 할 수 있다면 담대하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미지의 인생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우리를 만나주시고 함께 해 주시는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길을 내게 맡기라. 그리고 진리를 알라. 그러면 너희가 자유롭게 되리라.” 여러분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동시에 주님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알 때 담대하게 됩니다. 여러분 영생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 야곱이 요셉의 존재를 알았다면 그는 두려움 대신 기뻐 뛰며 춤을 추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아십니까? 그분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이시오, 우리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날마다 주님을 가까이하여 그 말씀 안에 살아갈 때 기쁨과 평안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나아가 두려움을 이기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형들은 이렇게 두려워하고 있지만, 그와는 대조적으로 아주 평안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다름 아닌 요셉입니다. 요셉은 죄의 문제가 없기에 평안합니다. 비록 극심한 고통의 나날을 보내기도 했지만 그러할 때도 요셉은 항상 평안했습니다. 노예 생활할 때도, 감옥생활 중에도 평안을 잃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늘 하나님이 함께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형들 앞에서 요셉을 보십시오. 그는 비록 시므온을 결박했지만, 결코 시므온이나 형들이 미워서가 아닙니다. 다만 저들의 진실을 알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시 형들과 아우, 그리고 아버지를 보고 싶어서일 것입니다. 그는 온 가족이 만나 함께 기쁨으로 살날을 고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을 알 리 없는 형들은 두려워하며 자신들의 과거 잘못을 떠올리며 후회합니다. 그러자 이 모습을 보는 요셉은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을 향한 연민의 마음이 강하게 생긴 것입니다. 보십시오. 요셉은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곡물을 그 그릇에 채우게 하고 각인의 돈은 그 자루에 도로 넣게 하고 또 길 양식을 그들에게 주라” 그렇습니다. 비록 형들은 자신을 팔아먹었지만, 요셉은 그들을 사랑하여 은혜를 베풉니다. 요셉은 자신이 베풀 수 있는 최대의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여행하는 동안 먹을 길 양식도 주었습니다. 양식값을 도로 넣어주고 양식도 거저 주었습니다. 비록 이 일이 죄를 지은 형제들에게는 불안의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요셉은 진정 형들을 사랑하였습니다. 요한1서 4장 18절 말씀을 보면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은 죄 문제의 해결 없이는 제거될 수 없습니다. 죄 문제가 깨끗하게 해결되어야만 두려움에서부터 해방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좋은 사실이 있습니다. 독생자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와 형벌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형벌을 대신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깨끗하게 청산해주신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을 위해 죽으신 주님의 십자가,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요한일서 4장 16절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하나님의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독생자를 보내주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영생을 얻게 하여주십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영원토록 이뤄집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리고 영원토록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용서하시고 영원히 품어주셨음을 알게 되면 형벌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우리는 참 자유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이뤄지면 하나님을 믿고 신뢰합니다. 마치 아이가 처음에 물을 두려워하여 수영장 안으로 못 들어가다가 아빠 품에 안기면 아빠와 함께 수영장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 다 맡기고 내려놓는 사람들은 하나님 품 안에서 마음의 자유와 평안과 담대함과 기쁨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주님께서 나를 일으켜 세우십니다-You Raise Me Up]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가사가 이렇습니다. 내 영혼이 힘들고 지칠 때/나는 여기에서 고요히 주님을 기다립니다/ 주님이 제 옆에 와 앉으실 때까지/ 주님이 나를 일으켜 주시기에/나는 산에 우뚝 서 있을 수 있고 /주님이 나를 일으켜 주시기에/나는 폭풍의 바다도 건널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저를 어깨에 매어주실 때 나는 강해집니다/ 주님께서 나를 일으켜주시기에/ 나보다 더 큰 내가 되게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일으켜 주시기에 우리는 늘 강건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이 사랑을 믿고 신뢰할 때에 두려움은 사라지면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 역시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형들의 마음에는 온전한 사랑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에게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있었고 또한 형들에 대한 사랑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에게는 두려움이 없이 담대했습니다. 그가 하는 일이 비록 보복처럼 못되게 보이기도 했지만, 형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행한 일이기에 담대하였던 것입니다. 디모데 후서 1:7절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사랑 안에 거합니까? 혹 여러분 속에 두려움은 없습니까?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해서, 지나치게 의인 되어서 그리고 죄를 회개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해서 불안해하는 것은 없습니까? 그렇다면 이제라도 사랑의 주님을 온전히 믿고 의지하십시오. 그리고 그 주님 앞에 회개하고 사랑의 자리로 나아가십시오. 그러면 여러분 속에 있는 두려움을 내어 쫓을 수 있을 것입니다. 두려움이 아닌 능력과 사랑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2020년 1월 19일 주일 낮 설교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