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 박승남 | 2020-01-2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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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창세기43:1-15절 개역개정1. 그 땅에 기근이 심하고 2. 그들이 애굽에서 가져온 곡식을 다 먹으매 그 아버지가 그들에게 이르되 다시 가서 우리를 위하여 양식을 조금 사오라 3. 유다가 아버지에게 말하여 이르되 그 사람이 우리에게 엄히 경고하여 이르되 너희 아우가 너희와 함께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4. 아버지께서 우리 아우를 우리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내려가서 아버지를 위하여 양식을 사려니와 5. 아버지께서 만일 그를 보내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내려가지 아니하리니 그 사람이 우리에게 말하기를 너희의 아우가 너희와 함께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6. 이스라엘이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너희에게 또 다른 아우가 있다고 그 사람에게 말하여 나를 괴롭게 하였느냐 7. 그들이 이르되 그 사람이 우리와 우리의 친족에 대하여 자세히 질문하여 이르기를 너희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시느냐 너희에게 아우가 있느냐 하기로 그 묻는 말에 따라 그에게 대답한 것이니 그가 너희의 아우를 데리고 내려오라 할 줄을 우리가 어찌 알았으리이까 8. 유다가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아이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 9.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서 그를 찾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10. 우리가 지체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벌써 두 번 갔다 왔으리이다 11. 그들의 아버지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러할진대 이렇게 하라 너희는 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그릇에 담아가지고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예물로 드릴지니 곧 유향 조금과 꿀 조금과 향품과 몰약과 유향나무 열매와 감복숭아이니라 12. 너희 손에 갑절의 돈을 가지고 너희 자루 아귀에 도로 넣어져 있던 그 돈을 다시 가지고 가라 혹 잘못이 있었을까 두렵도다 13. 네 아우도 데리고 떠나 다시 그 사람에게로 가라 14.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15. 그 형제들이 예물을 마련하고 갑절의 돈을 자기들의 손에 가지고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요셉 앞에 서니라 창43:1~15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명절을 잘 지내고 계십니까? 멀리 떨어져 있던 가족들도 만나고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고 윷놀이를 하거나 영화도 보는 등 하면서 설을 지내게 되는데요. 실로 명절은 일가친척, 가족들이 화목하게 보내는 날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이는 명절 음식 준비나 꽉 막히는 도로보다 더 힘들게 하는 것이라는데요.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가족들 간의 [부적절한 대화]로 생기는 스트레스입니다. 일반적으로 가족이니까 서로 이해하고 넘어가겠지 하는 생각으로 본인도 모르게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사례를 살펴보면 1. 사생활을 지나치게 간섭하거나 침해하는 말입니다. 가족이 모인 경우이나 민감한 화제로 대화를 시작하여 가족 간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경향이 종종 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집 샀냐" "여윳돈은 얼마나?" “월급은 얼마나 받니?”등등 꼬치꼬치 경제 사정 묻는 말에 '난감'해한다고 합니다. 또한, 정부의 부동산 정책 맞다 vs 틀리다…보유세 폭탄이다. vs 보유세를 더 올려야 한다 등 정치 다툼으로 번지기도 한답니다. 그래서 요즘 자녀들의 취업 문제, 또는 결혼 이야기 등 이야기와 더불어 집, 부동산도 명절 금기어 되었다고 합니다. 부모나 어른은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니까 잘 들어’, ‘부모나 어른 말 들어서 손해 볼 것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지만 이는 부모 자식 사이나 형제, 자매 사이에서 서로를 독립적인 주체로 인정하지 않고 자기 뜻만 강요하는 것으로 서로 간의 감정이 상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대화하기 전에 상대의 처지에서 생각하고, 이러한 말을 하였을 때 상대방의 기분이 어떤지 고민을 한 후 대화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2. 직설적인 표현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녀들을 오랜만에 만나서 ‘너는 도대체 언제 결혼할 거니?’, ‘아이는 언제 낳을 것이니?’, ‘옆집 아들은 좋은 회사에 다녀서 연봉이 얼마인데, 너는 취직을 언제 할 것이니?’라고 묻는다면, 부모는 자식을 걱정하고 있다는 견해를 표현하고자 한 것이지만 명절 때마다 이러한 말을 듣는 자식은 괴롭고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습니다. 만약, 부모로부터 이런 말을 듣는다면 기분이 상하더라도 화를 내거나 반발할 것이 아니라, ‘부모님께서 많이 서운하셨나 보네요. 다음에는 좋은 소식을 전해드릴 수 있도록 저도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 현명한 대처 방법의 하나일 것입니다. 3. 고부간의 대화도 조심해야 합니다. 설이나 추석과 같은 명절 후에 이혼율이 높아지는 현상은 명절 간 발생한 고부간의 갈등이 자식과 며느리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것을 반영하는데요.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왜 다른 집들 며느리는 전날 와서 일을 돕는데, 너는 왜 일찍 와서 돕지 않느냐?’라고 하거나, 며느리들 간 서로 비교하는 말을 하면 오히려 갈등이 심해질 수 있습니다. 또 며느리가 하는 일이 서툴러서 시어머니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직접 비난하거나 며느리의 친정 부모의 탓으로 돌리면 며느리는 서운함만 쌓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참는 것은 오히려 서로 간의 불만이나 화를 키울 뿐입니다. 따라서 화를 속으로 삭이는 것보다는 상대방의 입장을 서로 이해하고 공감하면서 차분히 설명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시어머니도 과거에 며느리로서 힘들었던 점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고 며느리에게 공감을 표현한다거나, 며느리의 친정 식구 안부를 먼저 챙기는 것도 고부간의 갈등을 줄이고 거리를 좁혀나갈 방법입니다. 4.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소재를 찾고 대화를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최근에 화제가 되는 영화나 드라마로 이야기를 시작하거나, 많은 사람의 공통된 관심사인 ‘새해 소망’, ‘건강’등을 주제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우리 신앙인들은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 대화를 나눌 때 은혜의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물론 이와 같은 대화법은 오랜만에 만나는 가족과 친척들 간에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평소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차분하게 표현하는 법을 연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더라도 막상 그런 상황에 부닥치면 생각해 놓은 말이 쉽게 나오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하는 부적절한 말을 해서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들은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시141:3) 라는 다윗의 기도가 절실히 필요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야곱의 가정의 대화를 들어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이 가정은 어떤 가정일까요? 대화가 잘 이뤄지고 소통이 잘 되는 가정일까요? 이집트에서 가지고 온 곡식이 다 떨어졌습니다. 기근이 더욱 심해 가게 되자 가정을 책임지고 있는 아버지 야곱이 아들들에게 말합니다. "다시 가서, 먹을거리를 조금 더 사 오너라." 이는 지금 가정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야곱은 상황 파악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적당히 돈을 가지고 가서 그저 양식을 사 오면 될 것이라고 안일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이미 아주 곤란하게 된 사정을 다 말씀드렸지만, 야곱은 그것을 귀담아듣지 않았는지, 아니면 연로해서 잊어버렸는지 아무튼 대책도 없이 그냥 먹을거리를 사 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식들 처지에서는 답답하기 짝이 없죠. 가만히 보면 이 가정은 부자지간에 진솔한 대화가 없이 그저 일상적인 대화만 하는 정도였습니다. 아버지가 제대로 자식들의 입장을 헤아려 주지 않는 무심한 아버지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이것은 비단 아버지만의 문제가 아니라 자식들에게도 문제가 다 큰 것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 자식들은 요셉을 팔아버리고는 그 일을 숨겼잖아요. 그리고 요셉이 죽은 것처럼 만들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형들의 관점에서 아버지와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를 위로하고 싶었지만 제대로 위로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를 아프게 한 것이 바로 자신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진실을 숨기는 자식들과 슬픔과 괴로움을 가슴에 가득 담아 둔 아버지 간에 진솔한 대화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아버지 야곱도 문제입니다. 그가 믿음의 사람이라면 요셉의 일을 떨쳐버리고 주님 안에서 새롭게 출발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아니, 꿈 이야기를 들었잖아요. 요셉으로부터~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꿈이라 믿었더라면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든 요셉을 살려주셨으리라 믿었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는가 보자!" 라고 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에게는 그런 믿음이 없었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나름대로 기도도 했을 것이고 제단도 쌓아 예배도 드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진실한 감사와 기쁨과 평안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가정이 변화되게 됩니다. 어떻게요?
형제들의 리더 격인 유다가 아버지께 욕을 먹을 각오를 하고, 꼭 해야 할 말을 합니다. "아버지, 결코 상황이 그렇게 만만치가 않습니다. 지금 우리는 애굽에서 첩자로 오인을 받고 있습니다. 막내 동생 베냐민을 데려가지 않으면 절대로 갈 수가 없습니다. 시므온이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을 보고도 모르십니까?" 야곱도 답답했겠지만, 그 자녀들도 더 답답했습니다. 왜냐하면, 양쪽을 다 알잖아요. 애굽의 총리, 생각해 보니 무서운 사람이요, 그 사람이 요구하는 베냐민을 데려가지 않으면 양식을 사기는커녕 생명을 부지하지도 못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늙은 아버지는 자꾸만 베냐민을 못 보낸다고 그렇게 역정을 부리시고 있으니. "이놈들아, 너희들이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긁어 부스럼이냐? 대충 말하면 될 것을 왜 동생이 있다고 해서 이런 일을 만나게 하는 것이야?" 그러자 자식들은 "아버지, 그 사람이 막내를 데려오라 할 줄을 우리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그러니 역정만 내지 마시고 제발 현실을 좀 보세요. 현실! 우리 가족들이 지금 다 굶어 죽게 되었는데 왜 베냐민만 붙들고 그렇게 못 내어놓는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베냐민이 뭔대~ 그러면서 유다는 한 가지 조건을 제시합니다. 제가 그 아이의 안전을 책임지겠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 아이에 대해서는, 저에게 책임을 물어 주십시오. 제가 그 아이를 아버지께로 다시 데리고 와서 아버지 앞에 세우지 못한다면, 그 죄를 제가 평생 달게 받겠습니다. (평생 죄인이 되겠습니다.) 결국, 이는 막내 베냐민의 생명은 자기 생명과 같이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형제간의 우애가 회복되고 진정한 대화가 이뤄지기 시작하는 징조가 여기에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유다는 서서히 자신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있었고 변하여 새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은 이 가정에서 깨어져야 할 두 번째 사건에 대하여 손을 대고 계십니다. 이 가정이 깨어져야 할 첫 번째 사건은 형제간의 불화, 시기, 질투였고 두 번째는 바로 아버지 야곱의 편애였습니다. 아마 이 가문 전체가 좀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 조상 이삭은 에서를 사랑했고, 그 아내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에서와 야곱이 한평생 그렇게 갈등하며 살았어요. 야곱이 그 희생물입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그렇다면 그야말로 다시는 편애하지 않고 그 사슬을 끊어버려야 마땅한데 야곱이 그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는 것이에요. 여러분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매를 맞으며 자란 아이는 내가 어른 되면 절대 때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자신이 아버지가 되었을 때 어느 순간 자식들을 때리고 있고, 술주정하는 아빠를 보면서 나는 결코 술을 먹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또 어느 순간 주정하게 되고 ……. 이걸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사람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힘으로도 안 되고 능으로도 안 됩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성령으로 됩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슥4:6) 아멘!
아버지가 그랬던 것과 같이 편애에 사로잡힌 야곱은 자기가 좋아하던 여자, 라헬에게서 난 두 아들, 요셉과 베냐민만을 끼고돌았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요셉은 어릴 때부터 좀 우월감에 사로잡혀 아버지께 형들의 잘못을 고자질하기도 했습니다. 다른 형제들의 마음을 생각하지 못한 철부지 아이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반면에 다른 형제들은 아버지로부터 무시를 받았고, 그 무시 받은 상처들이 곳곳으로부터 튀어나옵니다. 르우벤은 서모와 간통을 했고, 시므온과 레위는 세겜 사람 죽이는 데 앞장섰고, 아버지가 뭐라고 하자 정면으로 아버지에게 반발했지요. 또한, 유다는 집을 떠나서 며느리에게서 아이를 낳아오고……. 자식들이 이리저리 막 방황을 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부모와 자식 가운데 보이지 않는 장벽은 자꾸만 자꾸만 두꺼워졌어요.
그런데 이 가정의 이 고질적인 문제를 정확히 보시는 분이 있으니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문제를 보십니다. 내게, 우리 가정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그것을 정확하게 보실 뿐만 아니라 거기에 대한 정확한 해답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섭리, 프로그램에 우리가 들어가기만 하면 그 문제가 풀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정확하게 손보시기를 원했습니다. 무엇을 통해서요? 바로 막내 베냐민을 통해서입니다. 왜냐하면, 베냐민이란 야곱에게 있어서는 최후의 보루입니다. 이 자식 없으면 죽을 것 같은~ 자신이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자식 때문에~ 그런데 그게 말이 됩니까? 그게 신앙인입니까? 다 잃어버려도, 다 없어도 누구 때문에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 때문에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롬14:8) 그런데 야곱은 그게 아닙니다. 다른 자식들은 안중에도 없었어요. 그러니 어떻게 가정이 평안할 수가 있고 어떻게 진솔한 대화를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거룩한 가정이, 하나님의 약속을 이어갈 수 있는 가정이 도무지 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귀한 뜻이 있는데~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압박을 가합니다. 요셉을 통해서, 유다를 통해서~ 그 편애를 때려 부수어 버리기 위해서 말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편애는 정말로 좋지 못한 것인데 이것을 깨뜨리기 위하여 "너 굶어 죽을래? 아니면 베냐민 내어놓을래?" 하며 압박을 가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다르게 말하면 "다른 자식을 베냐민과 똑같이 사랑할래? 아니면 그 아이만 붙들고 늘어졌다가 죽을래?" 그런 얘기입니다. 우리가 이거 없으면 못 살것 같은, 이거 없으면 죽을 것 같은 것 없습니까? 그거 내려놓아야 사는 것인데~ 그거 내려놓으면 살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애지중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거 내려놓으십시오.
또한, 다른 자녀들도 아버지에게 간곡하게 요청을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지 않았으면, 벌써 두 번도 더 다녀왔을 거예요. 아버지, 이건 사서 고생을 하는 거예요. 왜 베냐민 때문에 이렇게 온 식구가 고생해야만 하는 것입니까? 왜 베냐민만 그렇게 집착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내리누르시고, 자녀들이 항의하고……. 그제야 야곱은 뭔가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야곱은 결심합니다. 그 결심이 13절입니다. 너희 아우를 데리고, 어서 그 사람에게로 가거라. 이는 야곱에게는 엄청난 결단입니다. 그리고 이는 이것은 위대한 변화입니다. 왜요? 그 오래된 야곱의 편애가 깨어지기 시작하는 것이거든요. 자식에 대한 편애가 깨어지면서 비로소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너희들이 그 사람 앞에 설 때,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 사람을 감동시키셔서, 너희에게 자비를 베풀게 해 주시기를 빌 뿐이다. 지금까지는 하나님도 안 보였어요. 오직 내 자식 베냐민, 베냐민만 생각했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이러한 자세를 결코 용납하지 아니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가만히 보면 아버지 야곱에게는 한평생 자식 문제가 심각하게 그를 괴롭혔는데, 왜 자식 문제가 그렇게 그를 속 썩였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잖아요. 자식에 대한 편애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이 자식을 통하여 그에게 하실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최후까지 믿었던 그 자식을 하나님 손에 맡깁니다. 그렇게 맡겨드리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자식들이 말입니다. 그래서 14절 중반 절에 보면 재미있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가 거기에 남아 있는 아이와 베냐민도 너희와 함께 돌려 보내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즉 시므온과 베냐민입니다. 전에 같으면 어림도 없는 것이에요. 시므온이 감옥에 갇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42:38절을 보세요. “내 아들은 너희와 함께 내려가지 못하리니” 여기 내 아들은 베냐민을 말하는 것이고 너희는 10명의 다른 아들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니 다른 자식들은 뭐예요. 기가막힌 일이지요. 베냐민만 내 아들이라니 세상이 이게 말이 됩니까? 그러니 다른 아들들의 마음이 오죽이나 상했겠습니까? 정말 야곱에게는 베냐민 외엔 보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시므온이 죽건 살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야곱이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기 앞에서 아니 하나님의 압박 앞에서 변화된 것입니다. 이제 베냐민은 많은 형제 중의 하나가 되고, 너희 다른 형제……. 순서대로 부르게 됩니다. 베냐민을 앞세우지 않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주신 자식들 다 소중한 것이라고 하는 생각이 그 마음속에 들어왔다는 것이지요. "라헬의 자식도, 레아의 자식도, 여종 빌하와 실바의 자식도 다 귀하다, 모두 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선물들이다." 그 고백을 야곱은 비로소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위대한 고백을 하게 됩니다. 14절 끝부분, 오늘 설교의 제목입니다.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 여러분 이는 ‘자식이 죽어도 좋다’ 그런 말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 손에 이 자식을 온전히 위탁합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는 에스더의 고백과 같은 결단입니다. "하나님이 이 아이의 진정한 주인이십니다. 내가 지금까지 보호하고, 끼고 돌았지만, 그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이제는 하나님께 이 아이를 온전하게 맡기겠습니다. 하나님 이 아이를 책임져 주시옵소서."
그런데 6절을 보세요. 뭐라고 시작하고 있지요? 이스라엘이 이르되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그전까지 누구였습니까? 야곱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결단할 때 비로소 이스라엘입니다. 창세기 32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이름을 바꾸어주셨잖아요. 35장에서도요. 그런데 어느 순간 다시 야곱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제 다시 본연의 자리, 본연의 신앙인으로 돌아갑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신앙인, 하나님의 자녀인데 엉뚱한 데로 돌아갈 때가 없었습니까? 불 신앙인인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것처럼~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지금 어떠한 상태인가?" 나는 야곱으로 있는가 아니면 이스라엘로 있는가? 하나님의 사람인가 아니면 세상에 속한 육의 사람인가? 엉뚱한 자리, 야곱과 같은 자기에 있다면 빨리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이란 이름의 뜻이 무엇인가요? 우리는 흔히 이스라엘의 뜻을 "하나님과 겨루어 이김" 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히브리어로 분해하면 <이스라> + <엘> 즉... <이스라>는 '주도하다, 끈질기게 다투어서 이기다, 다스리다'를 뜻하는 <사라>의 3인칭 평서형 또는 기원형입니다. 그리고 <엘>은 고대 히브리인들이 부르던 하나님의 이름이죠. 그러니까 둘을 합치면 평서형으로 보자면 '하나님이 주도하다, 하나님이 이기다, 하나님이 다스리다'가 되고 기원형으로 보면 '하나님이 주도하시기를, 하나님이 이기시기를, 하나님이 다스리시기를'이 되는 거죠. 이는 BDB 히브리 사전이 내린 정의입니다. 다시 말하면 야곱은 그동안 그렇게 이기려고 바득바득 살아왔고 하나님마저 이긴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야곱에게 너, 이제는 이스라엘로 살아라. 나의 다스림을 받으면서 살아라. 그러면 네가 진정 평안하고 화해하고 승리하고 성공할 것이다.
이제 형들은 막내 동생,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으로 갑니다. 요셉 때 같으면 아버지에게 사랑받는 막내 동생을 혼자 데리고 가면서 미운 마음에 얼마나 괴롭혔겠습니까? 그런데 이제는 그러한 마음이 다 없어진 것이지요. 여러분, 그 형제가 애굽으로 가는 길을 한번 생각을 해 보세요. 발걸음이 아마 꽤 무거웠을 것입니다. 첫 번째 갈 때는 간단했습니다. 돈만 가지고 가서 양식만 사 오면 되었거든요,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가 못합니다. 양식도 사와야 하고, 간첩의 누명도 벗어야 하고, 감옥에 갇힌 시므온도 빼내 와야 하고, 더욱이 데리고 가는 막내 동생도 안전하게 귀환시켜야 합니다. 하지만 그 결과를 아무도 장담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발걸음이 무거울 수밖에요. 그러니까 그 무거운 여행을 뭐 하면서 갔겠습니까?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기도하면서 갔겠지요. 요셉을 생각하면서, 지난날들을 회개하면서, 하나님께 매달리면서……. "하나님, 지난날의 저희 죄를 용서해 주세요. 그리고 제발 하나님, 이번 여행이 안전하게 해 주세요. 막내와 함께 잘 갔다 돌아오게 해 주세요. 은혜를 베풀어 주세요"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얼마나 사랑하며 살고 있습니까? 얼마나 형제간에 우애하고 있습니까? 베드로후서 2장 4절 이하에서 나오는 신성한 성품 중에 형제 우애(7절)가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편애를 버리고 있습니까? 아들이든지 딸이든지, 맏이든지 막내든지, 그 가운데 낀 아이든지 똑같이 사랑하라, 성도를 대하든지, 이웃을 대하든지 같은 사랑으로 대하라는 말씀입니다. 또 하나, 우상화하면 안 됩니다. 자식이 아무리 귀해도 부모가 24시간 보호할 수도 없습니다. 아무리 귀해도 어느 순간에는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자식을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도 우리 자녀들에게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계시는 것입니다. 자식 때문에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안 됩니다. 자식을 우상처럼 떠받들어서 자식이 잘된다는 보장이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 나는 힘이 없는데 자식이 요구하면 이렇게 말하세요. "얘야, 나도 너를 도와주고 싶다만 능력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께 함께 기도하자.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가 되지 않으시냐? 하나님께서 너의 도움이 되지 않으시냐" 그래서 함께 기도하고 아이도 하나님을 바라보게 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목욕탕이나 수영장이나 호텔 같은 곳에 가면 꼭 그런 말이 있습디다. '귀중품은 카운터에 보관하세요. 맡기시지 않은 것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세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께 맡기지 않으면 책임져 주실 수 없습니다. 귀하면 귀할수록 맡겨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020년 1월 26일 주일 낮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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