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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선교 (수요기도회 ) 박승남 2020-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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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사도행전14:1-18절 개역개정

1.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2. 그러나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3.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4. 그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

5.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6. 그들이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가서

7.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8.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9.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10.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11.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12.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13. 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14.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15.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16.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

17.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하고

18.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수요기도회

 

찬송 338, 430

 

기도

 

성경본문 행14:1~18  제목: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박해를 받고 떠나온 바울과 바나나는 이웃 도시인 이고니온으로 갔습닙니다. 이고니온은 안디옥으로부터 동쪽으로 140km 떨어져 있는 도시로서 루가오니아 지방의 수도입니다. 토지가 비옥하여 농경 지역의 중심지이기도 합니다. 두 사람은 다시 회당을 찾아갑니다(14:1). 발에 티끌을 떨어버리고(51), 이방인에게로 간다던(46) 바울과 바나바가 다시 유대인의 회당을 찾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방인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유대인을 버렸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회당에서 복음을 전할 때, 유대와 헬라의 아주 많은 무리가 그 말씀을 듣고 믿었습니(14:1). 말씀을 듣고 믿었다는 말과 142절의 순종하지 아니한 유대인이란 말이 대조를 이룹니다. 헬라의 무리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누가는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했다(14:3)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누가는 수개월 또는 수년간의 사역을 사도행전 141~7절에 보기 좋게 압축해 놓은 것입. 그런, 그 기간이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었을 것입니다. 윌리엄은 우리는 데오빌로의 시대와 우리 시대의 교회를 향하여 무언가를 말하고 행동하도록 의미하고 있는 한 권의 신학서를 읽고 있는 것이지, 바울의 여행 일지를 읽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는 무리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이고니온에서 오래 머물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말씀을 거부하고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런 결과에 대하여 악한 감정을 품고 이방인들을 선동하여 두 사도를 그 지역에서 쫓아내려 하였습니다(5). 브루스(Bruce)이방인이란 이고니온의 행정 책임자와 시민 단체를 가리킨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러나 쉽게 물러날 바울이 아닙니다. 그곳에 오래 머물면서 도리어 담대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담대히란 말은 항상 성령 충만과 관계되어 나옵니다(4:31, 9:29, 13:46, 14:3). 그래서 여기서도 주를 의지하여 담대히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담대히라는 말 다음에 기적과 표적이 따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주의 은혜의 말씀을 담대하게 전파하는 동안 그 시내 무리는 둘로 나뉘었습니(4).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었습니. 마침내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들었습니. 관리들 이란 누구를 말하는가요? 어떤 학자들은 이고니온의 관리들이라고 합니다. 그 관리는 통치자 또는 군주를 말한다. 장신대 학장을 지내신 박창환목사님은 이고니온의 군주와 유대 공동체의 지도자들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복음서에서 이 단어는 회당의 관리들을 지칭하기도 했습니다(9:18,23; 8:41, 12:58, 18:18). 이렇게 보면 유대 회당의 관리를 말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이제는 이방인과 유대인 그리고 유대 관리들이 연합하여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 하였습니다. 누가는 주저하면서도 돌에 맞은 사건을 간략하게 기록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이야기는 바울이 당한 고난에 관한 것을 위주로 하지 않고, 온갖 장벽들을 부수고 모든 장애물을 이겨낸 복음의 능력을 위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핍박과 폭력은 다시 한번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는데 기여했을 뿐입니다(21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그들은 위급한 상황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가서 거기서 또 복음을 전했습니다(7).

 

루스드라는 이고니온 남서쪽으로 32km 떨어진 곳이고, 더베는 루스드라로부터 남동쪽으로 30km 떨어져 있는 도시입니다. 그러니까 루스드라를 중심으로 서쪽에 이고니온이 있고, 남동쪽으로 더베가 있습닙니다. 이고니온으로부터 바울과 바나바는 루스드라로 갑니다. 루스드라와 더베뿐 아니라 그 근방 지역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행전 148~20절을 보면 루스드라에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되어 걸어본 적 이 없는 사람을 만납니다. 이 사람은 거지가 아닙니다. 그날 바울이 설교하는 자리에 나온 사람입니다. 바울은 설교하면서 그가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 '구원받을' 이란 완전하게 되다’, ‘건강하게 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병 나을 믿음이 그에게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도대체 그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네, 그것은 물론 말씀을 듣는 자세를 보고서 알게 되었겠지요. 그 자리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또한 장애인들도 여럿이 있을 수 있었겠지만 유독 바울의 눈에 들어오는 사람은 바로 이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나 진지하게 말씀을 듣는지 그것이 그 눈에서, 그 얼굴에서 전해져 바울의 가슴에 감동으로 다가오게 되었습니다. 9절에 들었다는 말과 주목하다는 단어가 나옵니다. 들었다는 말은 단지 듣는 행위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들려온 내용을 정신적으로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그는 그 말씀을 수용하는 정신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경청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를 주목했습니’. 이는 바울이 그 사람을 처음부터 조사하듯이 관찰했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바울은 설교를 하는 도중에 큰 소리로 그 사람을 향하여 말했습니다. 네 발로 일어서라.”(14:10)고 명령합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일어나 걸었습니다. 여기 일어났다는 동사는 뛰어 일어나다의 단순과거입니다. 그러니까 껑충 뛰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걸었다는 것은 마치 성전 미문에서 베드로에 의하여 뛰어 일어났던 앉은뱅이가 일어나 걸어 다녔던 것(3:8)처럼 계속해서 걸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은 베드로에게와 바울에게 똑같이 역사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사람이 믿음이 없었다면 지금 저 사람이 뭐하는 거야하며 멀뚱멀뚱 바라보거나 아니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지면서 "지금 누굴 놀리는 것인가?"하며 화를 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용수철과도 같았습니다. '일어서라!'는 말에 마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뛰어 일어나 걸었습니다.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오. 튀어 오르는 용수철과도 같았던 그의 모습을 말입니다. 이 얼마나 준비된 마음입니까? 이 얼마나 순수한 마음입니까?

사도 바울이 말씀을 잘 전하기도 했겠지만, 한마디 말씀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기울이며 그 말씀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던 그 모습,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바울이 감동을 받게 된 일, 여러분 어쩌면 바울은 이 한 사람 때문에 더욱 힘 있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을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설교할 때 보면 은혜받는 한 두 사람 때문에 더욱 힘 있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때가 있습니다. 말씀을 잘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면 힘이 나고 더욱 잘 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말씀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어떤 사람, 딴짓하고, 지루해하고, 다른 데 두리번거리고 거부하는 듯한 몸짓을 하는 이들로 인하여 말문이 막혀지고 제대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목회자들은 아예 그런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는다고도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물론 매번 이 사람처럼 들을 수는 없을지라도 진정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자세, 들으려고 하는 마음, 기대하는 마음이 여러분에게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은 신들이 내려왔다고 고함을 지르며, 바나바는 제우스(Zeus)라 하고, 바울은 헤르메스(Hermes)라고 하며 두 사람 앞에서 제사를 드리려고 했습니다(14:13). 제우스(Zeus)를 로마인들은 주피터라고 하는데, 주피터(Jupiter)는 모든 신중 가장 으뜸인 주신(主神)을 말합니다. 로마가 지배하던 모든 도시 중에서는 주피터 신전이었습니다. ‘헤르메스란 해석과 능변과 행운의 신으로 이 말에서 hermeneutics(해석학)이란 말이 나왔습니. 헤르메스는 로마인들의 머큐리(Mercury)에 해당하는 신입니다. 바울이 말을 했기 때문에 헤르메스라고 했습니다. 동양에서는 지도자란 가만히 앉아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동양의 종교에서 주신(主神)은 세상과 거리를 두고 보좌에 앉은 채로 사자(使者)와 부하들을 통해 세상과 의사소통을 합니다. 그러므로, 더욱 점잖고 위엄 있는 모습을 한 바나바가 동양인들에게 주신(主神)으로 간주되고, 적극적인 웅변가인 바울은 주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는 사자로 간주되었을 것입니다.

성 밖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은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려고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무지한 일입니까? 사람을 신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미신을 믿는 사람들,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의 무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차를 새로 샀다고 차도에서 돼지머리 앞에 절하며 무사고를 비는 모습이라든지, 돌아가신 조상을 위해 상을 차려놓고 제사를 드리는 이들 속에서 참으로 영적인 무지를 볼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만일 여러분이 바나바와 바울이었다면 기분이 어떠했겠습니까?

여러분을 신으로 알고 섬기려 한다면 혹시 은근히 좋아하지 않겠습니까? 원래 사람들은 자기를 알아주기를 바라고 또한 자기를 치켜세워주면 좋아하는 본성이 있으니까요! 여러분도 존경받고 높임을 받고 싶은 마음이 있지 않습니까? 만일 이 때 두 사람이 가만히 있으면 저들의 극진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이든 명령하면 그대로 시행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보다 신나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진정 존경받고 높임을 받는 일이 귀한 일이긴 하지만 하나님의 일꾼들에게는 더할 수 없는 무서운 시험이기도 합니다. 마치 마귀가 예수님에게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고 유혹한 것과 같은 시험입니다.

어느 주석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방법은 능력과 유명세를 얻는 데 가장 쉬운 길이다. 그리고 박해를 받고 돌팔매의 좁은 길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이것은 선지자들을 파멸케 하는 길이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선지자를 도우려면 그들이 영광의 관을 받아들이지 않도록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사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은근히 이처럼 신()적 대접을 받고자 합니다. 그리고 사이비, 이단 지도자들은 자기를 이긴자, 보혜사, 구세주 심지어 하나님이라고까지 합니다. 기가 막힌 일이지요. 이번 이만희의 기자회견을 보면서 말도 잘 이해 못 하고 더듬고 검은 점이 돋아 있는 노인을 신격화하고 있으니 참으로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참으로 세뇌당하고 미혹의 영에 사로잡힐 때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어질 수 있는지를 모릅니다.

 

그러면 이러한 큰 시험을 받은 두 사도는 어떻게 했습니까?

혹시 조금이라도 그것을 즐겼습니까? 받아들였습니까? 절대 그리하지 않았습니다.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자 자기들의 옷을 찢고 군중 속으로 달려 들어가서(뛰어 들어가다) 소리쳤습니다(14:13).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이는 군중 속으로 뛰어 들어갔고 계속해서 소리를 쳤다는 것입니다. 한순간의 여유도 주지 않는 단호한 거절한 것입니다.

여러분 "나는 신이 아닙니다.' 이 말은 결코 쉬운 말은 아닙니다. 옛날 일본 천황은 사람들에게 신으로 섬겨졌습니다. 그러다가 연합군에 항복한 뒤에 나는 신이 아닙니다라고 어쩔 수 없이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누구에 의해서 마지 못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영광을 받으려 할 때에 그렇게 외친 것입니다.

여러분 경우는 다르지만, 우리도 분명히 말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나는 그렇게 잘 난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부족한 사람입니다." 특히 자신이 어떤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을 때에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나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나는 다만 무익한 종일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71~10절까지에서 장차 교회 지도자가 될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어서 두 사람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복음을 강조하여 전하였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전하는 것이요 그분에게 돌아오게 하려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14:15).

그 지역 사람들이 섬기는 신들은 인간이 만든 신들입니다. 바나바와 바울을 신으로 만들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은 그런 신들이 아니고, 천지와 바다를 만드신 하나님이시고,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신 지금도 살아 계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선포한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은 알 수 없는 신으로 감춰져 있는 신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비를 내려주시고, 열매 맺는 계절들을 주시고, 먹을거리를 주시고, 여러분의 마음을 기쁨으로 채워주고 계시기 때문에, 그분은 여러분을 좋게 해주시는 분이라는 증거를 남기지 않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14:17, 박창환 역).

가나안의 신인 바알과 아세라나 소아시아의 신인 에베소의 아데미 여신은 풍요의 신들입니다. 또 이들이 제사하려고 했던 제우스나 헤르메스는 사실상 인간들과 별 관계가 없는 신들입니다. 이러한 신들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바울은 하늘로부터 비를 내려주시고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은 거짓 신들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신 것을 분명하게 지적해 줍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인간과 관계가 없이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천지와 바다를 지으시고, 우리 인간을 이 땅에 내신 하나님이라고 선언한다. 바울의 로마서 123절의 설교가 귀납법으로 하나님을 증거했다면 본문의 설교는 연역법으로 증거 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자신들을 신으로 경배하려는 것을 단호하게 거절하고 창조주 하나님을 선포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루스드라 시민들이 제사를 드리려고 한 것을 보면 사람의 심성에는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마음이 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유한 자도, 가난한 자도, 건강한 자들이나 약한 자들도 모두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문제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보여 주느냐가 중요할 뿐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함으로 하나님을 보여 주겠습니까?

 

기도:

1. 나라와 민족과 현 사태를 생각하며

2. 한국교회와 선교사남들과 자립대상교회(목회자)를 위해

3. 아름다운교회를 위해 (각 기관, 기도가 필요한 연약한 이들, 가정 자녀들, 목회자 위해)

4. 속히 모여 함께 예배드릴 수 있도록

 

찬송 505

 

주기도로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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