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시험 | 박승남 | 2020-02-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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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창세기44:16-34절 개역개정16. 유다가 말하되 우리가 내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무슨 설명을 하오리이까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정직함을 나타내리이까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노예가 되겠나이다 17. 요셉이 이르되 내가 결코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잔이 그 손에서 발견된 자만 내 종이 되고 너희는 평안히 너희 아버지께로 도로 올라갈 것이니라 18. 유다가 그에게 가까이 가서 이르되 내 주여 원하건대 당신의 종에게 내 주의 귀에 한 말씀을 아뢰게 하소서 주의 종에게 노하지 마소서 주는 바로와 같으심이니이다 19. 이전에 내 주께서 종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아버지가 있느냐 아우가 있느냐 하시기에 20. 우리가 내 주께 아뢰되 우리에게 아버지가 있으니 노인이요 또 그가 노년에 얻은 아들 청년이 있으니 그의 형은 죽고 그의 어머니가 남긴 것은 그뿐이므로 그의 아버지가 그를 사랑하나이다 하였더니 21. 주께서 또 종들에게 이르시되 그를 내게로 데리고 내려와서 내가 그를 보게 하라 하시기로 22. 우리가 내 주께 말씀드리기를 그 아이는 그의 아버지를 떠나지 못할지니 떠나면 그의 아버지가 죽겠나이다 23. 주께서 또 주의 종들에게 말씀하시되 너희 막내 아우가 너희와 함께 내려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시기로 24. 우리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로 도로 올라가서 내 주의 말씀을 그에게 아뢰었나이다 25. 그 후에 우리 아버지가 다시 가서 곡물을 조금 사오라 하시기로 26. 우리가 이르되 우리가 내려갈 수 없나이다 우리 막내 아우가 함께 가면 내려가려니와 막내 아우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그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없음이니이다 27.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우리에게 이르되 너희도 알거니와 내 아내가 내게 두 아들을 낳았으나 28. 하나는 내게서 나갔으므로 내가 말하기를 틀림없이 찢겨 죽었다 하고 내가 지금까지 그를 보지 못하거늘 29. 너희가 이 아이도 내게서 데려 가려하니 만일 재해가 그 몸에 미치면 나의 흰 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하리라 하니 30.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31. 아버지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흰 머리로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 32. 주의 종이 내 아버지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짐을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33.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34. 그 아이가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내가 어찌 내 아버지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버지에게 미침을 보리이다 창44:16-34 마지막 시험 요셉의 집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형제들은 돈 때문에 자신들에게 달려들어서, 나귀를 빼앗고, 노예로 삼으려 한다고 걱정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그것이 쓸데없는 기우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요셉의 집에서 요셉이 베푼 점심 식사에 모두 즐겁게 먹고 마셨습니다. 그 잔치가 얼마나 지속하였는지 모르지만, 형제들은 그날 밤 그곳에서 편안하게 지내기까지 했습니다. 시므온도 풀려났고 베냐민도 무사하였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날 밤 저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꾸며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어른들이 산에다 놓은 덫을 종종 발견할 수가 있었습니다. 짐승들이 다니는 길목에 놓아서 잡으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끔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 그 덫에 걸려 다치는 일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못된 사람들은 사람에게 덫을 놓는 경우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덫은 아니지만 나쁜 일을 꾸며 상대가 옴짝달싹 못 하게 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덫입니다. 참으로 못되고 고약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 본분을 보면 바로 요셉이 그날 밤에 그러한 일을 자행한 것입니다. 그는 청지기에게 은밀히 지시를 내렸습니다. “저 사람들이 가지고 갈 수 있을 만큼 많이, 자루에 곡식을 담아라. 그들이 가지고 온 돈도 각 사람의 자루 아귀에 넣어라. 그리고 막내의 자루에다가는, 곡식값으로 가지고 온 돈과 내가 쓰는 은잔을 함께 넣어라.” 그래서 베냐민을 도둑놈으로 몰아붙이려 한 것입니다. 여러분 고대 이집트인에는 술잔을 사용하는 점이 널리 행하여졌습니다. 저들은 잔에 물을 붓고 거기에 돌이나 쇳조각을 던져서 물결이 이는 모양을 보고 일을 알아맞히는 점을 쳤습니다. 그러므로 애굽에서는 점치는 잔을 매우 신성한 것으로 여겼고 그 은잔을 거룩한 물건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을 훔치는 것은 그 집의 수호신을 훔치는 행위라 하여 엄하게 처벌했고 심지어 사형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이는 엄청난 음모가 아닐 수 없습니다. 드디어 다음 날 이제 발걸음도 가볍게 집으로 가면 되었습니다. 형제들은 동틀 무렵 나귀에 양식을 싣고 가나안 집을 향해 출발합니다. 아마 가면서 전날에 있었던 시간을 떠올렸을지 모릅니다. 정말 잠깐이지만 행복했습니다. 한동안 못 보던 시므온도 다시 만나고 애굽의 막강한 총리의 집에 초대받아 총리가 베푸는 진수성찬의 특별대접도 받았으니 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이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파격적인 일입니다. 애굽으로 올 때는 걱정 걱정하며 왔는데 그런 융숭한 대접을 받다니……. 그래서 저들은 잠시 후면 무슨 일이 닥칠지도 모르고 기분 좋게 콧노래를 부르면서 가나안의 집으로 향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디쯤 갔을까요? 성에서 멀리도 가기 전에 요셉의 청지기가 뒤를 따라왔습니다. 아마 말을 타고 군인들과 함께 왔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너희는 왜 배은망덕 하느냐? 어쩌자고 은잔을 훔쳐 왔느냐? 그것은 바로 내 주인께서 따라 마시는 잔이요 점을 치시는 잔이다. 어찌하여 이렇게 사람으로선 못 할 짓을 했단 말이냐!" 하며 호통을 치고 있으니 아무것도 모르는 저들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나리, 어찌 그런 말씀을 다 하십니까? 아니 소인들이 그런 짓을 하다니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나리의 상전 댁에서 은이나 금을 훔치겠습니까? 소인 중 누구한테서라도 그것이 나오면 그를 죽여도 좋습니다. 그리고 우리까지 당신의 종으로 삼으셔도 좋습니다." "그래, 너희 말대로 하자. 은잔이 나오는 자루의 임자는 우리 종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야 무슨 죄가 있겠느냐?" 그들이 급히 자루를 땅에 내려놓고는 저마다 풀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베냐민의 자루에서 그 잔이 나온 것입니다. 그러자 저들은 옷을 모두 찢으면서 저마다 나귀에 짐을 다시 싣고 그 성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직 출근하지 않은 요셉 앞에 무릎을 꿇리어 심문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도대체 요셉은 왜 이러한 못된 음모를 서슴없이 꾸민 것입니까? 여러분 요셉은 청지기를 통해 잔을 말하면서 늘 점치는 데 쓰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면 요셉이 과연 미신을 신봉했다는 것입니까? 아니 그새 애굽의 문화에 젖어 들었다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다고 믿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이 독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다만 그의 형제들에게 자신이 애굽 사람임을 가장하고 형들을 시험하려는 방법이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베냐민은 22년 만에 만난 친동생이요, 꿈에도 그리던 동생입니다. 그런데 자기 은잔을 하필이면 동생의 곡식 자루 속에 넣어 그를 도둑으로 몬 것은 형제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기 전 꼭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요셉이 애굽에 왜 왔습니까? 형들의 시기와 미움 때문이 아닙니까? 동생인 자신을 그토록 무자비하게 노예로 팔아넘긴 형들인데 지금은 어떠한지 형들의 사람 됨됨이를 알아보고자 한 것입니다. 물론 어느 정도 저들의 진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자신을 팔았던 형들이 지금 베냐민을 어떻게 대하는지 마지막으로 시험해 보고자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잔이 나온 이 애나 우리나 할 것 없이 모두 종이 되겠다 하는 형들에게 은잔이 나온 사람만 남고 나머지 사람들은 돌아가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형들이 자기를 팔 때와 비슷한 상황으로 형들을 몰아넣은 것입니다. 자 과연 형들은 어떠한 반응을 할까요? 지금 요셉은 저들의 반응이 몹시 궁금했습니다. 만일 무정하게 그냥 간다고 하면 어떻게 할까? 정말 초조한 순간입니다. 여러분, 과거의 형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사랑이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이복동생이라 하지만, 그리고 아무리 밉다 하지만 노예로 팔아넘길 수는 없는 일입니다. 또한, 아버지 앞에서 자식 된 도리로서도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22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어떤지, 과연 그 못된 마음이 지금은 고쳐졌는지, 최소한의 형제애도 찾아볼 수 없었던 그들이 지금은 과연 어떻게 반응할지 알아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결국, 시험의 핵심은 그들에게 형제애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종종 사람을 시험하시는데 그 시험의 내용은 사랑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시험하실 때 시험하신 내용이 무엇입니까? 백 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것으로 이는 아브라함이 자기 자식 이삭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가 하는 것을 확인해 보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3일 길을 걸어 모리아 산까지 가서 이삭을 바치려 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입증했습니다. 이러한 사랑을 확인하신 하나님은 미리 양을 준비해 두셨다가 아들 대신 제물을 삼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무엇으로 보여주겠느냐 물어보신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물론 어떤 분들은 헌금을 많이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찬양을 열심히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봉사를 열심히 해서 보여 드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또 다른 면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를 보여 드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한일서 4:7-8) 하셨습니다. 또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요한일서 4:20)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고 ‘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네가 지금 네 옆에 있는 네 형제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나를 사랑한다고 하느냐? 너는 거짓말하고 있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노라면 신비한 일들을 체험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신령한 음성을 듣고 신비한 환상을 보았다 해도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그 모든 일은 아무것도 아닙니다(고린도전서 13:1-13). 미국의 시인 로웰이 쓴 "롱펠의 꿈"이란 책에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롱펠은 중세시대에 어느 성의 군주였습니다. 그는 말타기를 좋아하며 모험을 즐기는 사람이었습니다. 롱펠은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위해 무슨 일이든 뜻있는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을 늘 갖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작별의 저녁 식사를 하시면서 포도주를 부어 마시던 은잔이 세상 어디인가에 있을 것을 생각했습니다. 듣건대 그 은잔은 후에 한 미술가의 손에 넘어가 예수님과 열두 제자들의 얼굴이 밑바닥에 그려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유명한 은잔을 찾아서 후대 사람들에게 기념으로 보여준다면 뜻있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롱펠은 긴 여행을 준비했습니다. 물통에는 물을 가득 채우고, 자루에는 빵을 가득 채웠습니다. 모든 짐을 말에 실었습니다. 돈도 넉넉히 가지고 말을 탔습니다. 성문을 지나 먼 여행길을 달렸습니다. 어느 벌판을 지나가다가 나병 환자를 만났습니다. 나병환자는 지치고 배가 고파 보였습니다. 떨어진 옷을 걸치고 "형제여!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를 도와주세요. 먹을 것을 좀 주세요. 물을 좀 주세요." 하며 구걸을 했습니다. 그러나 롱펠은 말 위에서 거칠게 말을 했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방해하지 말라. 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구주 예수님의 은잔을 찾기 위해 떠나가는 몸이다. 더러운 문둥이가 어찌 나의 가는 길을 막는가?" 하지만 그는 더욱 애걸하면서 "나를 살려 주세요. 이대로 두면 굶어 죽습니다." 롱펠은 금화 한 개를 던져 주고 말을 달렸습니다. 롱펠은 이곳저곳을 다니며 은잔을 찾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10여 년간 유럽의 여러 나라를 여행했지만 헛수고였습니다. 롱펠은 힘없이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모든 꿈은 사라지고 떨어진 옷을 걸친 그는 힘없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추운 겨울날이었습니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벌판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롱펠은 지쳐서 간신히 몸을 가누며 걸어가다가 한 걸인을 만났습니다. 걸인은 쓰러져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롱펠은 쓰러진 걸인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줄 것은 이 빵이 있을 뿐입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이것을 받으세요." 그리고 차고 있던 표주박으로 물을 부어 걸인에게 마시게 했습니다. 물을 받아 마시던 걸인은 홀연히 빛이 나더니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보라! 나로다. 두려워 말라. 너는 은잔을 얻으려 이 나라 저 나라로 여행하였으나 너 얻은 것이 무엇이냐? 보라! 너의 손에 들려있는 쪽박을, 나에게 물을 떠준 그 쪽박이 네가 헤매던 은잔이니라. 네가 준 그 빵이 찢긴 나의 몸이요. 나에게 마시운 그 물이 십자가의 피로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마음이 성찬이로다." 롱펠은 정신을 차리고 깨어보니 꿈이었습니다. 그 후 그는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 재물을 나누어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때로는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 큰일을 하고 싶어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내가 하는 작은 일 그것이 위대한 일, 큰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반면 우리가 아무리 큰일을 한다 해도 작은 일, 작은 사람을 무시할 때 주님은 네가 한 일이 무엇이냐? 그것이 과연 나를 위한 것이냐? 너의 만족을 위해 한 일이 아니냐? 그러니 그것은 나와 상관이 없다 하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모습을 마태복음 7:21절 이하의 말씀에서 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자 그러면 이제 형들이 어떻게 나왔습니까? 형들은 돌아가도 좋다고 했으니 만일 전과 같았다면 저들은 아무런 부담도 느끼지 않고 유유히 집으로 올라가려 했을 것입니다. 그토록 간곡해 애원하던 요셉을 뿌리치고 노예로 팔아넘겼는데 그 정도야 양반이지요. 물론 아버지가 걱정되길 하겠지만 어차피 아버지는 노인이니 언젠가는 돌아가실 것이므로 그때까지만 좀 힘들어도 참으면 되지 않겠나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요즘 무정한 자식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부모를 학대하고 심지어 죽이는 자식들까지 있으니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쨌든 만일 형들이 요셉을 내버려 두고 가버렸다면 요셉은 베냐민만 데리고 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형들은 그냥 그렇게 가나안에서 이름도 없이 살다가 죽게 되었을 것입니다. 평생 죄책을 지고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번 경우는 달랐습니다. 모두가 불안에 떨며 할 말을 잊고 있었을 때 유다가 나셨습니다. 그리고는 완강하게 베냐민 대신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지겠으니 베냐민을 보내 달라고 탄원하였습니다. 유다의 탄원 내용이 본문인 창세기 44:16-34까지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을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본다면, 유다의 탄원은 우리가 주님을 섬기며 주님께 기도하는 성도의 모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요셉 앞에서 탄원하는 유다는 1. 누구도 탓하지 않고 자신의 죗값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본문 16절을 보면 유다는 "우리가 주인어른께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무슨 변명을 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우리의 죄 없음을 밝힐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소인들의 죄를 들추어내셨으니, 우리와 이 잔을 가지고 간 아이가 모두 주인어른의 종이 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요셉의 잔이 베냐민의 자리에 들어있었으므로 베냐민을 향해 "야 이놈아, 너 어쩌자고 이러한 일을 행했어? 이 철딱서니 없는 놈아" 하면서 베냐민을 욕하고 나무라고 원망할 만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모습은 하나도 없이 유다는 자기들의 죄악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22년 전 요셉을 팔았던 죄책감이 다시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지난날의 죄를 되새기게 되는 것이 사람의 양심입니다. 동생 요셉이 팔려가면서 그토록 울며 애원하는 모습을 보고도 끝내 외면하고 팔아넘긴 그 죗값을 지금 받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자신들의 죗값으로 돌리는 이들의 자세를 본 요셉은 어떠했겠습니까? 그 마음이 얼마나 뭉클했겠습니까? 그리고 이처럼 하나님께서도 ‘나 때문입니다’ 라고 하면서 중심으로 회개하는 사람을 어찌 기쁘게 받지 않으시겠습니까! 시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2. 그리고 그는 아버지 야곱의 심정을 깊이 헤아리고 있습니다. 본문 30-31절을 보면 아버지가 베냐민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아버지의 목숨과 이 아이의 목숨이 이렇게 얽혀 있습니다 라고 하면서 만일 소인의 아버지가 이 아이가 없는 것을 알면, 소인의 아버지는 곧바로 숨이 넘어가고 말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22년 전 유다를 비롯한 형들은 아버지가 얼마나 비통해했는가를 똑똑해 보았습니다. 요셉이 맹수가 물어 죽인 것처럼 위장하려 하여 염소를 잡고 그 피를 요셉의 옷에 묻힌 후 그 옷을 아버지 야곱에게 보여주었을 때 얼마나 대성통곡했는지, 어쩌면 실신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긴 세월 동안 얼마나 슬퍼하며 괴로워하며 지내셨는지를 죽 지켜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죽었지만, 시체조차 보지 못한 아버지의 심정이 오죽했겠습니까? 죽은 시신이라도 찾고자 아들들을 데리고 산과 들을 수없이 헤매며 다녔을 것입니다. 아들들은 요셉이 죽었다고 거짓말을 했으므로 시체를 찾는 흉내만 냈을 것이고, 아들들의 거짓말을 알지 못한 아버지 야곱만이 애타게 아들의 시신을 찾았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지친 아버지는 요셉의 피 묻은 옷만을 땅에 묻고 무덤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식 생각에 22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그 상처는 사라지지 않고 아버지의 가슴에 남아 있음을 보았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자식들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아무리 동생이 미웠지만, 몹쓸 일을 했음을 두고두고 후회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또다시 베냐민까지 잃게 된다면 어떤 결과를 맞을지 뻔해 보이는 일이었습니다. 필경 연로하신 아버지는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시고 세상을 떠나실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유다는 필사적으로 요셉에게 탄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볼 때 유다는 22년 전 유다가 아니라 이제는 효자로 변모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한 번의 불효도 씻을 수 없는 한을 남겼는데 또다시 그 죄를 범할 수 없다는 유다의 의지인 것입니다. 여러분 효도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부모님의 심정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심정을 헤아리면 효도할 방법은 저절로 깨닫게 됩니다. 복 받기를 바라십니까? 잘 되기를 바라십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자녀들아, 주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6:1-3) 3.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이 희생을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애굽의 총리 요셉 앞에서 유다가 말하기를 "저 아이 대신에 소인을 주인어른의 종으로 삼아 여기에 머물러 있게 해주시고, 저 아이는 그의 형들과 함께 돌려보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자기가 베냐민 대신 종이 되겠다니 이는 노예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감동적입니까? 여러분 같으면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부모님 같으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식을 위해 차라리 내가 죽지, 자식이 몹시 아플 때 차라리 내가 아프지 이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형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형제를 위해 내가 아프면 좋겠다, 내가 죽으면 좋겠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자신이 종이 되겠다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말을 들었을 때 요셉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아, 이처럼 베냐민을 사랑하는구나! 베냐민을 그토록 생각하는 마음을 보았을 때 바로 자신을 그처럼 사랑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감동되는지 이런 희생정신이 요셉의 마음 문을 열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나라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희생하셨기에 그 희생의 공로로 우리가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주님의 제자들은 이기심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희생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성경은 우리를 가리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세상의 빛이라" 하셨습니다. 소금은 녹음으로 맛을 내며, 촛불은 자기의 몸을 녹여 태울 때 빛을 발하게 됩니다. 기독교가 로마에 처음 들어갔을 때, 수많은 핍박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가, 기독교인들이 사람의 피를 먹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성찬식 때에, 포도주를 먹는 것을 보고서, 반대자들이 피를 먹는다는 이유를 달아서, 박해의 도구로 이용한 것입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로마 시내의 한복판에, 땅굴을 파고 들어가서 숨었다. 그 굴이 바로 카타콤입니다. 그 무렵에 로마 도시에, 염병이라는 전염병이 돌았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로마 시내 길거리 곳곳에서, 죽은 채로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누구도, 그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시체에 손을 대자마자, 전염되어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 시내는, 사람들의 사체가 길거리마다 쌓여 있었고, 시체가 썩는 냄새로 인해서, 악취가 코를 찔렀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한밤중에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나타나서, 시신을 수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아침이면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며칠 후에, 로마의 시내는 시체가 모두 치워지고 깨끗하게 되었다. 로마에 있는 고관으로부터, 일반 서민들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궁금했습니다. 도대체 저들이 누구일까? 로마 정부에서 나중에 자세히 알아보니, 카타콤으로 숨어들어 갔던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에 대한 오해가 풀렸다. 기독교를 핍박하는 대신에, 칭송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에 기독교가 로마의 종교로 공인이 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시신을 수습한 성도 중에서, 단 한 사람도 염병에 걸리지를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할 때에, 나타나는 하나님이 역사하신 기적이었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이,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서, 두려워하고 떨면서 공포 속에 살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때문에 주일 예배를 드리지 않는 성도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기본적인 수칙을 지키고, 안전에 대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런데 미리 겁을 먹고서, 두려움에 떨면서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은, 참다운 기독교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기독교인들은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들의 사체를 치우는 사람들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이러할 때, 세상 사람과 다른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다음에,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세상의 염병이 돌거든, 이 전에 와서 기도하면 들어 주시옵소서". (왕상8:37~39)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지금이, 염려, 두려움에 싸이기보다는 바로 기도를 해야 할 때이며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볼 때입니다. 그리고 믿는 자로서의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모습을 보여 줄 좋은 기회이기도 합니다. 결국, 이러한 유다의 탄원으로 인하여 감동한 요셉은 자신의 신분을 밝히게 되었고 형제의 화해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함으로 유다는 애굽으로 떠나올 때 아버지에게 이렇게 아뢰었었습니다. 제가 그 아이의 안전을 책임지겠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 아이에 대해서는, 저에게 책임을 물어 주십시오. 제가 그 아이를 아버지께로 다시 데리고 와서 아버지 앞에 세우지 못한다면, 그 죄를 제가 평생 달게 받겠습니다. (창세기 43:9) 그리고 유다는 자신의 말에 책임을 졌던 것입니다. 진정 하나님은 책임 있는 삶을 살아가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이렇게 유다가 베냐민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여 내어놓은 행위는 후일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 제물로 내어주신 일의 예표가 됩니다. 나중에 이스라엘이 큰 국가를 이루었을 때 야곱의 열두 아들을 통해서 12지파로 구성됩니다. 그런데 역사를 더듬어 보면 솔로몬 사후에 이스라엘 12지파가 분열하여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로 나뉩니다. 이때 베냐민 지파는 유다 지파와 행동을 함께하였습니다. 그것은 유다가 베냐민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바쳐서 변호하며 증보했던 일을 기억하고 그 빚을 갚는, 은혜를 갚은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다로 인하여 마지막 시험은 아름답게 마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유다는 훗날 그 자손이 하나님으로부터 넘치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의 후손 가운데 나라의 왕들이 줄을 이었고, 그 가운데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다윗 왕도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까지 유다의 후손으로 탄생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7장 14절을 보면 우리 주님께서는 유다 지파에서 나신 것이 명백합니다. 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죄인들을 위해서 기도했을 뿐 아니라 유다처럼 보증까지 서 주셨고 온전히 자신을 내어주시어 수많은 생명을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아울러 베냐민의 후손인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뿐만 아니라 모든 흩어진 세상 사람들을(이방)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되돌이키는 일에 힘썼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런저런 시험이 있습니다. 유혹의 시험도 있지만, 진실, 사랑을 찾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시험입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함으로 부디 이 시험을 잘 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 2020년 2월 9일 주일 낮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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