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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병의 시대에 박승남 2020-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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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역대하7:13-14절 개역개정

13. 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메뚜기들에게 토산을 먹게 하거나 혹 전염병이 내 백성 가운데에 유행하게 할 때에

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대하7:13~14, 13:34~35, 12:15 역병의 시대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렇게 예배당에 모여 함께 예배드리지 못하고 가정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 현실이 매우 마음이 아픕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공예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구체적인 한 장소에 모여서 유일하시고 참되신 삼위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가 교회입니다(4:10). 주의 이름으로 모인 곳(18:20), 즉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가 시행되는 곳에 교회가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모이기를 폐하지 않고 힘써 모여야 합니다(10:25). 우리 신앙고백서도 신자는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고, 또 할 수 있지만, 공적 집회에서 더 엄숙하게 예배할 수 있으므로 이런 집회를 임의로 소홀히 하거나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1:6). 성도는 질병 혹은 감염의 이유로 발생한 다양한 상황 속에서도 마음으로는 모여 예배하는 것을 더욱 사모해야 하며 혹여 예배에 참여하지 못하더라도 이를 안타깝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공예배를 절대화시키는 위험에 빠져서도 안 됩니다. 무지와 미신에 빠져있었던 중세시대의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지켜 주실 것이라고 믿고 예배당으로 몰려들기도 하였지만, 그것이 오히려 전염병을 더욱 확산시켰던 역사적 사실이 있습니다. 종교개혁가들도 주일 성수에 대하여 매우 엄격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하지만, 전염병이 돌았을 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규범을 벗어나지 않는 한 피신을 가장 지혜로운 방법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용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비록 칼빈이나 루터와 같은 위대한 목회자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남아있는 환자들을 돌보기도 하였지만, 성도들이 예배당을 떠나 피신하는 것까지 금하지는 않았습니다.

 

다가오지 마! 나는 당신이 두렵다.” 사람이 다가오는 것이 두려운 전염병입니다.

최근 코로나바이러스가 연일 TV 라디오 신문을 장식하고 있고 확진자가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마스크, 손 세정제 등 위생용품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고 있습니다. 물론 이 같은 현상의 이면에는 자신도 감염될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고대 그리스, 로마제국, 중세 문명, 그리고 인디언 문명을 차례로 강타한 전염병이 오늘날 재차 닥친다면 그야말로 사람들은 지구의 종말이 온 것처럼 느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역사를 보면 여러 시대에 있었습니다. 전염병이 본격적으로 인류의 골칫거리가 되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1만 년 전인 농업시대로의 진입 때부터였습니다. 그리고 출애굽기에 나오는 10가지 재앙 중에는 개구리·파리·메뚜기·이 등의 해충, 그리고 전염병과 독한 종기 등 인간이 걸리는 질병이 들어 있습니다.

 

전염병의 역사를 보면 명실공히 사상 최악의 전염병은 중세시대에 무려 7,500만 명에 달하는 사람을 죽인 페스트였습니다. 오죽하면 문호 알베르 카뮈가 페스트라는 제목의 소설을 썼을까요. 페스트는 쥐벼룩에 의해 매개되는 전염병인데 감염의 시작은 중국(원나라) 윈난성이었습니다. 그리고 쥐벼룩에 의해 감염된 쥐들이 1347년 무역선에 실려 이탈리아 시칠리아섬에 처음 상륙하여 옮기기 시작했는데 유럽 인구의 1/3이 흑사병으로 죽어갔습니다. 페스트에 걸리면 사람 몸이 새카맣게 타서 죽어갔기에 흑사병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강력한 페스트는 귀족들의 부와 권력을 줄어들게 했고 농노들은 영지를 떠나 소작농·소지주·장인 등으로 변신하게 됩니다. 중세 봉건주의 경제의 기반이 흔들리게 된 것입니다. 또한, 페스트를 퇴치하는 데 실패한 교회로부터 민심이 이반 됨에 따라 중세의 정신적 기반이었던 기독교(가톨릭)의 위세도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병이 끝난 뒤 유럽에서 문예부흥운동 르네상스 시대가 열리고 종교개혁이 일어나서 타락한 로마 가톨릭을 정화했습니다. 그러면 코로나 19 사태를 통해 어떠한 일이 일어날까요? 역사를 보면 100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전염병이 세계 여기저기에서 무려 11번 정도가 있었습니다.

 

그중 오늘 주목해 볼 것은 로마제국에서 일어난 1, 2차 전염병입니다.

1차는 서기 165~180년 사이에 유행한 이른바 안토니우스 역병이었습니다. 이때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우스가 황제였는데 이 역병은 근동인 시리아에 주둔했던 로마 군인들이 귀국하면서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역병의 정체는 당시의 기록을 참조해 보건대 아시아와의 무역, 그리고 흉노족 등을 매개로 전파된 천연두로 짐작됩니다. 이 역병이 한창 유행하던 15년 동안 유럽 전역에서는 무려 500만 명이 죽었습니다. 로마제국의 1/3이 사망한 것입니다.

그리고 2차로는 서기 251~266년에는 역병이 또다시 로마를 강타했습니다. 초기 기독교 저술가 성 키프리아누스가 목격하고 기록했기에 성 키프리아누스 역병이라 이름 되었습니다. 이 역명은 심할 때는 하루에 로마에서만 5,000명이 죽기도 했고 당시 황제였던 클라디우스 2세 고티쿠스(재위 268-270)의 생명을 앗아가기도 했습니다. 전염병의 결과, 농업과 군대에서 많은 인원 부족이 초래되었고 로마의 사회체계를 붕괴시켜 나갔고, 동서 로마의 분리와 멸망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전염병으로 인해 로마와 이교 세계가 좌절했습니다. 한스 진세르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승승장구하던 강대국 로마와 그 범세계 조직의 맥을 거듭 끊은 것은 그 앞에서는 정치적 천재성과 군사적 용맹도 무용지물이 되는 유일한 세력에서였다. 마치 태풍에 실려 온 듯 불시에 들이닥친 역병 앞에서 아무런 대안을 제시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럴 때 대안이 된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교회였습니다.

당시 이교는 이런 재앙 앞에 무능함을 여실히 드러냈습니다. 이교도들, 이방인들은 질병에 발생하면 아픈 자들을 내쫓고 가장 가까운 자로부터 도망쳤으며 병자가 죽기도 전에 거리에 내다 버리고 매장하지 않은 시신을 흙처럼 취급했습니다. 더욱이 당시 이방 사제들과 사회 지도층들은 도시를 떠나 피난 길에 올라 종교가 재앙 앞에서 무능하다는 인상을 남겼고 사회 지도층의 부재로 인해 무질서와 고통이 가중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군가 감염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는 서로 방문하기를 두려워함으로 감염된 이들은 돌봄을 받지 못한 채 죽어갔다. 관심 부족으로 온 가족이 몰살된 집도 많았습니다. 선한 자나 악한 자나 무차별적으로 죽는 것을 본 사람들은 신을 예배하건 안 하건 똑같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이런 거대한 위기의 사건을, 일관된 방식과 신앙으로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흔히 재앙을 당하면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합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심판을 세상에 말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 애타는 마음으로 간절히 중보기도 한 아브라함처럼 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죽은 자들을 위한 천국이 존재함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치유와 위로를 얻게 했습니다. 또한, 기독교인들은 역병을 통해 각 사람의 공의를 검증하고 이웃 사랑의 정신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역병에 대처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 다운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지 드러나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먼저 회개하였습니다. 역대하 7:13~14 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메뚜기들에게 토산을 먹게 하거나 혹 전염병이 내 백성 가운데에 유행하게 할 때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여기 고쳐 주리라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라파(רָפָא)’치료하다’, ‘고치다’ ‘회복하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악한 길에서 떠나고 겸손히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시고 그 땅을 치료하시고, 고치시고, 회복시켜 주신다고 약속하신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재앙 중에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희망을 품은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기독교인의 행동 지침]을 제공했습니다. 우선 성도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아픈 자를 도맡아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필요를 공급하고 섬겼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랑의 섬김과 돌봄을 실천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사랑하시고 기독교인은 서로 사랑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신자들에게만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이러한 방식은 역병에 대한 실제적인 효과를 낳았는데 크리스천들은 일반 사람들보다 사망률이 낮았던 것입니다. 생존율이 월등하게 높았던 것입니다. 기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의 간호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많이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당시는 기초적인 간호와 물과 음식을 제공하는 것만으로도 사망률을 현저하게 낮출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환자로부터 감염이 되었을 때는 기꺼이 그 고통을 감내했습니다. 많은 성도가 간호하고 치유하다가 감염되어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병자들과 함께 평안과 기쁨 속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왜냐하면, 천국, 육체의 생명을 뛰어넘어 영적인 생명과 영원한 생명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믿지 않는 이들이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레 민심이 이교에서 떠나 기독교로 옮겨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교도는 역병으로 사회 관계망에 혼란을 주고 애착 관계를 끊어버렸지만, 기독교인과는 강한 유대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고 그래서 많은 이교도가 자원하여 기독교로 개종 하였습니다.

어느 날 수행자 한 분이 험산 준령의 수도처를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갈 길은 먼데 산길은 아주 험했고 발걸음을 내딛기 어려울 정도로 숨이 찼습니다. 등에 진 보따리가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가다 서기를 반복하며 걸었지만, 여전히 목적지는 멀게만 느껴졌습니다. 마침 그때 눈앞에 열 살 남짓한 여자아이가 통통한 아기를 업은 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여자아이는 숨을 헐떡이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온몸이 땀 범벅이 된 채로 아기를 업은 모습이 애처로워 보이기에 수행자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얘야 정말 고생이 많구나. 등에 진 것이 무겁지 않니?” 여자아이가 수행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저씨가 등에 메고 있는 짐은 무겁겠지만, 저는 하나도 무겁지 않아요. 제 동생인걸요.”

무엇을 지고 있느냐가 무게감의 차이를 가져옵니다. 사랑을 지고 가는 사람은 짐이 아니라 동반이지만 의무를 지고 가는 사람에게는 기쁨이 아닌 부담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무한한 관심과 세심한 보살핌이지만, 무게가 없고 부담이 되지 않습니다. 사랑은 주는 것이며 나누는 것이고 베푸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무게가 없으므로 무거운 짐이 아니라 기쁨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사랑을 하라 하십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13:34)

 

세상은 기독교인들의 영웅적인 간호와 노력에 대해 치하했습니다. 326년 기독교인들을 좋아하지 않던 율리아누스 황제가 갈라디아의 로마종교 대사제에게 쓴 편지를 보면 비록 가식적이라고 해도 기독교인의 도덕성과 나그네에 대해 너그러움과 죽은 자의 무덤을 잘 관리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기독교의 미덕에 뒤처져서는 안 된다. 우리의 사제들이 가난한 자를 외면하고 버려둘 때 불경한 갈릴리인들(기독교인)은 이 점을 주목하고 구제하는 데 주력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심지어 불경한 갈릴리인들은 그들의 가난한 자만 돕는 게 아니라 우리의 가난한 자까지 돕는다. 누가 봐도 우리 사람들이 우리로부터 받는 도움이 부족한 것을 알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코로나 19 시기를 맞이하면서 이러한 초대교회 성도들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아니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요즘 힘들고 어렵지만 잔잔하게 감동을 주는 일들이 있습니다. 대구 수성못 인근의 한 건물주는 임대료를 안 받겠다고, 또 어떤 원룸 건물주는 석 달간 월세를 인하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장사가 안되어 남는 음식 재료들이 있는 식당을 알아내 인터넷으로 알려 필요한 이들이 살 수 있도록 연결해 주기도 합니다. 의사, 간호사, 간호조무사, 임상병리사 등 853명의 의료인확진자 급증으로 의료서비스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대구로 가 봉사활동을 하겠다고 지원하였습니다. 전국에서 자원하는 의료인력이 곧 1000명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개인병원 문을 닫고 격리병동에 자원한 의사분도 있고요. 여기에 감동이 있고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까!

역사를 보면 역병에 걸린 사람들은 대부분 질병 때문이 아니라 무관심 때문에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움츠러들지 말고 사랑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옛날 성도들이 한 일을 그대로 할 수는 없습니다. 많은 부분을 국가에서, 보건 당국에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생활 속에서 사랑의 실천, 나눔을 해야 합니다. 마스크를 나누고 필요한 것을 나누고 혹 주변에 어려운 이들이 없는지 관심을 두고 찾아보고 돌보는 것입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교부 터툴리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약자를 돌보고 사랑과 친절을 베푸는 우리의 모습은 많은 우리 반대자들의 눈에 비친 우리의 브랜드다. ‘한 번만 보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들이 얼마나 서로 사랑하는지를…….” 그리고 비록 우리의 육체가 죽음에 이른다고 할지라도 더 나은 영원한 생명, 영원한 나라가 있음을 믿음으로 두려움에 싸이지 말고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의 역병으로 이교는 몰락했습니다. 이번 신천지가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신천지 교인들을 미워하거나 저주하지 말고 거짓, 미혹에서 깨어나 진리를 알고 주님께로, 교회와 가정으로 돌아오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튼, 이 모든 역병의 상황에서 내세의 신앙과 형제 사랑의 교리를 붙들고 실천한 기독교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늘 주님과의 영적인 교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어렵고 힘들고 두려움이 몰려올 때 묵상과 기도를 통하여 주님과 친밀한 교제가 있었고 그로 인해 주님으로부터 은혜를 받고 새 힘과 용기를 얻어 고통을 이기고 사랑으로 섬길 수 있었습니다.

아일랜드의 한 청년이 결혼식을 하루 앞두고 사랑하는 약혼녀가 수영하다가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그는 슬픔을 극복하지 못하고 절망의 늪에 빠졌습니다. 친구들과 주위 사람들의 권유에 따라 이 청년은 아픔의 장소를 피하고자 캐나다로 이주를 했습니다. 캐나다에 가자마자 집에서 편지가 왔는데 어머니가 죽을병에 걸렸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기가 막혀서 죽고 싶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불행이 한꺼번에 자기를 향하여 몰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 청년은 힘없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흐느껴 부르짖었습니다. "예수님! 어머니의 병을 고쳐주세요. 응답해주세요. 평생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결단하고 기도를 했는데 어느 순간 그리스도의 평화가 그 마음속에 넘치게 위로가 꽉 들어찼습니다. 그래서 자기 애인이 죽은 슬픔을 이길 수가 있고 어머니가 병들어서 죽게 되었는데도 마음에 위로와 평화가 넘쳐났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연필을 들어 기록한 찬송가가 찬송가 369'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입니다. 고통이 변하여 찬송이 되고 아픔이 변하여 감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향에 편지해서 어머니의 안부를 물었는데, 중병을 앓던 어머니가 거짓말처럼 완전히 치료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청년이 바로 [조지프 스크리븐]입니다. 시험 걱정 모든 괴롬 없는 사람 누군가 부질없이 낙심 말고 기도드려 아뢰세 이런 진실하신 친구 찾아볼 수 있을까 우리 약함 아시오니 어찌 아니 아뢸까

잠언 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이사야 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역병의 시대에 더욱 주님을 사랑하시고 주님과 신령한 교제로 주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은혜로 교회와 이웃을 아름답게 사랑하며 섬기는 복된 우리 아름다운교회 소중한 지체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202031일 주일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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