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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적인 이야기 박승남 2020-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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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창세기45:1-15절 개역개정

1.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들에게 자기를

2. 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3.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

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6.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9. 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아뢰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지체 말고 내게로 내려오사

10. 아버지의 아들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고센 땅에 머물며 나와 가깝게 하소서

11. 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족과 아버지께 속한 모든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나이다 하더라고 전하소서

12. 당신들의 눈과 내 아우 베냐민의 눈이 보는 바 당신들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은 내 입이라

13. 당신들은 내가 애굽에서 누리는 영화와 당신들이 본 모든 것을 다 내 아버지께 아뢰고 속히 모시고 내려오소서 하며

14. 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우니 베냐민도 요셉의 목을 안고 우니라

15. 요셉이 또 형들과 입맞추며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서야 요셉과 말하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45:1-15 감동적인 이야기

     

루마니아의 산 순교자라고 일컬어지는 리처드 범브란트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한 번은 목사님이 기독교인 30명과 함께 루마니아의 어느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기를 잡아넣고 고문하던 그 비밀경찰 대위가 잡혀 들어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어떻게 여기를 들어오게 되었소?"하고 물어보았더니 "나도 기독교인입니다."라고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어떻게 해서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네, 얼마 전에 열두 살 난 어린이가 꽃다발을 들고 저를 찾아와서는 그 꽃다발을 저에게 주면서 "당신 부인에게 갖다 주세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무슨 일이냐?"하고 물어보았더니 그 어린이가 하는 말이 "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두 분 다 감옥에 갇히셨습니다. 그런데 어머님의 생일에는 꽃다발을 드리곤 하던 것을 당신이 우리 어머니 아버지를 다 붙잡아갔기 때문에 오늘은 드릴 수가 없어서 당신께 가져왔으니 이것을 당신 부인께 가져다주세요"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그런데 왜 나한테 이 꽃다발을 가지고 왔니?"하고 물어보았습니다. 이때 이 어린이는 "어머니께서 항상 가르쳐 주시기를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우리 어머니 아버지를 붙잡아간 원수인 당신을 내가 사랑해서 가지고 온 것입니다."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때 저는 어린이가 안겨 준 사랑의 꽃다발을 붙들고는 이 어린이와 함께 울면서 회개하고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저도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6:27-28)

 

오늘 말씀은 그야말로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저는 본문을 읽으면서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요셉이 형들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아버지를 생각하는 마음에 말입니다.

우리는 지난주까지 꿈을 꾼 요셉이 시기 질투를 받아서 형들에 의해 종으로 팔려온 것으로부터 애굽의 총리가 된 것과 그리고 마침내 형들을 만나게 되어 형들을 시험한 이야기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형들의 입장에서는 황당하고 두렵고 긴장되고 답답하고 억울한 일들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자신들의 죄악을 돌아보게 되었고 진정 아버지와 동생 베냐민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특히 유다가 그 대표적입니다. 그는 지나주 본 말씀과 같이 동생을 비난하지 않았고 아버지를 진정 생각하는 효자의 모습과 자신이 대신 종이 되겠다고 하는 희생정신을 보여주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마음이 다른 형들의 마음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편 우리는 눈물 많은 요셉을 볼 수 있었습니다.

4221장 이하를 보면 형들이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그리고 큰형 루우벤이 내가 너희에게 그 아이에 대하여 죄를 짓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더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핏값을 치르게 되었도다 하는 말을 듣고는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기도 하였고

4330~31절을 보면 요셉이 아우를 사랑하는 마음이 복받쳐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 얼굴을 씻고 나와서 그 정을 억제하고 음식을 차리라 하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그동안 요셉이 눈물을 얼마나 많이 흘렸겠습니까? 성경은 마치 요셉에게 큰 상처가 없었던 것처럼 자연스레 그려주고 있지만, 그가 물 없는 구덩이에 빠뜨려졌을 때, 노예로 팔릴 때, 낯설고 물설은 애굽 땅에 와서 노예 신세로 살아가야 했을 때, 억울하게 강간을 시도한 파렴치범으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그렇게 약속했던 술맡은 관원장이 자신을 까맣게 잊어버렸을 때 얼마나 가슴이 쓰리도록 괴롭고 아프고 눈물이 났겠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고난과 시련의 시간 너무도 아름답게 극복한 요셉,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지켜보셨고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총리가 되게 하시고 형들을 만나 시험의 과정을 다 마치고 드디어 형들에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시간이 다가온 것입니다. 그 때에 요셉은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자기의 모든 시종들 앞에서 그만 "모두들 물러가라!" 하고 소리쳐 주위 사람들을 물러나게 하고, 드디어 자기가 누구인지를 형제들에게 밝히고 나서, 한참 동안 울었습니다. 그 울음 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밖으로 물러난 이집트 사람들에게도 들리고, 바로의 궁에도 들렸습니다.

여러분 인간에게는 여러 가지 감정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눈물은 살아있는 인간 감정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눈물은 이율배반적입니다. 사람이 가장 슬픈 일을 당하거나 목격할 때 눈물을 흘리지만, 반면에 가장 기쁘고 감격적인 일을 성취하거나 목격할 때에도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고 보면 '가장 슬픈 일''가장 기쁜 일'과 가장 깊은 공감대를 가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눈물은 '없어야 할 것'도 아니고 '부끄러운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가장 슬픈 일을 당하여 눈물을 흘릴 때 그 눈물은 '슬픔을 정화시키는 눈물'이 될 것이며, 우리가 괴로움으로 인하여 눈물을 흘릴 때 그 눈물은 '상처받아 무거운 마음에 비상 탈출구를 열어주는 눈물'이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연민으로 인해 눈물을 흘릴 때 그 눈물은 '인격 성장을 촉진시키는 눈물'이 될 것이며, 우리가 복음의 씨를 뿌리기 위하여 눈물을 흘릴 때 그 눈물은 '기쁨으로 영혼의 단을 수확하는 참으로 고귀한 눈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감격과 기쁨으로 인하여 눈물을 흘릴 때 그 눈물은 '받은 감격을 오래도록 지속시켜주는 눈물'이 될 것입니다. 사람은 슬플 때나 아플 때 눈물을 흘립니다. 너무 기쁠 때, 너무 고마울 때도 뜨거운 눈물을 흘립니다. 용서하고, 화해하고, 사랑하며 흘리는 눈물은 더 뜨겁습니다. 눈물은 사람을 맑게 합니다. 눈에 뜨거운 눈물이 맺히면 그의 영혼엔 무지개가 피어오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여 주는 요셉의 눈물을 통해 우리는 폭풍 속의 소나기가 지난 뒤에 하늘에 개이고 그 가운데 아름다운 7 빛깔 무지개가 영롱하게 피어나는 것을 마음으로 그려 볼 수 있습니다. 지난 주 살펴 본 것처럼 형제들은 막내 베냐민에게 생긴 일로 인해 엄청난 위기에 빠졌었습니다. 정말 앞이 캄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장면을 연출한 요셉의 마음은 초조하고 긴장되었을 것입니다. 과연 형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그런데 형제 중 유다가 요셉에게 가까이 나아가 진솔하고 겸손하게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요셉의 눈에서는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엉엉 운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남자는 울면 안된다는 말을 해 왔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 운다'며 울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소녀와 소년, 멋진 사람이 되는 법](윤은주 글·이해정 그림)이라는 책을 보면 "어린이는 원래 눈물이 많아. 여자든 남자든 똑같아. 아프면 슬프고 서러우면 우는 게 당연한 거야. 사람은 누구나 울 자유가 있어! 자기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좋은 일이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흔히 일상 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여자다움' '남자다움'의 구분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도 우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을 보면 예수님은 사랑하는 나사로 집에 찾아가셨습니다. 이 때는 나사로가 죽은지가 나흘이나 된 때입니다. 이 때 마리아와 함께 따라온 유대 사람들이 우는 것을 보신 예수님의 마음이 비통하여 괴로워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 하고 물으시니, 그들은 "주님, 와 보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는데 이때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우셨을까요? 사람들은 예수님이 우신 이유는 나사로를 그만큼 사랑하셨기에, 그가 죽은 것이 못내 가슴 아파서 우셨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주위 사람 눈치 보지 않고 그냥 우셨을까요? 그것도 눈물을 찍어내거나 훔칠 정도가 아니라 주위 사람이 다 알아차릴 정도로 우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애초에 눈물과 관계없이 나사로를 살리려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의 눈물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예수님이 우리와 마음을 같이하고, 감정을 나누신다는, 다시 말해서 사람의 마음을,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시고, 같이하신다는 말입니다. 나사로를 사랑하는 마음이 나사로를 살리려는 마음을 만들어 내었고 죽음이 있는 곳으로 가셔서 우는 사람들과 같이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얼마나 사랑하셨던지 그 사랑의 최고 경지의 모습을 울음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랑이 밥 먹여 주냐, 사랑만 있으면 다냐?”라고 말합니다.

그런 질문을, 우리를 대신해서 유대인들이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136~37절을 보면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그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그래 좋다, 좋아, 그렇게 사랑해서 눈물을 흘리면 뭐하냐? 그렇게 사랑했다면, 죽기 전에 와서 진작 와서 살려내야지. 지금 와서, 뭐 한다고 울고 있냐?' 라는 것입니다. 그런 질문에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려내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는 말씀으로 말입니다. 여러분 사랑은 바로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죽은 사람을 살려냅니다. 나아가 죽을 사람을 살려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울던 요셉은 말합니다.

"내가 요셉입니다!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다고요?" 요셉이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으나, 놀란 형제들은 어리둥절하여, 요셉 앞에서 입이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이리 가까이 오십시오" 하고 요셉이 형제들에게 말하니, 그제야 그들이 요셉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면서 요셉은 4절부터 13절까지의 말을 합니다.

그 말을 들어보면 우선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밝힙니다.

내가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넘긴 그 아우입니다.”

여러분 이 말을 들은 형들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을 것이고 그들의 마음은 얼어붙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동생 베냐민은 너무도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제 형들은 요셉에게도 베냐민에게도 그야말로 머리를 들 수 없는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제 우리는 죽었구나 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다음 말이 너무도 감동적입니다. 5절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책하지도 마십시오. 형님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아 넘기긴 하였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이, 형님들보다 앞서서 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분명이 요셉의 말처럼 형들이 요셉을 노예로 팔아넘겼습니다. 그래서 애굽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요셉이 고생한 것이 그 얼마입니까? 노예로서, 또 감옥에 갇혀서 지냈던 어둡고 괴롭고 고달팠던 시간, 외로웠던 시간은 그 얼마입니까?

그런데 요셉은 자기를 그처럼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장본인들을 만난 자리에서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습니다. 나에게 이처럼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시려고 그리하셨습니다. 그러니 근심하지 마십시오. 한탄하지도 마십시오.”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어디 쉬운 일입니까? 이것은 이제 형들을 다 용서한다는 것인데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한 마디로 신앙으로 해석하는 섭리 신앙입니다. 요셉이 배신한 형제를 만나 방성대곡하며 극적으로 화해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자기 생애를 철저히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가 자신의 아픈 과거사를 기구한 운명의 장난으로 치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과 경륜으로 이해하고 해석했기에, 자기를 버린 형들에게 관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그 깊은 상처를 근본적으로 치유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억울하기 짝이 없고, 아무리 형제라 하여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치명적인 배신이었습니다. 요셉이 잘못한 게 무엇입니까? 있다고 해도 그것이 그렇게 노예로 팔아버릴 정도로 못된 죄였습니까? 잘못이 있었다면 아버지 야곱이 다른 형제보다 자기를 더 사랑한 것이 잘못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꿈을 주신 하나님이 잘못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요셉을 보십시오. 그는 그것을 단지 인간적인 비극으로만 보지 않고, 그 배후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실제 요셉이 얼마나 이러한 섭리 신앙에 투철했는지는 7~8절도 보십시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이게 다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 앞에서 감히 고개도 못 들고 사시나무 떨듯 하고 있는 형들에게 한 요셉의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형들을 위로합니다. 근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소서. 다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우리에게도 요셉과 같은 섭리신앙이 필요합니다. 누가 뭐래도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피상적으로만 보면 인간이 제멋대로 현실을 주무르고 역사를 요리하는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인간사 그 어떤 사건도 하나님의 간섭 없이 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배신을 당하지 않았다면, 애굽에 팔려가지 않았다면, 애굽에서 억울하게 감옥에 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가 애굽의 총리대신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역사에 이런 반전은 없었습니다. 그러니 요셉이 회고를 한 겁니다. 모든 게 하나님의 뜻이고 섭리라고 말입니다. 형들에게 인신매매 당한 것, 애굽에서 노예생활하다가 억울하게 감옥 생활한 것, 이 모두가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겁니다. 여러분 요셉은 꿈 때문에 더욱 미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꿈을 주신 하나님이 싫을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어릴 때 주신 꿈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경륜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어려움을 이겨내고 형들을 용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나 개인적인 차원에서나 하나님의 섭리를 믿을 때 고난과 시련을 능히 이겨낼 수 있고 용서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위기에는 반드시 기회가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그 어떤 시련과 고통과 불행과 저주 같은 일도 선하게,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민족적으로도 민족의 분단은 너무나 큰 고통입니다. 그리고 분단과 6.25는 그 책임 당사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 민족사 배후에도 분명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도 요셉의 섭리 사관을 배웁시다. 요셉의 이 대범하고 대승적인 섭리 신앙을 배웁시다. 요셉의 감동적인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이 하신 겁니다. 형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더 큰 구원과 밝은 미래를 위해 하나님이 나를 이리로 먼저 보내신 겁니다. 그러니 염려하지 말고 안심하소서. 오늘을 위해, 우리의 가족을 위해 하나님이 지난 모든 시간을 섭리하신 겁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믿음 그대로 우리 삶에 어떤 것도 헛된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현재의 아픔, 절망도 우리의 기쁨,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그렇게 믿고 해석하시기를 바랍니다.

 

또 감동되는 요셉의 말이 있습니다. 9~13절까지입니다. 그중에 11절을 보십시오.

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족과 아버지께 속한 모든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나이다 하더라고 전하소서 (흉년이 아직 다섯 해나 더 계속됩니다. 제가 여기에서 아버지를 모시겠습니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안과 아버지께 딸린 모든 식구가 아쉬울 것이 없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하고 여쭈십시오.)

여러분 왜 감동이 됩니까? 아버지를 봉양하겠다, 아버지만이 아니라 그 모든 식구를 아쉬울 것이 없도록 해 드리겠다. 그야말로 잘 섬기겠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진정한 섬김에는 감동이 있습니다. 여러분 당시 요셉은 초강대국 이집트의 총리대신입니다. 형들은 양식이 없어 이집트로 구걸하러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이 얻은 복을 형들에게 원수 갚는 것에 쓰지 않았고 섬기는 데 쓰겠다는 것입니다. 원래 화해는 이런 겁니다. 강자가 먼저 양보하고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강자가 먼저 약자의 발을 씻겨야 합니다. 약자는 자존심이 전부이기에 스스로 먼저 숙이고 들어가기 힘듭니다. 이집트 총리 요셉이 먼저 형들을 끌어안았던 것처럼 조금이라도 잘 사는 쪽이 약한 쪽을 섬겨야 합니다. 이런 게 성서적입니다. 그런 섬김과 양보가 없는 한, 화해도 민족의 통일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요즘 민주당에서 민주당을 빼고라는 글 때문에 임미리교수와 경향신문을 고발했다가 취하한 일이 있습니다. 물론 이는 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고발한 것은 자신들(민주당)의 말 따라 과도했다즉 도를 지나쳤다는 것입니다. 강자로서, 집권 정당으로서 언제든지 비난을 받을 자세를 감수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고발했다가 혼나고 있습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우니 베냐민도 요셉의 목을 안고 우니라 15 요셉이 또 형들과 입맞추며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서야 요셉과 말하니라요셉이 먼저 그들을 끌어안고 입맞추며 울자 그때야 형들도 울며 요셉과 말합니다. 강자가 먼저 끌어안아야 합니다. 강자가 먼저 달려가서 입을 맞추어야 하고,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더 잘 사는 우리가 먼저 북한의 형제를 포용하고 도와야 합니다. 우리가 좀 더 과감하게 북한 동포를 끌어안고 섬겨야 합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섬김의 종교입니다. 또한, 생명의 종교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으로 섬김으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섬김으로 살리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너희에게 질문하고 있지 않으냐? 그래 너희들이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너희들끼리 좋아서, 서로서로 대우해 주고, 챙겨 주는 그러한 사랑이 아니냐고 하는 그런 질문에 이제 너희들이 대답하거라.

마태복음 546~48절의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47 또한 너희가 너희 형제자매들에게만 인사를 하면서 지내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 사람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48 그러므로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온몸과 너희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고 그런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보여 주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9절에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저는 확실히 믿습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를 사랑하시는가? 바로 우리를 살리려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를 살림으로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사랑을 가르쳐 주신 이유는, 우리가 그 사랑으로 우리끼리 또는 나 혼자 잘 지내고 만족하라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신 그 사랑으로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려내야 합니다.

미국가정의 불행한 요인을 조사해서 밝힌 것을 보면 상대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고 늘 들추어내는 사람, 그런 가정이 무너진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모두가 다 덮어주는 관계입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 인간관계를 덮어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가 은혜 받았으니 은혜 베풀고 내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고 내가 죄사함 받았으니 죄 용서해 주고 내가 긍휼을 받았으니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는 곳마다 감동적인 이야기, 예수 사랑의 이야기가 넘쳐나기를 축복합니다. 2020216일 주일 낮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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